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현대 선교의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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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宣敎(Mission)와 傳道(Evangelism)의 뜻을 달리 생각해 왔다. Mission이란 말은 본래 語源的으로 '파견한다'는 뜻이다. 종래에는 宣敎師를 Missionry라고 호칭했기 때문에 宣敎는 Mission이라는 말로 표시했고, 그것은 Evangelism이란 말과는 다른 의미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宣敎와 傳道는 같은 말이다. Mission이라는 用語는 1928년에 개최된 예루살렘 국제 선교회의 이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케류그마(선교), 코이노니아(친교), 디아코니아(봉사)의 세 기능의 유기적 종합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선교의 구성 기능인 케류그마는 선교 혹은 宣言, 說敎와 거의 동의어가 된다. Evangelism이란 用語는 프로테스탄트 宣敎史에 있어서 20수년 전까지도 서구 여러 나라를 무대로 하는 소위 기독교국 안에서 교회로부터 이탈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용해온 用語다. 고로 異敎國에의 傳道는 '宣敎 - Mission' 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기독세계와 이교세계를 범주적으로 금을 긋던 경계선은 무너졌다. 그 결과로 전도와 선교의 구별도 사실상 무의미하게 되고 같은 뜻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면 세계 선교의 동기와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 나라 건설이다. 그러나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현대 선교의 Approach는 동일하지 않다. 대체로 크게 나누면 하나는 福音主義的 立場이고, 둘째는 에큐메니칼 立場이다. 이들은 다같이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목표로 하면서도 선교의 개념과 방법을 달리한다. 즉 福音主義에서는 基督化(Christianization)에 중점을 두고, 에큐메니칼 운동의 선교 방향은 人間化(Humanization)에 초점을 둔다. 기독화를 강조하는 福音主義는 1966년 미국 이리노이주 휘튼대학에서 모였던 초교파 외국선교 협의회(Interdenominational Foreign Association)와 세계 복음주의 선교협의회(Enagelical Foreign Mission Association)에서 채택한 휘튼 宣言文과 1970년 독일의 튀빙겐 대학의 선교학 교수 바이에르하우스 박사에 의하여 작성된 소위 프랑크프트 宣言文에 명시된 宣敎전략이다. 그리고 인간화에 초점을 둔 에큐메니칼 선교전략은 1968년 웁사라에서 개최된 WCC 대회 이후 줄곳 주장해온 선교전략이다. 이 대회에서 강조한 것은 선교는 基督化 운동도 아니요 새로 교회를 세우는(church plantion) 것도 아니다. 宣敎는 人間化운동이다. 즉 오늘 우리의 현실에 일어나고 있는 인종문제, 학생폭동 문제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평면적인 문제에 관심을 쏟고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선교의 목표요 급선무라고 강조한다. 現代宣敎에 있어서 이런 두 라인의 선교 전략은 제나름대로 성서적 근거를 갖고 있으며 신학적인 논리도 있다. 또 호소력도 강하다. 개별적으로 생각할 때는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고 평가할 수가 없다. 다만 다른 주장 때문에 서로 대립하고 서로 상대방을 용납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러면 기독화에 중점을 두고 복음주의의 주장과 인간화에 초점을 두는 에큐메니칼 주장의 상반된 요소와 그 내용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로 우리 주님의 지상명령이신 선교의 代委任(Great Commission)에 대한 해석의 차를 설명하면, 福音主義는 마태복음 28장 18-19절에 근거하여 선교의 代委任을 복음전도의 지역적 확대로 생각하고 그것을 선교의 과제로 삼는다. 그러나 에큐메니칼 입장은 이 代委任을 인간의 삶에 직결된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복음주의 입장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세속생활의 이중성 혹은 異質性을 강조하는데 비해, 에큐메니칼은 세속 생활은 福音의 具體的인 結實의 자리요, 집이라고 생각하고 교회와 세계를 同心圓에서 생각하려 한다.

두 번째로 생각할 문제는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에 관한 해석의 차다. 이 문제에 대해서 복음주의 입장은 宣敎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즉 하나님에 대한 존귀와 찬양이 선교의 최고 목표라고 말이다. 그 이유는 우주와 인간의 존재 이유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복종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큐메니칼은 宣敎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람직한 人間을 만들고 바람직한 삶을 俱現하는 데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인간상을 바로잡아 새로운 인간을 만드는 것이 선교의 작업이라고 믿는다. 전자는 하나님의 주체성을 강조한데 비하여, 후자는 인간의 主體性을 중요시했다.

