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21C 신학의 현실과 실천과제

〈 한국교회의 신학과 목회의 접목 〉



  Ⅰ. 신학, 목회, 목회자


   ⅰ. 신학이란 말은 신의 학이라는 뜻이다.


   희랍어의 데오스 (theos) 라는 말과 로고스 (logos)란 말의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신학이란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신의’학문이라는 뜻과, ‘신에 관한’학문이라는 뜻이다. 전자는 신의 주격 성을 강조한 말이 고, 후자는 신이 신학의 목적격이 된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이해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신학이 신의 학문이라는 이해에는 신학을 절대화하는 위험이 따른다. 과거의 어떤 사람이 작성한 신학의 내용을 절대화하는 것은 사람이 작성한 신학 체계를 우상화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사상도 절대적일 수는 없다. 어느 사상을 절대화하면 십계명 가운데 제2계명을 어기게 된다. 신학이 사람의 학문이라는 생각에도 위협은 따른다. 신학을 신에 관한 인간의 학문이라고만 생각할 때 신학을 지나치게 상대화하게 된다. 신학을 단순한 인간의 이성과 사유의 소산물로만 이해하면 신학의 무게와 과거의 전통을 평가절하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 급진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과 세속화 신학에서 나타나는 경향이다. 여기에서 신학의 본질적인 가치는 부정된다.

   신학은 인간이 인간의 노력으로 인간의 언어와 논리 구조에 따라 형성한 학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학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창조자이신 하나님에 관하여 인간의 응답을 통하여 형성되는 하나의 신앙고백으로서의 학문이다. 그리고 신학의 최종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람에게 전달해서 인류가 구원받도록 하는데 있다. 어떻게 교회에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며, 교회에 모여드는 신자들을 잘 가르치며 그들이 직면하는 여러 가지 삶의 문제를 풀어 나가도록 도와주는 목회에 신학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ⅱ. 그러면 목회란 무엇인가?


   목회는 교회를 통하여 이 땅 위에서 하나님께서 하기를 원하시는 모든 구원 사역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는 하나님의 계시와 기독교회의 전통에 근거해야 하며, 모든 그리스도인으로 이루어진 신앙 공동체인 교회가 목회의 주체가 되어야 하고, 교회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이 세상 속에 구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① 그러면 교회란 무엇인가 ?

   교회는 한 마디로 생명체다.

   첫째로 교회는 진리의 말씀을 가진 생명체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한 순간도 정지나 정체가 있을 수 없다. 작은 겨자씨가 위대한 생명력을 가지고 자라듯이 교회에 주어진 복음은 푸르고 장엄하게 또 권위 있게 자라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교회는 구원의 말씀을 가진 생명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한 순간도 죄와 더불어 타협할 수 없고, 세상의 악의 세력에 맡겨버릴 수 없다. 거룩한 부름을 받은 자들은 피를 흘리기 까지 죄와 더불어 싸워야 하고 복음이 주는 의와 평화와 행복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교회는 선교의 말씀을 가진 생명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한 순간도 선교의 의무를 중단할 수 없고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다. 교회에는 혼돈스러운 세상을 복음 아래 굴복시키고 교만한 인간성을 복음의 빛 아래 정복시켜서 십자가의 주님께서 역사와 세계의 주로 높임을 받으시도록 하는 사명이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ⅲ. 목회자란 무엇인가?


   목회자는 목자가 양을 치는 것 같이 교회에서 신자들을 진리로 가르치며 기르는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요한복음 21:15-17)고 하셨고, “나는 선한 목자다”( 요한복음10:11)고 하셨다. 바울도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성령이 당신들을 그들 가운데 감독으로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그 교회를 먹이게 하셨다”(사도행전20:28) 고 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한 마디로 교회를 섬기는 자다.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심고 가꾸고 그럼으로써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사람이다. 목회자의 책임이 무겁고도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목회자는 영원에 속한 일과 시간에 속한 일, 위에 속한 일과 땅에 속한 일,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참된 것과 거짓된 것, 영의 일과 육의 일,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 구원과 멸망 등을 분명하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하며, 그 신분과 위치를 바로 파악해야 하며, 그 사명과 임무를 바로 실천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목회자는 자신의 신분, 위치, 사명 등을 성서적으로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철저하게 규명하고 연구해야 한다.

