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한경직 목사와 선교

 



들어가는 말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한경직목사라고 말한다. 이것은 한경직 목사가 한국교회의 주류를 잘 대변해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경직목사는 먼저 양극을 배격한다. 그는 교리를 절대화하는 정통주의도 구원의 복음을 상대화하는 자유주의도 배격하며 온건한 복음주의를 지향한다. 필자는 이런 온건한 복음주의가 한국교회의 주류라고 믿으며, 이런 성향을 가장 잘 대변해주고 있는 분이 한경직목사라고 생각한다.

  한국교회가 이런 복음주의를 표방한 것은 초기선교시대부터이다. 1905 년 한국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이 모여서 협의체를 구성할 때 그들의 공식적인 명칭이 재한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 (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이었다. 그리고 이 연합회의 가장 큰 관심은 한국의 복음화였다. 즉 이 연합회는 전도를 위해서 연합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주의의 근본정신과 일치한다. 복음주의의 가장 큰 관심은 복음전도이다.

  이런 복음주의적인 선교정신을 가장 잘 표현해주고 있는 분이 한경직목사이다. 한경직목사는 그가 시무하던 영락교회의 가장 중요한 지표를 "선교 , 교육 , 봉사"로 정했으며, 그 중에서도 선교를 제일 첫째로 삼았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교육과 봉사도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수단이었다. 또한 한국교회에서도 그가 주로 참여한 일들은 전도에 관한 일이다 . 해방 후 빌리그래함 전도집회에서 통역한 것을 필두로 해서 한국교회의 수많은 전도집회들이 그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의 가장 큰 관심은 민족의 복음화였다. 이런 점에서 선교는 한경직목사를 이해하는 중심단어라고 말할 수 있다.

  필자에게 주어진 제목은 "한경직목사와 선교"이다. 이글에서 선교는 국내전도와 해외선교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될 것이다. 필자는 이글에서 한경직목사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그가 어떻게 선교를 했으며, 선교에 대한 그의 생각은 무엇인지, 또한 그가 선교를 통해서 한국교회에 공헌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Ⅰ. 한경직 목사의 초기생애


  한경직목사는 초기 생애는 두 번의 중요한 전기가 있다. 한 번은 1925 년 평양 숭실대학을 마치고 방위량선교사와 함께 황해도 구미포의 해변에 갔을 때였다. 이때 그는 장래 일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 헌신해야겠다는 분명한 소명감을 깨닫게 되었다. 두 번째는 미국에서 프린스톤신학교를 졸업하고 박사과정을 진학하려고 할 때 결핵 2기라는 선고를 받고 요양원에 있을 때였다. 그는 요양원에서 세상적인 명예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조국을 위해서 일할 것을 재헌신하였다.

  그러나 한경직목사가 본격적인 목회자의 길을 가게된 것은 아니었다. 귀국 후 그는 대학의 강단에 서고 싶었고 숭실대학에서 교섭이 왔었다. 하지만 일본당국은 사상 문제로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목회자의 길을 결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신의주 제 2교회의 목회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목회자로 복음전도자로서의 길을 걸어가게 되였다. 하지만 이것도 순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제가 사상적인 문제로 강단에 서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교회를 떠나 보린원이라는 고아원을 만들어 사회사업을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경직목사에게 교육자 ( 교육 ), 목회자( 선교 ), 사회사업가( 봉사 )로서의 세 가지 면모를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생애의 절정은 역시 목회자로서 복음전도자로서의 활동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Ⅱ. 영락교회를 통한 전도활동


  한경직목사가 한국교회의 중심무대에 서게 된 것은 해방 후 그가 월남하여 영락교회를 세우고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한국교회의 복음화에 공헌하기 시작부터이다. 영락교회의 원래 명칭은 베다니전도교회였다. 교회의 이름을 전도교회라고 붙인 것은 영락교회가 기존의 교회구조를 그대로 답습하기 보다는 좀더 적극적으로 선교지향적인 교회를 만들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ⅰ. 영락교회의 슬럼선교


   실지로 초기 영락교회는 전도에 매우 열심이었다. 영락교회 주변 묵정동에는 유곽지대가 있는데 영락교회 청년회는 이곳을 집중전도대상으로 정하고, "유곽은 지옥의 첫 동네요, 창기는 그 속에 있는 악마니라"고 적은 전도지를 만들어서 배포하였다.1) 이것은 도시의 슬럼지역을 복음으로 새롭게 만들려는 운동이었다.


