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세계 속의 한국교회의 역할



 



Ⅰ.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는 많은 역사적 과제를 안고 힘겹게 지난 세기를 살아왔다.

  첫 번째 과제는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는 일이고

  두 번째 과제는 절대적인 빈곤에서 벗어나는 일이고

  세 번째 과제는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일이며

  네 번째 과제는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과제는 부정과 부패를 없애고 맑고 깨끗한 복지국가를 세우는 것이다.

  그 중에서 처음 세 가지 과제는 불완전하지만 어느 정도 달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과제는 무거운 숙제로 안고 21세기를 맞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큰 축복을 우리 민족에게 내리셨다. 그것은 신령한 축복 즉 한국교회의 눈부신 성장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이다.

  특히 8.15광복과 6.25전란을 겪으면서 일제와 공산주의의 잔인한 박해를 벗어나 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30년 동안에는 선교 역사상 유례를 깨고 고도의 성장을 이룩했다. 그래서 지금은 12백만 신도, 5만 교회 그리고 13,0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세계 복음화에 기여하고 있다.


 

Ⅱ. 한국교회의 오늘


  온 세계의 높은 관심과 주목을 받으면서 21세기에 들어선 한국교회는 지난날의 경이적인 성장을 바탕으로 제2의 부흥기를 맞아 세계적인 교회로, 미래 사회를 주도하는 교회로 다시 한번 도약해보려는 것이 한국교회의 꿈이다.

  그러나 이러한 꿈을 실현하기에는 질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허약함이 우리가 안고 있는 고민이다. 그러므로 이런 꿈을 실현하기위해서 먼저 겸허한 자세로 오늘의 한국교회의 건강 상태를 진단해 보는 것이 우선해야할 과제가 아니가 생각한다.

  몸이 건강하려면 병이 없어야 한다. 아무리 신체가 튼튼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몸에 병이 들면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병이 없어야 한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몸집이 거대하고 원기가 왕성하여 건강한 것 같은데 속으로는 심상치 않은 병을 앓고 있다.

  물론 교회에 따라서는 부흥과 성장을 계속하는 건강한 교회도 있다. 그런 교회들은 우리 교회는 계속 성장하고 있고 건강한데 무엇이 문제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정관념은 성장을 지속하는 교회만의 당장의 논리로는 맞는 말일 수 있으나, 한국교회 전체를 총체적으로 진단해 볼 때는 여러 가지 병에 걸려 성장을 멈추고 침체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이, 한국교회의 미래를 염려하는 많은 지도층의 동일한 인식인 듯하다.

  가령 홍수가 나서 강둑이 무너져 강물이 온 마을에 넘쳐들어 오는데 내 집 담벼락만 튼튼히 수리하고 지킨다고 해서 전체 마을의 문제가 해결됐다고 할 수 있을까? 한국교회 전체가 부흥하면 모든 교회가 부흥하지만 한국교회 전체가 쇠퇴하게 되면 부흥하던 교회도 따라서 영향을 받게 된다.

  이것은 오래 기독교 역사를 가지고 기독교 문화와 인류문명을 창출해낸 구라파 교회의 현실이 보여주는 실감 있는 교훈이기도하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한국교회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은 무엇이며 병이 들었다면 무슨 병인가? 저는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병리현상을 사견임을 전제로 몇 가지만 진단해 보고자한다.


   ⅰ. 첫 번째 병리현상은 도덕성의 문제 즉 정직성의 상실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에 성실성, 정직성에 이상이 생겼다. 급성장의 산물인지는 모르나 실상보다는 허상을, 실세보다는 허세를, 실수보다는 허수로 치장한 교회가 되었다.

  예를 들면 한달에 백만 원 버는 사람이 천만 원 번다고 과장을 하거나, 20평짜리 아파트에 살면서 50평 아파트에 산다고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 있다면 믿어줄 사람이 있겠는가? 한국교회는 통탄할 정도로 통계 숫자에 정직하지 못하다. 오늘날 교회들 가운데는 물량적인 강박관념에서 교인수를 몇 배씩 늘려서 교세를 과시하는 경우도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정직성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어떤 지도자는 ‘믿음의 수치’를 강변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엄밀히 따지고 보면 물량주의에 오염된 한국교회 실상을 숨기고 자기 과시와 허세심리에서 표현되는 정직성의 은폐라고 볼 수 있다. 언젠가 목회자 포럼에서 한 강사는 한국교회의 병리현상을 진단하면서 한국교회의 허상, 허수, 허세를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서 한국교회가 상실한 정직성을 회복해야 산다고 경고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한 영혼 한 영혼의 올바른 가치의식에서 시작해야한다고 믿는다.


