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아천 정진경 목사의 삶과 신학

조향록 목사
(기독교장로회 전 총회장, 초동교회 원로목사)


 

저는 이 시간  먼저 가신 정진경 목사님을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김명혁 목사님께서 쓰신 추모의 글을 읽으며, 구절 구절마다 눈물을 씹으며 추모의 정을 되새겼습니다. 참으로 좋은 목사님을 동역자로, 친구로 당대에 함께 했다는 것이 저에게는 그지없는 축복이고 영광이었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신촌성결교회 담임목사로서 목회의 전 생애를 바치셨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계는 정진경 목사님과 신촌성결교회를 한 몸처럼 느꼈습니다. 목사님은 신촌성결교회의 중흥을 이루어 모든 목회자들의 사표가 되셨습니다. 목사님은 성결교단의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는 한 시대의 큰 지도자로서 존경과 신뢰를 받으셨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신촌성결교회의 목사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영향력은 신촌성결교회를 넘어서 한국교회 전반에 확장 되어 갔습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민족복음화 운동으로 한국기독교 인구가 급격히 성장하던 시기에 그분의 지도력이 미치지 않은 선교 운동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 결과 그분이 은퇴하실 때, 그분은 이미 한국교회의 큰 목사님이셨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항상 그러하셨지만, 인생의 후반부에 접어들수록 더욱 자신을 낮추시며 어느 자리에 가셔서도 앞에 나서지 않으셨습니다. 교계 모임의 회장단이나 고문단에는 의례히 목사님 이름이 올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 스스로 원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자리에 연연하시지도 않을뿐더러, 그것을 붙잡으려는 어떤 노력도 일절 하시지 않았습니다. 항상 겸손하시고 항상 인자하시고 항상 화평하시고 참으로 좋은 목사님이요 목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신촌성결교회의 목사님이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를 빛내신 목사님이셨습니다.

이러한 정진경 목사님의 성품과 영향력은 한국교회를 하나로 뭉치게 하셨습니다. 70년대 후반 이후 급격히 교회가 성장하고 교회인구가 확장되면서 교단의 분열현상이 생겼습니다. 해방이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3개 교단이 한국교회협의회를 조직하였고(NCC), 각 교단은 동시에 세계교회협의회에(WCC)에 회원교회로 가입하여 한국교회의 연합을 이루어 왔습니다. 그런데 70년대 당시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에 항거하는 교계 일부 목사님들이 한국교회협의회를 반정부운동의 거점으로 삼으면서, 한국개신교회의 단일 협의기관이었던 한국교회협의회와 가맹 교파와의 관계가 소원해졌으며, 그 결과  기존교파의 내부적 분열이 가속화되어 수 년 내에 30여 교파로 분열, 분립하게 되었습니다.

정진경 목사님과 저는 고 한경직 목사님을 모시고 여러 차례 한국교회 개신교회 전반의 분열현상을 어떻게 수습할 수 있을까를 논의하셨습니다. 당시 한경직 목사님은 NCC의 전직 회장이셨고, 저도 NCC의 부회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그 결과 NCC를 그대로 유지하는 동시에 30여 개 교파로 나눠진 교회들을 함께 묶어 협의체를 조직한 후, 이를 발전시켜 하나의 연합기구를 이루도록 하자는 데 뜻을 모았습니다. 그것이 오늘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탄생입니다.

