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하나가 되는 길



 


Ⅰ.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두 가지 유언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하나는 “하나가 되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요한복음17:11).” 이 기도는 지상생활을 거의 마치려는 무렵에 드린 주님의 기도의 제목이다.

  주님께서 이런 기도를 드리게 된 이유는 인간 세계의 높은 담을 헐고 화해의 길을 열기 위해서다. 주님의 이런 기도가 성취되는 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종교적인 담도

  나와 너 사이의 윤리적인 담도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정치적인 담도 무너지고

  시간과 영원 사이의 거리도 좁혀지고 공간의 간격도 없어지고 하나의 세계가 형성될 것이다.

   주님께서 두 번째로 남긴 유언과 같은 말씀은 “나의 증인이 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하고 묻는 제자들에게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고 너희가 알바 아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행전1:6~8).”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마치시면서 위에서 지적한 두 가지 중대한 사항을 위임하셨다.

  하나는 “하나가 되는 것” 일치요

  또 하나는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 선교다. 안으로는 일치, 밖으로는 선교를 위임하셨다.

  한국교회는 지난 120년 동안에 두 번째 위임하신 ‘증인의 책임’은 비교적 열심히 실천하였다. 그래서 오늘은 1,200만 신도와 5만 교회 그리고 13,000명의 선교사를 해외에 파송하여 세계 복음화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첫 번째 분부인 ‘하나가 되라’는 일치를 실천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지니고 있는 문제 중에 가장 큰 아픔이 무엇인가? 그것은 분열이요 분파주의다.

  온 세계가 운명을 같이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이 역사적인 전환기에 있어서 하나의 세계를 바라는 의지는 만민의 공통된 이념이요 세계의 특징이다.

  그러나 사분오열된 한국교회는 개 교회는 개 교회대로, 교단은 교단대로, 연합기관은 연합기관대로 예외 없이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고 있음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Ⅱ. 나는 빌립보교회를 중심으로‘하나 되는 길’을 찾아보고자 한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영접한 비단 장사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됐다.

  그 후 이 교회는 여성 주도의 교회가 되었다. 여성들이 교회 전체를 이끌어갔다. 여성들에게는 장점도 많지만 결정적인 단점도 있다. 그것은 시기와 질투심이 많다는 것이다.

  ‘사랑과 질투’는 종이의 양면과도 같다. 빌립보교회 안에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성 지도자 사이에 알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만사를 경쟁적으로 서로 질투하고 시샘을 내다보니 그만 당파가  생기고, 교회가 화목하지 못하고 환희와 사랑에 넘쳤던 처음의 기쁨을 잃고 말았다.

  여성 특유의 그러한 시기와 질투가 분쟁의 씨앗이 되고, 파벌이 생기고, 서로 양보 없이 맞서 주도권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빌립교회의 가장 큰 문젯거리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시기, 질투의 죄는 뿌리가 깊은 죄이다. 악이니 선이니 하는 것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다. 선은 선이고 악은 악이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는 선한 일에까지 찾아드는 죄이다. 악한 세계에만 질투와 시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선한데도 있고 믿는 사람에게도 있다.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좋은 일을 하고자는 거기에도 시기 질투는 뿌리 깊게 따라다닌다. 고로 교회에도 예외는 아니다.

  이 시기와 질투는 마귀가 시험하는 것 중에 가장 무서운 시험에 속하는 것이다. 고로 시기와 질투는 뿌리 깊은 죄요 무서운 시험이다. 우리 마음의 번민이나 고통의 밑바닥에는 반드시 시기와 질투가 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시험에 빠지고, 본의 아니게 죄를 짓게 되고 이 죄의 결과로 분열을 가져온다.

  그래서 설립자인 바울은 교회분열이 걱정이 되어 “주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을 강하게 권면하게 된 것이다.

