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교회 혁신과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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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특색은 한 마디로 격동의 시대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마치 회오리  바람처럼 눈부시게 돌아가고 있다. 날로 달로 달라지는 기술 혁신에 의하여 인간의 생활 양식이 변하고 사회제도가 변하고 사고 방식도 변한다. 따라서 고속도의 도시화 현상 등에 의해서 인구는 급격히 유동하고 도시는 날마다 그 모습을 바꾸며 어제의 자연은 오늘의 자연이 아니다.

신속한 교통과 통신 때문에 옛날의 시간 개념과 공간 개념은 완전히 변모해 버렸다. 옛날에는 자기의 좁은 동리에서 자기끼리만 사는 줄 알았지만, 이제는 자기 방에 앉아서 천리 만리 밖의 사람도 대화하고 또 눈으로 불 수 있게 됨으로써 이웃의 개념도 바뀌게 되었다.

남의 나라 생활을 듣지도 못하고 갇혀 살던 사람들이 이제는 세계 모든 나라의 생활을 쉽게 보고 들으며 문물을 교환하게 되었다. 따라서 자기들의 생활과 남의 생활을 대조하면서 모든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교회는 이렇게 바로 격동하는 세계 속에 있다. 교회는 결코 이런 세상이 풍랑이 미치지 않는 행복의 은자(隱者)가 사는 섬이 아니다. 이런 격동의 파도는 교회 문 밖에서 잠자는 눈을 깨울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크게 교회를 흔들고 있다. 최근 교회론과 선교론의 관계도 이와 같은 지평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선교하는 교회냐? 선교를 위한 교회냐?의 문제 제기는 하나의 토론을 위한 토론이 아니라 급격히 변혁하는 세계 속에서 위기감과 절박감에 의한 교회의 자기 음미요, 자기 검토에 불과하다. 그래서 50년대 이후 20여 년간 많은 사람들은 교회 혁신을 부르짖어 왔다. 고로 새삼스레 교회 혁신이란 말은 별로 실감을 주지 못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회 역사 전체가 성령에 의한 혁신의 역사이고 특히 개신교에 있어서는 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는 부단히 혁신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혁신이니 개혁이니 , 쇄신이니, 체질개선이니 하는 문제에 대한 강조는 앞으로도 부단히 반복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교회 혁신이 이렇게도 긴급하게 불가결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뜻대로 실현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우리는 여러 가지 요인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큰 요인은 바로 교회의 지도자에게 있지 않을까?

교회 혁신을 그렇게도 간절히 바라면서도 날이 갈수록 교회는 새로와지는 대신 오히려 점점 후퇴하는 느낌마저 주는 이유가 어디에 있나? 그것은 교회 지도자 자신의 혁신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혁신을 실현하는 가장 빠른 길은 지도자 자신의 체질을 개선하는 데 있다. 교역자는 말씀의 선포자요, 교회에 진심으로 봉사하는 자다. 그러나 교회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땅에 있으며 급격히 변화하는 세게 한 가운데 위치하기 때문에 지도자는 변화에 민감하게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기독교는 천박한 시대의 산물은 아니다. 영원히 불변하는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본말을 전도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그런 유혹에 빠질 것을 두려워해서 고정화된 교회 개념에 붙들려 그 속에 안주하는 것은 보다 더 큰 과오를 범하는 일이다. 우선 교회 지도자 자신이 이렇게 격동하는 세계 속에 존재하면서 오늘의 상황에 깊이 개입하여 말씀 전파의 역군 노릇을 함으로써 교회 혁신은 실현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항상 제자들에 입장 서서 모든 것을 실행하셨다. 이와 같이 교회지도자는 교회 혁신에 앞서 자기 혁신에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의 지도자가 먼저 새로워지어야 할 과제가 무엇인가?

교회 지도자에게 제일 먼저 요구되는 혁신의 과제는 권위 의식에 대한 혁신이다. 성직자에게 제일 먼저 요구되는 것은 권위다. 이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교역자의 기본 문제다.

