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현대선교의 방향

(130-135)

 

1.

지금부터 이 천년 전 근동(近東)의 한 작은 나라 유대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리며 다닌 하나의 인간 예수의 삶과 고난과 죽음이 이 천년의 교회사를 통해 은혜 갚으신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의 생명의 교류를 형성한 산 메시지의 선교는 역사상 가장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부르시는 소리로서 고대의 희랍과 로마에 중세기의 북방 게르만 여러 민족에게, 그리고 다시 근대의 구라파 아세아 아프리카 여러 민족과 개개인에게 실로 중대한 관계를 가진 하나의 새로운 사건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래서 이 복음은 전 세계 민족에 이미 전파되었고 또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 복음이 약 90여년 전에 극동의 작은 나라 한국에도 들어와 선교의 문을 열었다. 그러므로 세계 교회의 선교사는 그 전사(前史)인 신약성서의 예수의 부활과 초대교회에 있었던 사도들의 선교활동에 그 원천과 규범을 두고 생각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이렇게 선교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때, 선교역사의 기점과 종점 과정과 형태의 문제가 명백해진다. 산 선교의 길은 암흑한 세계사와 여러 민족의 투쟁사 속에 일정한 길을 열고 일정한 방향을 설정하고 전진하여 왔다. 이 선교의 기점을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의 부활에다 둔다면, 그 종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될 것이다. 부활과 재림, 이 사이는 특수한 교회의 때이다. 고로 산 선교의 길은 하나의 역사로서 이 두 사이에 선다.

이곳으로 저곳으로, 이 시작에서 저 목표로, 이 기점에서 저 중점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이 선교이다. 이 시작과 종점사이가 구원사의 코스이며 선교의 때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이런 역사 가운데서 특정한 사람을 불러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립된 하나님과 세계와의 화해의 길과 또는 세계를 지배하실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도록 증인으로 세상에 파견하시는 것이다. 사도나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먼저 파견한 사자(使者)를 의미한다. 산 선교는 먼저 이들 최초의 사자 사절 혹은 원증인(原證人)들의 전 존재와 생활 행위를 통해서 모범적으로 행해졌다. 이렇게 택함을 받은 사자들은 주의 말씀에 사로잡혀 원하든 원치 않든 전생애를 걸고 이에 봉사한 것이다. 그러면 이 선교의 방향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 그리고 어떤 형태를 취하여 행해졌는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2.

선교의 방향은 정확한 말씀 해석에 의해서만 현실화되고 산 설교가 될 수 있다. 교회에 위탁된 선교의 임무는 교회 생활의 중심에 두어진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과 중심이 오늘의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들려지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즉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입증하는 예언자적 사도적 증언이 힘있는 증명(고전 2:4)으로서 인류 역사 속에 폐쇄되지 않고 개방된 말씀이 되며 침묵하지 않고 표현되는 말씀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산 하나님의 자기증언인 선교는 성서, 즉 예언자적 사도적 증언을 통해서만 발표되기 때문이다. 이 산 말씀을 주석하는 책임 때문에 부름을 받은 특정한 사람들이 스스로 이 원증언(原證言)을 주석하고 반복함으로 인해서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스스로 죄와 죽음을 깨닫고 자기 자신이 이 말씀에 굴복하며 지배를 당하며 부름을 받았다고 고백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이 많은 사람과 그 환경에 대해서 산 권위로서 임하고 승인되고 존경을 받아 교회의 설교와 성례전, 목회와 교육, 세계 전도와 정책 가운데서 정당하게 해석될 때에만 복음이 개인 생활과 민족 생활에 있어서 중대한 관계를 갖게 되며, 이 말씀이 제대로 응용될 때에 선교는 현실화 되고 산 선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선교와 신학은 이 올바른 말씀의 주석에서만 산 것이 된다. 결국 이 천년의 세계 기독교회사도, 구십 여년의 한국 선교역사도 말씀 주석의 역사이다. 선교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말씀의 증언이 권위를 가지고 이 세상 사람에게 임하여 저들을 회개에로 인도하며 그 부르는 소리에 응답하게 하는 것이다. 산 말씀이 인간의 마음에 들어갈 때 산 선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 증언의 내용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등대 위에 두어 어두운 세계 전체를 비취게 될 때, 선교는 살게 되는 것이다.

이 증언이 산 위에 세운 성같이 숨기우지 않고 세계 각 분야에서 인정을 받고 주목을 받게 될 때, 선교는 살고 현실화되는 것이다. 산 선교란 구체적으로 말씀과 인간의 풍부한 생명 교류에서 생기는 하나의 사건이다. 만일 교회가 말씀을 제쳐놓고 그 말씀에서 얻는 사상(신학)이나 체험만을 선전한다면, 교회는 잠자게 되고 선교는 죽은 선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참 선교의 길은 현실을 향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현실에서 듣는 인간의 현실적인 만남, 즉 인간을 향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향하는 인간의 응답 사이에 생겨난다.

 

3.