  교회도 국가도 힘이 있어야 일할 수 있다. 그 힘이 어디서 오는가? 우리는 힘의 역학관계를 잘 알고 있다. 힘이란 하나가 될 때 생기는 것이다. 어느 민족이나 국가가 힘이 있으려면 하나가 되어야한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일치(unity)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가 되려면 조화와 협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힘의 역학관계를 형성하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이다.

  인간은 개성이 다르고 성이 다르고 환경이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가 다르고, 남자와 여자가 다르고, 직업이 다르고 언어와 문화가 다르다. 이렇게 다른 것들이 하나의 뜻을 위해 뭉치고 조화를 이루고 협력을 할 때 놀라운 에너지가 생긴다.

  그러나 반대로 조화와 협력을 이루지 못하면 각자가 가진 능력마저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자동차 한대를 만드는데 2만개의 부속품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모든 부속품 하나하나가 각각 제 구실을 해야 하지만 그러나 2만개의 부속품이 협력하고 조화를 이룰 때 자동차는 완성되어 굴러갈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하나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연합기관을 조직하고, 규약을 만들고, 사람을 배치한다고 해서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요즈음 “하나가 됩시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망한다.”는 구호만 가지고는 하나 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하나’가 되는 문제를 생각할 때 기억나는 것은 대부(代父)라는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면 깡패 두목들이 모여 하나가 되기 위한 예식을 치른다. 이것은 결혼예식에서 신랑과 신부가 두 손을 성경책 위에 얹고 하나 되기를 서약하는 그 정도가 아니라, 깡패 두목들은 즉석에서 손가락을 툭툭 잘라 그 흐르는 피를 컵 하나에 모아 손가락으로 휘휘 저어서 돌아가면서 한 목음씩 마신다. 이제 서로의 피를 마셨으니 우리는 피로 맺어진 몸이다. 이것을 혈맹(血盟)이라고 한다. 그러니 앞으로 우리끼리는 절대로 싸우지 말자고 맹세한다. 그러나 웬걸요 얼마 후에 다시 시시한 일로 싸우다가 다 죽고 두 사람만 남게 된다.

  결국 ‘하나가 된다’는 것은 내게 이로울 때만 가능하고 선을 행할 때만 가능한 것이지 악한 방법, 악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Ⅲ. 이제 빌립보서를 통해 바울이 제시한 하나가 되는 길을 찾아보고자 한다.


  ⅰ. 바울은 “한 마음을 품으라.”고 가르친다.


  그는 빌립보서 2장2절과 4장2절에서 하나가되는 첫째 비결을 제시했다. “너희는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으라(빌립보서2:2).”

  또 빌립보서4장2절에서는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개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위의 말씀은 마음과 사랑과 뜻의 내적 일치가 없이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즉 ‘하나의 세계’는 먼저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마음이 하나 될 때부터 시작된다. 마음을 열지 않고서는 세계의 질서도, 인류의 평화도, 교회의 일치와 연합도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이 말은 같은 침상에 누워서 다른 꿈을 꾸고 있다는 뜻이다.

  고로 바울은 “주 안에서 한 마음을 품으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는 우리는 흔히 어느 한 쪽을 비판해보려고 한다. 나를 비판하고 남을 비판한다. 나는 잘했고 남은 잘못했다고 우긴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잘못한 게 아니다. 모두가 잘못했다.

  사도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개에게 즉 교회분쟁의 양대 세력이었던 두 여인에게 "주 안에서 하나가 되라“고 조심스런 충고를 했다. 요새 말로하면 주류와 비주류였다. 바울은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주안에서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생활을 같이하라. 사업을 같이하라는 등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하나가 되라는 것은 어떤 물리적이거나 사회학적으로 풀어야할 문제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심령의 문제다. 인권의 문제도 아니요 신앙의 문제 마음의 문제다. 그래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하면서 “주안에서”를 강조했다. 우리가 서로 같은 마음을 갖으려한다고 해서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을 하나가되게 하는 구심점이 있어야한다. 옛날 우리의 부모들을 보면 그리 다정하게 지내지도 못하고 마치 닭이나 소를 몰듯이 살았지만 그들은 가문을 소중히 여기고 자녀를 소중히 여겼다. 이를테면 둘 사이에 난 자녀가 두 사람을 묶어주기 때문에 어머니가 자녀를 사랑하고 아버지도 자녀를 사랑함으로서 그 부부가 하나 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수평적인 관계에 앞서 수직적인 일부터 있어야한다, 둘을 하나로 맺어줄 수 있는 “끈”이 있어야한다. 갑이라는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고 을이라는 사람도 주님을 사랑한다면, 이 것이 진정이라면, “주안에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남편이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한다. 아내도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렇다면 함께 앉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면서 어떻게 하나가 되지 않겠는가?

