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선교의 신학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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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수 십년에 걸쳐서 선교문제에 관한 연구 논문이 많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선교가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 한 마디로 그 정의를 내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선교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정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구약 성서를 출발점으로 하여 연구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일 것이다.

 

1. 구약성서에서 본 구심적(求心的)인 선교개념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하나님과의 계약관계에 있게 되었다. 이 선택의 목적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시를 모든 나라에 선전하기 위한 중보자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중보적인 그릇으로 택함을 입은 이스라엘은 그 임무수행을 위하여 각 나라에 파견된 것은 아니다. 고로 구약성서의 선교의 의미는 파견의 뜻이 없다. 반대로 하나님 인식은 이스라엘의 예배생활 또는 경건 생활의 증거를 통하여 알려준다. 그러므로 여러 나라 사이에 있어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은 오히려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내적인 경건 생활에 매력을 느끼고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스라엘의 역할은 이와 같이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며 이 거룩함에 인도하며 결부시키는 것이다. 마틴 아샤르(Mastin Achard)는 이스라엘의 선교역할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이스라엘은 택함을 받은 백성이라는 것 이외의 방법으로 이교도에 대한 선교의 사명을 갖지 않는다. 저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성별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빛내고 신성을 증거하는 중보적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A. Light to the Nations, E.T. 1962, p.25)

선택된 백성은 택함을 받은 백성으로서의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즉 세계의 궁극적인 운명은 모든 나라 사이에 서 있는 이스라엘의 존재 그 자체에 걸려 있다. 이 선민은 여호와를 의지하고 삶으로서 전 인류를 위해 사는 것이 된다. 그러면 구약성서의 선교사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표현해서 구심적(求心的)이다.

구약성서는 원심적(遠心的)인 선교사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구심적 선교란 무엇인가? 그것은 힘을 안으로 모아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중심을 향하는 자세, 즉 주변에서 중심을 향해서 하는 운동이다. 그러나 선교라는 말보다는 오히려 소명(召命)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할는지 모른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성민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고 이방인의 빛이 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2 신약성서에서 본 원심적(遠心的) 선교개념

그러나 신약성서에 있어서는 제이 부라우(J. Blouw)의 말과 같이 구약에는 없는 새로운 선교 사상을 우리에게 가져왔다. 그 새로운 것은 구약과는 달리 모든 나라에 가서 선교하라는 위탁, 즉 원심적인 선교의 위탁이다(J. Blouw The Missionary Nature of the Church, p66). 이 원심적 선교의 위탁은 제자들을 두 사람씩 파송하신 예수의 Ministry 속에서 찾을 수 있다(막 6:7). 그러나 이들의 선교 범위는 처음에는 결정적으로 이스라엘 나라에 국한했다(마 10:5, 마 15:2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이방 사람도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것을 약속하셨다(눅 12:38-). 그리스도의 선교 활동 초기에 있어서의 제자들의 소명과 계속해서 이방인의 소명이 있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내적인 연관성이 있다. 유대인에 대한 선교활동은 그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 후에 이방인에 대한 선교활동으로 발전했다. 이방인에 대한 선교는 이방인을 모으시는 신의 종말론적인 행위의 개시다. 고로 선교는 역사의 의미를 개시하는 열쇠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행하시는 화해의 사업과 하나님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성취의 표정이다. 이것을 하나님 자신의 선교(Missio Dei)라고 한다(A. P. Beaver, The Chrstian World Mission A. Reconsderation, 1957, p.26).