오늘은 어느 때 보다도 권위 있는 교역자를 요구하는 시대다. 도락삼아 전도에 나섰든지, 직업으로 생각하고 이 일을 택했든지, 하여튼 어떤 자기 만족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는 교역자 말고 정말 인간의 깊은 내적 고민의 세계에까지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권위의 사람이 요구되는 것이다. 권위는 교역자의 생명이다.

아무리 학식이 풍부하고 웅변이 좋아도 목회자가 권위를 잃으면 그 지식과 웅변은 아무런 효과도 나타나지 못할 것이며 맛 잃은 소금이 될 것이다. 그런데 지난 20여 년간 우리는 교회 지도자로서의 기틀이 되는 권위를 잃어 버렸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많은 지도자들이 최대의 관심을 그리스도에게 두기보다는 교권과 정치에 두었고 내용과 생명에 두기보다는 전통과 형식에 치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고로 오늘날 세상은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게 되었고, 그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는 교회의 신자들이 그 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로 우리에게 시급히 요청되는 권위는 과거와 같은 어떤 형식이나 규율을 강요하는 외부적 제약이나 강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 파고 들어가서 그 깊은 의지를 움직여 이를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만들어 주는 좋은 신념과 사상과 생활 철학을 동반하는 인격의 힘을 가르치는 말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외적이요, 형식적이요, 피상적인 지도자의 권위를 내적이며 정신적이며 인간적인 능력 있는 권위로 그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 인도의 4억 대중을 움직인 것이 영국의 문화나 무력의 강제가 아니라 다섯 자도 못되는 조그마한 거의 반 벌거숭이 간디의 인격의 힘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오늘 세인의 여론을 들어보면, 기독교에서 전하는 진리 자체에 대해서는 옛날과 꼭 같이 경의를 갖고 있지만 기독교 지도자에 대하여는 일률적으로 존경감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세상의 이런 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우리는 이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가슴을 쳐도 울지 않는 이 세대만을 책하거나 탄식할 것이 아니라 피리 부는 사람 그 자체에 어떤 이상이 없는가를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부는 피리 소리가 아무리 아름다운 멜로디를 낸다 하여도 피리 부는 사람 그 자체가 관중들의 눈에 거슬리는 모양을 보여줄 때, 그 연주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지도자로서 권위에 대한 의식 구조부터 새롭게 하여야 한다.  

둘째로 교회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혁신의 과제는 설교에 대한 혁신이다. 교역자는 말씀을 전달하는 사역자다. 고로 설교는 그 시대에 대한 과감한 증언이 되어야 하고 개인의 마음을 파고들어 감화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주님이 군중을 향해 입을 열었을 때, 무슨 딱딱한 이론이나 케케묵은 고담이나 대중의 인기를 노리는 우스게 소리나 자기 자랑을 일삼는 재담 따위는 전연 없었다. 그러나 그거 전하는 말씀 속에는 권위가 있어 대중의 가슴 속을 파고드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설교를 들은 대중은 그의 말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 같지 않고 권위가 있더라고 했다.

설교자가 게을리 해서는 안 될 세 가지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말씀(kerygma), 상황(situation), 전달(communication)이다. 이는 오늘날 신학의 중심 과제인 동시에 지도자들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설교자는 언제나 한 손에는 진리의 말씀을 들고 있으며 또 한 손에는 우리가 처해 있는 시대적인 상황을 쥐고 있다.

케리큐마의 천명도 영원한 문제요, 변천하는 상황의 바른 진단도 늘 새로운 과제다. 이 케리큐마와 상황의 통화(Communication)를 성립시키는 것이 설교자의 최대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오늘 설교자의 최대 관심은 우리가 받아 가진 진리를 이 시대 사람들에게 잘 이해될 수 있도록 현실적인 감각을 지닌(용어, 내용, 사상, 형식, 방법에 있어서) 복음의 설명과 해석이 필요하다. 아니면 케리큐마의 전달은 독백에 그칠 우려가 있다. 고로 말씀과 상황의 대화를 가능케 하는 방법으로서의 설교는 으례히 두 개의 초점을 가져야 한다. 첫째는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또 하나는 인간의 상황, 즉 현실 위에 그 초점을 두어야 한다. 만일 이 둘 중에서 어느 하나를 빼거나 무시해 버린다면, 그것은 산 메시지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말하면서 그것이 인간의 현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그것은 성서 주해는 될지 몰라도 산 메시지는 못 될 것이다.