셋째로 생각할 것은 眞理의 絶對性 문제에 대한 견해차다. 복음주의 입장에서는 기독교 진리만이 절대라고 주장한다. 즉 인류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고로 그리스도만이 선교의 내용이며 토대가 된다. 타종교에도 철학적인 진리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구원의 길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원문제를 놓고는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대화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에큐메니칼 입장에서는 복음주의의 주장과는 달리 모든 종교의 진리의 보편성을 인정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 이외에도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자신이 만민의 구주이심을 계시한다고 믿는다. 결국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이외에도 간접적인 방법으로 가능하다는 결론이 된다. 이런 주장에 의하면 오직 은총, 오직 믿음이라는 구원의 절대적 은총이 필요 없게 된다.

넷째로 선교에 있어서 교회의 위치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 견해를 달리한다. 복음주의 입장에서는 종교의 뚜렷한 과제는 구원의 공동체인 교회의 확장을 실현하는 것이며 교회는 세계 속에 있어서 빛과 소금으로 존재한다. 교회와 사회는 기능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에큐메니칼 입장에서는 교회와 세계를 二元論的인 構造로 분해시키는 것을 반대하고 교회를 세계의 한 부분으로 본다. 구원은 인간의 사회생활을 떠나서 있을 수 없다. 이 세상도, 교회도 결국은 인류의 사회적 복지를 위해서 일한다. 그러므로 구원의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는 이 세계와 끊임없는 대화를 해야하고, 세계 안에서 교회의 공동참여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 실현을 촉구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에큐메니칼 입장은 선교를 교회의 하부구조로 취급하고 교회의 한 기능으로 여겼던 과거의 생각을 지양하고 선교를 위한 교회, 즉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구원의 공동체로 본다. 엄밀히 말해서 교회는 기쁜 소식의 주체가 아니라 기쁜 소식이 필연적으로 낳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고로 선교는 교회에 병행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 자체의 존재 이유라고 주장한다.

끝으로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본 선교의 개념차가 있다. 복음주의 입장에서는 선교를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끝난다고 본다. 즉 선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사이에 있어서의 하나님이 이룩하시고저 하시는 구원의 활동을 의미한다. 그 사이의 인간 역사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 마귀와의 싸움터이며, 교회는 악마와 싸워 진리를 사수할 책임을 진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진리의 완전 승리를 볼 수 없으며 현실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오직 彼岸의 세계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만 성취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불의와 의의 싸움이 계속되는 역사의 종말까지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위탁받은 선교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에큐메니칼 입장은 이에 대하여 비판적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재림은 신약성서가 증언한대로 제자들이 바라던 구름 타고 오신다던 그리스도는 아직 오시지 않았다. 이 천년의 역사가 흘러간 오늘에도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기울여야 할 관심은 언제 실현될지 알지도 못하는 막연한 종말론적 대망이 아니라 오늘의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파악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대망은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오늘의 인간 역사가 바로 그 실현의 무대임을 강조한다. 고로 선교는 미래에 실현될 하나님 나라 선포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선포라고 주장한다.

 

결론

우리의 위에서 기독화를 내용으로 한 복음주의적 선교전략과 인간화를 내용으로 하는 에큐메니칼적 선교 전략의 현격한 차이를 말했고, 또 각각 지니고 있는 장단점을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說敎전략의 대립보다는 양극화의 해소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보다 현명한 태도일 것이다. 기독화만을 강조할 때 역사를 외면하게 되고, 인간화만을 강조하면 복음의 진리가 힘을 잃는다. 고로 기독화와 인간화는 양자 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둘을 종합함으로 선교는 바른 전략을 찾게 될 것이다. 케류그마(말씀의 宣敎)와 디아코니아(봉사)를 분리시킬 때, 선교의 본질은 변하고 만다. 그리스도 없는 인간화가 불가능하듯이, 바람직한 인간상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기독화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그 삶과 행동이 항상 일치했다. 선포(Proclamatin)와 봉사(Service)는 선교 사업에 있어서 나눌 수 없는 불가분의 요소다. 다만 어느 것이 먼저냐의 순서가 문제일 뿐이다. 우리는 선포가 먼저요 봉사가 선포의 결과라고 믿는다. 고로 폴·틸리히는 종교는 문화의 내용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태다라고 주장한 것은 적당한 표현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