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예배의 신학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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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란 말은 공경한다, 앙망한다, 찬양한다 등의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런 정신이 형식으로 표현될 때, 인간은 자연히 신의 제단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이다. 예배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신의 위엄 앞에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고로 예배는 종교의 중심적인 사실이며 인간의 최고의 의무이다. 옛날부터 오늘까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신에게 예배하지 않은 민족은 없었다. 비록 그 예배의 대상이 인간이 만든 우상이었다 할지라도, 인류는 그 신에게 예배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였다. 인간 이상의 어떤 존재를 설정해 놓고 그것에다 경의를 표하고 신뢰하려는 인간의 마음은 본능적인 요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자기 마음에 예배할 신이 없을 때는 불안하고 적막함에 빠진다. 사슴이 시냇물을 항상 사모하듯이 인간의 마음은 신을 추구하고 그에게 예배하려고 한다. 고로 예배는 가장 근본적이고 고상한 인간의 본능이다.

우리의 영혼은 언제나 신을 향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안에서 쉬일 때까지는 불안하기 때문이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요리문답 제일조에 보면,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원히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정의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를 즐거워한다는 말은 신에게 예배하는 마음의 태도를 묘사한 것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성호를 높이기 위하여 생활하는 것은 인생의 최대의 목적이다. 참되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기초로 하는 생활은 스스로 신을 예배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고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권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생활 그 자체가 바로 예배하는 생활이다. 참 신앙생활은 끊임없는 예배의 생활이다. 다시 말해서 예배의 생활이란 자기 중심, 자기 본위에서 하던 생활에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로 전환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 그것이 바로 인간의 종국의 목적이다. 우리의 생활이 예배의 생활이 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생활의 중심이 자기 중심에서 전환되지 못하고 그대로 있는 까닭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주로 삼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주로 하며, 하나님보다도 재물이나 권세를 주로 섬긴다. 하나님 이외의 것을 섬기려는 유혹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늘 경험한다. "심지어는 예수님까지도 마귀로부터 나에게 경배하면 만국의 영화를 다 네게 주리라는 유혹을 받으셨다"(마 4:11). 그러나 주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오직 주 너희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고 물리치셨다 우리도 예수와 같이 하나님 이외의 것을 경배하려는 유혹이 올 때, 대담하게 물리쳐야 한다. 끊임없는 예배의 생활이란 하나님만을 섬기는 생활,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모시는 생활이다.

이런 예배의 생활을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실재를 확신해야 한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동요치 아니 하리로다"(시 16:8). 우리가 예배할 때에 예배의 대상의 가치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에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예배를 받으시기에 적합한 자라야 한다. 계시록 4장 끝에 보면, 24장로가 보좌에 앉으신 영원 무궁하도록 살아 계신 하나님께 경배하고 자기들의 면류관을 벗어 보좌 앞에 던지며 "주께서는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세세토록 받으시기에 당연하옵니다", "주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의 뜻에 의하여 만물이 창조되어 존재하나이다." 하고 예배의 대상이 누구임을 분명히 밝혔다. 문제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예배를 받기에 가치 있는 신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에나 예배할 수는 없다. 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류를 눈동자 같이 보살피시며 사랑하시는 전지전능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족하신 분이다. 우리는 오직 한 분이신 여호와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며 예배해야 한다(신 6:4). 우리는 아무리 덕이 높고 혹은 세상의 권세를 가진 자라도 인간을 신으로 경배할 수는 없다. 이것은 예배의 남용이다. 우리는 종교적 의미에서 인간을 존경할지언정 예배할 수는 없다(행 10:25). 그것은 우상숭배다. 예배는 노예적이어서는 안 된다. 사랑받는 아들이 아버지나 어머니를 섬김같이 해야 한다. 예배는 자유롭고 경건하게 드려야 한다. 우리는 막연한 신에게 예배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신 구체적인 하나님께 예배한다. 예배는 두 가지 면이 합쳐야 한다. 하나는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내시는 것, 둘째는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한 태도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예배를 받기에 족한 분이심을 사람에게 표시하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인정하고 이에 예배하며 섬기는 것이다.