이런 과제는 다른 면으로 보면 다음과 같은 실체적인 문체와 연관되어 있다. 선교의 문제, 예배의 문제, 설교의 문제, 심방과 상담의 문제, 교회 행정의 문제, 교회 재정의 문제, 교계의 문제, 대 사회 문제 등이다. 이런 문제들은 교회의 생명과 직접 또는 간접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들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 의해서만 연구 될 것이 아니라 부름 받은 목회자 전체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모든 목회자들이 이 과제들을 공동으로 연구해야 하며 또 그 연구 결과를 공동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앞날은 현재의 목회자들이 가진 지도력 여하에 따라서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리스도를 이 땅에서 욕되게 할 수도 있고 또 영광을 받게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막중한 일을 위해서는 소명을 받은 목회자들의 자질이 끊임없이 향상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지난 한 세기동안 ‘성장 우선’이라는 목회 구도 아래에서 눈부시게 발전 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 제1세기를 정리하고 제2세기에 접어든 한국 교회는 스스로 반성할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가장 큰 것은 외적 성장에 비하여 내적이고 질적인 성장이 빈약한 점이다. 이것은 지난 날 한국 교회가 올바른 성경이해와 건전한 신학 기반위에서 훈련받지 못한 때문이며 이로 인해서 신자들의 신앙 고백이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 (1892.6.21~1971.6.1)」 교수의 표현대로 종교와 신앙의 수직적인 차원과 윤리와 생활의 수평적인 차원이 균형 잡히지 못한 것이다. 지난날의 한국 교회는 성장에 걸맞게 종교와 문화, 신앙과 행위, 정신과 물질을 건전하게 조화시키지 못했다. 기독교는 1,200 만의 신도수를 자랑하지만 그 수에 맞는 영향력은 없다. 문화적인 뿌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신앙의 의식화 작업은 잘 되어 있으나 신앙의 생활화 작업은 불충분하다는 말이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인 됨’과 ‘그리스도인의 삶’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것을 오늘의 강좌 주제와 연결시키면 신학과 목회가 조화되지 못한 것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Ⅱ. 신학은 목회와 무관한가?


1975년 3월, 필자가 신촌교회에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한 지 한달쯤 되는 어느 주일 밤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신자들과 인사를 나눌 때 교회의 젊은 집사 한 사람이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목사님, 오늘 저녁 메시지를 통해서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설교였습니다. 그런데 꼭 한 가지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앞으로 설교하실 때 ‘신학적’이란 용어는 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 말은 목사님께 드리는 저의 간곡한 부탁입니다”

나는 그 분에게, 오늘 저녁 설교는 신학적인 근거에서 한 것인데 만일 신학적이라는 말을 빼면 그 메시지는 중심을 잃게 됩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 분은 다시 내게 간곡하게 말했다. “도대체 오늘날 한국 교회 강단에서 설교하는 목사님들이 신학적이니 교육적이니 하는 말들을 자주 사용하기 때문에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사님만은 그런 용어들일랑 설교에서 완전히 빼버리시고 순수하게 은혜로운 말씀만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젊은 집사의 충고를 받으면서 이 사람의 말에서 한국교회 현실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었다. 이 젊은 집사의 말에는 우리나라 교회에서 신학이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 벌써 들어있다. 즉 한국교회에서는 아직도 신학이 잘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구성원은 대체로 신학자, 목회자, 일반 신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까지도 신학만은 모든 신도와 모든 교회를 위한 것이 못되고 신학자들만의 독점물이라는 인상을 준다. 일부 교회를 제외하고는 한국교회에 신학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까지 의심할 정도이다. 신자와 신학의 관계는 제쳐놓고라도 목회자와 신학의 거리마져도 너무도 멀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신학이 교회 전체의 신학이 못되고 신학교 강의실에서만 가르치는 죽은 신학으로 끝나는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신학적 이론이 너무 추상적이고 고답적이 어서 신앙과 삶이 현장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목회자나 일반 신도를 사이에서도 신학에는 마치 하나님 말씀을 상대화하고 기독교 신앙을 파괴시키거나 약화시키는 위험성이 있다고 배척하는 분위기마저 있어서 신학과 목회를 유리시키는 이유가 되고 있다.

은혜가 아무리 매 주일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린다고 해도 그것을 뒷받침하는 신학적 근거가 없다면 그 은혜는 허공을 치고 말 것이며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또한 만일 신학이 강의실의 신학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죽은 신학이 될 것이며 신도들의 생활 현장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한국 교회의 깊고 건전한 신학을 배경으로 하는 목회가 실현되고, 모든 신도들이 신앙고백이 확실한 신학에 뿌리를 내리도록 힘 써야 할 것이다.


