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한국교회와 평신도의 지도력



 


Ⅰ. 한국교회의 발자취


  ⅰ. 한국교회 이 땅에 들어온 지 금년으로 120년이 된다.


  기독교 2000년의 긴 선교 역사에 비하면 그리 긴 세월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성장 과정을 살펴보면 경이적인 발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1885년에 개신교가 시작한 이래 1896년에 세례교인은 약 200명에 불과했다. 1905년에는 9,000명으로 증가했고, 1919년 3.1운동 당시는 기독교 인구가 10만 명에 이르게 되어 독립운동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 후 8.15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한국교회는 어두웠던 박해기를 벗어나 본격적인 발전과 성장의 궤도에 올랐다. 이렇게 성장한 한국교회가 오늘은 5만여 교회에 1,200만 신도, 13,000여 명의 선교사를 온 세계에 파송하여 세계복음화에 기여하고 있다.

  

  ⅱ. 지난 한 세기 여의 발자취를 돌아다볼 때 그동안 한국교회가 수행한 헌신적인 역할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우리 문화에 준 신선한 충격, 국민생활과 정신사를 고양시킨 점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조선왕조의 쇄락과 함께 시작된 개화기의 물결 속에서 기독교가 담당했던 근대화의 촉진이나 근대 인간형성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뿐만 아니라 온 국민에게 새로운 도덕적 가치기준을 제시한 것은 위대한 공헌이 아닐 수 없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문화의 개발, 현대교육의 실시, 상공업의 권장, 과학정신의 고취, 서양 의술의 보급, 여성의 지위 향상 등 한국인의 시야를 멀리 국제사회로 돌리게 했다.

  이런 각성된 국민의식은 훗날 항일 민족운동의 많은 지도자를 양성하는데 기여하였고 주권재민(主權在民)과 만인 평등의 민주주의 정신을 함양하는데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

  3.1운동을 정점으로 하는 항일투쟁을 비롯해서 해방 후 자유사회와 민주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는 물론이고 해방 후 공산주의와 정면으로 싸워 이 나라를 수호하는데도 기독교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나라 기독교는 사회복지사업, 교육사업, 의료사업 등,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지난 100년 동안 이 땅에 어둠을 밝히는 등불의 역할을 감당했다.

  근년에 사회 일각에서 기독교의 어떤 작은 결점만을 보고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을 말하고 있지만 그래도 교회는 사회발전을 위해 묵묵히 일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오늘 우리나라 안에 사회복지 기관 중에서 84%가 교회나 크리스천들이 운영하고 있다. 전국 545개 기관 중에서 455개를 교회나 크리스천들이 운영하고 있다.

  몇 해 전 기독교학교연맹의 통계에 따르면 정규 교육기관 256개의 학교를 기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초등학교가 6개, 중 고등학교가 233개, 대학이 17개로 교단 혹은 연합기관에서 직접 설립 운영하고 있다. 이밖에도 크리스천들이 직접 간접으로 운영하는 정규 비정규 학교들이 많다.

  또 의료기관을 보아도 1884년에 「알렌(H.N. Allen)」의료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와 의료의 씨를 뿌린 뒤 기독교 단체가 운영하는 종합병원이 22개, 크리스천들이 직접 설립 운영하는 병원이 19개나 있다.


 ⅲ. 지난 100년은 고난의 한 세기로서 일제의 무서운 핍박 속에서도 한국교회는 꾸준히 성장했으며, 6.25의 민족적 시련 속에서도 제사장적인 자세로 민족의 아픔을 감싸주며 고난의 현장을 찾아 사랑을 실천해 왔다.


  한국교회는 지난 세기동안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종교로 정착시키고, 주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완수해왔다. 교육과 의료등 사회봉사 활동을 통해 민족정신을 일깨우기 위한 복지사업과 정신문화 창달에도 선구자적 역할을 감당해 왔다. 교파를 초월하여 마음과 뜻을 모아 민족의 고난에 동참했으며 복지사회 실천에도 앞장서고 있다.


