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담임목사 부자(父子)승계에 대한 종합적 정리


 

 



Ⅰ.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는 급속한 성장을 이룬 교회로서 유명하다. 그러나 사실 한국교회가 급속한 성장 을 이룬 것은 60년대 이후부터라고 생각된다. 60년대부터 시작된 도시화와 더불어서 대형교회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런 교회들은 대부분 강력한 리더십을 갖추고, 독특한 색깔을 강조하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런데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런 교회들을 세운 목회자들이 은퇴하게 되었고, 따라서 이들의 리더십 이양이 중대한 문제점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개신교에 있어서 담임목사의 청빙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을 천주교와 비교해 보면 잘 들어난다. 성례전을 예배의 본질로 하는 천주교에서는 성직자의 가장 중요한 직능은 성례전 집전이다. 그리고 이 성례전은 예식서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어느 신부가 부임하든지에 관계없이 교회는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다. 여기에 비해서 개신교는 설교를 예배의 핵심으로 한다. 그리고 이 설교는 설교자의 신학적인 확신이나, 스타일에 따라서 다양해진다. 따라서 어떤 목회자를 청빙하느냐에 있어서 교회는 매우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개신교에서 어떤 교역자를 담임목사로 모시는가 하는 것은 교회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또한 개신교는 담임교역자를 청빙하는 문제에 있어서 천주교와 매우 다르다. 천주교의 본당사제는 주교가 한다. 천주교는 교회를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교회와 배우는 교회로 나눈다. 가르치는 교회는 교황에서 신부에 이르는 성직구조이며, 배우는 교회는 평신도들로 이루어진다. 천주교는 평신도에게 성직자를 청빙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직자만이 진리를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신교는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으며, 따라서 누구나 누가 참된 성직자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대부분의 개신교에서는 담임목사를 신자들이 청빙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담임목사의 청빙은 근본적으로 그 교회 공동체의 자율권에 속한 문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교회의 자율권이 충분하게 고려되어야 된다는 점도 분명하게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율권이란 그 교회에 속한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통해서 담임목사가 선출되었는가 하는 점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런 것을 전제로 하여 이런 담임목사의 승계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가를 살펴보고, 아울러서 이것에 관한 찬반의견을 종합한 다음에 필자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려 보고자 한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 논의가 어떤 특정교회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능한 한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Ⅱ. 부자승계에 대한 역사적 개괄


  성서시대의 지도자들을 어떻게 선출하였는가 하는 것은 시대에 따라서 달라졌다. 사사시대에는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지도자가 선출되어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끌었다. 여기에서 지도자가 되는 일차적인 조건은 영적인 카리스마였다.

  하지만 사사시대가 끝나고, 이스라엘이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면서 이스라엘에는 새로운 스타일의 지도자가 등장한다. 그것은 혈연을 통한 지도자의 선출이다. 왕위는 자동적으로 아들에게 세습되었고, 제사장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것은 항상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이들의 정통성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는 계약 안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약성서에서는 혈연적인 정통성보다는 계약적인 정통성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항상 왕권이나 교권이 계약적인 정통성에 충실한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신약성서에서 리더십의 부자승계를 찾아볼 수 없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공동체였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신앙공동체가 지도자를 선출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사사시대나, 초대교회와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는 능력을 갖춘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나타나지만 안정된 시대에는 혈연을 통한 부자승계가 이루어져왔고, 이것은 곧바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의 부자승계는 본질적으로 담임목사의 자리가 부와 명예를 보장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만일 어려운 교회, 아무도 오지 않으려고 하는 교회에서 자신의 아들을 후임목회자로 삼으려고 한다면 이것은 미담에 속할 것이다. 문제의 초점은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로마가톨릭교회는 부자승계는 없었다. 천주교는 신부의 독신을 주장하기 때문에 교회를 물려 줄 대상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독신이었지만 중세까지만 해도 신부 가운데 결혼한 사람은 종종 있었다. 결혼한 신부들은 교회의 재산을 자기의 자녀에게 물려주고자 하였다. 이것이 부패의 근원이 되었다. 그래서 황제와 교황은 성직자의 결혼을 교회법으로 정하고 이것을 강화하였다(1049). 이 후부터 천주교에서 신부의 독신은 의무조항이 되었다.

