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성령이란 무엇인가

(102-108)

 

 

어느 미션 대학의 학장이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당신들은 성령을 소유하고 있는가? 즉 성령을 받은 경험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런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학생들은 당황하면서 "우리는 성령이 무엇인지 전혀 모를 뿐 아니라 들어 본 일조차 없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이런 질문은 오늘의 젊은이들에게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흥미조차 없는 문제다. 그러나 성령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고는 기독교를 이해할 수 없고 역사와 삶을 바로 알 수 없다. 그러면 성령은 어떤 분이신가?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기독교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믿는다.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은 유일성(唯一性)과 삼위성(三位性)의 쌍방을 포함하고 있다. 삼위 하나님은 시대를 따라 다르게 나타나셨다. 천지창조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실 때까지를 성부 하나님의 활동기로 본다. 그리스도가 탄생한 이후 성령의 강림까지를 성자시대라고 부른다. 이 때는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개입하셔서 역사 속에서 활동하신 시대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오순절 날 약속하신 성령이 강림한 때부터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를 성령의 활동시대라고 부른다. 이 말은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역사 과정에서 이와 같이 삼위로 표현되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삼위신의 한 분이신 성령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성자가 성부 하나님을 계시하시듯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오늘 성령의 역사를 오해함으로 성령하면 비정상적인 종교적 감정의 흥분으로 여겨 성령을 받으면 기적으로 병을 고친다던가, 방언을 한다던가, 입신을 한다던가, 죽은 사람의 혼과 이야기를 할 수 있다던가 등등 변태적이고 광신적 행위로 생각하기 쉽다. '마틴 루터'는 이런 잘못을 다음과 같이 꼬집었다. "성령의 경험은 바이올린의 줄이 흔들리는 것 같이 우리의 혼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고. 성령의 역사는 그런 것이 아니다. 성령은 마른나무 가지에 불어와서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봄바람처럼 인간들의 메마르고 무기력한 인생 위에 원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감정이나 이성이나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다.       

 

성령의 역할

그러면 삼위 하나님의 한 분이신 성령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요한복음 기자는 성령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가 오시면 세상 사람들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깨우쳐 주실 것이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세상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요 의에 대해서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너희가 나를 더 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요 심판에 대해서라 함은 이 세상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16:8-11). 첫 번째로 성령이 하시는 일은 인간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신다. 인간은 누구나 인간적인 양심의 자각을 갖고 있다. 즉 진실한 태도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던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던가 하는 반성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악에 대한 지각을 갖는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자기 인식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악에 대한 자연적인, 그리고 실존적인 자각은 인간성의 범위 내에서 자문자답에 의하여 주어지는 자기 인식이지 결코 성서가 의미하는 죄의 인식과 같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면 성서가 의미하는 죄란 무엇인가? 그것은 살인을 한다던가 강도질을 한다던가 남을 속여 자기이익을 추구한다던가 하는 그런 외형적인 것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좀더 깊은 근원적인 죄를 말한다. 악한 인간뿐 아니라 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선에 의해서 빠지는 죄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이탈이요 인간의 자립성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가르치는 죄란 오직 하나님께 대해서만 범죄 하는 것, 하나님께 대해서만 고백하는 것(시 51:4 눅 15:17)이다. 따라서 죄의 인식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승인이요, 이런 죄는 하나님께 대한 적이라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고백은 자연적인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먼저 용서함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근본적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품을 떠난 것이 죄이기 때문에 그런 죄의 인식은 인간을 다시 찾아오신 계시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을 때만 가능하다. 성령의 가르치심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요구할 만큼 인간의 죄가 심각함을 인식할 수 있을까?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인간의 교만을 깨뜨리고 그를 내면적으로 겸손하게 하며 참회하는 데까지 이끌어 주신다. 성령은 거룩한 영으로서 인간의 거룩하지 못함을 알려 주고 하나님께 대한 불신의 적을 고백하는 데까지 인도하신다.

둘째로 성령의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의를 깨닫게 하신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의는 행동이 방정하다던가 계명을 잘 지킨다던가 하는 윤리적인 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표현되는 하나님의 의를 말한다. 우리 인간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훈련이나 수양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희생을 통해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거룩한 의다. 인간에게는 의가 없다. '바울'의 말대로 의인은 없으니 한 사람도 없다. 모두 죄인이다. 죄인이 참된 의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이다. 이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되고 '헬라'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이해되었으나 이런 십자가를 통해서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사실을 역사가 아니고서는 인간들에게 깨닫게 할 길이 전혀 없다.

성령의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성령은 인간의 눈을 열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보게 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십자가에 표현된 하나님의 의에 비추어 역사를 보며 사물을 판단하도록 가르친다. 이 때 비로소 인간은 의를 보면 실천하고 불의를 보면 분노할 줄 아는 인간다운 정의감과 용기를 갖게 된다.