 ⅳ. 그래서 오늘의 한국교회는 유교, 불교, 천도교 등, 재래 종교와 함께 공존하는 다원종교 사회에서 국민의 20%이상을 점유하는 다수 종교로서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교회는 과거와 같은 소수 종교의 열등의식이나 투쟁의식에 머물 수는 없고 그 대신 주인의식, 책임의식을 갖고 사회나 민족 전체에 대하여 목회적인 배려를 해야 할 위치에 서게 되었다.


 

Ⅱ.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한국교회는 많은 자체 반성의 과제들을 안고 있다.


  사견임을 전제로 다음의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다.


  ⅰ. 첫 번째로 무속종교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는 기복신앙이다.


  물론 기독교의 본질 속에는 축복의 신앙으로 편만해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복의 풍조는 건전한 복음적인 축복의 한계를 넘어 교회를 하나의 기복단체로 변질시키는 경향이 크다.

  이런 기복신앙은 지극히 현세적이고 물질적이며 지나친 이기주의적 행복의 추구다. 이것은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모든 재난과 고통을 모면하고 축복과 평안만을 추구하는 신앙이다. 이런 기복신앙은 영적인 축복과는 달리 가시적인 물질적인 축복일 뿐이다.

  이런 축복은 하나님께 기도만 하면 노력 없이 집도 생기고 취직도 하게 되고 승진도 하게 된다는 식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요즘 유행하는 용어 중에 “하면 무엇이나 된다.”는 소위 적극적인 사고론은 기독교의 본질을 벗어날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기복신앙은 성경이 가르치는 축복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이런 기복신앙은 괴이한 신비운동을 유발하게 된다. 마치 이런 것들이 기독교의 본질이요 전부이며 신령한 자의 자격심사처럼 생각하여 이런 가시적인 기적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것처럼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기복신앙은 차원 높은 기독교를 미신화하고 상식이하의 종교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성이 높다.


ⅱ. 두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문제는“세속주의적 사고”의 도입이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물론 한국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한국사회의 급격한 변화가 교회성장에 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산업화, 도시화 현상이 가져온 “세속주의적 사고”다. 이 세속주의적 사고는 두 가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교회성장의 기준과 선교의 목적을 물량적인 팽창에 두는 것이다. 물량적인 비대화에 맛을 들이면 배금풍조의 위험한 유혹에 빠져 영적이라는 미명하에 물질주의에 빠져버린다.

  세속적인 사고가 내포하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성공주의다.

  이런 사고의 위험성은 목회의 성공이 교회성장을 물량적으로 측정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인 수, 건물의 크기, 예산의 규모, 교회 버스가 몇 대냐 등 이런 것들이 오늘날 많은 교회의 지대한 관심사가 되어버렸다.

  이런 성공주의는 많은 지도자들로 하여금 동양 최대의 교회니, 세계 최대의 교회니 하는 꿈에 부풀게 하며 일조일석에 수만 명의 교인을 모이게 하는 허영과 영웅주의에 빠지도록 유혹한다.

  이런 세속적인 성공주의는 성취욕에 도취되어 불필요한 경쟁의식을 일으키고 그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도 정당화하게 된다. 교인 쟁탈전은 보통이고 교회가 교인들의 거래장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성공주의적 교회성장의 이론을 따른다면 “무엇이나 하면 된다.”는 적극적인 사고론의 심리를 충분히 유발시킬 수도 있다.

  앞으로 한국교회가 지니고 있는 과제는 이런 병폐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복음으로 재무장해야하며 한국교회가 성장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왜곡된 이런 체제들을 개선하는데 용기와 겸허한 자세가 필요하다.


  ⅲ. 세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문제는 사회참여만을 강조하는 급진사상이다.


  한국교회가 해방될 때까지 퍽 배타적이고 비사회적인 경건주의적 신학교육을 실시함으로서 기독교의 교리적 신앙만을 강조해 왔다. 그 결과로 현실에 대한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은 잊어버린 지대처럼 등한시해 온 것도 사실이다.

