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기본 자세

정진경 목사 희수기념문집 "목회자의 지성과 인격"(도서출판 진흥, 1998) 205-226쪽 


1. 목회자의 자질

가. 목회자란 무엇이냐?

한마디로 목회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기는 자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러면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진리의 말씀을 가진 생명체다. 한 순간도 거기에는 정지가 있을 수 없고, 정체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작은 겨자씨가 위대한 생명력을 가지고 자라나듯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이 푸르고 장엄하게 또 권위 있게 자라나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구원의 말씀을 가진 생명체다. 한 순간도 죄와 더불어 타협할 수 없고, 한 순간도 악이 세력이 이끄는 대로 맡겨버릴 수 없다. 그 이유는 거룩한 부름을 받은 자들이 모여서 피흘리기까지 죄와 더불어 싸워야 하고, 복음이 주는 평화와 행복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능력의 말씀을 가진 생명체다. 한 순간도 선교의 의무를 중단할 수 없고, 한 순간도 위로의 메시지 전하는 일을 게을리할 수 없다. 그것은 혼돈한 세계를 복음의 빛 아래 정복시켜서 십자가의 주님이 역사와 세계의 주로 높임을 받으시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목회자란 무엇인가? 목회자는 위에서 언급한 '교회를 섬기는 자'다. 비록 목회자는 지극히 약하고 무능한 존재라 할지라도 그의 생명과 사명은 하나님의 교회와 더불어 연결되어 있다. 고로 아무도 그를 멸시하거나 천대할 수 없다. 비록 그의 손이 둔해도 하나님의 지혜가 무한정으로 약속되었고, 비록 그가 가난해도 하나님의 지극한 부요를 맡았고, 비록 그가 약해도 하나님의 무한대의 능력을 쓸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책임은 무겁고 크다. 뭇사람을 상대로 하여 영원에 속한 일과 시간에 속한 일, 위에 속한 것과 땅에 속한 것,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영의 일과 육의 일,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 구원과 멸망 등 이 모든 것을 분명하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또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책임이 있다.

고로 목회자의 권위는 바로 발견되어야 하고 그의 신분과 위치는 바로 파악되어야 하며, 그의 사명과 임무는 바로 이해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목회자의 신분, 권위, 위치, 사명 등은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실천적으로, 철저히 규명되고 연구되어야 한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목회자는 항상 다음과 같은 연구 과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제들은 결코 과제만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연구하고 해명되어야 한다. 목회자가 무엇이냐? 왜 목회를 해야 하나?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문제들은 주님이 교회를 섬기고 그 양들을 먹이는 모든 목회자들의 공동연구 과제들이다.

이 과제들을 다시 풀어보면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실제적인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다. 선교의 문제, 예배의 문제, 설교의 문제, 교육의 문제, 심방의 문제, 상담의 문제, 교회 행정의 문제, 교회 재정의 문제, 교계의 문제, 대 사회 문제, 그리고 목회자의 끊임없는 자질향상의 문제 등이다.

이런 문제들은 교회의 생명과 직접, 간접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어느 한 교파나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연구될 것이 아니라 한국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부름을 받은 전체 목회자들의 관심사이다. 모든 교파의 목회자들이 공동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고, 그 연구 결과의 혜택을 고루 나누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앞날은 현재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들의 지도여하에 따라서 그리스도를 이 땅에서 욕되게 할 수도 있고 또 영광을 받으시게 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한국을 위하여 또 한국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있게 하는 날이 오도록 특별한 소명을 받은 목회자들이 자기 사명에 충실할 때가 왔다.

나. 목회자의 기본 자세

본 논문에는 목회자의 권위 문제, 목회자의 소명의식 문제, 목회자의 인격 문제, 목회자의 기본 교육 문제를 중심으로 목회자의 기본상만을 다루기로 하겠다.

1. 목회자의 권위

목회자에게 제일 먼저 요구되는 것은 권위다. 권위는 옛날이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요청되는 교역자의 기본문제다. 오늘은 어느 때보다도 권위 있는 목회자를 요구하는 시대다. 오락 삼아 전도에 나섰든지 직업으로 생각하고 이 길을 택했든지 하여튼 어떤 자기 만족의 테두리에서 움직이는 교역자가 아닌 정말 인간의 깊은 내적 고민의 세계에까지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권위의 목회자가 요구되는 것이 현실이다.