 

Ⅲ. 신학과 목회의 연관성


신학과 목회의 연관성을 누구보다도 가장 깊이 있게 다룬 신학자는 「칼 바르트(Karl Barth 1886.5.10~1968.12.10)」 다. 그는 신학을 “교회의 기능”이라고 보았다. 즉 신학은 교회를 떠나서 성립되는 학문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독교 신앙의 기능이며 반성이라고 본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신학은 우선 교회가 선포하는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은 일반 학문과는 달리 신앙을 전제로 한 학문이다.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진술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의 심판 아래 있고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능력으로 유지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바르트」는 신학과 교회의 연관성을 이와 같이 강조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신학을 공허한 이론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학문으로 세웠으며 또 한편으로는 교회가 안일한 체재 유지를 목표로 삼는 제도가 아니라 신학적 반성과 봉사의 실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선포하는 신앙의 공동체임을 천명했다.

바른 신학과 바른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바르트」의 확신 뒤에는 그 당시 상황 속에서 표출된 위기의식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의 스승이었던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5.7. ~ 1930.6.10.)」 을 비롯한 유수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유럽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틀어가 19l4년에 유럽의 전쟁을 지지 하고 나서는 것을 보면 「바르트」는 잘못된 신학의 위기를 자각했다. 인간의 이성과 철학적 반성 위에 세워진 신학은 현대의 위기 앞에서 더 이상 쓸모없게 되는 것을 보았다. 인간 이성에 의해 인간 사회와 문명이 진보한다는 자유주의의 천진한 낙관주의는 제1 차 세계대전과 더불어 무너져 버렸다. 이제는 교회에서 선포하는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신학만이 이 위기를 타개하고 극복할 수 있다고 「바르트」는 굳게 믿었다. 또 한편 「바르트」는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신학의 도움이 없이는 교회는 무기력하게 현실과 타협하고 만다는 것을 「히틀러(Adolf Hitler 1889.4.20~1945.4.30

)」 치하에서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 때 독일교회는 600 여만 명의 유대인 학살에도 침묵했고 「히틀러」의 침략 정책에도 동조하고 나섰다. 교회의 위기였다. 교회가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개혁하지 않으면 무기력한 제도가 되어 버리든가 타락해 버린다.

교회는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반성하고 개혁하는 신학을 요구한다. 신학은 이성에 근거한 학문이 아니라 교회의 학문, 곧 교회가 선포하는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학문이어야 한다는 것이 「바르트」의 확신이었다. 「바르트」의 이러한 확신에 찬 신학과 목회의 연관성을 오늘의 한국 교회에 어떻게 구체화시킬 수 있을까가 우리의 과제다.


 

Ⅳ. 신학과 목회의 만남


한국 교회의 신학과 목회의 위기는 다양한 신학적 조류들이 창조적 대화의 장을 포기하고 양극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현대 사회는 다원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신학에도 교회에도 여러 가지 분파가 있게 마련이며 자연히 다양한 입장들이 공존하게 된다. 다원성에는 창조적 다원성과 혼란을 야기하는 다원성이 있는데 한국신학과 목회의 현주소는 다분히 후자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근본주의 또는 보수주의는 다원성 자체를 거부하고 획일적 입장을 고수하려고 하며 또한 자유주의적인 진보주의도 자기들이 주장하는 일방적 입장을 고수하기는 마찬가지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여러 가지 분파나 신학의 다원적 현상은 배타적 갈동 구조를 갖고 있다. 서로가 상대방이 입장을 포기해야만 대화할 수 있는 배타적이며 정복적인 심리를 가지고 있다. 이런 갈등 구조는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위기 상황이다.

배타적 획일주의나 대화 거부적인 진보주의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종종 자기 교파 교리를 절대화하고 성경과 동일시하며 자기 교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일방성을 간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런 점들이 결국 교파 분열을 초래하는 것을 한국 교회는 역사 가운데 많이 경험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지체들의 전체적인 연합을 위해서 신학의 창조적인 다원성을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창조적인 다원성이란 우선 자기의 특징을 포기하지 않고 심화시키는 다원성을 말한다. 보수주의는 보수주의의 특성을 더욱 심화시켜 최선의 장점을 창조해가며, 진보주의는 진보주의대로 예언자적 참여의 전통을 심화시키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상대방의 독특한 특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창조적 다원성은 시작된다.

창조적 다원성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또한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사이에 있는 공통점을 확보해야 한다. 예를 들면,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은 보수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예언자들은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향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소리로 야훼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도록 백성을 촉구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인 출발점을 가졌다. 현재 한국에서 진보주의는 매스컴을 장악하고 있고, 보수주의는 교회 강단을 주요 매체로 삼고 있다. 옛날의 선지자와 예언자들처럼 공통점을 찾아 상대방의 장점을 인정하고 자신들의 취약점을 보완한다면 창조적 다원성을 정착시킬 수 있을 것이다.