  개인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는 지극히 헌신적이었으나 정치니 경제니 노동이니 하는 현실문제에는 이방인의 일처럼 무관심하였다. 이런 역사의식 때문에 교회는 현실을 외면한 채 자기도피, 자기옹성 예배당 내에서의 활동만이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왔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나라가 독립되고 우리의 손으로 문화를 창조하게 되고 경제적인 부흥이 일게 되자 기독교 안에서는 현실 참여라는 운동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실참여를 강력히 주장하고 나선 신학자나 교회 지도자들은 모두 진보적인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해방신학이니, 혁명신학이니, 정치신학이니 하는 급진적 신학을 도입하게 되었다. 이런 급진신학은 교리와 정치 사이에 한계를 긋기가 어렵다면서 정치와 신학을 연결하여 신학의 정치화를 시도하고 개인과 사회, 영혼과 육체의 이분화를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과거의 영혼 일변도의 구원관을 비판하며 인간의 육체와 연결되는 사회구원을 강조하게 되어 구원의 대상을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기독교의 사랑을 계급주의적 사랑으로 변질시켜 약자와 강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지식인과 무식대중을 계급적으로 갈라놓는 위험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Ⅲ. 위에서 지적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신앙의 본질을 되찾아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우선적으로 제기 돼야 할 문제는 “한국교회의 지도력”이다.


  이 문제는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고려해볼 수 있다.


  ⅰ. 첫 번째는 지도자 즉 다수 세력으로서의 교회는 소수(minority)심리에서 다수(majority)심리로 의식의 변화가 있어야 하고


 ⅱ. 두 번째로는 교회 지도력의 질적인 문제인데 다수종교의 지도력은 교회 내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 민족 세계에까지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성직자의 지도력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성직자의 지도력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교회 자체를 운영하는 지도력의 문제요, 둘째는 사회적인 지도력의 문제다. 교회 자체 운영에 있어서는 지난날 성직자의 지도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성직자의 사회적인 지도력이란 기껏해야 정신적인 사상적인 지도력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다. 그것도 개념적이고 구호에 지나지 않으며 구체적으로 정신적 지도력은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과정과 방법을 중요시하는 현대의 사회적 요망에는 적응할 힘이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대사회적 지도력의 문제는 성직자에게는 제한된 역할밖에 기대할 수 없다. 결국은 대사회 지도력은 유능한 평신도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그러면 평신도의 지도력 문제를 생각해보자


  몇 해 전 ‘현대사회문제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교회 신도들의 교육 수준은 고졸 이상이 83%로 나타났다. 물론 우리가 평신도의 지도력을 말할 때 무슨 사회적인 지위나 권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 선교의 주제를 평신도들 자신의 전문지식이나 경험을 통해서 어떻게 전달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성직자의 지도력이 미치지 못하는 사회현장에 파견된 전도자로서의 효과적인 역할의 문제다.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설교)이 평신도를 통해서 그들이 살고 있는 생활현장에 전달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평신도는 직업이 다양하고 기능도 학식도 다양하다. 고로 그들의 전문지식을 선교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기능 동원이 필요하다,

  평신도 지도력은 교회와 사회가 만나는 대회의 광장을 마련하는 교량 역할에 적용되어야한다. 그 이유로서 교회는 이 사회에서 각양의 직장을 갖고 각계각층의 사람과 가장 많은 접촉을 하는 평신도를 통해서만 본래의 선교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란 거룩한 성역을 형성하여 신도들에게 속된 세계로부터의 ‘피난처’를 공급하는 곳이 아니라 복음 선전의 전투본부로서 성도들에게 영적훈련을 시켜 그 힘을 세상에 공급하고 따라서 많은 불신자를 교회로 인도하는 즉 『모이고 흩어지는』역동적 관계를 주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평신도의 지도력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평신도를 통한 세계에 대한 교회의 봉사는 단순히 결과적인 불행을 메우기 위한 자선사업이 아니라 한걸음 더 나가서 원인으로서의 사회구조의 결함을 시정하는데 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할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평신도들의 사회참여를 통해서 사회변혁을 일으켜야한다.