  아무리 같이 산다 해도 신앙적으로 하나 되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가 아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만 하나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수직적인 사랑을 떠나서는 일치가 불가능하다.

  사실 성도의 교제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 가까이 지내다보면 부모형제보다 더 밀접하다. 무슨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영혼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해줄 사람도 성도뿐이다. 고로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맺어진 관계다. 무슨 사업관계나 이해관계와 같은 세상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가되고 구원받은 간증 안에서만 하나가 되는 것이다.


 ⅱ. 하나가 되는 길은“다툼이나 허영으로서는 불가능하다(빌립보서2:3)”고 했다.


  이 말속에는 자기의 자랑, 우월감, 특권의식을 버려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자기 자랑은 교만으로 통한 다. 교만은 자기가 하나님이 되려는 것이다. 교만이 있으면 마음속에 분열이 생긴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시험을 받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순간 그 마음은 분열되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역사를 보면 인간이 “우리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굳게 약속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는 집단적인 교만의 행위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시지 않고 언어를 혼잡케 하셨다. 자기 자랑은 교만으로, 교만은 분열로 이어졌다.

  마음속에 숨어있는 교만이 밖으로 표현될 때는 우월감으로 어떤 특수의식으로 변한다. 어떤 사회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양반이 별것이 아니요 부자가 곧 양반이다”라고 했다. 많이 가진 사람, 그것이 돈이든 지식이건 권력이건 머슴이건 자기의 잘난 것을(부자 됨을) 본질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나와 너는 족보가 다르다”고 하기 시작한 것이 소위 양반상놈의 구별이 됐다. 이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고정관념이 되어 “나는 양반이요 너는 상놈이다”하게 된 것이다.

  고로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했다. 다툼은 경쟁심이요 상대적 가치에서 나온다. 하나님과 내가 어떤 관계에 있느냐하는 절대관계가 중요한 것이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지 아닌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하나님의 평가에서는 바리새인 보다는 막달라 마리아, 세리가 더 의인 이였다.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보시는 절대가치다.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했다. 다투면 경쟁심이 생기고, 경쟁심이 커지면 자기상실에 빠진다. 자기 자신을 늘 다른 사람과 비교하다 보면 어느새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승부욕에 지나치다보면 자기 과장에 빠지게 된다. 한번 거짓말을 시작하면 없고도 있는 척 모르고도 아는척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예수심리학이란 책에 보면 예수님에게는 전혀 ‘승부욕’이 없었다고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비범함이요 위대하심이다. 우리는 겸손히 자기 본분을 다할 뿐이다. “허영으로 하지 말라”는 것은 허영은 진실을 잃게 되고 자기의 존재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나 무어라고하나’ 다른 사람의 평가에 따라 사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다.


  ⅲ. 바울은‘하나가 되는 길’을“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립보서2:3하)”고 했다.


  상대방을 치켜세우면서 싸우는 것 보았는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길 때 어디서나 누구와도 하나가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아이들이 부모의 속을 썩일 때 어머니는 무심코 “용케 네 아버지를 닮았구나.” 아들이 공부를 잘 못할 때 아버지는 무심코 “네 엄마가 공부를 잘못했더니 너도 그렇구나.” 아이들은 이 말을 기억해두었다가 자기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다 유전 이예요, 유전”한다.