셋째로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새로운 인간 사회를 형성하신다. 오순절 이전에는 제자들 하나 하나가 개별적으로 예수의 제자였으나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자 그들은 하나의 영적 가정을 이루어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모이기를 힘쓰며 떡을 떼는 성도의 친밀한 교제를 하여 내적인 사랑의 결합을 하게 되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막힌 장벽을 제거하셨다. 그 결과로 "더불어 사는 인간 사회"가 형성되었다. 에베소 편지에 둘로 하나를 만들었다(엡 2:14)는 말씀은 더불어 사는(Live together) 인간을 의미하며 이와 같이 연대적으로 사는 인간이야말로 새로운 인류(New humanity)가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새로 지음을 받는 사실이며 이것이야말로 성령의 하시는 일의 근본이다. 이런 의미의 새로운 인간이야말로 세계의 목표요 약속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더불어 사는 새로운 인간 사회가 바로 성령의 전인 교회이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은 모인 무리 가운데 언어가 다르고 풍속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뛰어 넘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영이시다. 성령은 인간 관계의 모든 장벽을 헐고 더불어 살 수 있는 새로운 인간 공동체를 창조하였을 뿐 아니라 성령의 평화로운 활동은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주인과 노예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모든 사회적인 장벽도 파괴하고 그 대신 새로운 인간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성령의 활동은 개인이나 신앙공동체 뿐 아니라 전체 사회적인 면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넓은 의미에서 성령의 역사를 생각할 때, 성령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의미는 크다고 믿는다. 오늘 같이 깊은 고민을 안고 있는 민족과 민족 사이의 비극, 백인과 흑인 사이의 상극, 경영자와 노동자 사이의 장벽은 벌써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하여 무의미한 것임을 성령은 선언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사회에는 극히 비인간적인 부정으로 가득 차 있다. 더불어 살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이익 추구만을 목적으로 하는 산업형태, 권력형태 속에는 여러 가지의 사회적인 악의 요소가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회 속에 살면서도 인간 상호간에 불신의 씨를 뿌리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더불어 사는 책임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성령의 맹렬한 활동을 간구해야 할 것이다.

 

성령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개인적인 생애에 있어서 성별된 생활을 하는 것이요, 둘째는 전체적인 면에서 복음을 만방에 전달하는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13절에 보면,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신다."고 했다.

여기서 거룩하게 한다는 말은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의 완전을 말함도 아니고, 또 인간이 타락으로 인하여 상실한 성질의 회복을 의미함도 아니다. 그것은 보다 차원이 높은 하나님의 성질이요 제 2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내주(內住) 하심을 뜻함이다. 인간의 성질의 완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질이 부여되는 것이며 우리의 영혼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일치되어짐을 말한다.

우리의 성결은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을 믿음으로 이미 성취된 것이다(히 10:10). 성별이라는 말은 세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자신의 낡은 죄악 생활로부터 분리한다는 뜻이요, 둘째는 깊은 죄악 생활을 떠날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은 생명을 하나님의 제단에 바쳐 의로운 병기가 되는 것이며, 셋째는 성령의 충만한 생활을 의미한다. 즉 성령의 완전한 지배를 받는 생활을 의미한다.

두 번째의 성령의 열매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권능을 얻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 되라"(행 1:8)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다.

지식이나 문화는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도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의 전달은 성령의 힘을 받기 전에는 결코 수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의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위로부터 능력이 임할 때까지 기다리라"(눅 24:49)고 말씀하셨다. 기독교의 2천년 역사는 그 내용이 풍부하다. 교리, 신조, 예전, 제도, 사상, 문예 등등 실로 다양하여 한 마디로 그 내용을 표시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내용은 모두 전도를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의 역사는 전도의 역사다. 오순절날 제자들에게 강림한 성형의 능력은 파동적으로 전 세계에 확대되었다. 전도는 혁명적인 사업이며 성령에 충만한 주의 증인들에 의해서만 전달되는 것이다. 현대는 종교적으로 무관심한 시대다. 오늘과 같이 대중이 무신론적인 풍토 위에서 종교를 외면하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삶의 의미를 잃고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 온 가치체계와 인생관은 무너지고 만다. 현대 문학의 특징은 물건의 위대함을 찬미하는 유물주의의 감화 밑에서 외적인 찬란한 문화에 눈길을 돌리고 있는 동안 영혼의 깊은 곳에는 불안, 허무, 공포, 절망이 움직일 수 없는 현실로 뿌리를 박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외면하고 정신의 사막을 방황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변함없으신 사랑과 진실로써 구원의 손을 펴고 계시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성령에 의하여 오늘도 계속 활동하고 계신다. 성령은 죄 밑에 속박된 인간에게 죄를 깨닫도록 하게 하신다. 오순절에 시작된 전도는 넓은 들의 풀을 태우는 불처럼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 교회는 옛날과 같은 전도의 힘을 잃었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외부적인 어떤 조건 때문이 아니라 내적인 조건 때문이다. 즉 선교의 원동력이 되는 성령의 능력을 소유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선교는 그리스도 자신이 성령을 통하여 수행하시는 교회의 사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