고 한경직 목사님의 카리스마적 지도력과 고 정진경 목사님의 “소리 없는 지도력”이 이러한 큰 일을 이룰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하나됨은 교회의 머리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입니다. 나는 위에서 정진경 목사님을 “소리없는 지도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로부터 배운 지도력이요, 그것이 바로 목사가 세상을 향해 가져야 할 지도력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한국개신교의 교회신학의 교류를 위해 조직된 복음주의 신학협의회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고, 때로 회장직도 감당하셨습니다. 이로써 성결교단이라는 한 교파교회가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을 잇는 전세계 복음주의 신학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세상 안에서 하나의 몸으로 존재하시는 그리스도의 몸 된 세계 교회와의 관계형성이라는 신앙고백적 일치를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을 통하여 한국성결교회의 교파신학적 특수성은 이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복음적 신앙고백 위에 근거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도 바울과 성 어스틴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더욱 선명하게 선언된 복음적 신앙전통에 연결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수평적으로는 역사적 교회의 신앙고백 그리고 수직적으로는 주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직결되어 주의 몸 된 교회로서 그 뿌리를 확고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성결교단은 한국개신교회의 복음주의 신학전통을 계승하고, 또 전승하는 주체적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나는 신촌성결교회가 신촌포럼을 설치한 그 발상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금번 발제를 강연을 준비하면서 그간 진행된 신촌포럼의 주제들을 읽어보면서, 신촌성결교회는 이미 한국개신교파 전체를 포함하고 대표하는 교회로서 선교의 장을 인간생활의 전영역으로 확대하여 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사역은 신학적 근거가 없이는 시작할 수 없고 동시에 그 신학적 근거는 목회현장의 실험적 요망이 전제되지 않고선 시작 할 수 없는 사역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나는 정진경 목사님의 신촌성결교회 30년 목회가 그 기초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진경 목사님의 목회 일생은 이렇게 신촌교회의 목사요, 한국교회를 위한 목자적 목사로 그리고 복음주의 개혁파 신학의 산 증인으로 큰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불러 세우신 주님께서는 그것으로 끝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은퇴 후에도 그에게 건강을 주시고, 총명도 흐리지 않게 하시고, 열정도 식지 않게 하시며, 또 다른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부분이 바로 제가 오늘 이 포럼에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본론에 앞서 긴 서론을 이야기한 데는 나름의 까닭이 있습니다. 한국교회 신도들의 일반적 통념이 되고 있는 목사의 이미지는 개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로서, 교계에 대한 공헌, 사회에 대한 공헌 등은 해도 좋고 안해도 무방하게 여깁니다. 다른 한편으로 목회자 자신들도 현장 목회를 안하면 자기는 목사가 아닌 것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한국교회가 목사 정년제를 채택하면서부터 목사직 그 자체가 철저히 세속적 종교 직업화되어 그 본질이 변질되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이 불러 세워주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요, 주님의 종입니다. 때문에 그가 세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의 거룩한 사명을 정지할 수 없습니다. 월급이 없다고 목사직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초빙하여 주는 교회가 없다고 목사의 사명을 정지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나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씨 뿌리는 비유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씨 뿌리는 밭이 옥토만은 아닙니다. 옥토에도 뿌리지만, 길바닥에도 뿌립니다. 가시덤불에서도 돌짝밭에도 씨를 뿌린다고 했습니다.

목회자가 하나님에게 받은 복음전파의 사명은 옥토에만 뿌리는 것이 아니라 길에도 가시덤불에도, 돌짝밭에도 뿌리는 것입니다. 목회자 사명의 영역은 교회 안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만 국한되는 것은 유대교의 성전 중심적 종교입니다. 성전 중심적인 유대교와 같은 교회는 목사가 제사장처럼 교회 안에서 예배만 잘 인도하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은 Temple입니다. Temple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의 이름은 에클레시아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역사 안에서 성령으로 사역하시는 그리스도 복음사역의 현존체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사역의 영역은 제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속하셔서 최후의 완성에 이르게 하시는 과정, 그 모든 시대, 모든 곳에 목사가 꼭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그 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신촌성결교회 담임목사, 한국 개신교회를 통합하고 이끌어 가신 목자의 사명, 그리고 한국선명회 이사장으로서 사회봉사에 기역한 업적과 평화통일 정책 자문위원회 종교분과위원으로서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우리 동포들을 규합하고 고국과의 연결 관계를 공고히 다지게 한 공적 등 온 민족적인 노고는 말로 표현하기에 부족할 뿐입니다.

