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인간이해

정진경 목사 희수기념문집 "목회자의 지성과 인격"(도서출판 진흥, 1998) 450-462쪽


"반짝반짝 작은 별 나는 네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 이 말은 서양 아이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이다. 그런데 이 노래를 아이가 잘못 불러 '네가' 무엇인지를 '내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했다.

이 어린이의 잘못 부른 노래는 과연 인간에게 오래 전달되어 온 수수께끼이다. '내가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괴로운 물음은 인간이면 누구나 풀고 싶은 수수께끼이다.

미국의 저명한 현대신학자요, 사상가인 '라인홀드 니버' 교수는 그의 저서 「인간의 본성과 운명」이라는 책 첫 구절에서 "인간이란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언제나 인간 자신을 가장 괴롭혀 온 것이다. 즉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물음은 나는 어떻게 살 것이냐의 결단을 찾는 첫 걸음 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존재의 근원과 행방, 목적과 이상에 대해서 궁극적인 질문을 갖고 있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이며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 것인가? 나의 생의 좌표를 어떻게 정하고 생의 방향을 어디에 둘 것인가?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신은 존재하는가?'이다. 만일에 신이 존재한다면 나와는 무슨 관계가 있으며, 또 어떠한 관계를 가져야 할 것인가?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고 할 때에 절대자에 대해서 이런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고대 희랍에서는 인간을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즉 생각하는 인간상을 제시했다. 기독교는 신앙하는 인간, 즉 종교적인 인간상을 제시했다. 그리고 근대인은 기술인, 즉 제작하는 인간으로 정의했다. 서양사람들은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인간상을 제시했다. 그것은 이성인, 신앙인, 기술인이다. 오늘의 서구문명은 이 세 개의 인간상에서 나왔다. 즉 아테네에서 탄생한 이성인이 희랍 문명을 만들었고,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신앙인이 기독교 문명을 낳았고, 이태리 프로텐스에서 태어난 기술인이 근대의 과학기술 문명을 만들었다. 하나는 생각하는 인간을 낳았고, 하나는 신앙하는 인간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제작하는 인간을 창조하였다. 이 셋 중 기독교의 인간상은 어떻게 어떤 요소로 구성되었는가를 창조와 타락과 구원이라는 세 가지 원리에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창조원리에서 본 기독교의 인간이해

기독교는 먼저 창조자와 피조자의 관계에서 이해하는 것이 기본이다.

기독교의 인간이해는 먼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데서 시작된다. 신앙은 아는 것이 아니요 믿는 것이다. 지의 질서와 신앙의 질서, 이성의 차원과 신앙의 차원은 동일한 영역이 아니다. 알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요, 알 수 없기 때문에 믿는 것이 신앙이다.

합리주의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독교 신앙은 역설이요, 모순이요, 부조리이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강조하는 신앙이 이성의 질서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질서와 신앙의 질서를 둘 다 인정하고, 이성에 대한 신앙의 우위를 강조하는 것이 신앙인의 기본자세다. 파스칼은 신앙은 정신의 고차원적 도박이라고 말했다. 무슨 수가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도박은 불가지한 것에 나를 내던지는 결단적 행위이다.

그러면 왜 신앙을 도박이라 했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편에 내 인생을 걸고 살아가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없다는 편에 내 인생을 맡기고 살 것인가? 이 두 가지 인생의 태도 중 어느 하나를 주체적으로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로 신앙은 진지하고도 성실한 도박이다. 산다는 것은 자유요, 자유는 선택하는 것이며, 선택한다는 것은 어떤 가능성에 나를 내어던지는 것이다. 고로 신앙은 인생의 결단이요, 선택이요, 도박이다. 기독교의 인생관은 이런 모험에서 출발한다.

두번째로, 그러면 기독교적 신앙인은 무엇을 믿느냐 하는 문제다. 기독교는 창조자와 피조자의 대화의 종교다.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셨고, 그 하나님은 유일하시며,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시고, 역사를 주관하시어 모든 것이 그의 지배 밑에 있다고 믿는다.

고로 이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요 우주의 주관자이시다. 이 사실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명한다. "나 여호와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시 44:6),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장차 올 자요, 전능자라"(계 1:8). 그는 알파와 오메가이기 때문에 여호와를 아는 것이 최고의 지혜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최고의 덕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자요, 인간은 유한한 피조자이다. 하나님과 인간은 언제나 창조자와 피조자의 관계에 서 있다. 그러므로 피조자인 인간이 자기를 절대화하거나 주인이 되려고 할 때 그런 행위는 창조자에 대한 반역이요, 범죄요, 교만이요, 우상숭배이다.

