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나님과 세계

 (27-33)

 

 

우주의 기원과 구조에 관계되는 교리를 기독교에서는 우주론이라는 신학적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기독교는 우주론의 기초를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창세기 설화에 둔다. 이 우주는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창조자에 의하여 되어진 것이라고 믿는다. 성서는 천지창조에서 시작하여 완성에 이르는 기록이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서술하였다. 제1일에는 빛을 지으시고, 제2일에는 공기와 물을 창조하시고, 제3일에는 육지와 그 위에 나는 초목을, 제4일에는 빛의 저장소인 천체를, 제5일에는 공중의 나는 새와 수중의 공기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제6일인 끝날에는 육지에 번식하는 짐승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처음 5일은 모두 마지막 날을 위한 준비였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심이다. 즉 창조의 최후 목적은 영적 실재자의 출현이다. 그래서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른다. 이 최후의 목적인 인간의 창조를 위해서는 오랜 세월이 흘렀다. 물론 6일간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 우리가 계산하는 하루 24시간의 계산은 아니다. 몇만년 혹은 몇백만년의 하루를 여섯 번이나 거듭한 창조자의 노동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하나님이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시고 완성하시는 긴 순서과정을 기록한 인류 구원의 역사이다. 고로 창세기 제1장은 유대인의 우주창조설이나 만물의 기원에 관한 과학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인류구원의 입장에서 본 우주관이다. 그러므로 이 논문은 하나님과 우주의 관계를 두 가지 큰 면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첫째는 창조의 의의요, 둘째는 창조자의 섭리다.

 

1. 구속사(救贖史)적 입장에서 본 창조의 의의  

사도 바울은 인류 구원이라는 구속사의 입장에서 창조의 의를 다음 말 속에서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는 시작이 있고 계속과 목표가 있다. 즉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태초는 만물의 태초만이 아니라 인류 구원의 태초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성업(聖業)에는 처음과 나중이 있다(계 1:8). 하나님의 창조사업의 종말은 인류의 완성이다. 계시록에 표시된 새 '예루살렘'은 죽음과 고통이 없는 종말의 시작이다. 고로 인류의 구원은 천지창조로서 시작된다. 이러한 창조의 전체 과정이 지니는 의미는 전체로서의 창조가 그리스도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즉 창조의 의의와 내용과 목표는 창조의 전체 행동이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유래되어진다.

(1) 창조의 기원과 그리스도의 관계

성서는 이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 1:16-17). 또 히브리서 기자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히 1:2)고 말한다. 이처럼 창조의 활동이 태초로부터 그리스도와 결부되어 있다고 한다면, 창조의 하나님이 바로 구속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2) 창조의 진행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만일 구속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만물의 기원과 깊은 관련이 있다면, 그의 구속적인 행동도 하나의 계속적인 창조라고 말할 수 있다. 창조는 늘 새롭게 진행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계 속의 파괴적이며 적대적인 세력을 상대로 싸우고 그것을 븍복할 대마다 새로운 창조를 해나가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는 그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한다. 이 새창조는 구속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현재도 진행되고 있다. 이 사실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

(3) 창조의 목표와 그리스도의 관계

그러나 이 새로운 창조도 역사의 한계 속에 가두어 놓을 수는 없다. 신앙은 이 창조가 현재에도 계속되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신앙은 이 새창조가 종말론적인 성취 가운데서 완성되어지기를 바란다 이 미래가 바로 최종적인 목표다(고전 15:10-18).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체로서의 창조와 그리스도가 결부되어졌다고 믿는 경우, 하나님의 세계창조의 뜻과 목적은 뚜렷해진다. 이러한 해석에 비추어 볼 때, 세계의 존재근거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자립하는 존재가 아니라 절대로 창조자에게 의존하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세계창조는 이성적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이 승인할 문제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의지를 이런 관점을 통해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좀더 객관적인 증언이 필요하며 또 그것의 가능성을 성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쳐주고 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 1:20).그리스도교 신앙은 피조물과 그 존재 자체가 창조주에 대한 증언을 한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세계창조의 의미를 생각할 때, 그리스도교적인 창조의 교리는 두 가지 근본적인 특징을 뚜렷하게 나타낸다. 첫째 특징은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에 있어서 피보물은 창조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창조자에 대한 피조자의 관계는 쉴라이에르마헤르의 주장대로 절대의존의 관계다. 그리고 이 절대의존의 종교적 의미는 첫째로 하나님은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주권적인 분이라는 것, 둘째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피조물은 하나님의 권능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 셋째로는 피조물은 자신 속에 어떤 신적인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된다는 무조건 의존에 있다. 두 번째 특징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신앙은 현실세계를 선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약 1:17). 사람이 살고 있는 유한의 세계도 하나님의 세계인 것이다.이 세계는 결코 영적인 부분과 속된 부분으로 갈라놓을 수 없다. 이 세계는 하나이며, 창조자이신 한분 하나님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2.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1) 섭리란 무엇인가?