이러한 정 목사님의 사회 활동을 살펴보면 하나는 민족통일을 위한 기반조성 활동이며, 다른 하나는 기독교 사회사업기관입니다. 한국선명회는 6.25사변에서 부모 잃은 어린고아들을 도우려고 미국인이 시작한 사업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그 책임을 맡은 이후에 국가기관에서도 감당하기 힘든 큰 사회사업 기관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불행한 민족적 수탈 시기에 고아들을 돕는 일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위로와 위안의 등불이 됨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은퇴하시면서 그 뒤를 정진경 목사님께서 이으셨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이 이사장으로 재임하신 기간 두 분의 실무자가 공직했습니다. 한분은 사회사업의 전문가이시고 세계 기독교 봉사기관에 크게 봉사하신 분이십니다. 국내에서 사회봉사 운동가들 중에서도 1인자이십니다. 그의 뒤를 이은 다음 분은 평신도이시지만 아세아 기독교협의회의 간사와 제네바에 소재한 교회협의회 국제 국장 등으로 재직했던 유능한 인재입니다.

저는 이 두 분의 생애 전 과정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유능한 인재를 선택하여 그 자리에 세우는 것도, 그리고 마음 놓고 그들의 지식과 경험, 꿈과 능력을 이 선한 사업에 아낌없이 쏟아 부을 수 있게 하는 일은 바로 정진경 목사님의 “소리없는 지도력”이었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한국선명회 이사장직을 그의 목회자로서의 사명 수행의 연장으로 생각하시고 세워놓은 유능한 지도자들과 그 산하에 있는 모든 종사자들을 목회하시고 그 사업을 위해 쉬지 않는 기도로서 그 직무를 감당하셨습니다.

금번 신촌포럼에서 제가 맡은 주제는 “정진경 목사가 교회와 사회에 끼친 영향”입니다. 내가 아는 정진경 목사님은 어떤 일에 참여 할 때는 자신의 전부를 바치겠다는 사명감으로 임하셨으며, 그 일 속에 목회자가 감당해야 할 일들을 찾아 목사로서 충성을 다하는 분입니다. 개교회를 섬기거나 한국교회 전체를 섬기면서 또한 사회 봉사 기관을 섬기면서 그 일속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구현하려는 복음전파의 사명의식을 더욱 날카롭게 자각하는 분입니다. 그분은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 사람들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목사직에 철저히 헌신한 분입니다.

요약하여 말하자면 그분은 복음전파의 장으로 길가, 가시덤불, 돌짝밭을 가리지 않고 씨를 뿌렸던 농부입니다. 인간이 사는 곳이면 그 어느 곳, 그 어느 일터에도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 목사가 가지 못할 자리가 없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 같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를 말로 끝내지 않고, 길처럼 굳어진 땅은 갈아엎어 옥토로 만들고 가시덤불이면 가시넝쿨을 뽑아내고 돌짝밭이면 돌들을 집어내어 옥토를 만들어가면서 씨뿌리는 농부처럼 가슴에 억척같은 복음전파의 사명을 불붙이고 그 자리에 헌신하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참여한 자리에는 언짢은 소리, 다툼이나 고함소리가 들려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일하시는 그 일터에서 갈등이 전혀 없었기 때문은 아닐 겁니다. 그분이 지조가 없으신 분도 아닙니다. 그분은 옳고 그름이 분명한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그가 참여한 일터에서는 언제나 조용하고 언제나 다정하고 언제나 평화로웠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던지 그분은 자기 마음을 비우고, 맑은 마음으로 모두를 포용하는 “소리없는 지도력”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진경 목사님에게 내려주신 은혜의 선물인가 생각합니다.