  ⅱ. 두 번째로 한국교회의 병리현상은 영향력의 상실이다.


  교인수가 12백만이라고 자랑을 하지만 그 영향력은 점점 약해져서 부끄럽게도 오늘은 사회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정부안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두루 요직을 맡고 있다. 입법부에도 기독교 신자들이 삼분의 일이 넘으며 그중에 장로들도 상당수가 있다. 그 외에도 사법부, 교육기관, 기업 등 크리스천이 섞이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날로 부패해가는 이유가 무엇이며 심지어는 시민질서에 이르기까지 불행하게도 큼직큼직한 사건에는 교회 간부들의 이름이 빠진 곳이 없다. 예수님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 소금이 되라”고 하신다. 그런데 소금은 많은데 맛을 잃었고, 등은 많은데 불이 꺼져서 심지만 남아 빛을 발하지 못한다.

  이 세상에는 언제나 두 종류의 세력이 대립하고 있다, 하나는 부패의 세력이요, 또 하나는 소금의 세력이다. 이 두 세력의 긴장된 역학관계에 의해서 이 사회는 부패한 사회가 될 수도 있고 맑은 사회가 될 수도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부패한 세력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부패한 세력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부패를 방지하는 세력이 약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한 사회에 소금의 세력이 약하고 부패한 세력이 강하면 그 사회는 타락한 사회로 전락할 것이며, 그 반대로 부패한 세력보다 소금의 세력이 강하면 그 사회는 맑고 깨끗한 사회가 된다.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신앙과 정의의 공동체인 교회는 부패와 타락을 막는 소금의 세력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므로 교회는 부단히 부패한 세력과 싸우는 Church Militant가 되어야한다.

  우리 몸에 생명을 위협하는 세균이 들어오면 백혈구들이 혈관을 뚫고 나와 독균을 포위하고 생사 결단하고 싸움을 한다. 백혈구는 살신의 정신으로 독균과 용감하게 싸워 독균을 잡아먹는다. 이것이 백혈구의 기능이다. 이렇게 백혈구가 독균 섬멸작전을 하여 이기기 때문에 우리는 건강한 몸으로 살고 있다,

  소금의 역할은 백혈구의 역할과 같다. 크리스천이 가는 곳, 머무는 곳에서 소금이 되고 백혈구가 되어 온갖 부패한 세력을 이길 수만 있다면, 오늘날 천만 명이 넘는 기독교인의 영향력이란 막강하여 당할 자가 없을 것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한국의 세례교인은 10만 명에 불과했다. 모든 신도를 다 합해도 겨우 20만 명 정도였다. 그들은 소수였지만 그 막강한 일제를 향해 독립을 선포했다. 그 후 일본 경찰은 수는 적으나 기독교 세력을 가장 두려워했다고 한다.

  해방 후에도 그 잔인한 공산당 세력에 항거하여 나라를 수호한 기독교의 세력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할 사람은 없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숫자로만 따진다면 막강한 세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금과 백혈구의 역할을 하는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수는 아주 적다는데서 실제적인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


 ⅲ. 세 번째로 한국교회의 병리현상은 성취감에 안주하려는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자세다.


  이미 어떤 일을 성취했다고 안도하는 착각처럼 무서운 적은 없다.

  교회란 언제나 전환기에 서 있는 실체다. 교회는 동터오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가 서있는 역사적 현실의 긴장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다(요한계시록21:22)”고 한다. 죄와 죽음이 있는 현실 속에 교회는 존재하며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완전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불완전한 역사적 현실 안에서 선포해야하며 그 둘 사이에서 긴장을 느끼며 순례자로 살아가야 한다.

  고로 교회는 과도적이며 도상의 나그네이며 전환기에 서 있는 순례자이다. 그러므로 화란의 신학자 「호켄다이크(J.C.Hoekendijk 1912-1975)」는 교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교회는 아무데도 선 곳이 없다. 교회는 끊임없이 창출되어가는 선교 도상의 실체다. 교회는 땅 끝과 마지막 때를 향하여 열려 있으며 결코 정착지가 될 수 없는 한 처소에 불과하다.”