권위는 목회자의 생명이다. 아무리 학식이 풍부하고 웅변이 좋아도 목회자가 권위를 잃으면 그 지식과 웅변이 효과를 나타내지 못할 것이며 맛 잃은 소금이 될 것이다.

그런데 해방 후 한국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은 그 기틀이 되는 권위를 상실했다. 그 원인은 목회자의 최대 관심을 그리스도에게 두기보다는 교권과 정치에 두었고, 내용과 생명에 두기보다는 전통과 형식에 치중했으며, 신학과 파쟁에 두었기 때문이다. 고로 세상은 교회와 목회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다.

그런데 이 시대가 요구하는 목회자의 권위는 과거와 같이 어떤 형식이나 규율을 강요하는 외부적 제약이나 강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시대에 맞는 권위는 인간의 내부에 파고 들어가서 그 깊은 의지를 움직여 이를 행동으로 옮기게 만들어 주는 굳은 신념과 높은 사상과 생활철학을 동반하는 인격의 힘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가 목회자에게 요구하는 권위는 외적, 형식적,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 정신적, 인격적 능력을 의미한다. 인도의 4억 대중을 움직인 것은 영국의 문화나 무력의 힘이 아니라 다섯 자도 못되는 작은 키의 반 벌거숭이 간디의 인격의 힘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오늘의 세상 여론을 들어보면 기독교의 진리 그 자체에 대해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경의를 갖고 있으나 오늘의 기독교 지도자에 대해서는 일률적으로 존경감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가슴을 쳐도 슬퍼할 줄 모르는 이 세상만을 나무랄 것이 아니라 피리 부는 사람 자체에 무슨 이상이 없는가를 반성해야 한다. 우리의 부는 피리소리가 아무리 아름다운 멜로디를 낸다 해도 피리 부는 사람 자신이 관중들의 눈에 거슬리는 모양을 보여줄 때 그 연주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2. 목회자의 투철한 소명의식

성경은 하나님의 소명(召命)을 헌신의 기본 사상으로 삼는다.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이 없이 신자가 될 수 없고 예언자나 전도자는 더욱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은 자천이 아니라 타천에 의해서다.

벧엘의 제사 아마샤가 아모스 선지자에게 왕성에서는 예언을 못하도록 금지했을 때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선지자도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다.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다. 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내 백성에게 예언하라 하셨다"(암 7:14~15). 신자의 확신도, 예언자의 권위도, 전도자의 사명도 하나님의 성도(聖召)에서 온다. 예수께서 공생애에 나서면서 무리들을 부르실 때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고 또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제자들이 자진해서 예수의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 부르심에 의해서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헌신에 대해서 "내가 사도가 된 것은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 아버지 하나님으로 인하여 되었다"(갈 1:1)고 하였고, 또 갈라디어서 1:5에서는 "내 모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고 하였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성소를 받은 위대한 인물 셋이 있다. 한 사람은 출애굽기 3장에서 4장에 기록된 모세의 성소요, 둘째 사람은 이사야 6장에 기록된 이사야의 성소요, 세번째 사람은 예레미야서 1장에 기록된 예레미야의 성소다.

모세는 미디안 사막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하라는 소명을 받았다. 그러나 모세는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나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감히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고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갈 것이니 너는 두려워 말고 가라"(출 3:11)고 명령하셨다.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도 마찬가지다. "너는 열방에 가서 예언하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을 때 예레미야는 "하나님, 나는 어린아이라 말할 줄을 모르나이다"(렘 1:7~10) 하고 사양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뜻을 바꾸지 않고 "내가 너를 복중에서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출생하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다."(렘 1:5)고 말씀하였다.

이사야는 모세와는 달리 사막이 아니라 성전에서 소명을 받았다. 모세는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을 보았고 이사야는 성전에서 높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았다. 그는 환상 속에서 거룩하신 하나님, 죄 많은 자신의 진상, 그리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발견하고 "내가 누구를 보낼꼬"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하고 순종하였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전도직의 발의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자진이 아니라 강요에 의해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소에 의하여 헌신한 일꾼은 어떤 방해가 있고 어려움이 있어도 사양할 수 없고 중단할 수 없다. 고로 하나님의 성소는 성직의 발단이요, 원인이요, 지속수행의 원동력이다.