  ⅱ. 영락교회 청년들의 구국선교


  한경직목사는 전도를 통해서 개인을 구원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나라를 구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해방 후 남한에도 공산당들이 많이 있었고, 기독교인들 가운데에도 기독교 동맹을 만들어 가지고 공산당과 협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북에서 피난 온 이북 기독교인들의 눈에는 이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그래서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서북청년회를 만들어서 여기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 이중 흥미 있는 일은 한경직목사와 서북청년회들이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과 함께 전도활동을 나섰다 . 1950년 1월과 2월에 걸쳐서 공비가 출현하는 전북 남원에 들어가서 목숨을 건 전도활동을 하였다. 한경직목사에겐 공산주의를 막는 가장 분명한 길은 복음전도였다 .2)

  전도를 통한 사회에의 공헌은 한경직목사가 영락교회 창립 1주년 기념설교에 잘 나타나 있다. "교회를 통하여 개인의 구원과 중생이 있다. 구원받고 중생한 개인을 통하여 사회적인 구원과 변혁을 이루는 것이다. ---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국기 ( 國基 )의 초석이 된다." 3) 한경직목사에게 전도는 기독교구국운동이었다.


  ⅲ. 영락교회의 개척선교


   영락교회는 개척교회에도 열심이었다. 영락교회는 개척된 지 1년도 안 되어서 인천지역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원래 인천은 감리교지역인데 여기에 영락교회가 처음으로 교회를 개척한 것이다. 이것이 인천 제일교회이다. 그 후 영락교회는 계속 개척교회의 설립에 힘을 기울여 왔고 1982 년까지 약 200여 교회를 개척하였다.


  ⅳ. 영락교회의 해외선교


  영락교회는 해외선교에도 노력하였다. 전쟁 직후 개교회가 외국에 선교사를 보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영락교회는 1955년 최찬영목사 가정을 태국에 파송하였다. 그 후 계속 선교에 관한 관심은 높아져서 1965 년 통합측 장로교회에서 태국에 선교사를 2명 파송할 때 영락교회가 단독으로 한 가족의 선교비 일체를 책임지기도 하였다. 1990년 현재로는 전 세계 21 나라에 29 가정을 파송하고 있다.


 

Ⅲ. 한경직 목사와 특수선교


  한경직목사는 영락교회의 담임목사이지만 그의 행동반경은 개교회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그는 한국 최대교회의 담임목사라는 분명한 기반을 전제로 보다 다양한 선교활동을 벌였다.


  ⅰ. 학원선교


  한경직목사는 원래 교육자로서 출발하였다. 유학에서 돌아 왔을 때 그는 숭인상업학교의 교사로서 학원선교를 시작했다. 해방 후에 그가 힘쓴 것 가운데 하나가 교육이었다. 대광중고등학교, 영락중학교, 영락여자상업학교, 영락여자 신학교 등을 설립하였으며, 숭실대학교를 비롯하여 수많은 학교의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한경직목사는 이 모든 것을 복음을 전하기 위한 기회로 삼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그는 단순한 교육자가 아니라 학원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전하기를 원하는 복음전도자였다.


  ⅱ. 군인선교


  한경직목사가 특별히 관심을 가진 분야가 군선교였다 . 한경직목사는 선교를 위한 가장 좋은 황금어장이 군대라고 생각했다. 영락교회의 도움을 받아서 그는 군목들의 생활을 지원하고, 예배당 신축을 보조하고, 그 다음에는 대중집회를 개최하여 주었다. 한경직목사가 군선교에 관심을 쏟는 이유는 그의 국가관 때문이기도 하다. 공산주의의 위협 아래서 조국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일은 군인들이 기독교정신으로 무장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한경직목사는 이일을 보다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 1972년 군복음화 후원회를 조직하여, 군목에게 오토바이 지원, 군인교회 건축지 원, 집회지원, 합동세례식 거행, 성경 보급 등 여러 가지 일들을 주도하였다.4)

  한경직목사가 군복음화 후원회를 조직하여 열심히 일을 하려고 할 때에 박정희 정부는 유신헌법을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유신헌법 반대에 서명했다. 이때 한경직목사는 서명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다. 여기에 대해서 한경직목사는 일차적으로 그런 서명운동이 사회의 불안을 가중 시켜 공산주의를 이롭게 하기 때문에 반대하였지만 또 다른 측면은 군복음화 사역을 계속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한경직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5)