창조자 신앙과 피조자 의식은 기독교적 인간상의 첫째 요소다. 창조자는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피조자는 유한하고 부족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은 절대적으로 단절된 차원에 속한다. 그것은 비연속(非連續­discontinuity)의 세계다.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가는 길은 없다. 다만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오시고 그 부르심에 인간이 응답함으로 창조자와 피조자의 인격적 관계는 성립된다. 유물론자 '포이에르바하'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렇게 피조자와 인간을 절대화하고 주인화하는 유물론적인 사상을 기독교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세번째로, 창조적 원리에서 본 기독교의 인간이해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기독교 인간이해의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다.

인간만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깊은 관계를 표시하는 종교적 의미가 들어 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존엄성을 인간에게 부여한 이유는 인간이 이성을 소유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대화하고, 서로 응답하는 관계 속에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류의 아버지요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말한다.

피조자인 인간은 창조자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두 가지 기본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 하나는 무엇 무엇에 의하여(by)라는 관계요, 또 하나는 무엇 무엇을 위하여(for)라는 관계다. 이 말은 피조자인 인간은 창조자인 하나님에 의하여 만들어졌고, 또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며, 모든 것은 그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고로 창조의 원리에서 본 기독교의 인간관은 사람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다. 인간들이 창조한 문화, 예술, 인간이 경영하는 정치와 경제 등 지상에서의 인간의 모든 활동은 창조자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는 말이다. 문화는 종교에 봉사하는 한에 있어서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현대 신학자 폴 틸리히 교수는 "종교는 문화의 내용이요, 문화는 종교의 형태"라고 말했다. 고로 기독교는 문화의 자율적 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타락의 원리에서 본 기독교의 인간이해(창 3:1~21)

창세기에서 보면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은 우주와 인생을 창조하시고 세계와 역사를 지배하신다. 하나님은 무(無)에서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제일 마지막에 자기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것은 유(有)에서가 아니라 무에서의 창조였다.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축복하여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피조물과 엄연히 구별한다. 즉 인간은 인간 이상의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 이하의 피조물인 자연과의 중간에 처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만물 중에서 가장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모든 피조물의 지배자로 정하시고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에덴동산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과실을 마음대로 따먹되 다만 선악을 알게 하는 지혜의 열매만은 따먹어서는 안된다는 계명을 주셨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간교한 동물 뱀의 유혹을 받아 먹어서는 안된다는 과실을 보고 세 가지 강한 자극을 받았다.

아담과 하와는 이 자극을 극복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금단의 열매를 따 먹었다.

인간은 처음으로 창조주의 명령을 거역하였다. 이때부터 사람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였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죄와 죽음과 고뇌의 운명을 영원히 걸머지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토지는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저주받은 땅이 되었다.

왜 인간에게 죽음이 있고, 고통이 있고, 죄악이 있는가? 이런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물음에 창세기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인간의 죄에 대한 벌이라고 대답한다. 모든 고뇌, 죽음, 부패는 죄의 값이다.

창세기에 설명된 타락의 원리는 깊은 진리를 상징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유와 거역하는 자유를 아울러 갖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자유를 남용했다. 즉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탐욕과 자기를 주인화하고, 절대화하고, 만물의 중심화하려는 오만에 사로잡혀 하나님께 반역했기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되고,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단절되고 말았다.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을 신학에서는 타락이라고 표현한다.

창세기는 첫째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엄한 피조물임을 말하고, 둘째로 자유의 남용으로 타락한 죄인이 되었음을 설명한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었다. 인간의 본성은 부패하였고 그 의지는 썩어버렸다. 고로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자격과 능력을 상실하였다.

그들의 타락으로 인하여 온 인류의 혈관 속에는 뱀에게 유혹당한 하와의 나약한 의지가 계승되었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아담의 오만과 탐욕이 깃들어 있으며, 질투의 노예가 되어 동생 아벨을 살해한 가인의 이기심과 악의의 검은 피가 우리 혈관에 돌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피조자라는 점에서는 기독교의 인간관은 낙관적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범한 죄로 인하여 인류를 그 본성이 타락한 죄인이라고 보는 점에서는 기독교의 인간관은 비관적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기독교는 창조의 원리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동시에, 또한 타락의 원리에서 이해하고 있다.

기독교는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고 단정한다. 이런 단정에 대해서 현대인은 반문할 것이다. 우리가 언제 간음죄를 지었는가? 언제 도적질을 하였으며 살인죄를 범했는가? 그러나 기독교가 인간을 모두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런 결과적인 죄 때문이 아니다.

그러면 인류를 모두 죄인이라고 단정하는 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여러 가지 죄 때문이 아니라 한 가지 죄 때문이다. 그 하나의 죄에서 만 가지 죄가 발생한다. 그러면 그 하나의 죄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앞에 짓는 죄다. 기독교가 제시하는 이 '하나의 죄'(The sin)는 우리가 양심에 의하여, 또는 사회적인 어떤 기준에 의하여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그 성질을 달리한다.