  한 곳에 안주한다는 것은 우리의 전진을 가로막는 큰 적이다. 바울 사도는 노경에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생각하지 않는다(빌립보서3:13)”고 했다. 그는 자기의 삶을 하나의 완성품으로 보지 않고 ‘이루어져가는 과정으로’ 생각하면서 산 것이 그의 위대한 점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에베소서 2장22절에 보면 바울이 ‘그리스도인을 하나의 성전’으로 묘사하면서 “너희는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거할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하였다. ‘지어진 성전’ ‘완성된 성전’이 아니라 ‘지어져 가는 성전’이라고 표현한 것은 문법적으로 말하면 ‘과거 형’도 아니고 ‘현재완료형’도 아니라 ‘현재진행형’을 사용했다. 완성된 성전이 아니라 아직도 ‘지어져 가는 성전’이다. 완성된 교회는 생명이 없다.  그러나 ‘지어져 가는 미완성의 교회’는 어떤 목표를 향해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로서의 성전이기 때문에 힘이 있고 생명이 넘친다.

  여기에 깊은 뜻이 있다. 기독교 인생관은 나그네 인생관이다. 나그네 인생은 한 곳에 정착해 살기보다는 부단히 어디론 가를 향해 계속 전진하는 생활이다. 교회도 한 곳에 안주하려는 ‘되어진 교회’, ‘완성된 교회’가 될 때 생명력을 잃게 된다.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돌아다보아도 초대교회가 천막교회로서 초라하게 ‘되어져 가는 교회’로 민중 속에 존립하고 있을 때 생명력이 넘쳤다. 그 힘으로 막강한 로마제국을 복음으로 정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274.2.27~337.5.22)」대제가 통일된 로마의 황제가 된 후 주후 313년 그 어느 날 「콘스탄티누스」황제는 일약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300여 년 동안 지하에서만 살아온 교회, 수 없이 많은 신앙의 동지들이 ‘믿음’ 하나 때문에 죽어가야 했던 슬픔이, 흙 묻고 피 묻은 교회가 하루아침에 로마 국교가 된 다음날부터 박해는 없어지고 갇혔던 사람들은 석방되었으며 무너진 교회들은 재건되고 주일은 공식 휴일로 선포되고  감독과 성직자들은 그 나라 고관들처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종교의 자유가주어지면 교회는 의당 부흥되고 그 신앙은 깊어져야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정반대였다. 지하교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무서운 파벌 싸움과 논쟁이 300년 동안 지켜온 믿음과 생명력 있던 교회를 타락시켰다. 죽음과 박해 앞에서는 오히려 ‘믿음과 교회’는 생동하는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종교의 자유가보장되고 웅장한 성전을 짓고 그 속에 안주하며 교권을 휘두르면서 백성들 위에 군림하자 역설적으로 생명력을 다 잃고 말았다.

  한국교회도 일제시대, 공산주의 치하에서 박해를 받으며 초라한 성전 속에서 ‘되어져 가는 교회’로 존재할 때는 생명력이 넘쳤고 저항력도 강했다. 그러나 교회가 놀라운 성장을 이룩하자 성취감에 만족하고 안주하려는 오늘의 한국교회는 생명력을 잃고 영향력을 상실한 무능한 교회가 되고 말았다. 나는 이런 상황은 교회의 위기라고 조심스럽게 부른다.

  한때 융성했던 유럽의 교회들이 지금은 텅 빈 예배당만 남아있는 역사적인 교훈을 돌이켜보면 지금의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 미래의 한국교회를 좀더 창의적으로 세워가는 방안이 아닌가 생각한다. 


 

Ⅲ. 세계 속의 한국교회


  우리는 지금 ‘세계화’라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 속에 살고 있다.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에 들어선 세계는 ‘지구촌’이니 ‘국제화’니 ‘세계화’니 하는 전에 쓰지 않던 용어들이 폭넓게 쓰이고 있다. 지구촌이란 말은 이제 멀리 있는 개념이 아니라, 피부로 느끼는 실제(reality)가 되었고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 이후로는 세계화가 현실로 눈앞에 와있다. 세계화란 한마디로 국경이 없는 시대를 말한다.

