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구원에의 길

(95-101)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생애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그의 인격이요 둘째는 그의 사업이다 즉 그가 누구냐 하는 문제와 그가 무엇을 하였냐 하는 문제다.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계되는 것이고, 후자는 그의 사업에 관계된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전도하실 때, 그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도 생각하느냐?" 하고 물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질문이다. 예수의 인격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의 사업도 바로 알 수 없다. 시몬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21)하고 고백했다. 이 고백을 들은 예수는 제자들이 자신의 인격을 바로 이해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몹시 기뻐하셨다. 이때부터 예수는 제자들에게 메시야의 사업에 대하여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마 16:21).

그의 사업을 요약하면 "그가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그리고 많은 학자들에게 심한 고동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한 후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마 1:21-22)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업이란 바로 이 성구에 명시된 대로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룩되는 속죄사업을 말한다(막 10:45).

 

속죄의 어의(語義)

속죄란 말은 문자 그대로 죄를 속한다는 뜻이다. 즉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 죄를 속할 뿐 아니라, 죄 가운데 있는 생명을 구속해낸다는 뜻이다. 영어 성서에 보면, 속죄의 어의는 다음의 세 가지 단어로 설명된다. Propitiation(화목제물)이다. 이 단어의 뜻을 다음의 성구들은 잘 설명해준다(요1서 2:2, 요1서 4:10, 롬 3:25). 둘째로 속죄란 말의 뜻을 잘 표시하는 단어는 redeption이다. 이 단어의 뜻은 대가를 지불하여 어떤 것을 다시 사서 구해낸다는 뜻이다. 이 뜻을 뒷받침하는 성구는 다음과 같다. 롬 3:24 고전 6:20 벧전 1:18-19. 셋째로 속죄의 의의는 reconciliation(화해)라는 단어로 표시된다. 이 단어의 뜻은 원수되었던 둘의 관계가 화해하여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 즉 원수의 상태에서 친구의 입장으로 변함을 의미한다. 다음의 성구들은 이 단어를 뒷받침한다. 롬 5:10…11, 엡 2:16, 고후 5:19.

 

성서에서 본 속죄사상

우리는 인간의 원죄가 창세기 3장에 근거한 것과 같이 속죄사상도 극히 초보적인 표현이기는 하나 역시 창세기 3장에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 본래의 관계는 창조자와 피조자의 관계이며 은총과 신뢰의 관계였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초의 인간은 악마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함으로 자유와 생명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고 자신의 추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담' 과 '이브'는 동산에 있는 무화과나무의 잎을 따서 그것으로 그 추한 모습을 가려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빨리 말라서 자기들의 죄지은 추한 모습을 가릴 수가 없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범죄 한 저들을 긍휼히 여겨 무화과나무 잎 대신에 가죽옷을 지어 입혔다. 양의 가죽으로 범죄한 추한 모습을 당분간 가릴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서의 속죄사상의 신학적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구속은 아니다.

그리고 속죄사상이 어느 정도 구체화된 것은 하나님이 '노아'나 그 자손에게 속죄의 그림자가 되며 예표가 되는 희생의 제도를 수립하신 때부터이다. 특별히 '모세'를 중보로 하여 '이스라엘'백성 가운데 제단을 쌓게 하고 소와 양을 잡아 희생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백성들이 죄사함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불완전한 속죄 방법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 값으로 망하게 된 것을 인간보다 값이 싸고 천한 짐승의 피로 대속한다는 것은 다만 속죄의 그림자가 되고 예표는 될지언정 완전한 속죄의 성취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속죄의 완성은 가죽옷이나 짐승의 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보다 더 고귀하시고 흠과 티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속죄 사상의 역사적 발전

속죄의 원리와 그 구조 추구는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유치한 이론으로부터 탁월한 속죄론을 형성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속죄론 몇개를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는 교부배상설(敎父賠償說 - Ransom Theory)이다. 이 설은 사도시대 이후 최초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이레네우스'(125-200)에 의하여 제창된 것으로 교부시대를 종결시킨 '다마스코'의 '요한'에 이르기까지 그 견해가 지배적이었고, 그 후 '희랍' 정통교회의 대표적인 권위 있는 속죄론이 되었다. 교부배상설의 내용은 속죄란 대가를 지불하여 노예를 구속해내고 자유를 부여한다는 뜻인데, 그 때 지불하는 배상료를 누구에게 지불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이레네우스'는 "인간은 죄를 범한 때문에 악마의 노예가 되었다. 고로 악마의 지배로부터 인간을 구출해내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자신을 배상료로 악마에게 지불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심으로 인하여 악마에게 대가를 지불하였다는 이 설은 퍽 유치한 학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악마에게 빚진 일이 없다. 오히려 악마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범죄함으로 하나님께 빚진 것이며, 그 대신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악마에게 손에 내어 줄 필요는 전혀 없다. 인간 편에서 보아도, 사람은 악마에게 속아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범죄하였으므로 하나님께 부채를 진 것이고 악마에게는 아무런 부채도 진 일이 없다. 손해를 본 것은 인간 자신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인생의 범죄로 인하여 그 권위와 영광에 손해를 입었고 그 권리에 침해를 입었다. 그러므로 인생의 범죄에 대한 채권자는 하나님이시지 악마가 아니며, 부채의 보상의무는 오직 하나님께 대해서 뿐이다.

