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하나의 차원에서 본 예배와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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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의 많은 예배학자나 선교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는 예배와 선교는 각각 별개의 신학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예배와 선교를 각각 독립된 방에 격리시켜 버렸다. 그 결과 예배와 선교는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여 평행선을 그어 별개의 원리처럼 인식되었다. 오늘도 선교에 관심이 없는 학자들은 선교를 일종의 행동주의로 보고 예배의 부속물로 밖에 취급하지 않으며, 또한 예배에 대한 관심이 희박한 학자들은 예배는 의식적인 내향성의 표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방적인 관심에 대하여 '본회퍼' 는 선교라고 하는 하나님의 위탁에 대하여 배타적이거나 또는 선교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교회의 선교적 사명과 예배의 내적 기능 사이에 있는 깊은 관련성을 보지 못한 데서 오는 결과라고 지적하였다(Ethics, Tontanaed., 1963. p.302). 예배와 선교의 부조화가 현대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사상 속에 하나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신약성서의 교훈과는 모순된다. 신약성서는 예배와 선교의 일치를 강조한다. 복음서에 보면, 그리스도의 생활과 교훈은 선교에 관한 용어와 예배에 관한 용어를 같이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12:49에 보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고 또 어떻게 말해야할 것을 친히 내게 명하셨다." 고 하신 것은 선교에 관한 표현이다. 동시에 같은 복음서 6:51에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이 떡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산다."고 한 것은 예배와 관련된 표현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6:57에 보면, 예배와 선교를 동시에 표현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교훈은 선교와 예배를 구별하지 않고 하나의 통일성 있는 전체로 표시하셨다. 이 사실은 바울서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예배를 표현하는 용어 속에서 선교를 표시하도록 하고, 또한 선교의 용어를 사용하여 예배의 정신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롬 15:16, 골 1:28, 빌 2:17, 딤후 4:6 등에서 그 실례를 찾을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선교와 예배를 분리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는 자기의 선교의 노고와 교회의 제사성이라고 하는 쌍방의 활동을 하나로 묶어 생각하셨다. 그러나 예배와 선교를 하나의 차원에서 보는 신약성서의 강조는 결코 단편적인 구절을 집약함으로써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확실한 근거에서 인식되는 것이다.

즉 신약성서에 있어서 예배와 선교의 일치에 대한 강조는 그리스도의 주권에 근거하여 그가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사이의 장벽을 파괴시켰다고 인식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신약성서에 있어서 예수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주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의 백성의 생활은 항상 그리스도의 주권 밑에 있음을 믿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체에 적응된다. 고로 우리는 한 주님의 주권 밑에 살면서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예배의 영역과 인간의 생활 영역을 들로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것이 신약성서의 교훈이다. 그러므로 신약성서는 예배와 그리스도인의 일상 생활 사이에 본질적인 구별이 있을 수 없는 것 같이 예배와 선교 사이에는 본질적인 구별을 둘 수 없다. 그 이유는 선교는 이 세상의 일상 생활 속에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배하시는 부분과 하나님의 임재가 배제된 부분, 즉 예배의 영역과 선교의 영역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대에 있어서 예배와 선교의 영역을 구별하는 이유는 많은 그리스도인의 생각 속에 두 개의 차별된 차원의 개념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본회퍼'의 말을 다시 빌린다면, 그는 이 두 개의 영역을 다음과 같이 길게 설명하였다. 즉 두 개의 영역이란 하나는 신적이며 거룩하고 초자연적인 그리스도적 영역이고 또 하나는 세속적이고 자연적인 비그리스도적 영역이다. 현실의 전체는 이 두 부분으로 나누인다.

이렇게 현실의 전체가 거룩한 영역과 속된 영역, 그리스도적 영역과 세속적 영역으로 갈라짐에 따라 인간은 이 두 영역 중 어느 하나에 치우칠 가능성이 생긴다. 그리스도의 주권이 두 개의 현실 중 어느 한 부분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주권 외에도 많은 다른 현실이 있다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주군을 제한하는 결과가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세상이 서로 대립하고 반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인간은 현실의 전체성을 포기하고 그 자신을 두 개의 영역 중 어느 한쪽에 두게 되는 딜레마에 빠지기 쉽다. 이 말은 이 세상 없는 그리스도만을 추구하든가 혹은 그리스도 없는 이 세상만을 추구하든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 현실은 두 개의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현실이며, 이 하나의 현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현실이다. 그리스도의 주권을 벗어난 현실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을 구하지 않고 또 인식하려 하지 않으면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F.V. Filson, The New Testament against its Environment, 1950, p.196)고 지적함으로써 예배와 선교를 갈라놓는 비성서적인 생각을 시정하려 한 것은 정당하다고 믿는다 이와 같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고 예배와 선교를 갈라놓는 것은 비신약적이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표현은 이와는 다르다. 구약성서는 세속적인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런 것은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데 있어서 장애물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것은 배제해야 된다는 것이 구약의 정신이다. 그러나 신약성서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접근해 오셨기 때문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속되게 여기지 말라(행 10:5)고 하셨다. 여기에 깨끗하게 하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깨끗하게 하심을 의미한다(히 1:3), 무엇이든지 그 자체가 더러운 것은 하나도 없다(롬 14:4). 그리스도의 깨끗하게 하시는 속죄의 능력 앞에서는 무엇이나 깨끗해질 수 있기 때문에 성속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에 의한 성속의 새로운 관계는 바울의 진술에 의하여 더욱 분명해졌다. 그는 고린도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 가운데 살며 그들 가운데 다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도 내 백성이 될 것이다.(고후 6:16)"고 말했다.

