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계시와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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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라고 하는 용어가 종교적으로 사용될 때 이것은 기독교에서 뿐 아니라 많은 종교가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말이 된다. 그러나 기독교의 계시는 일반 종교에서 말하는 계시와는 근본적으로 그 내용과 의미를 달리한다. 그 이유는 세상의 종교와 기독교는 계시에 있어서 그 출발점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생활을 거룩하고 가장 높은 곳으로 이끌어 올리려는 시도, 즉 신을 탐구하는 인간의 노력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계시는 이 같은 인간의 노력이나 자연적인 인식 혹은 경험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숨어 계시던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자신을 표시하시는 것이다. 계시는 구원을 목적으로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행위이고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것이며 성령을 통하여 완성되는 화해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인 동시에 구원의 종교이다.

 

시간과 영원

그러면 기독교의 계시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키엘케골'은 계시의 출발을 시간과 영원과의 무한한 질적 차이에서 찾았다. 그는 시간에 의하여 제한 받은 유한한 인간은 시간을 초월한 무한하신 하나님을 파악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기 때문에 유한은 무한을 포함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키엘케골'의 이러한 단편적인 문장 속에 제시된 명제는 변증법적 신학이라고 불리는 것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님이요 인간은 영원히 인간이기 때문에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통로는 완전히 단절되어서 하등의 연속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선 인간은 완전히 상실된 죄인이요 먼지와 같고 재와 같은 죽은 존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으로부터 거룩하신 하나님에게로 가는 통로는 전혀 열려 있지 않다. 즉 유한은 무한에 대하여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신학은 19세기의 인본주의, 자연주의 신학에 내린 하나의 쇠사슬이요, 또한 자고 있던 신학자들의 유원지에 던진 한 개의 폭탄이기도 했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은 영원토록 암흑의 길을 걷는 맹목적인 나그네에 불과한가? 아니다.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가는 길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내려오는 길은 있다. 이것이 계시다. 즉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육(受肉)에 의해서 성소의 휘장은 위로부터 밑으로 찢어진 것이다. 이러한 단 한번의 사건에 의하여 죄인은 의롭다 함을 받아 인간에게 감추어져 계시던 하나님을 표현된 모습으로 직접 뵈올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특별계시 즉 하나님의 아들의 수육은 위로부터의 완전한 은총이며 하등의 인간의 참여나 인식 능력에서 온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 신앙의 특색은 완전히 독자적인 특별계시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이 계시는 본래 개인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한 인격에 대해서 다른 인격인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의 전달이다. 그러면 그 전달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추상적인 막연한 진리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즉 자신을 구원자로 또는 긴 인생의 반려자로서 구현하신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면 이런 하나님은 어떠한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나? 그는 세 가지 중요한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을 계시하셨다. 이 세 방법은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다.

 

구약역사에 나타난 계시

그러면 첫째로 구약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강림하시기 2천년에 '갈디아 우르'에서 이주한 자손들의 역사 속에서 그의 힘있는 직접적인 행동에 의하여 자신을 계시하셨다. 구약성서는 본래 하나님의 행동의 기록이다. 그 이유는 구약성서의 중심이 하나님은 택한 민족 속에서 무엇을 행하셨나 하는 행위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계시는 시간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하나의 이념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건의 내용 하나 하나를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고로 구약성서가 다른 종교의 경전과 현저하게 다른 점은 그 역사적 성격에 있다. 다른 경전은 주로 시간을 초월한 절대적 실재에 관한 진리를 전하려는 신탁(神託)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구역역사는 하나님이 행하신 구체적인 일의 기록이다. 예를 들면 모세의 율법은 그 모든 규정이 야웨와 '이스라엘'과의 계약의 체결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율법적인 문서와 다르다.

그 계약이란 것은 초시간적인 신인관계에서 체결된 것이 아니고 역사상 특정한 경우에 '호렙' 산에서 체결된 것이다. 최근 어떤 학자는 구약역사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서 다음의 다섯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족장들의 소명과 족장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 둘째는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으로부터 해방, 셋째는 '시내' 산에서 체결된 계약, 넷째는 '가나안' 정복, 다섯째로는 '다윗'왕의 자비다. 이러한 역사적 행위를 신앙의 운을 통해서 해석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

그리스도의 강림 이전 제 8 세기경의 위대한 예언자들은 모든 나라의 흥망을 내다보았고, 자신의 소왕국의 운명도 보았다. 또 그들의 강대한 여러 나라들의 멸망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보았고 동포의 비참과 패배 중에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불가피한 결과를 보았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구원사는 분명히 불충분한 역사다. 그것은 먼 앞날을 내다보는 역사에 불과하였다.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의 상실과 더불어 예언자는 점점 종말, 주의 날, 장차 올 왕국을 주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구약역사만을 통해서 표현된 하나님의 계시는 불완전하다.