또 아무리 상황의 바른 진단과 인간의 현실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더라도 그 문제가 하나님 말씀 안에서 해답을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시국강연은 될는지 모르나 권위 있는 메시지는 되지 못 할 것이다. 고로 권위 있는 메시지를 전하려면, 영원한 말씀을 끄집어 내어서 현실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필요한 양식이 되도록 통역을 해주거나 아니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끌고 올라가 영원의 무릎 앞에서 해답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에를 들면 오늘의 많은 청년들이 주일마다 설교를 열심히 듣기는 하나 현실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설교의 내용과 그들의 삶의 상황 사이에 아무런 대화의 길이 없다는 것과 공통의 느낌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였던 것과 같이 설교는 하나님과 인간, 영원한 시간, 교회와 사회를 만나게 하는 중보자의 역할을 그 사명으로 삼고 있어야 한다.

셋째로 교회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혁신의 과제는 인간 관계다. 현대인의 지도자는 순수한 이성을 은폐하지 말아야 한다. 나라는 인간을 어떤 장식품 속에 숨기거나 혹은 목사라는 법옷 속에 숨겨 놓고 스스로 자기를 인간 이상의 자리에 올려 앉히는 것을 삼가야 한다. 거침없는 마음씨, 그것이 곧 힘이다. 사람을 움직이고 그 깊은 곳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힘은 기교나 재능의 우수함에 있는 것이 아니요, 참 진실한 마음에 있으며 조화된 인격에 있다.

때로는 정치적인 수완이나 방법으로 필요할는지 모르나 그러나 권위의 최후적인 근거는 진실한 인간성에 있다.  

오늘 많은 젊은이들은 목사를 만나면 숨이 막히는 것 같다든가, 사나운 시어머니 앞에 나간 것 같이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을 한다. 목사의 손에는 꼭 성경책과 찬송가가 들려져야 하고 그 입에서는 항상 꾸짖는 말만 하는 태도는 많은 청년들에게 자유로 지도자를 접근할 수 없는 거리감을 안겨 주게 된다. 이런 태도는 지도자에게 외부적인 권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현대인에게 인정받는 태도는 못 된다.

고로 오늘의 교회 지도자는, 어떤 계층의 사람과도 대화가 가능하도록 구김살 없는 솔직하고 순수한 인간성을 갖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상 말한 것은 결국 지도자의 질을 향상시켜야 하겠다는 말이 되겠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형편은 지도자들이 자신의 향상을 위해서 깊은 명상이나 독서에 시간을 바치고 정력을 쏟을 환경이 되어 있지 못하다. 그런 환경에서 이럭저럭 적응하다 보면, 자기도 미처 모르는 사이에 처음에 받았던 은혜의 감격도 다 식어버리고 영감도 없어지고 사상적 내용도 시대의 감각도 없는 설교만 반복하게 되고, 케케묵은 사상과 생활에서 때를 벗지 못하게 된다. 이 때는 하는 수 없이 시대에 뒤진 폐물이 되어버릴 염려가 크다. 그래서 자신의 부족을 덮고 현재의 위치를 유지하려는 보신책으로 사실은 그렇지도 못하면서 보수니 전통이니 신령한 은사니 하는 것들을 전면에 내세우게 되고, 자신은 그 껍질 속에 들어가 숨은 성자 모양 숨어 버린다. 고로 우리 교회 지도자들은 모름지기 시대와 함께 질을 높이기 위해서 잠시라도 자신을 혁신하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될 것이다. 지도자가 새로워지면, 교회는 자연적으로 새로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