지금까지 예배의 정신을 설명했다. 그러나 예배는 정신으로 끝날 수 없다. 정신은 반드시 형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마음 속의 소원은 스스로 말이 되어 입으로 표현되며 자연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게 된다. 인간에게 정신과 형식이 있어서 양자는 분리시킬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정신이 육체를 통해서 표현되고 활동하는 것 같이 예배의 정신은 그 형식에서 발휘한다. 형식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형식에 있어서 정신은 훈련되고 강하게 된다. 다만 정신은 잃고 형식만을 존중할 때, 형식은 정신을 타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러나 예배의 정신이 충실하여 샘물이 밖으로 넘쳐흐르듯 형식으로 표현된다면, 이 형식은 훌륭한 것이다. 경건한 예배의 정신은 반드시 엄숙한 형식으로 나타난다. 고로 정신과 의식은 서로 분리시킬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예배의 정신이 형식으로 표현될 때, 그것은 가정예배가 되며 또는 교회로서 드리는 예배의 공통성을 지니게 된다. 물론 나 홀로 조용하게 예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충분하다. 기독교는 단체를 존중하고 신자의 거룩한 교제를 중히 여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나 혼자서만 믿는 것으로 족하지 않고 이웃과 더불어 믿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어서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예배할 때, 기독교의 정신은 표현된다. 고로 예수님도 "내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그 가운데 있겠다"(마 18:20)고 하셨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성도의 교제는 공동의 예배로 표현된다. 어떤 이는 주일에 반드시 교회에 나가서 공동예배를 참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야외에서 자연과 더불어 조용히 예배하면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말하지만, 그런 사람은 아직도 성도의 교제라는 그리스도의 근본 정신을 바로 몰라서 그렇다. 공동예배는 하나님을 믿는 자의 특권이요 의미이다. 그리스를 믿는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함은 교회정신의 바른 표현이며 자연스런 일이다. 교회의 중대한 목적은 성도의 교제를 하고 같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다. 서로 모여 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곳에 교회가 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공동예배를 제거하면, 교회의 존재 이유가 없어진다. 교회가 설교나 강연만을 듣기 위한 장소라면, 세상의 공회당과 다를 것이 없다. 교회는 예배하는 곳이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당은 언제나 정돈되고 청결하고, 장식된 경건한 곳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당의 건축양식도 예배에 크게 관계된다. 교회당은 경건의 정신을 자극하도록 지어져야 한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예배 의식에는 기도, 찬미, 성서낭독, 설교, 세례, 성찬, 헌금, 축도를 성립된다. 이것을 크게 구분하면 성찬, 설교, 성서낭독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미치는 면이고, 찬미, 기도, 헌금은 사람에게서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다. 그러고 세례와 축도는 양면을 포함한다. 완전한 예배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내려오는 것과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올라가는 두 면이 조화될 때 성립된다. 만일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만 생각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소홀히 하면, 건전한 예배가 될 수 없다. 그러면 성찬이란 무엇인가? 루터는 성찬은 주의 말씀이라고 했다. 즉 성찬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을 전하는 행동이다. 성서낭독은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고로 성서는 경건한 태도로 읽어야 한다. 듣는 청중으로 하여금 낡은 말씀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읽어야 한다. 설교는 예배에 대상인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도록 가르치려는 데 목적이 있다. 또한 회중으로 하여금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참 마음을 갖게 해 주는 것이 설교의 사명이다.

바울은 "유대인은 기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전 1:22-23)고 설교의 사명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공동예배에 있어서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크게 주의할 것은 설교는 예배의 한 부분이지 결코 전부는 아니다. 예배에 참석해서 설교를 들으면 되고 설교를 들음으로 정신수양에 도움이 되면 그만이지 하는 그릇된 생각은 버려야 한다. 이것은 설교의 부산물이지 근본 목적은 아니다. 설교의 근본 목적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로서 찬미는 예배의 중요한 요소다. 예배에 있어서 구속의 감격을 마음으로부터 노래할 때, 인간들의 메마른 마음을 청신하게 하며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이름을 날마다 전파할찌어다."(시 96:1-2)하고 찬양의 중요성을 말했다.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이 대화하는 것이다. 공동예배 때에는 하나님과만 말하는 사람에게 말할 필요는 없다. 헌금은 감사의 표현이다. 금액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고 감사하는 정신에 그 가치가 있다. 예배의 참 목적은 하나님을 찬미하고 자신을 잊어 버리는 데 있다. 고로 예배할 때에 주의할 것은 예배드리는 자의 경건한 정신과 엄숙한 자세를 갖는 것이다.

끝으로 이 지상에서의 예배는 앞으로 실현 될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드릴 예배의 준비요 모형이기도 하다(계 21:3). 고로 예배는 이 세계에서나 저 세계에서 모두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