기독교가 말하는 죄는 단순한 사회학, 법률학, 도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악의 원인을 의미한다. 이 죄는 사회의 질서 혹은 국가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이기 이전에 벌써 하나님 앞에서 범한 죄다. 고로 시편기자는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나이다"(시 51:4)라고 고백하였고, 또 누가복음 기자도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범하였나이다"(눅 15:18)라고 먼저 하나님 앞에서 범한 종교적인 죄를 고백하였다.

기독교가 인류를 모두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원리는 여러 가지 결과적인 죄들이 아니다. 모든 죄의 원인인 하나의 죄다. 그러면 '하나의 죄'란 도대체 무엇인가? 신·구약 성경은 이 하나의 죄를 불순종, 반역, 또는 불신앙이라고 정의한다. 즉 이 죄는 피조자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자신을 하나님 위치에 올려 놓으려는 교만이다.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제 1계명을 범한 하나의 우상숭배다. 이런 인간의 교만을 현대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의 죄' 또는 '죽음에 이르는 죄'라고 말했고, 기독교의 전통적인 신학에서는 이것을 '원죄'(原罪)라고 부른다.

그러면 이 원죄가 온 인류에게 미친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를 단절시켰고, 둘째는 생명을 상실했고, 셋째는 사단의 노예가 되어버렸다(롬 5:12; 시 51:5). 사도 바울은 이런 죄의 힘은 인간을 속박하고 지배하는 힘이 되었으며, 그 죄의 유전은 누구에게나 미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한 사람에 의하여 죄는 세상에 들어왔고, 또 죄에 의하여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죽음도 모든 사람에게 미쳤다"고 하였다. 그는 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단정하고,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도 없으니 율법 밑에서는 하나님 앞에 한 사람도 의인이 없다"(롬 3:9~12)고 선언하였다.

이와 같이 아담의 타락은 인간의 사회성, 연대성, 전체성 속에 깊이 유전되었다. 고로 기독교 신앙에서 볼 때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다. 평소에는 건강하게 보이는 사람이라도 전문의사나 기계 앞에 설 때는 우리의 몸 속 어느 부분엔가 병든 곳을 발견할 수 있듯이 아무리 성현군자라도 하나님의 밝은 빛에 비추어 본다면 죄인 아닌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느 날 유대 나라의 종교가들이 군중을 충동하여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 하나를 데리고 와서 예수께 고발한 일이 있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이 여인을 돌로 치리이까? 하고 물었다. 이때 예수님은 여인을 고발한 군중을 향하여 "너희 중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있으면 모세의 법대로 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셨다. 그러자 양심의 가책을 느낀 무리들은 한 사람도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 못하고 하나둘 그 자리를 떠났다. 이것은 죄 없는 인간은 이 땅에 한 사람도 없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현대인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그것은 죄의식의 결여다. 인간이 죄 가운데 살면서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것이 문제다. 만일 아침에는 학생들에게 교육을 하고, 저녁에는 술상 앞에서 술 파는 여인의 놀림감이 되는 교육자가 있다면? 만일 국가와 사회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에서 사리사욕에만 눈이 어두워진 정치인이나 공무원이 있다면? 만일 강단에서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외치면서 행동은 위선적인 종교가가 있다면? 그들은 모두 죄인이면서 죄의식이 없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죄인 됨은 깨닫지 못하고 남의 허물만 비판하고 정죄하는 자는 더욱 큰 죄이다.

기독교는 타락의 원리에서 인간을 이해한다. 이 점에서는 기독교의 인간관은 비관적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자신이 죄인 됨을 인식해야 한다. 아무리 학식이 풍부하고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다 하여도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천국의 시민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는 유대의 높은 관원인 니고데모에게 "네가 죄에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셋째, 구원의 원리에서 본 인간이해

성경은 창조와 타락과 구원의 세 원리에서 인간을 설명한다. 창세기의 처음 몇 장은 창조와 타락의 원리를 기록했다. 인간은 유일신 여호와의 형상대로 창조된 피조물이요,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인류는 타락하였고, 그 결과로 죽음이라는 벌을 받게 되었다.

만일 이것이 인생의 전부라면 기독교는 인간의 운명을 암흑 속으로 비극으로 몰고가는 종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구원의 길을 제시한다. 타락한 죄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새 사람이 되는 구원의 진리를 제시한다. 기독교는 죄와 불행의 어둠 속에서 벗어나서 생명과 행복에 이르는 새로운 복음을 제시한다. 고로 기독교는 복음의 종교다.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빛과 생명과 행복에 이르는 복음을 준다고 선언하신다. 이기심과 거만과 육으로 사는 낡은 인간으로부터 사랑과 신앙과 영으로 사는 새로운 인간으로 창조한다. 타락한 인간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구원의 길은 적어도 세 가지 과정을 거쳐야 가능하다. 첫째 과정은 죄에 대한 자각이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라는 인식을 가질 때 비로소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죄의 문제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죄를 모르고 인생을 바로 이해할 수 없으며, 죄를 모르고 역사와 세계를 바로 이해할 수 없다. 창세기 1, 2장, 그리고 요한계시록 21, 22장을 제외한 성경 66권은 전부가 죄의 문제와 관련된 내용이다. 창세기 1~2장은 죄 이전의 역사이고, 요한계시록 21~22장은 죄 이후의 역사이다.

