19. 조화 속의 영성(웨슬리 전통에 대한 하나의 해석)

(The Balanced Spirituality: An Interpretation on the Wesleyan Tradition)

 


 

머리말 : 웨슬리안 전통의 양면성

 

  웨슬리가 살던 18 세기는 인류역사 가운데 가장 큰 격변기 가운데 하나이다. 18세기는 본격적으로 근대사회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이 시기는 개인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였다. 18세기 이전에는 인간은 집단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어 왔다 . 개인은 집단의 부속품이었다. 하지만 18 세기부터 개인은 집단과 분리된 독자적인 인간으로서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종교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즉 개인은 자신의 종교를 위해서 결단해야 했다. 결단의 종교는 개인주의 시대의 종교적 특정이다.

  이런 개인주의의 등장과 더불어서 나타난 것이 대중사회이다. 18 세기는 소위 산업화로 인해서 도시화가 이루어졌으며, 이제 사람들은 도시라는 좁은 공간에서 집단적으로 모여 살게 되었다.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었으며, 이들의 생활방식은 이전과는 전연 달랐다. 혈연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농촌의 인간관계는 깨어졌고 이제 직장을 중심으로 새로운 인간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런 도시를 배경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 바로 부흥운동이다. 부흥운동은 대중시대의 종교적인 표현이다.

  웨슬리는 이런 개인주의와 대중사회의 출현을 보고, 여기에 맞는 새로운 신앙의 형태를 만들었다. 그는 종교는 하나님과 자신의 인격적 (혹은 개인적)인 관계라고 생각했다. 인격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종교는 그에게는 단지 형식의 반복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체험한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은 이런 개인적인 신앙 경험의 표본이다. 이런 개인적인 체험은 곧 이어서 감리교운동이라는 대중적인 신앙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 웨슬리는 개인적인 신앙체험을 수도원과 같은 공동체에 제한시키지 않고, 일상의 대중들의 삶 가운데서 실천하였다. 그의 집회는 대중들의 특기인 찬송과 간증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18세기의 대 부흥운동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웨슬리는 단지 새로운 시대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아니다. 그는 기독교역사 가운데 어느 누구 못지않게 기독교전통에 깊이 몰입한 사람이다. 그는 고전어에 능통했으며,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글을 열심히 읽었다. 동시에 그는 종교개혁당시의 경건주의적인 수도원 운동의 저서들을 많이 읽었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토머스 아 켐퍼스(Thomas a Kempis, 1380-1471)」의 [ 그리스도를 본받아 ] 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청교도 경건주의 그리고 자신의 전통인 성공회의 문헌에 대해서 깊게 연구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성서를 열심히 읽은 한 책의 사람 (homo lmills libri) 이었다.

  웨슬리는 단지 전통을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 그 전통 가운데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영국사회에서 새로 부상하는 젠트리(gentry) 계층출신이며, 그의 어머니는 영국의 귀족 가문에 속하는 사람이었다.l) 우리는 웨슬리가 무엇보다도 평생 성공회를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한다. 이것은 웨슬리의 신학과 행동의 한계를 미리 예고해주는 것이다. 웨슬리는 영국성공회 내에서 성공회를 개혁하고자 했단 사람이었다. 이것은 그가 비국교도가 혐오하는 성례전을 수용하고 있으며, 또한 감리교가 성공회의 감독제도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웨슬리의 양면성을 찾아보게 된다. 웨슬리는 18 세기라는 시대를 살면서 전통을 새롭게 이해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웨슬리는 전통과 현대성을 잘 조화시킨 사람이다. 필자는 웨슬리의 영성에 있어서도 이런 조화를 찾아 볼 수 있다고 생각 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웨슬리안의 영성에 나타난 조화를 찾아보려고 한다. 특별히, 이런 조화는 훈련과 체험, 소그룹운동과 대형집회, 그리고 마음과 행동 등과 같은 여러 측면에서 드러나고 있다.


 

Ⅰ. 훈련과 체험

  

  웨슬리안 영성의 중요한 특징은 훈련과 체험의 조화이다. 교회사에 나타난 많은 영성운동은 훈련과 체험 가운데 하나만을 강조하였다.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는 율법주의이며, 후자의 대표적인 경우는 신비주의이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영성을 잘 이끌어 갈 수 없다. 오히려 이 두 가지가 잘 조화될 때 영성생활은 아름답게 형성될 수 있다. 체험은 영성 생활의 동력을 주고, 훈련은 그것을 지속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훈련이 없는 체험은 오래가지 못하고, 체험이 없는 훈련은 형식주의에 빠져 곧 지치고 만다. 웨슬리의 영성운동은 이 두 가지를 잘 조화시키고 있다.