3. 목회자의 조화된 인격

조화된 인격은 기본적으로 정확한 사고로 진리를 분별하며, 모든 문제를 바로 판단하여 상담하며, 모든 성도들과 동거동락할 수 있는 풍부한 정서, 그리고 양떼들에게 끌려다니지 않는 견고한 의지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런 조화된 인격 위에 순수한 인간성을 은폐하지 말아야 한다. 나라고 하는 어떤 인간성을 어떤 장식품 속에, 성직이라는 법옷 속에 숨기고 스스로를 인간 이상의 자리에 올려놓지 말아야 한다. 거짓 없는 마음씨, 그것이 곧 힘이다. 사람을 움직이고 그 깊은 곳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힘은 어떤 기교나 재능의 우수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진실한 마음에 있다.

목회자에게 때로는 정치적인 수완도 필요하고 방법도 필요하다. 그러나 목회자의 기본상은 역시 진실성에 있다. 내가 진실해야 생각도, 행동도, 표현도 진실할 수 있다. 고로 실존철인 키에르케고르는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실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목회자는 모든 것에 앞서서 진실하고 정직해야 한다.

요사이 사회니 국가니 세계니 하는 전체라는 용어가 유행되어 개체의 진실성을 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 현대인은 대중 속에 몰래 숨어서 행동하다가 무슨 수가 날 듯하면 넌지시 나서고 자기에게 해로울 듯하면 뒷문으로 새어버리는 것이 요령 있는 처세술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인간에게는 진실의 꽃이 영원히 피지 않을 것이다 목회자는 다른 재주는 좀 부족해도 진실성만은 잃지 말아야 한다. 진실성은 목회자의 생명이요 인격의 전부다. 수완과 방법으로도 목회에 성공하는 예가 혹시 있을지 모르나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고 실패하고 만다.

해방 후 "나의 길을 가련다"라는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다. 이 영화의 내용은 두 신부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한 신부는 늙었고 또 한 신부는 젊은이다. 그들의 사상 태도 모두 대조적이다. 늙은 신부는 사고방식이 낡고 까다로운 할아버지로서 마치 옛날 초등학교 선생들이 자기 반의 생도들을 다루듯이 교구의 신자를 취급했다.

자신은 늘 정당하고 신자는 언제나 부당하다. 그래서 늙은 신부를 좋아하는 신자는 별로 없다. 그래서 이 신부와 신자들 사이에는 매사에 문제가 생겼다. 반면에 새로 부임해 온 신부는 나이 젊고 경험도 부족하다. 그러나 인간미가 풍부하고 때묻지 않은 순수한 인간성을 지녔다. 그는 까다로운 규칙이나 관습에 구애됨이 없이 살아 있는 인간을 취급하는 것이 자기의 직무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하나의 순수한 인간으로 대했다. 어느 날 그는 야구복을 입고 거리에 나갔다. 이것을 본 신자들 동리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늙은 신부에게 가졌던 경계심이 사라지고 젊은 신부에게 친근감을 갖고 성당으로 모여와 그 교회는 크게 부흥되었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목사를 만나면 숨이 막히는 것 같다. 또는 사나운 시어머니 앞에 선 며느리의 기분 같다는 이야기를 한다. 목회자의 손에는 꼭 성경책과 찬송가, 그 입에는 비난과 꾸짖는 말만 함으로 청년들이 접근하는 데 언제나 거리감을 준다. 이런 태도가 목회자의 외부적 권위를 유지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현대인에게 존대를 받기는 어렵다. "경건한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다"는 성경말씀대로 참 목회자의 생명은 그 능에 있지 모양에 있지 않다. 고로 우리 목회자는 모름지기 목사가 되기에 앞서 좋은 신자가 되야 하고, 신자이기 전에 먼저 순수한 인간이어야 한다.