창조적 다원성을 위해서 서로를 비판하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만일 진보주의가 지나치게 19세기 유럽의 자유주의와 같이 윤리적이며 합리적인 기독교를 지향한다거나 「포이에르바하 (Ludwig Andreaes Feuerbach1804.7.28-1872.9.13)」와 같이 신학을 인간학으로 발전시킨다면 보수주의는 이 점을 냉철하게 비판하고 바 로 잡아야 할 것이다. 또한 보수주의가 지나치게 성경의 내용을 축소하며 한쪽만을 절대화 한다면 진보주의는 전체적인 시각에서 이를 비판해야 하며 역사의 현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해야 할 것이다.

몰트만(Jurgen Moltmann 1926.4.8. ~)」 교수는 자신의 저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정체성 (Identity) 과 연관성 (Relevance) 을 어떻게 균형 있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것이 현대 신학이 당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복음적이며 사도적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교회의 사명을 정체성이라고 한다면 현대인의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문화적 상황에서 제기되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해결하려는 목회의 실천 (Praxis) 을 연관성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현대 교회가 정체성의 문제에만 일방적으로 집착하면 연관성이 약해지고 반면에 연관성의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이면 정체성이 약해진다. 보수주의는 정체성을 강조함으로써, 그리고 반면에 진보주의는 연관성을 강조함으로써 각각 한국 교회 신학의 폭을 넓혀서 목회와 신학을 한 테두리 안에서 만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Ⅴ. 맺는 말


신학이 목회의 주체인 교회와 만나서 깊은 연관성을 가질 때 산 신학이 되듯이, 교회도 삶의 현장에 과감하게 뛰어들어 성속의 벽을 넘어 역사와 만날 때 생동력있는 교회가 될 것이다. 앞으로 1년 후면 서기 2천년을 맞게 된다. 인류의 관심의 초점은 2천년이란 수 자에 모아져 있다. Millenium 이란 낱말이 뜻하듯이 2천년을 기점으로 세계는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번영과 평화의 시대가 될까, 아니면 인류의 종말이 오고 말 것인가 ?

21 세기를 눈앞에 두고 최근에 기업들은 미래 사회에서는 “인류만이 살아 남는다.”는 적자생존의 이론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부는 세계화를 기조로 하여 세계적 국가를 지향하고 있다. 이런 세기적인 전환기에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달라져야 할 것인가? 이는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미래지향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지난날의 경이적인 성장을 바탕으로 다시 한 번 도약하여 제2의 부흥기를 맞아 세계적인 교회로 미래 사회를 주도할 교회로 탈바꿈하려는 것이 한국 교회의 꿈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이런 지표를 세워 미래지향적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할 것이다. 물론 교회의 개방이란 세상의 빛깔과 같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넓은 바깥 세계의 공기를 차단하고 좁은 집안 공기만 마시고 살면 건강을 유지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세상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여 변하고 있다. 미래 학자 「토플러(Alvin Toffler, 1928~)」는 “제3의 물결”에서 제1의 물결인 농업 혁명을 완수 하는 데는 수천 년이 걸렸고 제2의 물결인 산업 혁명은 삼백년 만에 끝났다고 했다. 그리고 제3의 물결인 정보 혁명 시대는 앞으로 수십 년 안에 끝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이런 때에 교회만이 내 집 지키는데 안주할 수는 없다.

나는 첫 번째 신학적으로는 우리의 전통적인 신학과 신앙의 정체성을 굳게 지키는 복음적인 노선을 가야 하지만 목회의 주체인 교회는 넓게 문을 여는 개방적인 방향을 설정해야 할 것이다. 신학은 변함없는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학문이며 우리 신앙의 대상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도서 1장4절에 보면“한 시대는 가고 한 시대는 오되 땅은 영원하다.”고 하였고 또 베드로전서 1장24~25절에는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고 했다.

그러나 영원불변하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는 이 역사를 그대로 보존하지 않으시고 항상 새롭게 하신다. 따라서 인간의 가치관도 달라지게 하신다. 교회는 언제나 그 본질적인 성격상 전환기에 서있다. 교회는 동터 오르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가 서있는 역사적인 현실과의 긴장 속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궁극적인 목표와 소망을 이 세상 저 너머에 두어야 하지만 이 소망의 초점은 바로 오늘의 삶 속에 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권하고 있다.(빌립보서2:12, 고린도후서 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