이 선교의 위탁은 주권이 나에게 주어졌다(마 28:-18-; 단 7:14)는 뜻이다. 마태복음의 권위의 수여는 인자의 승천을 통해서 행해졌다. 그리고 이 권위를 받은 인자가 모든 나라에서 제자를 일으키도록 명하셨다. 선교에의 명령은 이미 일어난 그리스도의 부활승천을 전하라는 명령이다. 천지에 그리스도의 주권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모든 나라를 향해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전파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은 전 인류를 향하여 증거된 것이다. 이 선교의 위탁은 사복음서에 각각 다른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마태복음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왕적 권위로, 마가복음은 해방자의 권위로, 누가복음은 용서의 권위로, 요한복음은 아버지에 의한 그리스도의 파견, 즉 선교의 기독론적 근거를 명백히 하였다. 위에 말한 것을 요약한다면, 신약성서의 선교사상은 하나님이 원심적인 존재, 즉 파견하는 존재임을 분명히 했으며, 선교의 근거는 하나님 자신의 존재 속에서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교의 기독론적 근거에서 성령론적 근거에로 옮겨져야 함을 보여준다.

 

3. 성령론적 근거에서 본 선교의 의미

바울은 성령의 파견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파견의 결과이며 그 계속이라고 강조하셨다(갈 7:14). 성령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것이다(눅 24:49, 벧전 1:12, 요 20:22). 바울과 요한의 이런 성령과 선교의 일치의 강조는 누가에 의한 사도행전의 노작 속에 숨은 존재가 되었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얻으리라는 그 힘의 약속은 사도행전 1장에 있어서 선교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행 1:8). 오순절 성령 강림은 바로 이 약속의 성취이다. 이것은 주님의 주도 밑에 선교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고로 선교의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있고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그 선교를 추진시키는데 있어서의 새로운 방향도 하나님에 의하여 전개되는 것이다(고넬료의 예, 행 11:15). 오순절이 선교의 발단이 된 것 같이 이방인에의 성령 강림은 저들의 선교의 발단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은 성령과 선교와의 사이에 있는 불가분의 관련성을 실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단 선교의 기독론적 근거와 성령론적 근거를 이해하게 되면 선교의 하나님 중심개념을 이해하게 되며, 삼위 하나님은 선교사업의 유일한 근원임을 알게 된다. 고로 하나님 선교의 목적의 본질적인 것은 아들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이다. 하나님은 단 한번 수육하여 아들을 세상에 보냈지만, 그렇다고 그 후의 선교활동에 관여하는 것을 정지하셨거나 또는 어떤 인간적인 권위에 맡겨 버리신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 때까지 하나님 자신이 이 일을 지속하는 것이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성령을 파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사업의 목적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주권을 선언하는 일이다. 고로 그리스도인의 선교의 임무는 성령에 의하여 이미 세계에 임재해 계시는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그의 보편적인 주권을 증거하는 데 있다.

 

4.   선교의 교회론적 의미

위에서 설명한대로 선교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때, 선교론을 교회의 하부 구조의 하나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의 선교의 성격은 하나님의 성격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선교론이 교회론의 부수물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선교는 하나님의 성격에서 직접 생겨나는 것이므로 교회의 한 부분이거나 또는 파생적인 부분으로 생각할 수 없다. 고로 선교는 교회의 중심이요 신학의 중심에 위치해야 한다. 선교는 하나님의 명령의 결과로 생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의 발로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삼위 신론에 기초를 둘 것이지, 교회론에 기초를 둘 수는 없다. 따라서 선교론은 하나님에 관한 선포요 설교이지 결코 교회론의 한 항목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교회론이 기독론과 성령론에서 단절할 수 없음과 같이 선교론과 교회론은 연속되어 있다.

그리고 선교론의 근원은 교회론적이 아니고 신의 존재와 그 뜻 속에 있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교회가 선교의 주체적인 것처럼 생각하던 과거의 사고의 잘 못을 인식하게 된다. 엄밀히 말해서 교회는 기쁜 소식의 주체가 아니라 기쁜 소식이 필연적으로 낳은 결과이다. 고로 선교는 교회에 병행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 자체의 존재 이유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선교한다기보다는 성령을 통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시는 것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교회가 수육의 패턴을 세상에 재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 한가운데 사심 같이 교회도 그런 양식으로 세상 속에 사는 것이 바로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