  지구를 하나의 마을이라는 단위로 표현한 지구화는 지구를 하나의 세계로 만들었고 실제로 지구는 하나일 수밖에 없는 운명의 공동체가 되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지구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는 이중구조가 아니라 하나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나라를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다고 하실 만큼 만족하셨다(창세기1:31, 에베소서2:14).

  그러나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나라로 나뉘게 하고 이중구조는 갈등관계를 형성하게 하였다. 세상 나라의 갈등은 언어로 인한 분리, 문화로 인한 갈등, 인종으로 인한 싸움으로 번지게 되고 결국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선이 생기게 되었다. 선과 장벽으로 미궁이 된 세상은 국경이라는 것으로 나라와 나라가 나뉘고 국가 이기주의로 치닫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신 지구에는 선도 장벽도 국경도 없는 하나의 세계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권익을 위하여 선을 긋고 이익의 선이 되게 했다. 우리나라의 분단도 인간이 편의상 만들어 놓은 38선이, 고착된 분단의 벽이 되게 하였고 지금도 구시대 이념의 상징인 휴전선이 남북을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자국의 이기주의 때문에 국경이 다시없어진 것이며, 나아가서는 하나의 지구, 하나의 세계라는 운명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지금은 국경을 포기하게된 것이다. 국경이 없는 시대라는 것은 어느 나라든지 입국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지금은 국가적 이익만 있으면 얼마든지 입국이 허용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최근 기업들은 ‘일류만이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이론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고 또 나라들도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세계화’를 기조로 하여 세계적 국가를 지향하고 있다. 어째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개인이나 국가나 교회나 멀리 내다볼수록 멋진 꿈을 꿀 수 있고 이에 가깝게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화 시대로 가는 미래는 한국교회에 대해서도 예외 없이 상당한 변화를 강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와 같은 소박한 목회구조와 철학을 가지고서는 미래사회에 적응할 수 없을 것이다. 고로 한국교회의 변화는 한국교회의 생존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한국교회의 변화에는 전반적인 선교정책 에큐메니즘 그리고 다양한 사회봉사의 체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야할 것이다. 이와 같이 다양화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목회자 자신의 목회구조의 변화와 더불어 목회에 대한 신학적인 뒷받침 그리고 목회에 대한 교인들의 이해가 선행되어야할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의 교회성장이나 목회전략은 과거와는 달라져야할 것이다. 그러면 세계화 시대에 한국교회가 생각해야할 과제는 무엇일까?

  

  ⅰ. 세계화 시대에 한국교회가 생각해야할 과제는 기독교문화의 형성이다.


  현대 신학자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1886.8.20~1965.10.22)」교수는 “종교는 문화의 뿌리"라고 했다. 즉 모든 문명의 원천은 종교적인 힘이라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어느 지역 어느 나라의 문명이건 그 뿌리는 종교였다.

  종교적 감화 없는 기술, 지식의 발전은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종교적 감화 없는 도덕은 인간을 율법적으로 구속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과오를 범한다. 종교적인 감화 없는 예술은 인간의 미의 문화를 부패케 하여 타락시킬 우려가 있다. 고로 구약성경의 지혜문학서인 잠언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요 지혜의 근본이다(잠언1:7,9:10)고 말씀하셨다.

  일반적으로 서양문명을 기독교 문명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콘스탄티누스」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 이래 하나의 기독교적 권력구조에 의해 성취된 문명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거대한 권력을 동반하여 종래의 비기독교적인 생활양식을 소멸시키거나 또는 흡수하여 모든 문명을 기독교적 방향으로 통일했기 때문이다. 그 후 기독교 2천년의 역사와 문화 예술의 관계는 교회가 서구문화와 예술의 어머니라고 불릴 정도로 밀접해졌다.

  한국은 서구 여러 나라와는 달리 기독교 국가도 아니고 기독교 문명의 나라도 아니다. 한국의 원시적인 종교인 ‘무당종교’가 민심에 뿌리를 전승했고 그 뒤를 이어 불교와 유교가 번갈아 국교로 행세했다. 그러므로 지금 한국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무속문화와 불교문화 그리고 유교문화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종교들이 모두 호국종교로서의 제 구실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망국과 함께 그 긍지를 잃고 말았다.