   내가 제일 원하는 것은 민족복음화가 아니 갔소. 그때 군인전도할 때인데, 내가  

   이거 서 명운동하고 내 이름 먼저 써 놓으면 군인전도의 길이 막히거든. 어느 사

   단장이 감히 나를 오라고 그러갔소? 그러니 전도해야할 목사로서 제1되는 사명

   을 버리고까지 정치 운동이나 사회운동에는 참여하지 않는다는 그 원칙이 서 있

   었시오. 그래 내 보류했거든.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목사에게는 여러 가지 사명이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전도이다. 이것이 어떤 것 보다 우선될 수 없으며, 이것에 방해가 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경직목사는 근본적으로 복음전도자이지 사회운동가가 아니었다.


  ⅲ . 산업선교


   영락교회는 1960년대 후반부터 산업선교에도 관심을 가졌다. 60 년대 초 산업화가 가속되면서 도시 근로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고, 한경직목사가 여기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영락교회의 산업선교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것은 산업선교의 실무자가 영락교회의 복음주의 노선과 달랐기 때문이다. 영락교회는 산업전도를 위해 영등포에 목사 한사람을 파송하였다. 그런데 그는 전도보다는 노동운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한경직목사는 산업전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6)


   공장 노동자들 곧 하나님을 모르는 부녀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그리스도의 사

   랑을 가르쳐야할 선교가 방향이 변하여 좀 불만이 있으면 동맹도 하고, 파업을 하

   라고 선동하는 극단적인 노동운동이 되고 말았어요. --- 그래서 실업계에서는

   산업전도하면 질색 이야요. 동맹파업이나 일으킨다고. 이렇게 되어 당국으로부터

   영락교회는 오해를 받게 되었고, 자연 우리 산업전도는 제동이 결리고 말았습니

   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한 한경직목사의 선교이해를 알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전도란 철저한 복음전도 이었다. 하지만 이것 외에도 한경직목사가 주로 상대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실업인들이며, 한경직목사가 이들로부터 많은 후원을 얻고 있다. 따라서 노동문제를 보는 시각이 실업가들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어쨌든 60 년대와 70 년대 격동의 세윌 속에서 한경직목사는 진보적인 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ⅳ. 기타 특수선교


  시대는 변하고, 전도의 방법도 변화해야한다. 이런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어 한경직목사의 전도방법도 다양하였다. 한경직목사는 방송선교에 힘을 썼다. 1959 년부터 기독교 방송에 소망의 시간을 통하여 방송선교를 시작한 이래 방송매체를 통한 선교는 계속되었고, 이것은 영락교회와 한경직목사를 널리 알리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문서선교운동도 주목할만하였다. 성경을 보급하고, 전도지를 배포하는 일에 힘을 썼다. 특별히 영락교화는 한경직목사가 쓴 "기독교란 무엇인가 ? "라는 전도 소책자를 매년 만부씩 많은 사람들에게 배포하였다.

  또한 영락교회는 병원선교에도 앞장섰다 . 특별히 여전도회가 중심이 되어 서울의 중요한 병원을 다니면서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사람들을 인도하였다. 병상이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장소라는 속담처럼 병원선교는 많은 열매를 맺었다.7)


 

Ⅳ. 한경직목사와 세계적인 부흥운동


  한경직목사는 일찍이 외국 유학을 통하여 국제적인 교류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특별히 그가 세계적인 복음주의 지도자들과 교분을 맺음으로서 한국교회를 세계복음주의의 흐름 가운데 위치하게 만들었다. 그는 복음전도를 위하여 국경을 뛰어넘어 협력하였으며, 또한 자신도 국경을 넘어서서 세계무대에서 활동하였다.

  

  ⅰ. 한경직과 밥 피얼스


 한경직목사가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에 큰 공헌을 한 것은 미국 선교사 밥 피얼스와 (Bob Pierce)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피얼스는 해방 후 1949년 한국에 처음으로 왔다. 당시 영락교회의 협동선교사로 있던 옥호열선교사의 주선으로 피얼스와 한경직 목사는 선교동역자가 되어 한국의 복음화와 사회사업을 위하여 일했다. 그 후 피얼스는 6차례에 걸쳐서 한국에 내한 하였는데 이 때마다 한경직목사와 한 팀이 되어서 전도집회를 열었으며, 그 결과로 수만 명의 결신자를 얻었다.8) 이것이 아마도 해방이후 한국최초의 대중집회였으며, 이 집회가 성공적으로 이끌어지면서 한경직 목사가 한국교회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커졌다. 또한 피얼스는 전도의 지름길은 교역자들이 새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여러 해 동안 영락교회에서 교역자 수양회를 개최하였다.