정진경 목사님과 저는 생신날짜가 틀려서 한살터울의 형제이지, 동갑친구이기도합니다. 우리 두 사람은 스물네 살이 되던 1945년 8.15 해방을 맞았습니다. 여기 앉으신 대부분은 나라 잃고 살아본 경험이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나라를 잃으면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나라 없이 살아본 사람이 아니면 나라가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은 해방된 내나라, 내 땅에서 살지 못하고 남한으로 내려와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고향 없는 나그네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한민족 최대의 불행이 무엇인가 물으면 두말도 없이, “남북 분단이요 동족상잔이였오.”라고 대답하게 됩니다.

우리 두 사람은 대한민국 정부가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를 조직하면서 그 조직 속에 종교위원회를 두고 개신교회 목사로서 위원으로 참여하라는 위촉을 받았습니다. 종교위원회는 국내 7개 종단을 대표하는 위원으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그 모임을 시작하면서 위원 모두는 모든 종파가 각기 고유한 신앙에 대한 신앙고백도 할 수 있고 종교간 진리에 관한 학술적 토론과 논쟁도 할 수 있지만 종교 우월감이나 감정적인 타종교 배척운동 같은 행위는 남북이 통일될 때까지 만이라도 피차 자제하는 것이 민족 통일에 간접적이나마 좋은 봉사가 된다는데 일치했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미국에서 한인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님 한분이 북한을 왕래하면서 김일성대학에서 강의도 하면서, 아직 정착하지 못한 미국의 교포사회에 불멸의 불씨를 지피고 대한민국을 비방하는 거점역할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 목사님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고국에 돌아와 영락교회 부목사로 몇 해 동안 복직하시고 다시 미국에 들어가신 분입니다. 그는 6.25사변 전 제가 목회했던 신사동교회에서 국내 보수계통의 신학교에서 수학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제가 섬기는 교회 유치원 보조였고, 그의 장모님은 교회 전도사님으로 봉직하면서 저와는 가족처럼 지냈던 분들이었습니다. 정진경 목사님도 그 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평북 신의주 출신으로 한경직 목사님께서 일제 말기까지 목회하시던 신의주 제2교회의 교우 자녀였던 것 같습니다.