다음으로 목회자는 대인관계에서 원만한 인품을 지녀야 한다. 목회자는 언제나 양을 기르고 치는 일을 한다. 그러므로 여러 계층의 삶을 만나게 되고 많은 사람을 심방하게 되고 찾아드는 많은 사람의 상담에 응해야 한다. 목회자가 만나는 많은 현대인은 제각기 다른 내용의 문제들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오늘과 같이 사회가 복잡하고 기계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서 사람들의 정신상태는 언제나 긴장상태에 있다. 고로 현대인은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도 정신적인 균형을 잃어버리고 실패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이런 현대인을 지도하는 목회자는 언제나 적절한 판단과 부동의 신념과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적절한 충고와 최선의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영국의 비국교 신학자이며 저명한 목회자였던 '리차드 박스터'는 목회성공의 비결을 상담에서 발견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신자는 목사와의 30분간의 상담으로써 10년간 예배설교에서 얻은 이익보다 더 큰 것을 발견하였다"고 고백했다. 이것은 목회자의 인격에서 풍기는 감화를 말하는 것이다.

4. 목회자의 기본 교육

목회자의 기본상의 또 하나는 충분한 기본 교육이다. 예수님은 전도 초기에 제자들에게 배우고 가르치라고 하셨고 그는 친히 제자들이 교육문제에 깊은 관심을 쏟았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의 종교운동은 그 당시로 끝나고 오늘의 세계적 종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목회자는 언제나 배우는 데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배우는 사람을 학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학생하면 초등학생, 중고등학생, 대학생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깊은 의미에서 인생은 평생을 학생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세상은 학교다. 나면서 입학하여 죽을 때 교문을 나선다.

목회자가 저지르기 쉬운 과오는 두 가지다. 하나는 모르면서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알면서 가르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아는 것은 힘이요 지식은 인생의 무기다. 산다는 것은 배우는 것이요 배우는 것은 사는 것이다. 그래서 옛 사람은 '생즉학' (生則學)이라 했다. 목회자는 평생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격변하는 사회에서 공부하지 않으면 이 사회에 적응력을 상실한다. 새로운 지식, 새로운 기술, 새로운 이론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지식폭발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20년마다 지식의 양이 배로 증가한다. 10년만 지나면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지식은 모두 낡은 지식이 되고 만다. 새 시대에 창조적인 적응을 하려면 부지런히 배우고 연구해야 한다.

목회자가 배우기를 게을리하면 조로증(早老症)에 걸리기 쉽다. 부단히 새 지식을 흡수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젊은 정열과 시간을 다 바쳐 교회 성장에만 바치다 보면 일의 분량은 많아지고 생계는 넉넉치 못하여 서재는 빈곤해지고 모습도 초라해진다. 이렇게 될 때 목회자는 자신의 주변정리의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사실 한국 목회자의 형편은 자신의 향상을 위해서 깊은 명상과 독서에 시간을 바칠 환경이 되어 있지 못하다.

이렇게 지나는 동안에 은혜의 감격도 다 잃어버리고 영감이나 사상적 내용도 없는 설교만 반복하게 된다. 케케묵은 사상과 생활의 때를 벗지 못한다. 이 때는 하는 수 없이 시대에 뒤떨어딘 폐물이 되어 끝에 가서는 자신의 짧은 지식으로 보수니 정통이니 하는 것을 내세워 자기의 부족을 은폐하고 현재의 위치를 보존하려 한다.

이런 방편으로 방언의 은사를 내세우기도 하고 신유니, 40일 금식기도니, 또는 예언이니 하는 것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일시적인 자기방어의 수단은 될지 모르나 계속적인 목회성공의 길은 아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에서는 이혼소동이 벌어진다. 신부는 날로 젊어지는데 신랑만 일방적으로 늙어지면 가정의 행복은 깨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이혼소동이 벌어지면 목회자는 권위를 잃고 본래의 사명과 지조를 상실하고 허탈감에 빠지게 된다.

고로 목회자는 꾸준히 배워야 한다. 배움에는 두 가지 정신이 필요하다. 하나는 겸손의 정신이요, 또 하나는 향상의 정신이다. 동시에 목회자는 열심으로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가르치는 것이 바로 배우는 길이기 때문이다. 흘러가지 않는 물은 썩는다. 쟁기도 내버려 두면 녹이 슨다. 구슬도 닦아야 빛이 난다. 천재도 안일 속에 빠지면 무용지물이 된다.