  원래 나사렛교회 출신인 피얼스는 전도와 사회봉사를 조화시킨 사람이었다. 1947 년 중국에서 집회를 인도해 달라고 요청받은 피얼스는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 불쌍한 고아를 보게 되었고, 고아원에 대해서 관심이 생겼다. 그러나 중국의 공산화로 한국을 선교지로 삼은 피얼스는 한국 전란의 혼돈을 보며,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서 일하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그는 1950년 선명회 (World Vision) 을 세우게 되었다.9) 이 선명회를 통해서 한국의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새로운 삶을 얻었다. 선명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기독교자선단체이다.

  한경직목사는 은퇴 후에 피얼스 박사의 도움으로 아세아교회진흥원을 시작하였다. 동남아가 거의 불교권이거나 회교권인 것을 생각하면 한국교회의 아세아선교에 대한 사명은 매우 크다. 한경직목사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아세아교회진흥원을 세웠다.10)

  피얼스와 한경직 목사는 단지 한국에서만 협력한 것이 아니고 세계선교를 위해서도 함께 협력하였다. 피얼스는 자신의 전도집회의 강사로 한경직목사를 초청하였고, 한경직목사는 피얼스와 함께 전 세계를 누비며 복음을 전했다. 특별히 피얼스와 한경직목사의 관계는 돈독하여서 피얼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한경직목사는 그의 장례식 설교자로 초청을 받게 되었다.11)


  ⅱ . 한경직 목사와 빌리 그래함


  한국이 아직 전란 중인 l952 년 부산에서는 피얼스와 빌리그래함이 연합하여 대 전도집회를 열었고, 그 후 이집회가 서울에서도 열렸다 . 이것이 빌리그래함의 첫 번째 방한이었다. 복음주의적인 침례교인인 빌리그래함은 한국민의 상처들 복음으로 치유하려고 하였다. 그 후 1956년에 다시 방한한 빌리그래함은 서울운동장에서 8 만 명 이상이 모인 집회를 인도하였고, 이때 빌리그래함의 설교를 통역한 사람이 한경직목사이다.

  이런 것이 계기가 되어 한경직목사는 빌리그래함의 복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진보적인 교단의 선교가 선교의 모라토리움을 선언하여 세계선교의 위기가 확산되어질 때 빌리그래함은 1966년 베를린에서 세계전도대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 피얼스도 적극적으로 참여 하고 있었다. 이 대회에서 복음주의자들은 종교적 다원주의를 반대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유일한 소망임을 다시 한 번 천명하였다.12) 한경직목사는 많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함께 이 대회에 참여하였다 . 이것은 한경직목사가 복음주의 라인에 서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한경직목사가 특별히 베를린대회에서 배운 것은 전도의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 강사가 전도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있는데 "첫째는 물고기가 많은 곳에 가야하고, 둘째는 장비가 좋아야 하고, 셋째는 어부를 잘 훈련시켜야한다."는 것이다. 한경직목사는 이  강연을 통해서 선교에 대한 새로운 전략을 세워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첫째 물고가기 많은 곳은 군대, 학교, 산업현장이며, 좋은 장비란 방송, 문서 등 매스컴이며, 훈련은 전도자 양성인 것이다. 이것은 한경직목사의 생애를 통해서 잘 나타난다.13)

  한경직목사가 한국교회의 중심에 서있다는 절정의 모습은 아마도 1973 년의 빌리그래함의 3차 방문 때일 것이다. 한경직목사는 빌리그래함 한국전도 대회 준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한국교회를 대표하였다. 이 대회는 " 5 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를 내 걸고, 빌리그래함 전도팀의 계획아래 조직적으로 전도활동을 벌여 마지막 날에는 115 만 명이 참석하는 성공적인 집회가 되었다.