  웨슬리는 원래 철저한 훈련을 강조했다. 그는 엄격한 청교도적인 신앙을 가진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의 어머니 수잔나 웨슬리는 인간은 원죄 아래 태어나기 때문에 인간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고 믿었다 . 웨슬리의 어머니는 어린아이가 마음껏 울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소리 내서 울지 못하게 했다. 뿐만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 외에는 음식을 주지 않았다. 이런 훈련을 통해서 욕망을 절제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이다. 수잔나 웨슬리는 죄는 분명히 벌을 받아야 하고, 선은 분명히 칭찬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2)

  그러나 웨슬리가 집을 떠나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이런 엄격한 생활을 포기하였다. 특히 옥스퍼드대학 시절에는 매우 자유스럽게 행동하였다. 이 당시 옥스퍼드 대학의 질은 좋지 않았다. 웨슬리는 이런 옥스퍼드의 분위기에 물들었다. 하지만 그가 1724 년 성직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안수를 준비하기 위해서 경건서적을 읽기 시작하였다 . 이때 읽은 책이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 1613.8.15~

1667.8.13)」의 [ 거룩한 삶과 거룩한 죽음의 규칙과 실천 ](The Rule and Exercise of the Holy Living and Holy Dying) 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영성생활에는 일정한 규칙 (rule) 이 있으며, 이 규칙을 반복해서 지키는 것 (exercise) 이 성결이라는 것이다.3) 웨슬리는 이런 책의 영향을 받아서 매일 철저한 규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사상에는 당시의 이신론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이신론에 의하면 신은 세상에 규칙을 만들어 놓았고, 세상은 그 규칙을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신의 구체적인 역사개입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계몽주의 사상이다. 계몽주의 이전에 사람들은 역사는 신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계몽주의는 이것을 부정하였다. 계몽주의는 신의 역사란 규칙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을 개인의 영성생활에 적용한 것이 바로 당시의 영성적인 분위기였다. 즉 영성이란 영적 질서를 따라 사는데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적인 역사는 기대되지 않는다.


  이런 규칙과 훈련에 강조점을 둔 영성의 모습은 그 뒤에도 계속 이어진다. 요한 웨슬리의 뒤를 이어 그의 동생인 찰스 웨슬리도 옥스퍼드에 입학하였다. 처음에는 찰스 웨슬리도 방종한 생활을 하였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마음을 정리하고 경건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는 친구들을 모아서 신성 클럽(Holy Club) 을 만들고, 자기의 형인 요한을 지도자로 모셨다. 요한 웨슬리는 철저한 규칙을 만들고, 자신의 제자들을 엄격하게 훈련시켰다. 이들은 엄격하게 훈련한다는 의미에서 메소디스트(Methodist) 라고 불렸다. 원래 메소디스트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에서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식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18 세기에는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 규칙적으로 훈련하는 사람을 말한다.

  하지만 이런 훈련이 웨슬리의 신앙을 궁극적으로 완성해 주지 못하였다. 웨슬리는 철저하게 자신을 훈련시키기를 원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이 실패의 대표적인 케이스는 미국 선교였다. 원래 웨슬리는 초대교회의 수도원 같은 공동체를 세우고자 미국 조지아로 갔다. 철저한 훈련을 통해서 성결에 이르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웨슬리는 조지아에서 원하지 않는 스캔들에 빠지게 되었고, 그 결과 비참하게 영국으로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 그 에게 나타난 것이 바로 모라비안이었다. 당시 미국으로 가는 길에 잠시 영국에 머물던 「피터 뵐러 (Peter Boehler1712-1775)」라는 모라비안은 웨슬리에게 신앙의 새로운 측면을 알려 주었다. 그것은 신앙은 선물이라는 것이다. 「뵐러」는 웨슬리에게 신앙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포기이며, 이것은 오랜 훈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을 순간적으로 받아들이는데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뵐러」에 의하면 신앙이란 근본적으로 훈련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순간적인 선물이라는 것이다.