목회자는 배우고 가르침으로 얻은 지식을 후대에 유산으로 남겨야 한다. 그것은 바로 저술이요 글이다. 말은 사상의 표현이요 지식의 전달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남지 못한다. 그렇지만 글은 영원히 남는다. 그 사람의 인격과 업적을 후대에 남기는 것은 저술이다.

5. 목회자는 오직 한 가지 일만 위하여 신명을 바쳐야 한다.

코가콜라 회사를 창시한 사람은 그의 성공담을 이렇게 말했다. "나의 혈관 손에는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콜라가 흐르고 있다." 불란서의 혁명사를 저술한 칼라일은 "아무리 약한 자라도 그 정력을 한 가지 목적에 집중시키면 성공 못할 사람이 없고, 아무리 강자라도 여러 가지 목적에 그 정력을 분산시키면 한 가지 일도 이루지 못한다.",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물이라도 일정한 곳에 부단히 떨어지면 암석이라도 뚫을 수 있고, 노도 요란한 급류라도 바위 위에 분산되면 아무 흔적도 남지 못한다"고 했다.

성직자의 생활은 주위를 산만하게 흩어서는 안된다. 세속적인 관심이 우리의 경건한 생활을 흐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한 가지 일에 전념해야 한다. 야고보는 "샘이 한 구멍에서 단물과 쓴물을 낼 수 없다"(약 3:11)고 했다. 주님께서도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바울 사도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에게 붙잡혔다(행 9:1~9). 바울은 그 후 주께서 부르신 목적에서 잠시도 딴짓에 눈을 팔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그의 생각, 정열, 소망을 모두 집중시켰다. 성직자가 그의 사명을 완수하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나를 부르신 주님의 뜻과 계획을 실현하는 데 전력을 쏟아야 한다.

특별한 뜻을 가지고 나를 부르신 주님 한 분 외에 그 어떤 것에도 붙잡혀서는 안된다. 사람에게 붙잡히면 사람의 종이 된다. 마귀에게 붙잡히면 마귀의 종이 된다. 금전이나 허영에 붙잡히면 금전과 허영의 종이 된다. 자신에게 붙잡히면 자신의 종이 된다.

그러므로 성직자는 오직 나를 선택하신 그리스도에게만 붙잡혀야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붙잡은 그분의 뜻을 성취할 수 있다. 목회자는 뒤에 있는 일은 잊고 한 가지 일을 위해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

 

2. 목회자의 온전한 헌신

(로마서 12장 1~2절을 중심으로)

헌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고로 성경은 하나님의 성소(聖召)를 헌신의 기본으로 삼는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 신자가 될 수 없고 전도자는 더욱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은 자천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천에 의해서다.

벧엘의 제사 「아마샤」가 아모스 선지자에게 왕성에서는 예언을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렸다. 그때 아모스는 "나는 선지자도 아니요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다.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다. 내가 양떼를 몰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불러 이르시기를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다"고 대답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헌신에 대하여 "내가 사도가 된 것은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 아버지 하나님으로 인하여 되었다"(갈 1:1). 또 그는 "나를 모태로부터 택정하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갈 1:5)고 자기의 소명감을 피력하였다.

하나님의 소명에 응답한 헌신자들에게 바울은 온전한 헌신의 세 가지 원리를 제시했다.

첫째로 온전한 헌신은 우리를 부르신 거룩하신 하나님께 몸(생애)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헌신이란 말 속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하나는 몸이요 둘째는 산 제사다. 헌신, 즉 몸을 드린다는 말은 우리의 육신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이성, 감정, 의지, 재능, 재산 등 우리의 생애 전부를 드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 제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죄사함을 받기 위한 것이고, 둘째는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산 제사는 물론 죄사함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고 구속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제사다.

그러므로 헌신자가 드려야 할 산 제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아 의롭다 함을 얻게 된 것을 감사하여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산 제사를 드릴 때 우리의 몸만 바치고 마음은 딴 곳에 두는 것은 온전한 헌신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헌신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마음 없는 몸이 아니라 몸과 마음, 인격 전체이다. 즉 우리의 내적 생활, 외적 생활, 개인 생활, 가정 생활, 사회 생활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드리라는 말이다.