  그 후 개화기에 새 바람을 타고 들어온 기독교가 그 공백을 메우는 구실을 했기 때문에 기독교의 위치는 국민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해방 후 급속한 성장으로 한국교회는 국내외에서 무시 못 할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문화는 아직도 국민의 마음과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아직도 초기 한국교회의 선교정책인‘이원론적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과 생활의 이원화’ 즉 신앙은 교회에 속한 것이고 삶은 세상에 속한 것처럼 착각한다. 이런 이원론적 사고는 ‘신앙과 삶’을 별개의 문제로 생각하는 경향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존재하나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면 진정한 기독교 문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교훈’이 모든 문화 예술 속에 형태화한 업적을 말하는 것이다. 문화란 우리의 생활을  말한다. 고로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으로 사는 것이 기독교 문화다. 이것은 신앙의 생활화를 의미한다. 그래서 생활종교로서의 기독교는 날마다의 생활, 그것이 정치든 경제든 교육이든 예술이든 그 모든 것이 기독교적인 생활 질서 안에 포섭되는 것이다.

  그렇게 사노라면 정치는 민주적이 될 것이고, 사회는 서로 돕고 서로 위하는 사랑의 공동체로 발전할 것이며, 교육은 인간의 참 모습을 되찾아 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성숙한 모습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생활화로 자리를 잡을 때 가능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생활문화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는 날 한국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게 될 것은 물론이고 나가서 선진 세계 속에서 같이 호흡하고 제몫을 감당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ⅱ. 한국교회의 미래 과제는 ‘목회 구조의 개혁’이다.


  21세기에 들어선 한국교회는 지난날의 지나친 ‘성장 신드롬’에서 벗어나야한다. 미국의 교회 성장학교수 「칼 조지(Carl F George)」는 그의 저서 ‘미래를 준비하는 교회(prepare your church for the future)에서 미래교회를 메타교회(Meta Church)라고 정의했다. ‘메타’라는 용어는 Fuller 신학교의 세계선교 대학원의  「폴 히버트(Paul Hiebert)」가 차세대 교회형태를 기술적으로 표현한 용어이다.

  메타는 헬라어의 ‘변화’를 의미하는 말로서

  전환기의 교회(Church in Transition)

  돌아서는 교회(Church that is Turning)

  되어져가는 교회(Church is Becoming)를 말한다(The Coming Church Revolution, 1994 by Carl F George).

  메타교회는 대형교회라는 메가(Mega)교회와는 전혀 다르다. 차세대 교회는 대형교회라는 의미보다는 대형교회건 소형교회건 ‘변화하는’ 의미의 교회를 말한다. 미래교회는 이동성(mobility)이 극도로 발달하여 교회의 지역성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지금도 벌써 도시교회는 지역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미래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목회구조의 창출을 위한 사고의 전환이 시급한 과제이다.

  미래교회는 양적 성장구조에서 질적인 성장구조로 바뀌어져야하고 개인 목회에서 협력목회로 구조를 바꾸어야할 것이다. 미래사회의 또 하나의 변화는 다양성의 극대화일 것이다. 고로 미래교회는 다양성을 포용해야하며 동시에 통일성을 추구하는 이중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또한 협력목회란 담임목사와 부교역자 그리고 교회의 사무직원과 모든 평신도가 다 함께 목회에 참여하는 총체적 개념이다. 이런 원리를 2천년 전에 이미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이 집이니라(고린도전서3:6~9).”

 

 ⅲ. 미래교회의 과제는 연합운동의 활성화이다.


  분열과 분쟁의 시대가 산업사회의 특징이라면 연합과 조화는 정보화 사회의 새로운 특징이 될 것이다. 고로 한국교회는 지난날의 분열과 개교회주의 교파주의 등으로 교세 확장의 지나친 경쟁을 지양하고 연합된 교회로서 세계화에 적극 참여해야할 것이다. 지구가 하나의 집으로 개편되는 이즈음에 우리는 과거의 분파와 분쟁을 씻고 배타적인 사고에서 빨리 벗어나 포용적인 사고로 전환하여 폭 넓은 교회로 탈바꿈해야할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사회에 대해서도 과거와 같은 배타적인 좁은 생각을 버리고 넓게 포용하는 자세로 전체 사회에 대한 목회적 배려를  펴야할 것이다. 교회가 사회를 외면하면 사회도 교회에 대한 관심을 버릴 것이다. 한국교회의 대 사회 개방성의 결여는 장차 젊은이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게 하는 동기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의 연합운동의 성격은 개체의 가치를 철저하게 존중하고 인정하는데서 시작해야한다. 이것이 다양성 속에서 통일을 추구하는 원리이다. 성경은 하나 됨을 강조한다. 그러나 하나 됨의 전제인 다양성을 인정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에베소서4:3)”고 하셨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이라는 말은 '연합'을 의미한다. 성경의 하나 되라는 말은 연합이라는 뜻이다. '하나 됨(oneness)'이라는 말은 '같이 됨(sameness)'이 아니다. 서로의 개별성을 인정하면서 연합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개체의 개별성은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이시다. 그러므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개별성을 무시하고 '같아지라'고 하실 이유가 없다.