  웨슬리는 「뵐러」의 이 말을 진지하게 이해했다. 그러던 어느 날 1738년 5월 24일 9시 15분전에 웨슬리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런던의 올더스게이트 거리로 갔다. 그곳에서는 모라비안의 작은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웨슬리는 이 경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4)

  저녁에 나는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모이는 작은 단체에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그냥 갔다. 이곳에서 어떤 사람이 로마서 서문을 읽었다. 9시 15분 전 쯤 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서 역사하사 일으키시는 변화를 말할 때에 내 마음이 이상하게도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리스도를 의지하였다. 구원에 있어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나 같은 죄인의 죄까지도 없이 하시고, 사망과 죄의 율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 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웨슬리는 이 올더스게이트 체험을 통해서 신앙의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신앙은 인간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순간적인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훈련이 아니라 체험이라고 보았다. 원래 웨슬리는 윌리엄 로 (William Law)를 통해서 이런 훈련을 배웠다. 하지만 이제는 모라비안을 통해서 믿음과 체험을 배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모라비안에 대해서 더 배우기 위해 독일로 가서「진젠돌프(Nikolaus Ludwig von Zinzendorf, (1700-1760) 」를 만났다.

  최근 웨슬리의 전기를 새롭게 연구한 헨리 랙에 의하면 이 당시의 웨슬리는 상당한 열광주의적인 분위기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웨슬리는 독일에서 돌아온 다음에도 모라비안과 관계를 지속하였는데, 이 단체는 순간적인 회심뿐만이 아니라 사도시대의 은사들도 재현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은사들을 비판하였지만 웨슬리는 이런 은사들은 진실하고, 성경적이라고 평가하였다. 당시의 전통주의자들과는 달리 웨슬리는 이런 성령의 은사는 당시에도 재현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1739년 1월 1일 웨슬리는 모라비안 단체인 페터 레인 신도회 (Fetter Lane Society)에 참석하였고, 이곳에서 오순절과 비슷한 경험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들이 새벽 3 시쯤 찬송을 부르고 있을 때,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에게 강하게 임하여, 많은 사람들은 넘치는 기쁨으로 소리를 질렀고, 많은 사람들이 바닥으로 거꾸러졌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한 경외와 기쁨으로부터" 다소 회복되어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는 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나님 우리가 당신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당신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5)

  그러나 웨슬리는 여기에서 모라비안의 한계를 보게 되었다. 웨슬리가 느낀 모라비안의 한계는 모라비안이 순간적인 체험만을 강조한 나머지 은총의 수단을 통한 신앙의 훈련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결국 웨슬리는 모라비안이 가르쳐준 신앙의 체험적인 측면은 받아들였으나 모라비안이 신앙의 훈련을 무시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얼마가지 않아서 웨슬리는 모라비안을 떠나 독자적인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이 감리교의 시작이 된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웨슬리의 영성의 균형을 보게 된다. 웨슬리는 영적 생활에 있어서 훈련의 중요성을 충분하게 알고 있었고, 그것을 열심히 실천하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보잘것없었다. 조지아에서의 실패가 이것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그에게 영성생활의 참된 모티브는 성령의 역사를 통한 순간적인 체험이다. 이것은 그에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쁨과 위로를 주었다. 하지만 웨슬리는 체험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웨슬리의 영성은 전통적인 훈련도, 모라비안의 새로운 경험도 아닌 새로운 길이었다. 그것은 성령의 경험을 통한 순간적인 체험과 이런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응답으로서 계속적인 노력을 통한 신앙의 훈련이 잘 조화된 것이다.


 