산 제사를 드리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 큰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거룩하다' '깨끗하다'는 사상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거룩한 것이다. 즉 우리가 드리고자 하는 몸은 십자가에서 지불한 피의 대가로 '산 몸' 그리고 죄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거룩한 몸이다. 이 속에는 성별의 사상이 들어 있다. 즉 세속적인 생활에서 구별된 삶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깨끗하다'는 뜻이 들어있다. 옛날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깨끗하고 온전한 것이어야 했다. 소나 양 같은 짐승을 드릴 때, 또는 열매나 곡실을 드릴 때 흠이 없고 깨끗한 것을 골라서 드렸다. 성경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전'이라고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전인 우리의 몸을 드릴 때 우리는 먼저 과거의 잘못된 생활을 전부 청산하고 죄악세상으로부터 성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제사로 드려야 한다. 이것이 온전한 헌신이다.

그러면 왜 우리의 몸을 드려야 하나? 헌신의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너희 몸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바울 사도의 말씀과 같이 우리의 몸은 이제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을 주고 산 것이기 때문에 내가 소유한 것은 내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이런 진리를 이해하게 되면 결론은 분명하다.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때부터는 자기의 이익이나 쾌락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살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마 6:33)고 하였고, 바울은 "그러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전 10:31)고 강조하였다. 이런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일시적인 감정이나 흥분에서 드리는 헌신이 아니라 지속적인 의지에 의한 헌신이다. 그렇다고 이런 헌신이 수도원 생활처럼 현실을 외면한 정적인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틈에서, 심한 생존경쟁 속에서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다. 이런 생활이 온전한 헌신이다.

두번째로 온전한 헌신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생활이다.

물론 헌신자들도 이 세상 한 가운데 살고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하고, 같은 신문을 읽고 텔레비전을 보고, 백화점이나 다방에도 가고 영화관에도 자유로이 출입을 한다. 그러나 헌신자는 이 세상에 속해버리면 안된다. 그 이유는 이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헌신자로 자처하면서 아직도 이런 부르심에 대한 인식이 분명치 못한 지도자는 온전한 헌신자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면 헌신자들이 본받아서 안될 '세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대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설명할 수 있다. 자연의 세계를 말하기도 하고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고 이 세상에 가득한 죄악과 정욕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이 지적한 '세대'란 말은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과 대립하는 세대, 또 하나는 지나가는 세대를 말한다.

사도 요한은 세대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렸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니라." 이는 진리에 대항하는 세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 1서 2:15~16). 이는 지나가는 세대를 말한 것이다.

사도 요한이 정의한 대로 이 세상의 특징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소유에 대한 자랑을 내세우는 데 있다. 그러면 '육신의 정욕'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영혼보다 육신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즉 육체를 기초로 하는 부패한 욕망과 그 생활이다. 부정과 향락, 그리고 방탕을 위주로 하는 생활이다. 육을 중심으로 하는 모든 생활, 즉 물질의 실재만 인식하는 유물주의다. 육을 기초로 하는 모든 문화, 즉 감각문화(Sensational Culture) 또는 과학주의(Scientism)이다.

안목의 정욕은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집으로 말하면 하층구조인 기초보다 눈에 보이는 상층구조를 더 사랑하는 것이다. 눈의 만족만 일삼는 사상과 생활을 의미한다. 가시적인 것에만 관심을 쏟는 외관주의다. 이생의 자랑은 생명보다 물질을 더 중히 여기는 생활태도다. 물론 육신 안목, 소유 어느 것도 그 자체가 악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영혼을 무시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외면하고 그것들을 생명보다 더 존중할 때 인간은 타락과 세속화 그리고 죄악에 빠지게 된다. 오늘날 모든 매스컴을 통해서 듣고 보는 것이 어떻게 하면 육신을 배부르게 하고 소유욕을 충족시킬까 하는 것뿐이고, 그 이상의 하나님의 문제 영혼의 문제 영원의 문제 등은 완전히 배제되어 버렸다.

그러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본받지 말라'는 말은 이 세상의 변천하는 것과 동화되지 말라는 뜻이다. 즉 헌신자는 이 세상 풍조를 분별 없이 따르지 말라는 뜻이다.

참된 교회의 본질은 세상과 싸우는 것이다.(Church Millitant) 그런데 이 세상과 영적 싸움을 그치고 세상 풍조를 마구 따라가면 교회는 생명을 잃고 무기력해지며 타락하고 만다.