  결국 연합이란 자기의 것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굳게 지키고 정체성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남의 것을 배우면서 세계화하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이방인을 위하여 ‘부름 받은 사도’라고 강조하면서도 그는 세계화로 나가기 전에 먼저 아라비아에서 3년 다소에서 7년을 지내면서 가장 유대적인 것을 성찰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세계화에 앞서 자신의 정체성을 먼저 확인하고 소중히 여기는 지혜가 우선되어야한다는 것을 바로 인식하고 있었다.

  오늘날 교회도 연합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화는 한국교회의 긴급 과제가 되었다. 어쨌든 세계화시대로 가는 미래를 향한 한국교회는 우리의 ‘우물 안’을 탈피하여 세계화를 추진하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도록 주의해야할 것이다. 이런 뜻에서 세계화는 갈등구조가 아니라 상호의존적이며 조화의 관계에서 추구해야 할 것이다. 다양성의 조화는 연합운동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요소이다.


  ⅳ. 평신도의 목회 참여를 극대화시켜야한다.


  전 세대는 목회자 한 사람의 역량에 따라 교회가 특징지어졌다. 교회성장은 목회자에게 절대 의존적이었다. 목회자의 목회관은 “교회의 크기”, “목표 설정”, “교회의 방향” 등을 규정하고 교회의 개성을 뚜렷하게 하였다.

  물론 미래교회의 목회에도 목회자의 영향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목회와 미래의 목회가 다른 점은 목회자와 평신도의 관계다. 과거의 목회에서 평신도는 목회자와의 종속 개념에서의 협력관계였다. 그러나 미래 목회에서는 목회자와 평신도가 동등한 관계에서의 협력자가 될 것이다. 

  미래 목회에서는 카리스마적 목회자의 출현보다 평신도의 사역이 극대화될 것이다. 미래목회는 대중적인 카리스마적 목회가 아니라 소그룹을 통한 평신도 목회가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미래교회는 과거와 같은 메가(대형교회)교회가 아니라 메타(Meta)교회 즉 소그룹을 중심한 선교활동이 더 활성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메타교회는 목회자의 역할보다 평신도 역할이 중심이 될 것이다.

  그러면 평신도는 누구인가? 성직자를 제외한 교회 구성원을 평신도라고 한다. 평신도는 오래전부터 역사 속에 존재했지만 그 가치와 기능을 인정하고 교회가 신학적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오래지 않다. 평신도 운동은 19세기에 와서 교회 안에서 서서히 관심을 끌기 시작했고 20세기에 들어와서야 활발하게 발전되었다.

  한국교회에는 1960년대에 도입되었고 1970년대에 와서 평신도 신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운동은 교회 안에서 신학과 운동이 소수의 성직자 중심에서 다수의 평신도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평신도 운동은 교회의 민주화와 교회의 다수에 대한 새로운 관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가톨릭교회는 사제중심의 교회제도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연히 계급적이며 성직자와 평신도를 엄격하게 구분하여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성속(聖俗)이 대립적 계층으로 설정한다.

  그러나 개신교의 개혁자들은 이런 이중적 구조를 버리고 「루터(Martin Luther  1483.11.10~1546.2.18)」의 ‘만인제사장설’에 근거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며 동등한 제사장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함으로(갈라디아서3:28) 종교개혁은 평신도의 이차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본질적 차별을 철폐한 것이다.


  ⅴ. 미래교회 성장을 위한 목회전략으로 보다 중요한 것은 “영성적 기능의 회복”이다.