Ⅱ. 소그룹과 대형집회


  웨슬리의 영성운동의 조화된 또 다른 측면은 소그룹 운동과 대형집회이다. 우리가 교회사를 보면 수많은 소그룹의 갱신운동이 있어왔다. 이들은 기성교회가 타락해가고, 형식적이 되는 것에 대해서 가슴아파하며 순수하게 자신을 갱신하고, 교회를 갱신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런 소그룹의 갱신운동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운동으로 끝난 경우가 많이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근대에 와서 소위 대형집회들을 많이 본다. 이런 대형집회들은 많은 사람들의 집중을 받게 되며, 기독교의 힘을 과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때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대형집회들이 얼마가지 않아서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우리는 웨슬리에게서 이런 양면성을 극복하고, 양자의 장점을 잘 조화시킨 모습을 보게 된다. 웨슬리는 속회 (Class)를 대표로하는 소그룹운동에 성공한 사람이며, 동시에 18 세기의 대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사람이다. 웨슬리는 소그룹과 대형집회의 두 모임을 감리교의 영성운동을 위해서 잘 활용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웨슬리의 대각성운동은 원래 소그룹운동이었다. 웨슬리 이전에 나타났던 경건주의는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고, 죽은 신앙을 살리기 위해서 소그룹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런 경건주의의 소그룹운동은 영국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18 세기 초 영국교회는 매우 형식화되었고, 관료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교회 내에 수많은 소그룹운동이 나타났다.6)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SPCK(Society of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 이다. 이 모임은 1698년 「베이 (Thomas Bay)」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이 모임은 영국과 웨일즈에 성서와 신앙서적을 보급하여 영국교회의 영적인 갱신을 꾀하는 단체였다. 3년 뒤, 「베이」는 SPG(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를 설립하여 성직자가 없어 영적인 침체를 겪고 있는 미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을 하였다 .7) 웨슬리가 조지아의 선교사로 간 것은 이 단체의 도움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웨슬리의 소그룹운동의 뿌리는 신성클럽 (the Holy Club) 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는 동생의 요청으로 신성클럽의 지도자가 되었다. 신성클럽은 옥스퍼드 대학 내의 소그룹으로서 몇 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경건을 실천하고 있었다. 이 모임의 내용을 보면 매일 오후 6시에서 9시까지 모여서 기도하고, 그릭성경을 읽으며, 고전을 연구 하였다. 그리고 낮의 신앙생활을 반성하였다.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점심을 금식하였고, 그 돈으로 감옥을 방문하고, 병자를 돌보았다. 하지만 웨슬리는 옥스퍼드의 소그룹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더 본격적인 소그룹운동을 하고자 하였다. 그가 모델로 생각한 것은 바로 초대교회의 사막 수도사들이었다. 웨슬리는 이런 작은 수도원을 미국에 설립하고자 하였다. 이런 동기로 그는 미국에 가게 되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그의 미국생활은 실패로 끝났다.


  웨슬리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올더스게이트에 있는 모라비안의 소그룹에서였다. 모라비안은 일찍이 소그룹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사실 모라비안과 영국교회의 일부 개혁세력은 초대교회의 소그룹 수도원 운동에서 교회개혁의 모델을 찾으려 했다. 특히 모라비안의 밴드는 두 세 사람이 모여서 서로 신앙을 격려하는 모임이었다. 웨슬리가 찾아간 올더스게이트의 집회는 이와 같은 소그룹의 모임이었다. 웨슬리는 이곳에서 소위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였다. 그러므로 소그룹은 단지 훈련의 장소가 아니라 체험의 장소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종교체험은 대규모의 부흥집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소그룹의 작은 모임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근본적으로 소그룹운동이었다.

  이것은 웨슬리의 생애에서 계속이어 진다. 웨슬리의 감리회는 영국국교회내의 작은 그룹이었다. 이것을 신도회(Society) 라고 부른다. 이 회의 유일한 목적은 성결한 신자를 만드는 것이다. 포플러신도회의 목적을 보면 "본 신도회의 유일한 의도는 마음과 생활의 진정한 성결을 증진시키려는 것이다"고 기록되어 있다.8) 이 신도회의 구체적인 규범을 보면 이들의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음은 그 중 몇 가지 예이다. " 1, 모든 거래에 있어서 공정 할 것, 2. 매일 여러분 기도할 것, 5. 다른 사람을 책망하는 일을 삼갈 것, 6. 한 달에 한번, 형편에 따라서 은밀한 금식을 하거나 또는 몇 차례의 금식을 할 것, 20, 경망한 기분, 또는 침울한 기분에 사로잡히지 말 것." 9) 이 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웨슬리의 감리교는 더 작은 소그룹을 만들었다 . 이것이 속회 (class) 와 신도반 (band) 이다. 속회는 감리회 내의 신자들의 모임으로 여기에서는 신자들의 지난 한 주간의 삶을 반성하여, 속장에게 직고한다. 속장은 이것을 듣고, 이들에게 적절한 권면을 하게 된다. 신도반은 보다 차원 높은 소수의 신자들로 구성되며, 여기에서는 보다 깊은 영적인 문제들을 다루게 된다. 아울러서 신도반은 회원들에게 보다 엄격한 규칙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상당한 기간을 통해서 선택된 사람들이 이 신도반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신도반보다 더 선택된 집단이 있다. 그것은 선택된 신도회(select society)이다. 이 모임은 기독자의 완전에 도달했거나 거의 그 단계에 나가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 모임은 세 가지 규칙만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이 모임에서 말해진 것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말하지 말라. 둘째 , 모든 회원은 사소한 일에서도 지도자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 셋째 , 모든 회원은 가능한대로 많이 일주일에 한번씩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헌금을 한다.