  한경직목사는 세계적인 복음주의자들과의 연대를 통하여 한국의 복음주의를 보다 깊게 뿌리를 내리게 만들었다. 또한 이런 것들을 통하여 세계 교회 속에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빌리그래함은 한경직목사를 자신의 전도집회의 강사로 초청하여 홍콩, 대만, 미국의 달라스 같은 곳에서 집회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결론 : 한경직목사와 한국교회의 복음주의 연합운동


  이상에서 우리는 한경직목사의 선교활동과 선교관을 살펴보았다. 한경직목사는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기존교회가 선교하기 힘든 지역을 찾아서 열심히 선교하였다. 항상 영락교회는 이런 활동을 인적, 물적으로 후원하여 주었다. 이렇게 해서 열매를 맺은 것이 학원선교와 군선교이다. 뿐만 아니랴 한경직목사는 세계적인 복음지도자들과 힘을 합하여 한국의 복음화와 세계의 복음화에 힘을 썼다. 한경직목사는 훌륭한 복음전도자였다.

  한경직목사에게 있어서 전도는 제일의 사명이었다. 어떤 것도 전도에 방해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사회봉사나 정치활동도 이 범주를 넘어서면 안 된다. 한경직목사가 이렇게 전도를 강조한 것은 전도를 통하여 진정으로 나라가 새로워지며, 인류가 소망을 얻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전도가 애국하는 가장 중요한 지름길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한경직목사와 연합운동이다. 이미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출발점은 복음전도였다. 이것을 위해서 교회는 뭉쳤고, 함께 일했다. 이것이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뿌리이다. 이 연합운동의 결실이 1907년 대 부흥운동이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60년대 70 년대를 지나오면서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은 두 부류로 나누어졌다. 하나는 NCC 들 중심으로 한 연합운동으로 민주화운동을 위한 연합운동이었다. 이들은 주로 진보적인 신학을 바탕으로 복음화 보다는 인간화를 중심과제로 내세웠다. 이 운동이 한국교회의 민주화에 공헌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복음전도의 중요성을 간과한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이런 연합운동이 교회의 폭 넓은 지지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다른 하나는 한경직목사를 중심으로 복음전도를 위한 연합운동이다. 한경직목사는 수많은 연합운동의 대표로 일했지만 거의 대부분이 전도를 위한 것이었다. 이것을 위하여 교파를 초월하여 한경직목사를 중심으로 뭉쳐서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이 연합운동에 열심히 참여하였다. 전자가 소수의 엘리트들을 중심요로 한 운동이라면 후자는 보다 대중적인 지지를 얻은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운동이 사회적인 관심이 적었다는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교회의 성장은 없을 것이다.

  2000년을 맞이하면서 한국교회는 다시 한번 복음전도에 총력을 기울이는 연합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부흥에 대한 희망을 상실해 가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더욱 복음전도에 힘을 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복음전도를 통하여 한국사회를 새롭게 변화시켜야 할 것이며, 세계선교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원래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이었고, 이것이 한경직목사를 중심으로 한 전국복음화운동이었다. 이제 다시 한 번 한국교회가 힘을 합하여 복음전도에 나서야 할 것이다 - 이것이 한경직목사가 바라고 소원하던 바일 것이다.


   1. 김병희 편저 , [ 한경직 목사 ] ( 서울 : 규장문화사 , 1982), 58.

   2. 한경직목사 기념사업회 , [ 한경직목사 성역 58 주년 ] ( 서울 : 영락교회 , 1986), 44-46.

   3. 한경직 , [ 한경직설교집 ] 전 11 권 (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 1971), I: 43.

   4. “군복음화후원회.” [기독교대백과사전], 제2권, 452:[한경직목사 성역 50년], 73-76.

   5. 김병희 편저, [한경직목사], 89.

   6. 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77.

   7. 대한예수교 장로회 영락교회, [ 영락교회 50 년사 ] ( 서울 : 영락교회, 1998), 208-209.

   8. "복음화운동, 한국의 , " [ 한국기독교대백과사전 ] 7 권 , 1023.

   9. 루스 터커, [ 선교사열전 j ( 서울 :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 l991), 617.

 10.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 한경직목사 성역 50 년 ], 76-77.

 11. 이윤구, "한경직목사님께서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한경직기념관 헌당세미나 자료집](숭실대학교교목실 , 1998), 39.

 12. 베를린대회의 성격에 대해서는 아더 잔스톤 , 엄홍빈 역 [ 세계복음화를 위한 투쟁 ] ( 서울: 성광 문화사 , 1983), 156-226 을 참고하시오.

 13. 김병희, [ 한경직목사 ], 7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