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새로운 목회 형태

(198-204)

 

 오늘의 시대는 사회의 모든 분야가 전문화되고 분화되어 간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 대처하여 나가기 위하여 교회의 모든 활동도 목회자를 중심으로 하여 다양성 있는 방법을 취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각자의 종사하는 직업이 다르고 관심이 다르고 세대가 다르고 시대의식과 지식 및 교양의 정도가 다른 교인을 가지고 있는 교회가 그들이 일상 생활하는 상황과 아무런 접촉이나 동력관계가 없다면, 사회로부터 지탄받는 교회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교회가 어딘지 사회의 리듬과 맞지 않는 일방적인 목회를 해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교회를 보기 만해도 지긋지긋 한다든가, 교회 가까이 있는 집 값을 내린다는 등의 외부로부터의 비판은 이런 고식적인 교회를 가지고서는 이렇게 전문화되고 다원화되어 가는 사회에 적응할 수 없다는 이론이 된다. 그러면 어떤 형태로서 이런 사회에 적응할 것이냐 하는 것이 새로운 목회를 지향하는 목회자의 과제이다. 새로운 형태(形態)란 말은 역동적인(dynamic) 관계를 의미한다. 즉 외부와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역동적인 관계, 즉 그 사이에 구김살 없는 자연스러운 관계를 말한다.

옛날 풍습을 그대로 가지고 현대 사회 속에 살려면, 그는 웃음거리가 된다. 현대는 현대로서의 풍습과 그 시대와 사회에 맞는 생활 방식에 따라야 한다. 이와 같은 현대 사회 속에서 자연스러운 목회 형태가 무엇이냐를 다루는 것이 새로운 목회의 형태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의 편성, 프로그램, 조직 등 내적 문제를 취급하는 것이 교회의 구조론이라면, 목회형태는 외적인 기능과 방법 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목회를 위해서 먼저 몇 가지 지양해야 할 경향이 있다.

첫째는 지나치게 주장하는 피안적(彼岸的)인 경향이다. 이것은 우리 목회자가 이 세상을 지나치게 악마가 지배하는 곳으로 단정하고 오는 세계만을 대망한 나머지 이 세상에서 도피하고 피안의 세계에만 주요한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서 현실, 지금, 여기에 대한 구체적 윤리적 책임이 희박해져서 스스로 이 세상으로 격리된 소수자(An Isolated minority)가 되어 버리는 경향이다. 이 점에 대하여 스웨덴의 루터파 신학부흥에 공헌이 큰 아우렌(Aulen)은 하나님의 지배와 종말론과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하나님이 지배하는 영역의 타계성(The other worldiness of the realm of God)은 추호도 완화하거나 폐색될 수 없다. 성서의 종말론은 역사가 비본질적인 것으로서 소멸하여 버리는 것과 같은 초월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와는 정반대로 하나님의 왕국은 이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종말론이란 역사에 대한 하나의 특정한 견해다. 즉 그것은 역사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배하시는 영역에서 역사를 보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의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심과 동시에 제자들에게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하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다(Aulen, Gustaf. Church Law and Society, p.42).

둘째는 지나치게 편협하고 고립된 정신주의를 지양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세상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의미의 종교적, 정신적 영역에 한정하는 경우다. 즉 교회건물 속에서 행하는 모든 활동에 신도가 동원되어야 할 것을 역설하였으나, 이 세계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각각 받은 은사를 십분 활용해서 한다는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다. 신학적으로 이 입장은 그리스도의 주권이 교회 내에서만 인정되고 세계 전체 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주권은 인정하지 않는 태도다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이 속세에서 되어지는 사건으로부터 하나하나 도피하여 거룩한 영역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처하여 있는 세속의 영속에서 그리스가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가를 발견하고 그 활동에 참가하여 증거 하는 데 있다.