여기서 바울이 진술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은 이미 격리되고 고립된 어떤 건축물의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생활 공동체다. 따라서 거룩한 영역 밖에 있는 일상 생활의 총체로서의 세속성이란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것이건 바울의 사상과는 이질적인 것이다. 초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예배하기 위한 특정한 장소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나는 장소는 공간적으로 설정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러한 만남의 장소는 승천하신 주의 인격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고로 거룩한 장소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같이 편재하기 때문에 예배를 전 생활에서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고로 신앙 속에서 생기는 반응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예배라고 하는 의미에서 생각하였다. 그리고 신약성서 시대에 있어서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의 사건이 되기 위하여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일정한 장소라든가 일정한 때가 첫째로 중요성을 가진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일정한 장소와 때에 의하여 생기는 예배는 하나님을 향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전 실존을 바치는 응답 전체와의 관련에서 이해되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이 세상에서 교회의 생활 전체의 상황 속에서 신학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결론은 예배와 선교를 서로 격리된 방에 가두어 놓는 일이 얼마나 큰 잘못인가를 분명히 말해 준다. 예배와 선교의 일치성을 무시하고 어느 한 쪽을 고립시킬 때, 예배와 선교의 참된 정신과 목적은 상실된다. 즉 예배를 선교에서 고립시키거나 유리시킬 때, 예배는 내향적인 경향을 갖게 된다. 그리고 내향적인 교회는 언제나 자신의 안일을 선교에 앞세우게 된다. 즉 기성 질서 속에 숨어 버린다. 또한 이런 교회는 자기 승인을 그 사명보다 중요하게 여기게 되며 ,자신의 대내적인 배려를 사도성 위에 놓게 되며, 형식을 봉사에 선행시키는 교회가 되기 쉽다. 그리고 내향적인 교회는 교회의 본질적 성격으로서 이 세상 안에서의 화해의 증언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교회는 종교적 연기를 행하는데 불과한 인간의 집단이 되어버릴 가능성마저 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증언이나 봉사의 사명을 잃고 만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선교에는 참여하지 않게 되고, 모든 관심을 사회 생활 전체에 둔다기보다는 자기 교회의 회원에게만 집중하게 되며, 현실과는 완전히 유리된 생명 없는 하나의 종교 그룹으로 전략하게 된다.              

반면에 선교를 예배에서 고립시키거나 유리시킬 때, 그 선교 자체는 인간 예찬과 자기 과장에 빠질 우려가 많다. 이렇게 되면, 선교는 인간의 자존심과 자기 의식에 지배되어 자기가 그리스도의 주인이 아니라 종이라는 것을 쉽게 잊어버리고 만다. 이 때는 선교의 중심을 잃게 된다. 예배한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의식을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에게 집중하고 또 그것을 생활 전 차원에 적응시킬 때, 예배의 정신은 산다. 왜냐하면 예배는 수직적인 차원과 수평적인 차원, 즉 초월적인 하나님과 이 세상을 향한 선교가 조화를 이룰 때에만 진정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와 선교는 두 영역으로 분리하거나 어느 한쪽으로 고립하지 않고 완전한 일치와 조화를 이룰 때, 둘 다 산 의미를 갖게 된다. 고로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할 때에 형제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은 것이 생각나거든 너는 그 재물을 제단 앞에 두고 가서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 그리고 와서 제물을 드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 속에서 예배와 선교 두 차원의 일치를 본다. 예배의 수직적 차원에 참여하는 일, 즉 제단에 제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과의 교제에 들어가는 일과 또는 예물을 제단에 두고 가서 형제와 화목하는 형제애는 완전히 조화되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교회는 설립의 근거와 목표가 있다. 설립의 근거는 하나님께 예배를 통하여 영광을 돌리는 것이요, 설립의 목표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고로 교회는 하나님을 위한 교회인 동시에 세상을 위한 교회이다. 세상을 구원코저 선교하는 봉사단체이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으며 동시에 세상을 향하여 뛰어나가는 것이 교회이다. 그러므로 예배와 선교는 분리할 수 없다.

선교는 예배하는 중에서 참된 선교의 정신을 찾을 수 있다. 이 둘의 일치와 조화는 하나님과 세상을 화해시킨 그리스도의 화해의 원리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이런 화해의 원리에서 본 예배와 선교의 개념은 본래 같은 차원의 양면이었던 것이 교회 생활에 있어선 서로 고립된 부분이 되어 버렸다. 고로 우리는 다시 예배와 선교의 일치성과 조화를 재검토하고 재발견하여 예배를 위한 선교, 선교를 위한 예배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