  동방교회는 좀더 달랐다. 동방교회는 결혼한 사람도 성직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결혼 한 사람은 고위성직자는 될 수 없었다. 대부분 동방교회에서 고위성직자는 수도원의 수도사들 가운데서 나온다. 따라서 동방교회에서 성직의 부자승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영국성공회의 경우도 동방교회와 비슷하다.

  성직자가 결혼할 수 있도록 만든 최초의 사람은 개혁자 루터이다. 성직자가 결혼하면 가정에 매이기 때문에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할 수 없다고 해서 초대교회 이래로 교회는 결혼을 금해왔다. 하지만 이런 독신주의는 비밀결혼 같은 수  많은 문제를 야기 시켰다. 그래서 루터는 독신주의를 비성서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결혼을 정당화하였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도 성직자의 부자승계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독일의 루터교회는 일종의 국가교회로서 성직임명은 국가가 한다. 또한 개혁교회에서도, 침례교회에서도 부자승계는 별로 없다. 많은 개신교는 개교회 공동체가 성직자를 청빙하기 때문에 부자승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개교회 공동체가 원하는 경우에는 청빙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예를 들면 18세기의 유명한 부흥사요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외할아버지가 목회하는 교회의 부목사로 들어가서 할아버지의 사후에 담임목사가 되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혈연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개교회의 결의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교회사에 보면 개신교에서 부자승계의 경우가 많이 보인다. 무엇보다도 선교 단체에서 이런 일들이 많이 생긴다. 중국내지선교회(지금은 OMF)는 창립자 허드슨 테일러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과 손자가 계속 대표를 맞고 있다. 빌리 그래함 전도협의회의 경우도 그의 아들에게 리더십의 이양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성결교회의 모체가 되는 동양선교회의 경우도 창립자 카우만의 아내가 후에 총재가 되어서 활동하였다. 이것은 선교단체뿐만이 아니라 신생교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의 많은 오순절교파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들이 감독의 직분을 맡아서 하는 경우가 있다. 구세군의 경우도 한동안 창립자 윌리엄 부드의 자녀들이 대장을 하였다. 또한 이런 부자승계의 경우는 새로 급성장한 교회나 단체의 경우에도 나타난다. 미국의 유명한 수정교회의 로버트 슐러나, 신유운동가인 오 랄 로버츠의 경우도 아들이 아버지의 직을 계승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교회사의 입장에서 성직의 부자승계는 근세의 개념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면 왜 근대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필자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성격이 변화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교회는 공적인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정교의 분리이후 교회는 근본적으로 사적인 영역에 속하게 되었다. 물론 교회가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측면에서 공적인 성격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교회는 강제력이 없이 신앙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만든 사적공동체인 것이다.

  교회가 사적인 공동체가 되면서 그 공동체를 움직이는 법은 그 공동체가 스스로 정한다. 물론 전체 사회가 제정한 기준을 넘어서지 말아야한다. 다시 말하면 법이 정하는 범주 내에서 사적인 규율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와 같은 신앙공동체의 경우에는 기독교신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부자세습을 하는 많은 교회나 단체들의 경우에는 그 단체들의 성장이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빌리 그래함과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 중국내자선교회와 허드슨 테일러, 로버트 슐러와 수정교회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런 단체의 성장은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해 있기 때문에 후계자 임명에 개인의 영향력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이런 과정에서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Ⅲ. 부자승계를 찬성하는 입장과 그 문제점