  이와는 반대로 자녀들은 “우리 부모님들은 훌륭했다는데 나는 이렇게 부족해.”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우리는 부족했는데 너희들은 참 훌륭하구나.” 이런 마음만 가진 사람이 있다면 둘이 모여도 하나요, 열이 모여도 하나요, 만이 모여도 하나가 될 수 있다. 후진국민 선진국민의 차이점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칭찬문화에 있다.


 ⅳ. 바울은 빌립보서2장4절에서“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 아니라 도한 다른 사람의 일도 돌보라.”이것이 ‘하나가 되는 길’이라고 교훈하셨다.

 

  자기 일에 충성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남의 처지도 생각해야한다는 말이다.

  이 말씀은 자기 집착에 지나치게 사로잡히지 말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가 됨을 방해하는 요소다. 자기의 주관적인 고정관념에 꽉 매여 있는 것을 "터널 뷰(tunnel view)"라고 한다. 굴속에서 보면 바깥세상으로 통하는 저쪽 끝에 작은 구멍이 있다. 굴속에서 볼 수 있는 하늘이란 그 구멍만큼 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하늘이 그렇게 작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고집부리는 사람, 자기주장만이 옳다고 고집부리는 사람은 하나가 되지 못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다른 사람과 같아지려고 노력할 때 하나가 될 수 있다.

  이해가 없는 곳에는 협조가 없고 협조정신이 결여된 사회는 하나가 될 수 없다. 스승과 학생 사이에 이해가 없으면 학원은 지식전달의 장으로 변하고 인격교류가 없어진다. 기업주와 노동자 사이에 이해의 줄이 끊어지면 노사분규는 계속 될 수밖에 없다. 위정자들과 백성들 사이에 이해가 부족하면 신뢰의 금이 간다. 교역자와 신도들 사이에 이해가 부족하면 교회의 평화는 깨지고 온기가 식는다.

  오늘의 교회가 역사의 변천과 시대적인 요청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의 고정관념과 자기집착에 깊이 빠지게 되면 교회는 빛을 잃고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게 된다.

  이해는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다. 상대방의 생각을 머리로 이해하고 상대방의 처지를 가슴으로 느껴주면 된다. 바울은 ‘하나가 되는 길’에 대해서 여러 가지 교훈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하나가되는 궁극적인 비결은 못된다.


 ⅴ. 바울은‘하나가 되는 궁극적인 길’을 제시했다. 그것은 빌립보서 2장5절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궁극적으로‘하나가 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

  최근에는 어느 때보다도 민족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요즈음 진보적인 통일론자들은 양보만하면 당장에 통일이 되는 것처럼 주장한다. 통일의 정신이 없어서 안 된다고 한다.

  그러나 양보만 한다고 무조건 퍼주기만 한다고 하나가 되는 것 아니다. 내 마음대로 네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통일이다. 그래서 반세기를 끌어온 것이 아닌가? 통일의 길은 하나뿐이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주장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통일은 정치나 경제 군사 과학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문제다. “동숙인은 있어도 가정은 없다”는 말이 있다. 마음이 하나 되지 않은 상태에서 20년 30년 함께 산다고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나를 이룰 때 거기에 진정한 연합이 있고 통일이 있고 평화가 있다. 결국 종교적인 차원, 하나님의 경륜을 떠나서 통일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가 되는’ 원리를 여러 가지로 제시했으나 궁극적인 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빌립보서2장5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이나”라는 말로 시작했다. 이것은 요한복음1장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이신데 “자신을 비워 사람이 되셨고, 종이 되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인데 자기를 비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을 신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설명한다. “역사 안에 오셨다.” “인간과 대화적 관계를 이루었다.” “문화의 옷을 입고 오셨다.” 이런 설명들은 표현이 다른 뿐이지 내용은 같은 이야기다. “사람이 되었다.”는 말은 인간의 형태를 입지 않고서는 절대로 사람을 만날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문화의 옷을 입었다’는 것이다.