물론 헌신자라고 해서 이 세상을 떠나서는 잠시도 생존할 수 없다. 그러나 성직자가 세상에 동화되어버리거나 흉내를 내어 세상과 빛깔이 같아지면 안된다. 세상이 제국주의를 제창하면 이에 동조하고 세상이 사회주의를 제창하면 그것에 흡수되어 주체성을 잃게 되면 결국 맛 잃은 소금이 되고 만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에게 자기를 본받고 따르기를 원한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서 완전히 동화된 다음에는 믿는 사람도 별 수 없구나 하고 차버린다. 그때는 맛 잃은 소금처럼 쓸데없이 밖에 버려져 사람들의 밟힘이 된다. 배를 산꼭대기에다 갖다 놓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 배는 물 위에 떠야 제구실을 한다. 그러나 배 밑창에 구멍이 뚫리면 결국 침몰하고 만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 살고 세상을 위해 산다. 그러나 이 세상에 속해버리면 안된다. 이 말은 역설이지만 진리이다. 고로 그리스도는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에 속하면 안된다고 강조하셨다(요 15:19; 17:16~17). 참된 헌신자는 분별없이 이 세대를 본받아서는 안된다. 바다 한 가운데 의연히 서 있는 바위(암초)를 상상해 보자. 만조 때가 되면 조수는 크게 소리치면서 육지로 그 세력을 밀고 나가면서 바다 위에 떠 있는 모든 것을 움직인다. 그때 조수는 바위를 향해 너도 우리와 함께 저 육지로 가지 않겠느냐고 유혹한다. 그러나 바다 밑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바위는 NO라고 단호히 거절한다. 조수는 육지에서 퇴조할 때 다시 바위를 유혹한다. 너는 우리와 함께 저 바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 살고 싶지 않느냐? 그러나 바위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의연히 자기 위치를 지킨다. 이 바위의 꿋꿋한 태도가 바로 이 세대를 대하는 헌신자의 자세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헌신자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이유는 헌신자는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물리학에서는 소위 '불가입성의 원칙'이란 것이 있다. 이 원리는 한 공간을 같은 시간에 두 물체가 점령할 수 없다는 원리이다. 예를 든다면 우리가 병에다 물을 넣은 때 물이 들어가지 전에 먼저 그 병 속에 있던 공기가 나와야 들어갈 수 있다. 물과 공기는 동시에 같은 그릇에 들어갈 수 없다는 원리다.

이와 같이 헌신자는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하거나 섬길 수 없다는 말이다.

둘째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할 이유는 이 세상도 그 속에 있는 모든 정욕도 다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잠깐이다. 강물같이 흘러가고 새와 같이 날아간다. 꽃과 같이 떨어지고 바람 같이 지나간다는 것이 성경 전체의 교훈이다. 고로 바울 사도는 "이 세상의 모든 형적은 지나간다"(고전 7:31)고 하였고 "보이는 것은 잠깐이라"(고후 4:18)고 하였다.

개인의 형적도 지나간다. 아름답고 원기가 왕성하고 정열이 넘치며 앞날이 구만리 같이 느껴지던 청소년 시절도 잠깐 동안에 지나간다. 어느새 중년기에 접어든다. 그때는 인생이 한없이 바빠진다. 정치에 바쁘고, 사업에 바쁘고, 자녀 교육에 바쁘고, 이런저런 주어진 일에 동분서주 하다 보면 인생이 열매 맺는 중년기도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다. 어느덧 노년기에 접어든다. 그때는 전도서 12장의 말씀과 같이 "강하던 허리가 구부러진다. 눈이 어두어진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머리에는 살구나무 꽃이 피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노년기도 지나간다.

역사의 흔적도 지나간다. 일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간다. 한 세기가 지나고 두 세기도 지나간다. 그렇게도 복잡하고 문제가 많던 20세기도 앞으로 몇 해를 남겨놓고 저물어 간다. 이러는 동안에 문명의 흔적도 나라의 흔적도 지나간다. 세력의 형적도 영광의 자랑도 모두 그 자취를 감추고 만다.