  그러면 부자승계를 찬성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ⅰ. 개교회의 특성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개 대형교회는 담임목사의 독특한 카리스마에 의해서 발전되어왔다. 따라서 담임목사의 목회철학과 그 스타일을 어떻게 유지하는가는 그 교회의 미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된다. 부자승계를 원하는 교회들은 아들이 아버지의 목회를 잘 이해하고, 그것을 계승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여기에 상당한 근거가 있다고 본다. 개신교는 천주교와는 달리 개교회의 강한 특성이 있다. 그리고 그 특성이야말로 그 교회의 존재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많은 경우 1세대에는 그런 특성이 있다가 2,3세대로 이어오면서 그 특성이 사라져 버리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그 교회의 특성을 잘 발전시킬 수 있는 후임자를 찾게 되고, 그 가운데 전임자의 아들이 지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점이 있다. 과연 아들을 세운다고 해서 그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정신을 가지고 목회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물론 아버지가 세운 목회정신을 잘 이어받아서 계승하는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따라서 부자승계가 이런 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ⅱ. 원로목사와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많은 경우, 교단법에 의해서 은퇴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교회는 원로목사의 영향력을 필요로 한다. 물론 후임에게 온전히 물려주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교회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 아들을 후임으로 정했다면 상호신뢰와 혈연관계라는 정 때문에 서로에게 관대해질 수 있다. 하지만 아들의 경우가 아닌 경우에는 원로목사의 참여가 매우 어려워지게 된다.

  실질적으로 한국의 대형교회에서 전임자와 후임자자 사이의 갈등이 큰 문제로 등장하고, 많은 후임자들은 전임자의 영향 때문에 마음 놓고, 목회하기 힘들다고 토로한다. 한국의 몇 몇 대교회들이 이런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아들을 후임자로 선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법의 경직성을 지적하고 싶다. 미국의 경우 대학교수도 본인이 원하고 학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정년을 넘어서서 계속할 수 있다. 빌리 그래함은 고령인데도 여전히 그 단체를 책임지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법을 제대로 지키지도 않으면서 모든 것을 법적으로 제한하여 충분히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을 제한하는 경우가 있다. 법을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교회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년문제도 개교회의 결정에 맡길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법으로 정년을 정해 놓지 않으면 담임목사가 능력이 없는데도 은퇴 하지 않고 계속 머물려고 한다면 이것을 막을 수 있는 민주적인 절차가 한국교회에서는 없다. 따라서 최선은 아니지만 법으로 획일적으로 규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역시 법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임을 알 수 있다.


 ⅲ. 아들목사가 자격이 충분하다면 오히려 이런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있는 충분한 대안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버지 보다 못한 아들도 있지만 또한 아버지 보다 나은 아들도 있다. 단지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에게 후임 목사가 될 수 있는 길을 막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원칙적으로 옳은 말이다. 한국사회는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엄격하다,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관대하다. 다시 말하면 융통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을 보지 않고, 문자만 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아들에게 후임을 열어주는 경우에 많은 담임목사들이 자신들의 아들을 후임으로 세우려고 할 때에 그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좋은 목회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갖은 이권이 오가는 현실에서 자신의 아들을 목회자로 세우기 위해서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부정적인 측면을 염려하는 것이다.

  현실 목회에서 교회의 인사이동이 영향력 있는 목회자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목회자의 자녀들은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 특혜를 누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서 소외된 수많은 목사들은 이런 불공정 경쟁에 대해서 분개할 것이다. 사실 대형교회의 부자계승문제는 이런 불공정경쟁에 대한 분노의 표현일 것이다.