  ① 자기를 비웠다(빌립보서2:6~7)”는 말은 영어로는 'empty', 한문자로는 ‘空’이다. 근본 하나님이신데 본래의 형태를  벗고 사람의 형태로 갈아입었다는 뜻이다.    

  왜 그래야 했을까? 그것은 죄인을 만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여러분 중에 「다미안(Father Damien 1840.1.3~1889.4.15)」신부의 전기를 읽으신 분이 있을 것이다. 그는 평생 문둥병자들과 함께 살다가 죽은 사람이다.

  그가 문둥병자들이 사는 하와이 군도 ‘몰로카이’섬을 지나다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그들에게 전도하기로 결심을 했다. 이 섬에는 7,000명의 나환자가 있고 약자의 간을 내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많은 구호물자를 가지고 이 섬을 방문하여 여러 해 동안 전도했으나 그들이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건강한 사람이 사치로 돕는 것은 필요 없다는 반응이었다. 나보다 못한 사람,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며 즐기는 도덕적 향락주의라고 비판했다.

  그들이 끝까지 마음 문을 열지 않자 「다미안」은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다. “주님 내게 문둥병을 주십시오.” 결국 그는 문둥병에 걸리고 만다. 그리고 문둥병자가 된 그가 나환자를 다시 찾아갔더니 그제야 그들은 마음 문을 열어주더라는 것이다.

  멀쩡한 사람이 문둥병자의 마음 문을 열기위하여 똑 같은 나환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 전에도 환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치료를 해주기도 했으나 그들의 마음 문을 열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돕는 사람 자신도 문등병자가 되고서야 저들의 마음 문을 열 수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런데 이것이 기독교에서 전하는 복음의 힘이다.

  「다미안」신부가 죽은 후 나환자들은 「다미안」신부의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요한복음 12장24절(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의 말씀을 새겼다. 그의 동생, 조카도 「다미안」의 뒤를 이어 그 섬에서 나환자가 되어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돌보다가 갔다.

  하나님은 높은 보좌에 앉아서 사람들이 자기에게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 그 과정은 어려웠다. 먼저 보좌를 떠나서 하나님의 본체를 버리시는 것이다. 그리고 종의 모습으로 천한 사람으로 오셔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그 후에라야 사람들이 마음 문을 열게 되었던 것이다. ‘비웠다’는 말은 한쪽을 얻기 위하여 다른 한쪽을 버렸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교회 자체에만 머물러 있는 한 교회와 세상은 관계가 없다. 교회가 문화의 옷을 입고 역사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세상은 교회를 향해 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지위가 높은 그리스도인들은 지위의 옷을 벗고 낮은 서민 속으로 내려가야 한다. 지식이 높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엘리트 옷을 벗고 못 배운 대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부자는 돈의 옷을 벗고 가난한 세계로 내려가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문을 열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자기를 비우는 것, 낮은 자리로 옷을 갈아입고 내려가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②‘자기를 비웠다’는 말보다 더 중요한 말이 있다. 그것은 빌립보서2장8절에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말씀이다.

  순종은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이요 복종은 납득이 가지 않지만 따라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종은 하나님의 뜻에 자기 뜻을 굴복시킨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의 뜻은 따로 있는데 하나님이 그 길을 원하시니까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이런 뜻이다. “희생과 죽음까지” 복종하지 않으면 충성이 아니다. 충성은 목숨을 다하는 것이다. 목숨을 바쳤는데 다른 것이야 문제될 것이 있겠는가?

  바울은 몸에 알지 못하는 병이 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님 내 몸에서 가시를 제거해주십시오.” 이 병 때문에 전도하는데 지장이 많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대답하셨다. 바울은 자기의 원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다.


③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빌립보서2장9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다.”고 했다.

  예수님이 죽기까지 복종하신 후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나?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빌립보서2:9~11).”

  하나님께서 높여주시기까지는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지 말라.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마가복음10:4~5)”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