  하지만 웨슬리의 감리교는 소그룹운동에서 그치지 않는다. 웨슬리의 감리교는 근본적으로 부흥운동이며, 이것은 종종 대규모의 집회로 이어졌다 . 그러나 웨슬리가 원래부터 대규모의 부흥집회를 개획하지는 않았다. 잘 알려진 대로 웨슬리의 부흥집회는 야외집회의 형태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야외집회를 시작한 사람은 웨슬리가 아니라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1741.12.16~1970.9.30)」였다. 웨슬리의 복음주의적인 설교는 당시 영국교회 성직자들로부터 많은 반대를 받았다 . 처음에는 환영 하던 사람들도 점점 웨슬리에게 문을 닫았다. 웨슬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전도자로 부름 받았다는 분명한 의식이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초청해주는 교회가 없었다. 이때 그에게 대안으로 나타난 것이 「휫필드」가 행하고 있던 야외설교였다. 웨슬리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여전히 다른 어떤 장소에서 보다도 교회에서 설교하기를 바랐다 . 그러나 나의 앞에는 수많은 장애가 놓여있었다. 이렇게 교회에서 배척당했으나 침묵만을 지킬 수 없으므로 옥외에서 설교하는 것만은 지속하였다. 이것은 내가 처음에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된 것이었다." 10)

  하지만 이것은 웨슬리 운동에 하나의 축복이었다. 전통적인 교회에서 만날 수 없는 새로운 부류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이것은 감리교운동의 큰 추진력이 되었다. 당시 전통적인 국교회는 새롭게 등장하는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 영국은 산업화를 겪고 있었으며,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도시로 몰려들게 만들었다. 이들은 대부분 근로자였으며, 이들의 생활은 최하층이었다. 영국교회는 이들을 복음으로 인도하지 못했다. 여기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 바로 웨슬리의 감리교였다. 교회에서 배척당한 웨슬리는 이들이 모인 곳을 찾아갔으며, 바로 그곳에서 집회를 인도했다. 웨슬리가 주로 설교한 장소는 공장 앞, 시장, 큰 거리등, 보통 사람이 모이는 곳이었다. 감리교인들은 웨슬리가 설교할 장소를 미리 알려 주었으며, 영국의 보통 사람들은 그곳에 모여 들어서 웨슬리의 야외설교를 들었다.1l)

  웨슬리는 후에 야외설교의 유용성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하였다. "야외설교는 여전히 유용하다. 그 이유는 유용성에 있어서 아무것도 이것에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12) 웨슬리는 야외설교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들과 여러번 부딪혀야 했다. 그는 기존의 교회가 자신을 환영하지도 않을 뿐더러 기존의 교회 가운데서 그렇게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것은 기존의 예배와 비교해 보면 그 특정이 잘 들어 난다. 기존의 교회가 전례중심이라면 야외설교는 설교중심이며, 기존교회가 기존교인을 상대로 한 것이라면 야외설교는 비기독교인 중심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웨슬리의 부흥운동이 전통적인 교회와 구분되는 것일 것이다.

  이 야외설교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웨슬리의 야외집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 l939년 봄 웨슬리는 「휫필드」가 설교한 적이 있는 브리스톨의 야외에 갔다. 웨슬리는 이 집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는 오후 네시에 더욱 겸손한 자세로 도시로 연결되는 언덕에 서서 3,000명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직선적으로 전하였다." 13)

  1742년 5월 어느 주일에 웨슬리는 광산촌에 가서 야외집회를 가졌다. 그는 그 도시 중 가장 가난하고 더러운 곳인 샌드게일로 내려가서 시편을 읽었다. 처음에는 3, 4명이 무슨 일이 있나 모여들었다. 그러자 곧 3, 4백명이 몰려들었다. 그때 웨슬리는 이사야 53장 5절을 설교 하였는데 설교가 끝날 때에는 1,500 명으로 증가하였다. 웨슬리는 설교를 더 듣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저녁 5시에 이곳에 모이라고 말하고 집회를 끝냈다 .14)

  웨슬리의 감리교는 소그룹을 중심으로 한 훈련과 대중집회를 통한 복음전도가 잘 조화되었다. 사실 교회사에서 소그룹운동은 많이 있어왔다. 그러나 대부분 이 소그룹운동은 크게 확산되지 못하였다. 마찬가지로 대중적인 부흥집회로 일시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 있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휫필드의 부흥집회가 오래 가지 못한 것이 좋은 예이다. 하지만 웨슬리는 대중집회를 통해서 항상 불신자들에게 전도했고, 그리고 이것을 소그룹을 통해서 잘 양육하였다. 이것은 웨슬리의 영성운동이 균형 잡힌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이다.