그 다음 선교의 길은 세상의 이곳 저곳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을 거룩한 신앙의 단체(성도의 교제)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즉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간을 부르시는 소리가 선교를 통해 사람들에게 들려질 때, 그들은 오늘까지의 세상적인 자기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가치관과 인생관이 전복되고 전 실존과 전 생활로서 자기 자신의 인간적 대답을 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변화를 많은 사람들로서 형성된 단체가 성도의 교제요 신앙의 공동체요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역사적인 사회학적 집단이기에 앞서 결정적으로 신학적인 사건사적(事件史的) 개념에 속한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법적 종교단체나 사회학적 공동체이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 일어난 사건의 내용을 보면 산 하나님이 소집한 하나의 소명단체요 신앙의 공동체이다. 고로 이 신앙의 공동체 안에는 빈부나 귀천의 차별도, 신분 계급의 차이도 있을 수 없고, 교파나 전통의 차별도 초월한다. 다만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같은 주로 믿는 무리들의 교제하는 신앙의 단체일 뿐이다. 교회란 이렇게 소집된 사건의 다이나믹스이고 결코 일정한 제도나 일정한 전통 또는 일정한 교직제도에 속박된 교회주의적 고정관념이 아니다. 일정한 제도나 조직 전통, 교직 제도 등 여러 개념은 하나님의 소집과 인간의 응답의 사건이 생기는 장소이지, 그 역사적 동력 관계를 방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빠르트는 그의 논문에서 Ecclesia라는 단어를 교회라는 말보다는 집회, 회중, 교단 등의 말이 원뜻에 가깝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Ecclesia라는 말의 원뜻은 사람들 가운데서 불러모은 소집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사도신경 제3조에 성도의 교제란 말은 세상에서 분리된 구속받은 백성의 지상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시는 소리가 인간들에게 들릴 때 그 성소(聖召)에 대한 인간의 실존적인 응답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의미한다. 성도의 교제는 사람들이 공통의 사건을 같이 보고, 듣고, 말하고 찬미하고, 고백하는 단체이다. 이것은 어떤 교리적 신학적 독점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공통의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성도의 진실한 교제는 어떠한 교파나 교리나 전통도 초월한다.

엄밀히 말해서 유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단 하나의 산 성도의 교제 밖에는 없다. 시대와 나라와 지역적인 차이로 생긴 여러 교차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유일하신 주의 공동체의 표현인 여러 가지 형태나 양식에 불과하다. 구라파의 여러 교회, 아메리카의 교회, 아세아의 여러 다른 교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의 성도의 교제의 지역 혹은 국토에 의한 다수성에 불과한 것이다. 성도의 교제는 하나다. 그 이유는 성도의 교제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계도 하나이며, 오직 한 분이신 만민의 아버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하여 형성된 단체이기 때문이다.

 

4.

끝으로 선교의 방향은 하나님께서 성도의 교제인 신앙의 집단을 바깥 세상에 파견하는 것이다. 소명의 집단인 성도의 교제가 그 집단 안에서만 끝나지 않고 밖을 향하여 봉사단체로 나타날 때, 비로소 산 선교가 되며 그 선교는 현실화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기관이요 기능이다. 고로 교회는 모든 능력과 조직을 총동원하여 하나님의 선교에 적극 참여하여야 하며 봉사해야 할 의무가 있다. 교회가 안으로 사람을 소집하여 영적 교제에 참여케 하는 것이라면, 설교는 밖을 향해서 넓은 세계에 보냄을 받아야 한다. 선교는 교회와 세상의 경계에 서서 안에서 밖으로, 좁은 데서 넓은 데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출격하는 말씀의 자기 증명에 봉사하는 것이다.

산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 구원사와 계시는 전도되고 어두워지고 혼돈 속에 위협을 받고 있는 세상을 비치는 빛이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다"(요 1:5), "그가 세상에 계셨으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다."(요 19-10)고 요한은 의미 깊게 서술하였다. 이 빛은 어두운 세계 가운데 들어왔다. 그리고 그 어두운 세계를 비쳤다. 그러나 세계사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먼저 부름을 받고 택함을 입은 신앙의 공동체는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사실을 인식한 공동체는 안에서만 찬미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바깥 세계에 들려지도록 힘써야 한다. 이것이 교회에 위탁된 선교의 과제이다. 그러므로 선교의 방향은 결국 바깥 세계에 신앙의 공동체가 파견되어 세계에 봉사하는 일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양이 이리 가운데 들어가는 것 같이 아무런 방법도 없이 위험한 세계에 파견되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현과 소명과 회심의 날부터 이방인의 전도자로서 파견되어, 그 선교의 여정을 소아세아에서 예루살렘을 돌아 지중해를 건너 로마에게 순교할 때까지 쉬지 않고 전진하였다.

예언자 에레미아는 재삼 거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부름을 받아 만민의 예언자로 파견되어 세계 역사 한 가운데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 진노와 긍휼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선교는 세상을 위하여 세워졌고 세상을 위하여 세상에 파견된다. 그 이유는 말씀 자신이 세상에 오시고 세상 가운데 계시고 세상을 위해서 고생하시고 세상을 위해서 죽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어제나 세상을 향하여 세상을 위해서 되어진다. 그러나 세상에 참여한다고 해서, 세상과 영합하거나 세상에 동화되어 버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맥빠진 선교요 맛잃은 소금이 되어 결국 밖에 버리어 사람의 밟힘이 될 뿐이다. 오늘날 선교의 침체와 부진은 말씀 전달자가 맛잃은 소금같이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선교가 산 선교가 되고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세계에 파견된 공동체가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가 어찔할꼬" 하고 가슴을 치도록 어떤 충격을 가할 수 있어야 한다. 선교는 하나님의 자기 증언이다. 이 계시에서 응답할 신앙의 무리들도 성도의 교제가 형성된다. 이 신앙의 공동체를 불러낸 세상으로 다시 파견하여 구원을 완성하는 것, 이것이 선교의 현실화요 참된 선교의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