그러면 죄가 무엇인가? 소극적으로 생각하면 죄는 미혹이 아니다, 죄는 지식의 부족도 두뇌의 이상도 아니다, 또 죄는 인간의 행위도 아니다. 그러면 죄가 무엇인가? 적극적으로 생각하면 여럿(sins)이 아니라 하나(The sin)이다. 온갖 죄는 이 하나의 죄에서 파생한다.

그러면 하나의 죄란 어떤 것인가? 위에서도 지적한 대로 구약성경은 이 죄를 반역이라고 정의했다. 이 반역은 모든 고통과 사망의 원인이다. 인간의 시조 아담이 범한 죄가 바로 이것이며, 역대 예언자들의 갈망도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신약성경은 이 하나의 죄를 불신이라고 정의했다. 이 불신 때문에 인간은 행해서는 안될 불법(不法­Sins of Comission)을 감행하게 되었고(요일 5:17), 또한 마땅히 행해야 할 선을 행치 않는 태만의 죄(Sins of Omission)를 범하게 되었다(약 4:17).

그리고 어거스틴을 위시해서 파스칼, 루터, 칼빈, 니버 등 여러 신학자들은 이 하나의 죄를 교만이라고 정의했다. 인간은 하나님께 반역하고, 불신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의 죄로 인하여 타락한 죄인이 되었다. 죄는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다. 만가지 죄는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탕자의 비유가 바로 이 사실을 잘 설명해 준다. 탕자는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먼저 받아가지고 아버지 품을 떠나 먼 나라로 갔다. 이것은 아버지의 간섭을 벗어나 자유롭고 독립된 생활을 갈망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타락의 첫걸음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한 거부권 행사이다. 그는 아버지를 떠나 자유를 얻은 다음 순간부터 다른 지배자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몰랐다. 탕자가 찾아간 먼 나라를 '윈스톤 처칠'은 그의 소설에서 '표준과 이상을 상실한 땅'이라고 해석을 붙였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교제하는 인격적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의 지배 밑에 있어야 할 인간이 그의 품을 떠날 때 생명을 잃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두번째 과정은 의에 대한 자각이다. 이 말은 의롭다 함을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의란 무엇인가? 죄는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요, 의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날 때 죄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께로 귀순할 때 의롭다 함을 얻어 구원에 이른다.

그러나 죄인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 의롭다 함을 받으려면 두 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첫째는 회개요, 둘째는 신앙이다. 회개는 소극적인 요소다. 탕자는 먼 나라에 가서 마음껏 방탕의 생활을 했으나 하늘과 땅에 범죄함을 깨닫고 이를 돌이켜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것을 결심했다. 이것은 그의 심경의 변화를 의미한다. 즉 인간의 본심에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죄로부터의 전향(Turning from sin), 죄에 대한 자각과 그 결과로 자기의 그릇된 과거를 청산하는 일, 이것이 회개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일은 신앙이다. 탕자는 자기 죄를 깨닫는 즉시 일어나 아버지의 집으로 향했다. 이것이 신앙이다.(Turning to Faith). 신앙은 하나님께로 귀순하는 것이다. 죄로부터의 전향을 회개라 하고 하나님에게로의 전향을 신앙이라 한다.

'의'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이다. 옛 사람은 나요, 새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다. 죄 짓던 옛 자기를 비어 그리스도에게 명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인을 교체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하여금 나를 완전히 점령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구원의 두번째 과정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운동이다. 먼저는 자기의 본심에로 돌아가는 일, 그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원리는 개인이나 민족에게 모두 적용되는 원리이다.

구원에 이르는 세번째 과정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다. 죄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돌아오는 아들의 만남, 이것은 기적이다. 이런 인격적인 만남에서만 인간의 구원은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만남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 편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 편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즉 하나님의 계시,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기적적인 만남의 가능성을 우리는 십자가에서 발견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십자가에 이를 때 하나님과 죄인의 인격적인 만남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만남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의미하며, 새로운 창조를 말한다. 고로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만남의 상태, 새로운 창조, 즉 구원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은 기독교의 인간이해의 세번째 요소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하담과 하와의 원죄로 타락하여 무서운 죄인이 되었지만 하나님이 인류에게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길이 다시 열리게 된 것이다. 요컨대 기독교의 인간이해는 창조와 타락과 구원의 세 원리로 요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