  정치참여 문제도 교회 자체의 이름으로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 이유는 교회 본연의 사명은 세상 정치단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직자 역시 직접적인 정치 참여는 정도가 아니다. 교회의 역사 참여는 오직 유능한 평신도를 훈련시켜 정계에 진출시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렇게 함으로서 교회는 대사회의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기독교가 약하고 소수 종파일 때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제는 힘이 있다. 천만 명이 넘는 기독교인이 합하기만 하면 모든 일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평신도의 지도력을 활성화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첫 번째로 평신도의 지도력을 조직화해야 한다. 그들의 모든 달란트를 총동원하여 선교 일선에 내세워야한다.

  두 번째는 신앙교육과 훈련이다. 먼저는 평신도에 대한 신학교육이 필요하며 말씀으로 무장시켜야 한다.

 위에서 지적한대로 한국교회는 다수종교로서의 책임감을 가져야하며 그 실현을 위하여 성직자의 지도력은 한계가 있으므로 유능한 평신도들이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훈련을 받아 자신의 전문영역에서 사회에 대한 교회적 지도력을 충분히 발휘해야한다. 그리고 교회는 이 일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야한다. 나아가서는 아시아의 불교, 유교, 회교 등의 문화권을 전환시키고 2천 년대에는 아시아와 세계 복음화의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Ⅳ. 끝으로 교회는 평신도의 목회 참여를 극대화해야 할 것이다.


    ⅰ. 전 세대는 목회자 한 사람의 역량에 따라 교회가 특징지어졌다. 


  교회성장은 목회자에게 절대 의존적이었다. 목회자의 목회관은 “교회의 크기”, “목표 설정”, “교회의 방향” 등을 규정하고 교회의 개성을 뚜렷하게 하였다.

 

    ⅱ. 물론 미래 교회의 목회에도 목회자의 영향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목회와 미래의 목회가 다른 점은 목회자와 평신도의 관계다. 과거의 목회에서 평신도는 목회자와 주종 개념에서의 협력관계였다. 그러나 미래에서는 목회자와 평신도가 수평적 관계에서의 협력자가 될 것이다.


 ⅲ. 미래목회에서는 카리스마적 목회자의 출현보다 평신도의 사역이 강화될 것이다.

  

  미래 목회는 대중적인 카리스마적 목회가 아니라 소그룹을 통한 평신도 사역이 강화될 것이다.

  그 이유는 미래목회는 과거와 같은 메가(대형)교회가 아니라 메타(meta)교회 즉 소그룹을 중심한 선교활동이 더 활성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그룹교회는 목회자의 역할보다 평신도 역할이 중심이 될 것이다.

 

ⅳ. 그러면 평신도는 누구인가? 성직자를 제외한 교회 구성원을 평신도라고 한다.


  평신도는 오래 전부터 역사 속에 존재했지만 그 가치와 기능을 인정하고 교회가 신학적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오래지 않다. 평신도 운동은 19세기에 와서 교회 안에서 서서히 관심을 끌기 시작했고 20세기에 들어와서야 활발하게 발전되었다.

  한국교회는 1960년대에 도입되었고 1970년대 와서 평신도 신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운동은 교회 안에서의 신학화 운동이 소수의 성직자 중심에서 다수의 평신도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평신도 운동은 교회의 민주화와 교회의 다수에 대한 새로운 관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ⅴ. 가톨릭교회는 사제 중심의 교회제도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연히 계급적이며 성직자와 평신도를 엄격하게 구분하여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성속(聖俗)의 대립적 계층으로 설정한다.

  그러나 개신교의 개혁자들은 이런 이중적 구조를 버리고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1.10~1546.2.18)」의 ‘만인제사장설’에 근거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며 동등한 제사장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함으로(베드로전서 2:9, 갈라디아서 3:28) 종교개혁은 평신도의 이차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성직자 평신도 사이의 본질적 차별을 철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