  ⅳ. 후임자 선정은 근본적으로 개교회의 자율권에 속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도 맞는 말이다. 특별히 개신교는 개교회의 자율권을 존중한다. 이런 자율권 때문에 개신교회의 신자들은 교회에서 주인의식을 갖는다. 또한 개교회마다 거기에 독특한 사정이 있기 때문에 개교회는 자신에 합당한 담임목사를 선출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거론되고 있는 대형교회는 이것을 단지 개교회만의 문제라고 못 밖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런 교회들이 갖고 있는 한국교회에서의 대표성 때문이다. 아직도 획일화 된 한국 사회에서 담임목사직의 부자승계는 많은 교회들에게 후임자 선정의 모델로서 등장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많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대형교회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이다. 이미 거론되고 있는 대형교회들은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임을 자임하여 왔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이런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Ⅳ. 부자승계에 대한 반대 입장과 문제점


  그러면 부자승계를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를 사유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은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맞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므로 부자승계를 반대하는 이런 주장의 배후에는 부자승계자체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해치는 것이라는 것을 전체로 한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목회자라면 전임자의 아들이라고 해서 몸된 그리스도의 교회를 파괴시킨다고 말할 수 없다

  후임자의 선정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자연스러운 승계는 아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승계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가장 잘 알기 때문이라는 전제가 들어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참된 목자 상을 보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란 아들이 그의 뒤를 이어서 참된 목자 상을 계승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따라서 무조건 부자승계는 반신학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담임목사직의 부자승계는 교회를 사유화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의 담임목사들은 말로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것처럼 행세한다. 사실 이런 담임목사직의 부자계승에 대한 논란이 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담임목사의 권한의 비대화 때문이다. 때로는 대기업의 사장 같고, 때로는 국가기관의 권력자와 같은 대교회의 목사에게서 예수님과 같은 겸손한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ⅱ. 교회는 근본적으로 혈연공동체가 아니라 언약공동체라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듯이 이스라엘은 신앙공동체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맺는 언약에 기초한 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의 후임자 선정에는 언약에 얼마나 충실할 것인가를 따져야지 혈연에 얼마나 가까운가를 따져서는 안 된다.

  하지만 부자승계를 한다고 해서 곧바로 언약공동체를 파괴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성서적으로 보더라도 아버지를 계승한 아들들도 언약에 충실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자녀교육은 이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알게 해서 언약공동체의 일원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승계는 교회를 언약공동체라기 보다는 혈연공동체로 전략시킬 위험을 갖게하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에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권위를 중시하는 전통에서 때때로 자식은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지 못하고, 아버지 역시 자식이라는 정에 끌려서 올바른 판단을 못할 염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담임목사의 부자승계는 언약공동체를 파괴할 상당한 위험이 있다고 말할 순 있다.

  

  ⅲ. 부자승계는 대형교회가 갖고 있는 폐단이라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담임목사의 부자승계는 대형교회의 문제이다.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작은 교회에 아들이라도 보내서 섬기게 하는 일에 누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대형교회는 많은 사람이 가려고 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지금에 이루어지고 있는 대형교회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는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대형교회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은 눈물과 고독을 겪어야 했는가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아무나 큰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교회성장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사람을 택해서 그의 일을 감당하게 하신다. 오늘날의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들은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하는 영적인 힘과 결단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영혼에 대한 열정도 많은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들을 존경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대형교회=양적 성장=기업 확장=부도덕한 종교라는 도식이 팽배해있다. 하지만 이런 도식은 잘못이다. 오히려 영혼에 대한 열정=철저한 헌신=교회의 성장= 한국교회에 대한 공헌으로 바꾸어서 생각해야 한다. 물론 열심히 해도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경우에는 교회에는 열심히 없고, 대형교회의 비판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대형교회가 일종의 기업논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효율적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다보면 획일화되기 쉽고, 진정한 성서적인 사랑이 결핍되기 쉽다. 이것이 오래가면 교회는 경직화되고, 관료화되며, 기업화된다. 이런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대형교회들은 이런 가능성에 대해서 항상 경계하며, 신앙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ⅳ. 담임목사의 부자계승은 교회의 잘못된 지도체제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요 구주라고 고백하는 신앙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는 어떤 한 개인에 의해서 좌지우지되어서는 인된다. 하지만 부자계승은 지나친 담임목사의 카리스마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교회의 지도체제를 왜곡시키며, 결과적으로 교회의 본질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대형교회들이 절대적인 카리스마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그런 교회들이 성장하여온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부작용도 많이 있다. 만일 그 한사람의 지도자가 잘못되면 그 공동체 전체가 붕괴되는 위험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 장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도력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 그 공동체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현대사회는 회중이 지도자를 선출하고 그 지도자는 그 지도력을 가지고 그 단체를 이끌어가며, 나중에 그 결과를 다시금 회중이 평가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이런 것이 효과적으로 잘 이루어지면 그것은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독재나 혼란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이런 건전한 지도체제 구축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Ⅴ. 부자승계에 대한 종합적인 정리 및 결론