 

Ⅲ. 마음과 행동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는 대로 웨슬리는 이것 아니면 저것(either or)의 입장이 아니고, 이것과 저것 (both and)의 입장이다. 이것은 그의 생애를 살펴 볼 때 잘 드러난다. 그는 성공회 성직자이면서도 새로운 단체인 감리회의 창시자이며, 그는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학자이면서도 대중적인 설교를 하는 부흥사이며, 기독교의 긴 역사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l8 세기의 대각성운동을 일으킨 복음주의자이다. 이것은 그가 어떻게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조화된 영성을 추구할 수 있는가를 잘 설명해 준다. 사실 이런 이중적인 측면이 때로는 그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조화된 입장 때문에 그가 체험을 강조하는 열광주의적인 측면을 갖고 있으면서도 종종 이런 집단들이 빠지는 이단성과 과격성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운동을 기독교의 큰 흐름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게 하는데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런 조화된 입장을 보다 깊은 신학적인 측면에서도 찾을 수 있다. 먼저 웨슬리는 죄의 이해에 있어서 조화된 입장을 갖고 있다. 웨슬리에 의하면 죄는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하나는 원죄요, 다른 하나는 자범죄이다. 원죄는 아담이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이 후대에까지 미치는 원죄의 죄책(guilty)과 아담이 지은 죄의 성질이 후대에 유전되는 유전죄(inherent original sin), 혹은 부패성(depravity)이 있다. 사실 웨슬리의 가장 큰 관심은 원죄의 죄책이 아니라 원죄로 인해서 유전된 인간 내면의 부패성이다. 웨슬리는 이 원죄야말로 기독교와 이교도를 구분하는 진리라고 이해하였다. 그는 "아담의 죄는 우리의 죄이다. 이는 우리 모두를 대표하는 사람의 죄였다. 사도 바울이 그 죄는 우리와 모든 그의 후손에게 전가되었다고 말했듯이 이는 곧 우리의 것이다 ."고 말한다.15) 웨슬리에게 이 원죄는 이론이 아니고 실존이었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당신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본성의 부패를 아시오 . --- 당신은 당신의 영혼의 모든 능력이, 그리고 모든 기능이 부패되었으며, 당신은 이 같은 모든 면에서 완전히 부패되었다는 것을 아시오. --- 이와 같은 것은 당신의 마음 속 깊이에 자리 잡고 있는 본성의 타고난 부패입니다 ."고 외쳤다 .l6)

  웨슬리가 자신의 종교를 마음의 종교라고 말했을 때 이것은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죄악의 부패성을 해결하는 것이 감리교의 본질이라는 것을 말한다. 웨슬리에 의하면 인간의 부패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병들었고, 이 부패성이 제거될 때, 인간은 다시금 원래의 아름다운 마음을 회복하게 된다. 웨슬리가 성결을 마음의 할례라고 불렀을 때, 그 의미는 마음속의 부패성을 절단하는 것이 곧 성결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마음의 부패성을 제거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곧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웨슬리의 성결론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의 문제이다. 이것은 성결을 단지 외적인 윤리로만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웨슬리의 죄론은 다른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범죄, 곧 자범죄(voluntary sin)를 강조한다. 웨슬리가 부패성, 혹은 죄성을 죄라고 인정하기는 하지만 사실 그런 죄성은 개인이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개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모든 아담의 후예들에게 전달되어졌다. 그러나 이런 죄성이 자라서 구체적인 결과를 가져올 때 그것은 구체적인 범죄가 되고, 이것은 인간의 책임을 가져오게 된다. 웨슬리는 이런 구체적인 죄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한다. 웨슬리는 죄란 구체적으로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웨슬리는 감리교도들로 하여금 이런 구체적인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고 여러 가지 감리교도들의 규칙을 만들었고, 이것을 속회나 신도반을 통하여 강조하였다.

  웨슬리가 말하는 성결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크게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십계명은 이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웨슬리는 이것을 영국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구체화시킨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결은 순수한 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 속에서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웨슬리의 성결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웨슬리가 구체적인 죄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할 때, 이것은 18 세기 영국사회의 불법을 정결케 만드는 힘이 되었다. 이것은 사회를 개혁하는 큰 힘으로 작용하였다.