  1900년에서 2000년까지의 100년은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류는 비영성적인 세기(Non Spiritual Century)를 살아왔다. 1960년대의 히피문화, 1970년대의 마약문화, 1980년대의 탈근대주의의 급진적 스타일 등이 자리하게 되었다.

  1990년대에 와서 다시 ‘영성적 방향’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1세기에 진입하여서 이러한 영성적 추세는 더욱 발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물질과 과학 만능으로 살아온 인류는 이런 것에서 만족과 행복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타락과 고갈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성을 추구하게된 것은 세속화된 사회나 세속에 물들어가는 교회 모두의 요청이기도 하다.


  ① 사회의 요청

  7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급격한 경제성장 산업화 도시화와 더불어 물질만능주의 과학만능주의가 편만하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영혼, 도덕, 삶의 가치나 의미 등 인간의 존엄성은 평가절하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가치관의 전도 혹은 아노미(anomie) 현상의 와중에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차원적인 존재로 소유지향적인 존재로 육감적인 존재로 행동지향적인 존재로 소비 메커니즘에 갇혀버린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철저하게 세속화된 세계요 물질주의와 자본주의 삶의 철학과 양식에 충만 되어 있는 세속화된 세계가 됨으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영성은 현실세계와의 의미 또는 관련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의 시기는 영성이 위기에 직면한 시기이며 동시에 어느 때보다도 영성운동을 필요로 하는 시기이다.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크게 되돌아보면 위대한 영성운동이 일어난 때는 대체로 그 당시 세계질서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정신적 도덕적 종교적 타락이 크게 위험수위에 왔을 때였다. 여러 가지 위험과 가치의 혼란 도덕적 타락 가치 판단의 혼재 현상이 수도원을 통해 청빈 순결 봉사 사랑 등의 영성운동이 일어났고 특히 유럽의 산업사회 속에서 인간의 영혼이 병들고 그 결과 그 사회가 몹시 부패하고 병들었을 때 경건한 모라비안 형제들과 「웨슬리( John Wesley  1703.6.17~1791.3.2)」의 형제들의 영적 갱신운동이 일어났다.


  ② 영성운동의 추구는 세속에 물들어가고 있는 한국교회의 시급한 요청이기도 하다.

  물질주의 세속주의 물량주의는 삶의 깊이와 초월을 상실한 일차원적인 합리주의, 삶의 성공과 실패의 척도를 실용에만 두는 실용주의 등의 잘못된 풍조에 밀려가게 만들었다. 이러한 혼돈의 와중에서 세속사회를 정화하고 이끌어야할 교회가 그 서야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이 혼돈의 물결에 휩쓸려 교회 역시 세속화의 흐름에 그 몸을 맡김으로 날로 급증하는 사회의 범죄율, 정신도덕의 타락을 막을 능력을 상실한 한국교회이기에 영성기능의 회복이 절실한 상태에 와있다.

  이런 과학적 물질적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교회만이라도 영성적이기를 기대하게 되었고 ‘교회마저’ 물질적이기를 바라지 않게 되었다. 더욱이 과학 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미래사회에서는 교회를 찾는 사람들은 과학기술이나 물질을 추구하러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얻지 못하는 영성적인 것을 얻기 위하여 교회에 나오게 될 것임으로 교회는 더욱 영성적이어야 하며 덜 물질적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영성 추세는 이미 20세기 말에 시작된 교회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1981년에 Fuller 신학교 「Peter Wagner」교수는 전 세계에 약 9천만 명의 은사 중심의 카리스마적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그 수가 약 4억으로 추정하고 있다. 1992년에는 2억7천만 명이 카리스마적 기독교인이고 그 중에 2억4천만 명은 카리스마적 교단에 이미 가입되어 있다. 이러한 숫자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의 24%에 해당하는 놀라운 숫자이다.

  현재 세계의 추세를 볼 때에 남미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성장하는 교회들 대부분이 카리스마적 교회이며 쇠퇴일로에 있는 영국교회도 지난 10년 동안에 카리스마적 교회는 9%의 성장을 이룬 반면 다른 교회는 5%이상의 감소현상을 보였다. 이러한 세계적 추세는 미래교회가 다시 은사를 추구하며 강조하는 교회라야 미래사회에 적응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미래교회 지도자들은 영성적 기능을 강화해야하며 미래교회는 어느 때보다도 영성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개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계와 물질과 함께 살 미래인들은 신비적 영적 삶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역행심리가 발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는 교회와 사라지는 교회의 차이는 영성의 차이가 될 것이다.