정진경 목사님과 저는 이 문제를 계기로 우선 미국을 위시한 주변 4대국에 있는 우리 교포 사회를 자세히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고국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맙게도 그 뜻을 전달받은 사무처가 우리 두 사람의 경비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때까지 미국 교포 사회는 3층 구도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제1층은 해방전?후 미국에 유학을 갔던 분들이 6.25사변 등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남아있던 분들로, 제1세대 즉 뿌리교포들입니다. 그분들은 일제치하에 이미 미국에 정착한 우리 교포들과도 연계가 잘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미국시민권 소유자들이었고 대부분 대학 교수나 연구기관 혹은 행정기관 등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다음 층은 6.25사변에 주한 미군들과 결혼한 한국인 신부들과 그 가정 그리고 주한 미군과의 교류를 통해 미국에 이민을 간 한국인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계층입니다. 마지막 층은 6~70년대 유신정권 출발이후 다량으로 미국에 이주해 간 우리 동포들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계층 간의 수직적 연결 관계가 단절되어있고, 계층 내에도 아직 중심점을 잡지 못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우리 둘은 그 탐방을 통해 두 가지 점을 요약했습니다. 그 하나는 고국에서 교포 사회 각 계층의 중심이 될 만한 지도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서 교포 사회의 구심점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고국이 해외교포를 돕는 가장 근본적인 일이 무엇이겠는가의 문제 입니다. 이미 고국을 떠나 이민을 와있는 사람들은 그 땅에서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그 땅에 정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을 진정으로 돕는 길은 그 나라에서 소수 민족이라는 불리한 입장에서 그 나라의 지도자 그룹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교포들이 거주하는 나라와 사회에서 지도자 그룹에 진출하는 것은 그들 자신과 후손들의 성공은 물론 고국인 한국을 위해서도 가장 실질적인 공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후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사무처의 경비지원을 받아 미국 동, 서부와 아시아에서는 일본, 싱가폴, 유럽에서는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독일 프랑크푸르트, 후에는 러시아의 모스크바 등에서 그 지역 출신 지도자들 3, 40명과 자유스러운 교류를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평가가 되겠지만 그 기간 동안 진행된 행사가 교포 사회의 연대의식을 강화하여 구심점을 이루었고 그들과 고국의 관계 형성에 기초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민족적 봉사는 정진경 목사님과 저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개인적으로는 지극히 감사한 기회였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저희 두 사람은 그렇게도 애절하게 내 나라 없음을 서러워하며 자라난 사람들입니다. 나라를 찾은 후에는 북한의 남침으로 비롯된 전쟁에서 국토가 쑥밭이 되고 수백만의 생명들이 희생당하는 시대를 지나왔으며, 유신이라는 험난한 정치사를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목회직을 은퇴한 이후 이렇게라도 나라와 민족에 봉사할 기회를 얻게 됨을 지극히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주제에서 벗어났다고 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이러한 긴 역사의 이야기들을 짧게나마 말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말하지 않으면 정진경 목사님의 인생 한 토막이 삭제되는 것 같은 안타까운 심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데로 정진경 목사님은 한국교회와 민족의 역사 속에서 많은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저는 정진경 목사님과 같은 분이 함께 하지 않았으면 사회봉사와 민족통일의 기반조성과 같은 큰 일을 이룰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모든 경우에 자신을 목사로 소개하였으며, 그가 일하는 자리에서 목사로서의 사명의식을 한 시라도 소홀히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진경  목사님은 회중 속에 앉아있는 교인들에게는 언제라도 다가가 따스하게 손을 잡고 반갑게 흔드는 다정한 분으로 비춰졌습니다. 기독교가 무엇인지, 교회나 목사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더 나아가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편안하게 웃음으로 인사를 나누면서 친구처럼 다정함을 느끼게 하는 분이였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디서나 목사의 티를 내지 않으면서도 목사님으로서 거부감 없이 받아지게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의 그 다정함, 그 겸손함, 그 순결함, 그 진실함 자체가 그리스도 복음의 증인이 되고 믿지 않는 분들에게도 교회를 쳐다보아야할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진경 목사님 그분은 교계에서 일등 목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교회 밖에서 보는 분들에게도 일등 목사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정진경 목사님 자신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자기를 꾸미고 치장하는데 완전히 무감각합니다. 그는 자기 뒤에 지지자들이 따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분은 자기 명함에 빈틈없이 직함을 적어놓지도 않았습니다. 목사로서 그의 가장 큰 결점은 목소리가 항상 작은 점입니다. 하늘과 땅이 쩡쩡 울리도록 고함을 치지 못합니다. 그분은 옛날 선지자 엘리야의 경험처럼 지극히 작고 희미함 속에서 가늘게 들려오는 야훼 하나님의 음성을 그 자신이 그렇게 체험하고 사셨습니다. 그분도 하려고 하면 할 수 있는 분이신데 그는 제 일인자의 자리는 감히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분명한 까닭이 있습니다. 그 첫째 자리에는 이미 그 자기 자신이 모시고 계신분이 앉아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래 목사에게 배당된 자리에는 제 일인자의 자리가 없습니다. 종으로 불러주신 예수님만이 그 자리에 앉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일찍부터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일생동안 어디에 가시나 맨 앞자리에 나와 앉지 않았습니다. 정진경 목사님, 이 분은 교회 안에서는 선한 목자로서, 한국 교계에서는 “소리 없는 지도력”으로 화목케 하는 자 그리고 한국사회에서는 그 어디에서나 참 목사, 좋은 목사님의 귀감을 보이시고 가셨습니다. 정진경 목사님, 다시 한번 애도의 정을 표하면서 제 강연을 끝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