성지에 있는 솔로몬 동산에 서서 보면 이천 년 전에 그렇게 찬란했던 솔로몬의 영광도 다 사라지고 지금은 동산에 동 몇 개밖에는 남은 흔적이 없다. 고대의 철학과 과학, 예술 등 모든 문화의 발생지였던 아테네도 지금은 옛 신전의 남은 기둥 몇 개밖에는 찾아볼 것이 없다. 한 때 그렇게 찬란했던 헬라문명의 형적도 다 지나갔다. 천 여년 동안 온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 그리고 근동 일대를 호령하던 문화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오늘도 많은 관광객들이 세계 도처에서 모여든다. 그러나 그들이 찾은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이곳저곳에 부러진 석상, 부러진 석주 외에 남은 것이 없다. 로마의 문명도 지나갔다.

멀리 갈 것 없이 신라의 고도 경주에 가서 천년 신라의 문호를 더듬어 보라. 남은 것이 무엇인가? 왕들의 무덤 외에 또 무엇을 찾을 수 있는가? 신라도 지나갔고, 고려도 지나갔고, 이씨 조선왕조도 지나갔다. 해방 후에 세워졌던 자유당 정권도 민주당 정권도 공화당 정권도 군사 정권도 다 지나갔다. 이데올로기도 사상도 지나간다. 100년 동안 인간을 철의 장막 속에 묶어 놓고 모든 자유를 박탈한 공산주의 형적도 지나갔다. 옛 글에 "열흘 가는 붉은 꽃이 없고, 10년 가는 세도 없다"는 말은 옳다. 성지자는 이렇게 속절없이 지나가는 것을 붙잡지 말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온전한 헌신은 항상 새로워져야 한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헌신한 성직자의 생활은 소극적으로는 세상풍조에 대항하여 싸워야 하고 적극적으로는 모든 면에서 늘 새로워져야 한다. 근년에 와서 현대인이 가장 많이 쓰는 말 중에 혁신이니 혁명이니 하는 말이 있다. 정치혁명, 산업혁명, 신학혁명이니 하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이런 용어들의 근본 뜻은 낡은 것, 옛 것을 깨뜨려 버리고 새것을 세운다는 뜻이다. 즉 낡은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 질서를 세운다는 뜻이다. 로마서 12:2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라"는 것은 전면적인 정신적 변화를 의미한다. 이렇게 새로워지면 소극적으로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적극적으로는 '새 사람'을 입는 것이다.

에베소서 4:22~24에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거룩함을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위의 성구 속에는 '옛 사람'(Old man)을 수식하는 세 개의 말이 있다.

첫째는 "유혹의 욕심을 좇는" 옛 사람이다. 현대인들은 권세욕, 명예욕 등의 유혹을 많이 받고 있다. 둘째로는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이다. 인간의 육신도 늙으면 썩고 더러워지고 죽으면 냄새가 나듯이 도덕적으로 영적으로도 부패하면 냄새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셋째로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이다. 구습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고 일시적인 것이다. 새 시대, 새 유행, 새 발명도 예외 없이 외형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므로 때가 지나면 다 낡아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헌신자는 이렇게 변하고 낡아버리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적극적으로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이다.

로마서 12:2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새 사람이 되라"는 말과 에베소서 4:24의 "네 속 사람을 새롭게 하라"는 말씀은 날마다 새로와지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변화는 먼저 영혼이 새로와지고 그 결과로 사상도 말도 하는 일도 새로와진다는 뜻이다.

변화를 과학적으로 설명한다면 하나는 물리적인 변화이고, 둘째는 화학적인 변화다. 물리적인 변화는 그 형태만 변하고 본질은 그대로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화학적인 변화는 형태와 본질이 모두 변하는 것을의미한다. 고로 마음의 변화는 화학적인 변화와 같아서 속사람의 변화에 따라 겉사람, 그리고 외적 생활도 모두 변하게 된다.

인간의 근본이 새로와져야 그의 사역도 새로와지고 주변도 모두 새로와질 것이다. 목회자가 근본이 새로와지면 그의 생각도 행동도 새로와질 뿐 아니라 그의 목회구조도 목회형태도 새로와진다. 목회자가 옛 사람 그대로 있는 한 그에게서 아무 것도 새로와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고로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고 하였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자신이 항상 새로와져야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선하시며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바로 이해하게 되고, 또 그 뜻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