  ⅰ. 종합적인 정리


  이상에서 필자는 담임목사직의 부자승계에 대한 역사적인 흐름과 찬반양론을 설명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담임목사의 부자승계를 종합적으로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① 담임목사의 부자승계는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최선의 부자승계는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볼 때 리더십의 이양은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어떤 때는 부자승계가 최고의 정당성을 가질 때가 있고, 어떤 때는 민주적인 선출이 최고의 정당성을 가질 때가 있다. 문제는 어떤 것이 그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서 가장 적합한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담임목사의 부자승계를 교리나 신학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제도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② 담임목사의 부자승계 문제는 보다 근원적인 것, 곧 교회의 민주화에서부터 해결되어야 한다.

  사실 진정으로 교회가 민주화가 되어있다면, 그래서 교회의 구성원들이 아들목사를 아버지 목사의 후임으로 선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대형교회에 그런 분위기가 성숙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담임목사의 부자승계보다는 교회의 민주화가 선행되어야 하며. 이것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③ 담임목사의 부자승계문제는 대형교회의 구조적인 문제, 즉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해서 교회가 움직여진다는데 있다.

  개신교는 교회 개척자의 신학, 설교 특성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특성이 담임목사의 개인의 특성에서 벗어나서 교회공동체의 특성으로 바꾸어져야 하며, 이렇게 될 때 교회는 개인의 정신이 아니라 교회공동체의 정신에 의해서 움직여지게 된다. 그래서 담임목사 개인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공동체의 정신으로 이끌러져야 한다. 다시 말하면 평신도의 리더십이 개발되어서 일인목회가 아니라 공동목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교회가 공동목회가 되지 않으면 결국 어떤 형태로든 이런 문제가 유발된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빨리 일인 중심의 목회에서 벗어나서 성직자와 평신도가 함께 목회하는 체제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④ 담임목사의 부자승계문제는 부나 권력의 승계로 이루어지는데 문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승계를 반대하는 이유는 부자승계를 통해서 막대한 권력이 세습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담임목사에게 지나친 권한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소신껏 목회할 수 있도록 리더십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목사직은 근본적으로 성직이다. 성직은 겸손과 청렴히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대형교회의 목사라고 할지라도 이것은 예외가 아니다. 아니 대형 교회의 목사일수록 이것은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ⅱ. 결론


  이상에서 지적한 대로 담임목사의 부자계승은 좋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의 교회가 이것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상황이 되었는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상황에서 이것은 긍정적인 방향보다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기가 쉽다. 현재 한국사회에 만연되어 잇는 혈연주의와 비민주적인 요소들이 담임목사의 부자승계를 나쁜 쪽으로 발전시킬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한국교회의 부자승계를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만일 현재의 한국교회에서 부자승계가 용납된다면 수많은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자신의 아들을 담임으로 세우려고 할 것이며, 그렇게 될 경우 교회는 어쩔 수 없이 담임목사의 의사를 따르게 된다. 이것은 교회에도 불행한 일이요, 한국교회의 지도자가 될 만한 많은 사람들의 기회는 원칙적으로 봉쇄되는 결과에 이를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상황에서는 담임목사의 부자승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