  웨슬리는 원죄를 모든 죄의 뿌리로 보았고, 자범죄를 그 죄의 뿌리에서 나오는 열매로 이해했다. 웨슬리는 전자를 내적인 죄로 이해했고, 후자를 외적인 죄로 이해했다. 문제는 많은 성결운동이 전자에 대한 충분한 관심이 없이 후자만을 문제 삼는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하면 죄의 근원은 내버려 두고, 죄의 열매만을 언급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웨슬리는 이 두 가지를 다같이 말하고 있다. 웨슬리는 모든 죄의 뿌리인 원죄, 곧 부패성을 해결 하는 데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것을 그는 내적인 성결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웨슬리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이 내적인 죄의 열매인 외적인 죄를 해결하는 데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웨슬리는 이것을 외적인 성결이라고 불렀다.

  사실 내적인 변화가 없이 외적인 성결만을 강조하게 되면 그것은 율법주의에 빠지기 쉽다. 많은 성결운동이 가지는 함정이 바로 율법주의로 전락할 위험이다. 하지만 웨슬리는 인간의 마음의 변화를 먼저 강조하였기 때문에 이런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어떤 집단은 내적인 변화만 강조되면 자동적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며, 따라서 외적인 율법은 필요 없다는 율법 폐기론에 빠지기 쉽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신비주의에서 종종 보게 된다. 이들은 종교체험만을 강조하고, 율법의 준수는 무시한다. 이런 태도는 엄청난 실패를 가져온다. 하지만 웨슬리는 부패성의 제거인 내적인 성결과 율법의 준수인 외적인 성결을 다같이 강조함으로서 기독교교회사에서 수없이 보아왔던 문제들을 조화롭게 해결하여왔다. 여기에서 우리는 웨슬리의 영성의 또 다른 측면을 보게 된다.

  이런 마음과 행동의 문제는 그가 성결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순간적인 요소와 점진 적인 요소를 다같이 강조함으로서 균형을 가져 왔다는 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웨슬리는 영성생활에 있어서 점진적인 측면과 순간적인 측면을 다같이 인정하였다. 웨슬리는 1763 년 [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재검토 ]라는 책을 썼고, 여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 "대부분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점진적으로 그 심령에 역사하신 후  마침내 온전한 사랑에 이른다거나 또는 일반적으로 죄가 멸절되기 전까지는 오래 걸리는 것으로서 때로는 여러 해가 될 수 도 있다는 것을 거듭 말할 필요도 없고, 많은 성경 구절을 끌어다가 증명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쾌히 승낙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일을 원하시는 대로 단축하시어 보통 여러 해에 하신 일을 한 순간에라도 행하시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행하시는 사례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 순간 이전과 이후에는 점진적인 작업을 행하신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점진적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즉각적이라고 해도 전혀 모순이 될 것이 없다." 17)

  여기에서 웨슬리는 성결에 이르는 두 가지 방법을 말하고 있다. 하나는 점진적인 방법이요, 다른 하나는 순간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점진적인 방법이 보다 일반적인 것이기는 하나, 인간이 결단하기만 하면 순간적인 방법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순간적인 방법의 전후에는 역시 점진적인 방법이 동반된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1764년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정리하였다. 이때에는 이전보다 좀더 순간적인 성결을 강조하는 쪽으로 옮겨졌다. 웨슬리는 완전, 곧 성결 자체는 순간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 완전의 전후에는 점진적인 성장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완전 자체는 즉각적이냐 아니냐? 이 문제는 계단을 밟아서 살펴보자. 어떤 신자에게 순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아무도 그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 변화가 있은 후 그들은 완전한 사랑을 누리고 있다 . ---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변화가 순간적이 아니던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변화를 받은 순간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죽는 순간을 포착하기 어려우나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은 분명히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죄가 끊어진다고 하면 죄의 존재의 최후의 순간과 우리가 그 죄에서 구출된 최초의 순간이 있을 것이다 ." l8)

  여기에서 웨슬리는 성결을 분명하게 순간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문제는 우리가 그 순간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웨슬리가 점진적인 성장을 무시한다는 것은 아니다. 순간적인 성결의 체험은 점진적인 성장의 노력이 동행되어야 한다. 웨슬리가 성결을 순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웨슬리는 성결을 인간의 노력의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서 이해하기 때문이다. 성결은 은총의 결과이지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선물은 순간적으로 받는 것이지, 점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점진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귀한 은총을 받은 다음에는 우리는 더욱 더 그것을 잘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이런 점에서 점진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웨슬리의 영성의 조화된 모습을 본다. 그는 은총으로서의 성결을 강조한다. 성결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처럼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다. 이것은 순간적인 것이다. 하지만 웨슬리는 인간의 노력을 무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성결을 받기 위해서 준비해야 하며 이 성결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웨슬리의 영성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노력이 대립되지 않고 잘 조화된 모습을 갖고 있다.