들째는 배상만족설(賠償滿足設 - Satisfaction Theory)이다. 이 설은 11세기의 신학자 '안셈'(Anselm)의 속죄론이다. 그의 속죄론은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었나?"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면 '안셈, 의 속죄론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최선의 의무는 복종이라고 말했다. 가장 악한 것은 불순종이다. 인간은 복종에 의해서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하고 그 영광을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아 버렸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에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 빚을 진 것이다. 그런데 공의의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간과하시지 않고 반드시 형벌하신다. 죄인이 하나님의 축복을 다시 받기 위해서는 죄의 부채, 즉 빼앗은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돌려 드림으로써 자신의 죄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안셈'이 말하는 배상만족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은 죄에 대한 배상을 함으로 회복되고 하나님이 만족하심으로 사죄의 은총은 부여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죄에 대한 배상을 해야 되지만 그럴 힘이 없다. 그러므로 배상의 능력이 없는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의 태도는 배상이냐? 형벌이냐? 둘 중의 하나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에게 형벌을 가한다면, 인생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하나님의 사랑의 경륜과 배치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형벌의 방법을 포기하시고 배상의 길을 택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배상의 능력이 없다. 죄의 배상을 할 수 있는 분이 계시다면 그는 하나님 자신뿐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대신 죄의 배상을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참 하나님이 참 인간으로 표현되지 않고서는 인간의 죄는 배상될 수 없었던 것이다. '안셈'의 속죄론의 제목이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었나"라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이 '안셈'의 배상만족설의 내용이다. 교부들의 유치한 속죄론을 극복하고 배상이 악마에게 지불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지불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탁월한 견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배상이냐? 형벌이냐? 양자 중에 죄를 그대로 두고 형벌이 없는 배상을 주장한 것은 그의 속죄론의 큰 약점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세 번째는 도덕감화설(道德感化設 - Moralinfluence Theory)이다 이 설은 '안셈'의 객관적 속죄론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나섰다. '안셈'이 하나님의 명예를 고조하고 나선데 비하여 '아벨라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였다. 이 설은 죄를 별로 문제시하지 않는다. 죄는 동정의 대상이지 형벌의 대상이 아니다. 고로 이 설은 배상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명예가 회복되고 사죄의 은총이 부여된다고 하는 사상은 잔인하고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가 죽은 것은 배상을 악마에게 하기 위함도 아니요 하나님께 하기 위함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지상의 표현이 죄인의 마음 속에 도덕적인 감화를 주어 죄인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 거룩한 뜻을 따라 새로운 생활에 들어가게 함이다. 인간은 죄에 대한 배상을 함으로 용서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죄는 사함을 받고 죄 문제는 깨끗이 해결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은 목적은 죄에 대한 처리가 아니라 인간을 도덕적으로 개조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도덕감화설의 내용이다. 그러나 이 속죄론은 무게 없는 속죄사상이다. 이런 속죄관은 철저한 신관이나 죄악관에 근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이 설은 십자가의 사랑만 보았지 공의는 보지 못하였다.

끝으로 형벌대상설(刑罰代償說 - vicarious punishment Theory)이다. 이 설은 '루터'나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제창된 속죄론이다. 이 설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형벌대상의 고난과 죽음에 의해서만 속죄는 이루어지고 배상은 악마에게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해서만 해야 한다. 형벌 대상에 의하여 완전한 죄의 처리가 없이는 인간은 죽음이나 죄나 악마로부터 구출될 수 없다. 즉 우리 인간이 받을 형벌을 그리스도가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는 죽음에서 구출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희생에 의하여 배상은 지불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진로에서 해방 될 수 있다. 이것이 형벌대상설의 내용이다. 안셈'은 배상이냐? 형벌이냐?의 구상 밑에 형벌을 뺀 속죄론을 수립하였으나, 종교개혁자들은 '안셈'의 속죄론의 부족을 보완하여 형벌에 의한 속죄론을 수립함으로써 성서와 일치하는 속죄사상을 남겨 주었다.

 

구속의 길

그러면 구속의 길은 어디서 어떻게 열렸나?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십자가는 인류가 지은 죄에 대한 가장 심각한 폭로요 철저한 심판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의 표현이요 주장이므로 인류의 죄는 폭로되고 심판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죄인을 대신하여 저주를 받은 자가 되었다(갈 3:13). 그러나 십자가는 심판의 표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거룩한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 뜻은 죄인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그리스도 자신이 받으시고 인간은 용서함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구속의 본질은 그리스도이며 십자가에 있다. 그러나 십자가만으로 구속의 사업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부활이 필요하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영원히 죄 가운데 있으리라고 했다.

그러면 속죄론에 미치는 부활의 의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십자가를 역사의 무덤에서 불러내어 영원한 십자가가 되게 하는 것이다. 부활이 있으므로 십자가는 영원한 것이 되며 현재성을 갖고 우리에게 구속의 힘을 준다. 부활로 인하여 인간은 과거 뿐 아니라 오늘에 있어서, 그리고 영원히 신음 속에서 소망을 갖게 되고 구원의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