창조의 신앙은 세계창조를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사건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현재의 사건으로 파악해야 한다. 고로 창조의 신앙은 섭리의 신앙과 결부되어야 한다. 세계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현재적 지배를 '하나님의 보존의 은혜'라고도 부르며, 이것을 통칭 섭리라고 한다. 세계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자신의 완전한 지배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데 있다. 그 실현을 위해서 하나님은 오늘의 세계를 개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당신의 사랑의 손 밑에 보존하시며 배려하시며 수호하시는 것이 섭리의 뜻이다. '하이델베르크 교의 문답서'는 섭리신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고 그리고 현재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힘, 이 힘에 의하여 하나님은 천지와 전 피조물을 보호하시며 초목의 잎, 우로, 농장, 식음, 건강, 병, 빈부 등 모든 것은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요 하나님의 보호에 의하여 지배되는 그 힘을 의미한다." 섭리신앙은 결정론이나 숙명론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는 기계적이고 법칙적인 것이 아니고 피조자의 자유의지가 인정되는 것이다. 섭리신앙은 세계의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의지에 기초해 있지만 그러나 피조자의 의지의 상대적 자립을 부정하지 않는다. 섭리신앙은 모든 것의 원인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뜻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돌보심 모든 사건 안에는 그의 목적이 현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맡겨둔다는 확신을 의미한다(마 6:10, 눅 22:42, 마 6:33, 롬 8:28).

(2) 섭리와 악의 문제

이 세계가 하나님의 섭리 밑에 있다면,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물음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이다. 악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육체적 악이요, 다른 하나는 종교적 악이다. 이것을 기독교는 죄라고 부른다. 이것은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철저한 대립으로 존재한다. 바르트는 이것을 섭리신앙의 한계라고 표현하면서, 현실세계에 나타나는 악을 성서에 의하여 네 가지를 들었다. 첫째 악은 고(苦)요, 둘째 악은 죄요, 셋째 악은 죽음이요,

넷째 악은 악마다. 이러한 악은 언제나 섭리신앙에 도전하며, 신앙의 이론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섭리와 악의 문제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면, 하나는 섭리와 고난의 문제다. 그러면 먼저 섭리신앙과 죄악의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 문제는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그 목적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현재 개인이나 단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보호 밑에 있다면, 어찌하여 이 세계는 죄악이 존재하여 인간을 괴롭히며 불안 속ㅇ 몰아넣고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이 물음은 옛날부터 오늘까지 계속해서 반복되는 의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이론적으로만 제기되는 의문이 아니라 실제적인 신앙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다. 이런 의문에 대한 종래의 대답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두 가지만 예로 든다면, 하나는 하나님의 권능을 희생시킴으로써 이 의문을 풀어보려는 경향이다. 즉 하나님을 궁극적인 힘으로 보지 않고 배후에 다른 또 하나의 비윤리적인 힘의 존재를 인정하려는 태도에서 나오는 생각이다. 하나님의 전능을 제한하려는 태도다. 그러나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견해다. 둘째 대답은 '스피노자' 이래 '헤겔'에 이르는 소위 절대 이상주의적 철학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서 "악은 궁극적인 실재가 아니다"라고 보는 견해다. 이 견해에 의하면 궁극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모든 실재는 선이며 악도 악으로 생각하지 않는 견해다. 이것은 악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견해다. 그러나 기독교는 악은 가상(假象)이 아니요, 하나님 앞에 실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이런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면 기독교는 섭리와 죄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기독교 신앙은 세계에 있어서 죄악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책임에 돌리지 않고 인간의 책임으로 생각한다. 유혹을 허용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으나 악을 선택한 책임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져야 한다고 믿는다.

(3) 섭리와 고난의 문제

이것은 세계가 하나님의 수호 밑에 있다고 한다면, 왜 이 세계에는 고난이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에 대해서 전통적인 기독교는 대체로 두 가지 해답을 제시한다. 하나는 형벌 또는 보응적인 해석이다. 즉 세계의 모든 고난은 결국 죄악의 결과이며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생각하는 견해다. 이 해석에도 개인형의 고난과 전체적인 고난으로 분류한다. 개인적인 고난은 이 세상의 괴로움이 단순히 각 개인의 죄의 결과라고 보고, 반대로 행복이나 덕은 신앙의 결과라고 보는 견해다. 그리고 단체적인 고난은 죄상이 지은 죄의 벌이 그 후손에게 미친다고 보는 견해다. 이런 사고는 전체적으로 확대되어 '아담'이 죄의 결과인 사망이 전 인류에게 미쳤다는 '바울'적인 교리가 되었고, 그 사상이 교회역사상 '어거스틴', '칼빈' 등에 의하여 전승되었다(롬 5:12-14).

고난에 대한 두 번째 해석은 고난을 교육적인 의미에서 해석하려는 태도다. 이 견해는 고난을 형벌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교육으로 보며, 백성을 훈련하시는 것으로 본다. 이것은 반드시 죄와 관계시키지 않고 인간의 품성의 향상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보는 견해다. 교육과 훈련을 주안(主眼)으로 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고난의 교육적인 해석과 형벌적인 해석을 둘다 인정한다. 이 세계가 하나님의 지배 밑에 있고 죄악이 인간의 책임이라고 인정할 때, 죄악과 고난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 고난이라는 사실 밑에는 언제나 죄악이라고 하는 사실이 숨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성서는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분리하지 않는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롬 6:23)와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자가 되었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해냈다"(갈 3:13)에서 이런 의미를 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