 

수육을 통한 계시

고로 하나님은 두 번째 방법으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수육하셨다. 우리는 수육에 의해서만 계시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 신학자 '칼 바르트'는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는 별개의 것이 아니며, 또한 그리스도에 의해서 실현된 화해와도 다르지 않다고 했으며, 계시를 말한다는 것은 바로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고 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며, 그리스도는 바로 계시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인격적인 하나님은 인간의 인격과 몸을 입고 나타나는 이외의 방법으로 자신을 완전히 계시할 수는 없다. 그러면 이런 사실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으며 무엇에 의하여 완성되는가?

 

성서의 계시

그리스도의 수육에 의한 객관적 계시는 성서에 의해서만 그 입증이 가능하다. 성서는 계시의 기록으로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과거 수십 년에 걸쳐서 자유주의 신학은 시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일반화된 종교적 경험이나 인간 이성에 의하여 이해할 수 있다고 믿고 성서만이 하나님의 계시를 입증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성서는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의 종교경험의 기록에 불과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가장 가까운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그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의 은총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간성은 선천적으로 선한 것이기 때문에 종교교육은 인간 구원의 길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자유주의자들이 계시의 절대성을 상대화하고 있던 그 때에 세계 제1차대전이 일어났다.

인본주의적 낙관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은 일단 좌절되고 말았다. 자유주의 사상이 무너짐과 동시에 신학과 성서 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운동에 있어서 성서는 새로운 중요성을 띄게 되었다. 그 이유는 성서만이 역사 속에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산 증언이라고 깨닫게 된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계시·신앙·이성

끝으로 계시와 신앙 그리고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위에서 설명한대로 구약역사, 수육하신 그리스도, 그리고 성서에 의해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계시는 계시 그 자체로서 끝나지 않는다. 계시는 반드시 인간들을 향해서 응답을 요구한다. 그러면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이 응답을 거부하는 경우를 불신앙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응답은 세 가지 요소를 내포한다. 첫째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동의이며, 둘째로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순종이고, 셋째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혹은 신임이다. 따라서 신앙은 진리의 내용과 주장에 있어서 반드시 이성을 필수조건으로 삼는다. 신앙은 계시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에 종교의 문제요 영혼의 문제다. 그러나 이성은 이 계시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문화의 문제요 현실의 문제이다. 이 두 기둥의 어느 하나가 무너지면 인간의 역사는 깨지고 인류의 문명은 절름발이가 될 것이며 인생은 불행하게 된다. 고로 성서는 신앙과 이성의 중요성을 똑같이 강조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히11:6),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다" 라고.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네 가지 견해가 있었다.

첫째로 신앙과 지식은 동시에 유효하다. 그러나 양자는 완전히 독립적이며 관계가 없다는 주장이고, 둘째는 지식이 신앙에 종속한다는 견해다. 이것은 지식의 직분은 신앙이 지시하는 바를 받아서 인간의 지성에 맞도록 하는 것이다. 셋째는 신앙이 지식에 종속한다는 견해다. 이 견해는 신앙이 지시하는 것 중에서 이성이 만족할 수 있는 것만 골라서 받아들일 수 있다는 합리주의다. 네 번째는 신앙과 이성은 서로 대립하거나 상반되는 것이 아니고 상호보완한다는 견해다. 즉 믿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전체의 두 면과 같다. '해절턴' (Rogen Hazalton)은 이에 관해서 네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하나는 신앙은 이성에 선행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신앙은 이성을 필요로 한다. 셋째는 신앙은 이성을 추구한다. 넷째는 신앙은 이성을 획득한다. 고로 이성은 신앙을 말살하는 것이 아니라 성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과 이성의 관계는 마치 불과 나무의 관계와 같다. 불이 있어도 나무가 없으면 불꽃은 일어나지 않는다. 또 아무리 마른나무라 할지라도 불이 없으면 타지 못할 것이며 열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신앙 없는 지식은 돌덩어리 같이 굳고, 지식 없는 신앙은 마른풀의 재 같아서 곧 식어 버린다. 신앙과 지식을 겸유할 때만 신앙은 영속되고 지식은 선용된다. 신앙을 미신이라고 조롱하는 지식인들이나 지식을 무용지물이라고 배척하는 신앙인들은 모두 일면만을 알고 전체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신앙과 이성은 불가분리의 관계를 갖고있다. 고로 지식 없는 신앙은 미신에 빠지기 쉽고 신앙 없는 지식은 기계화될 위험성이 많다. 계시는 구원을 목적으로 인간을 만나는 하나님의 행위요 자기표시이며, 신앙은 이 계시에 대한 응답이다. 그리고 이성은 이 계시의 내용을 바로 밝히고 전달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계시와 신앙과 지식은 언제나 분리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