  ③ 그러면 기독교가 추구하는 영성은 무엇일까?

  기독교가 추구하는 영성은 초월자와의 인격적인 관계, 영적 변화의 성숙한 체험 그리고 구체적으로 역사 현장에의 참여라는 삼각 도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한 삶을 추구함으로서 개인의 영적 변화를 통하여 교회와 사회의 영적 갱신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갱신은 그리스도인 개인의 영적 갱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사회의 개혁은 교회의 영성이 이를 가능케 할 것이다. 영성 추구의 공통점은 영성의 목표가 다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와 하나님과의 합일의 삶과 세상에서의 강한 사랑의 실천과 헌신의 삶이라는 사실이다.


  ④ 세계화 시대에 한국교회의 역할은 무엇일까?

  지난 8월7일 8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한국을 떠나는 이스라엘 주한대사 「우지마노루」는 마지막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기는 한국을 떠나면서 별로 석별의 느낌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는 한국과 이스라엘은 닮은 데가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나는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스라엘은 고대 왕국시절에 12개 부족(12지파)으로 구성되었다. 나중에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지금까지 12 부족 중 한 부족만은 어디로 이동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사라진 부족(Lost Tribes)의 성이 단(Dan)지파인데 아마 고대 조선의 시조 단군인지 모른다.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믿지 않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한국인은 나의 동족같이 항상 느껴지기 때문에 떠나면서도 새삼 별다른 감정이 없다.”

  그리고 그는 사부라(Sabra)라는 단어를 예로 들면서 이 단어의 뜻은 토박이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인데 원래 사부라는 선인장의 일종인데 겉은 딱딱하고 가시가 많지만 그 열매는 아주 달콤하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사람도 외부 환경 때문에 겉으로 대하기는 딱딱해 보이지만 속은 한국 사람처럼 친절하고 따뜻하다고 말했다.

  이 대사의 말대로 한국민족과 이스라엘민족은 닮은 데가 많다. 특히 이스라엘의 디아스포라와 한국민족의 디아스포라를 비교해보면 공통점이 많다. 첫째로 이스라엘 디아스포라는 가는 곳마다 회당(synagogue)을 세웠다. 한국민족은 교회를 세웠다. 회당이 그들의 중심이었듯이 교회도 한국 이민자들의 정신적인 보류가 되었다. 두 번째는 두 민족이 모두 근면하고 교육열이 세계적이고 가족제도나 어머니의 역할도 비슷하다.


  2005년7월 정부가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175개국에 6,637,000명의 한국민족의 디아스포라가 정착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민자들이 세운 교회가 5천이 넘는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위에서 지적한대로 여러 가지 부정적인 문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민족은 거대한 신앙의 에너지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세계에 흩어진 한국민족의 디아스포라들이 가는 곳 마다 선교적 사명을 다한다면 세계복음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현재 13,000명의 선교사를 130여 개국에 파송하고 있다. 6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미국에 이어 제2의 선교사 파송국이 됐다. 작년도 대한성서공회가 발표에 의하면 150개 국가에 130개 언어로 된 성경 3백만 부를 수출하여 세계에서 가장 많이 성경을 수출하는 나라가 됐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인류의 구원사업을 위해 시대마다 필요한 백성을 선택하여 그 일을 맡기셨다. 고대에는 유태민족 만이 선택받은 민족이 되었다. 그래서 그 민족을 선민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이후에는 많은 이방 나라 백성들이 이 위대한 일을 위해 선택받았다. 그럼으로 현 시점에서 우리는 ‘택한 백성(선민)’의 성경적 개념을 명백히 알아야한다.

  세계 복음화를 위해 우리민족은 가장 세계화된 민족이요 새로이 택함을 받은 백성이 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선택받은 한국교회는 ‘세계화의 눈'으로 하나님이 주신세계 복음화의 선교적 역할을 최선을 다해 책임져야할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 선교를 총괄하는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는 2020년까지 선교사 10만 명과 자비량 선교사 100만 명을 만드는 운동을 벌여 적어도 한국교회의 50% 이상을 선교하는 교회로 무장시키려고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