 

맺는 말: 웨슬리 이후


  우리는 이상에서 웨슬리의 영성에 나타나 있는 양면성을 살펴보았다. 웨슬리에게 이 양면성은 분명하게 창조성이었다. 이런 웨슬리의 신학은 기독교신학에서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의 세대에는 이 양면성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양극으로 분열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웨슬리안 내의 갈등이다. 결국 이 양면성은 잘 조화되지 못하고, 서로 대립하고 분열하고 말았다. 그것이 19세기 말에 나타났던 감리교 내에서의 성결운동의 분열이다.

  웨슬리를 이어온 감리교는 얼마가지 않아서 웨슬리가 반대한 영국교회의 형식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형식주의에 빠진 감리교는 마음의 종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성결을 단지 도덕으로 이해하고 말았다. 결국 미국 감리교회는 사회적인 영향력에 있어서는 큰 위치를 차지하였지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계승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대해서 반발을 하고 출발한 것이 바로 성결운동이다. 성결운동은 무엇보다도 성령의 역사를 통한 인간의 마음의 변화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엄청난 열정을 가져왔다. 그 결과 오늘날의 오순절운동을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웨슬리가 원래 말한 사회를 개혁하는 데까지는 나가지 못 하였다.

  우리는 다시금 웨슬리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웨슬리는 훈련과 체 험, 소그룹과 대형집회, 마음과 행동을 창의적으로 종합한 사람이다. 이것은 단지 이론이 아니라 그의 사역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오늘의 감리교는 다시금 웨슬리의 뜨거운 열정을 회복해야 하며, 오늘의 성결운동은 웨슬리의 개혁적인 정신을 배워야 한다.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1886.8.20~1965.10.22)」에 의하면 모든 창조적인 인물에는 모호성 (ambiguity) 이 있으며, 이것이 바로 창조성의 원동력이다. 그런데 그 이후의 세대에서 이 모호성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이것을 명료화하려고 하는데 이런 과정에서 율법주의가 나오게 되고,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면 창조성이 사라지게 된다고 한다.19)

  우리는 다시금 웨슬리의 창조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양극으로 빠져 서로를 비난하고, 결국에 가서는 다같이 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이다.

  

   1) Martin Schmidt, John Wesley: A Theological Biography, 2 vols (Nashville, Abingdon, n.d.), 1: 35ff

   2) Richard P. Heitzenrater, The Elusive Mr. Wesley: John Wesley, His Own Biographer, 2 vols(Nashville, Abingdon, 1984), 1: 16-21

   3) Schmidt, John Wesley, 75.

   4) N. Cunock ed., Journal of John Wesley, 8 vols (Epworth Press, 1931), 1: 576; 1738년 5월 24일 이하는 Joural 로 약칭 함 .

   5) Journal, 2: 123-l25; 1739년 1월 1일 ; Cf. Henry D. Rack, Resonable Enthusiast: John Wesley and the Rise of the Methodist (London: Epworth, 1989).

   6) Ernest Gordon Rupp, Religion in England l688-l791(Oxford University Press, 1986), 298-322.

   7) Ted Campbell, The Religion of the Heart(SC: The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Press, 1991), 101.

   8) David L. Watson, The Early Methodist Class Meeting (Nashville: Discipleship Resourses, 1985), 190

   9) Watson, The Early Methodist Class Meeting, 192.

 10) Thomas Jackson, ed., The Works of John Wesley, 14 vols (Grand Rapids: Baker, 1970), 13: 272. 이하는 Works 로 인용함.

 11) Skevington Wood, The Burning Heart, John Wesley: Evangelist (Mineapolis, MN   Bethany House Publishers, l967), 98.

 12) Journal, 4: 188; 1756년 10월 10일.

 13) Journal, 2: 172-173; 1739년 4월 1일.

 14) Journal, 3: 14; 1742년 5월 30일.

 15) Works, 9: 418.

 16) E. H. Sugden, ed., The Standard Sermons of John Wesley, 2 vols (London: Epworth Press, 1956), 1: 155.

 17) Works, 11:, 423.

 18) Works, 11:, 442.

 19)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3 vol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3), Part IV  Life and Spirit 을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