셋째로, 지나친 개인주의적 입장을 버려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집단적으로 사회 문제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하는 태도다. 여기는 개인의 결정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는 높은 배려가 들어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입장은 두 가지 점에서 결점을 내포한다. 하나는 오늘은 이미 개인주의 시대는 지났다는 현실 인식의 결합이다. 오늘은 개인도 집단 또는 조직의 일원 됨을 통하여 사회현실에 산다. 고로 사회 계획과 조직이 개인의 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적 영향을 받지 않는 사적 생활이 있을 수 없다. 제2의 결합은 좀 더 본질적 문제이다. 그것은 개인주의적인 생각은 그리스도인의 본질에서 벗어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교회가 신앙고백을 박탈당할 경우에, 또는 인종문제에 있어서 평등을 주장해야 할 때, 교회는 집단적으로 침묵을 지킬 수는 없다.

만일 교회가 사회적인 중요한 과제에 대하여 교회 내에서 여러 기관이 개인의 자유 존중을 이유로써 침묵을 지키고 무사주의를 택한다면, 교회는 예언자적 기능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풀 틸리히는 인간을 부단히 위협하는 파괴적인 힘에 대하여 인간이 가져야 할 두 가지 용기를 말했다. 첫재는 '자기 자신이 되는 용기'(courage to be oneself), 둘째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참여하는 용기'(courage to be a part)이다(Paul Tillch, Courage To Be, 1953).

종래 많은 개신교에서 자기 죄의 내적 파악에 철저했고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주체적 신앙을 견지하는 데 지나치게 중점을 둔 나머지, 자기 신용의 용기는 강조 됐으나 연대적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참여하는 용기의 중요성을 망각하여 개인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목회 형태를 분석해 보면, 대체로 위에 지적한 세 가지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퍽 단순하고 통속적이고 전형적인 타계사상에 사로잡힌 목회와 또 세속과 기성 질서를 모두 부정하고 타계적인 새로운 질서에 대해서 열광적으로 긍정하는 신비적인 타입의 목회로 그 유형을 분류할 수 있다. 그러면 새로운 형태의 목회란 무엇인가?

첫째로 역사와 대화하는 목회라야 한다. 역사와 대화를 갖지 않는 신은 기독교의 신은 아니다. 역사 위에서 선포되지 않는 메시지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일 수 없다. 이점에서 한국교회는 역사와의 대화에 있어서 올바른 자세를 취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주 많은 청년들로부터 "주말마다 설교를 열심히 듣기는 해도 전혀 현실감을 주지 못한다는 말은 설교의 내용과 나의 삶의 상황 사이에 대화의 통로가 열려 있지 못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역사적인 계시에 근거한 것임을 믿는다. 그리고 그 계시는 역사적 상황에 따라서 다양성을 지닌 내용으로 표현된다는 사실과 같다. 우리는 같은 신약의 복음서들 사이에도 계시의 다양성을 발견한다. 복음의 구심적(求心的)인 내용에는 통일적인 요소가 들어 있지만, 그 내용을 담고 있는 외피(外皮)는 다양성을 지닌 것이다. 다양성 안에 통일성(unity in diversity)을 지니고 있는 케류그마(Kerygma)와 다양성을 지니고 있는 역사적 상황은 언제나 정치적(static)인 것이 아니라 동적(dynamic)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움직일 수 없는 내용적인 사실(kerygma)과 움직일 수 있는 외연적 조건(外延的 條件) 사이에는 항상 동적인 대화 관계를 갖게 하는 것이 목회자가 지녀야 할 중요한 임무이다. 이런 의미에서 틸리히 교수가 신학의 두 가지 기조로서 제시한 실존주의 물음(Existential question)과 신학적인 해답(Theological answer), 다른 말로 표시하면 케류그마의 선포와 새로운 상황에서의 재해석은 유사한 논리의 형식을 보여준다. 즉 영원한 메시지가 시대적 표현에 적응되어야 한다는 말은 정당하다고 본다.

둘째로 새로운 형태의 목회는 균형 잡힌 방향 감각을 수립해야 한다. 교회의 기능은 적어도 다음 세 가지 기본적인 점이 있어야 한다. 사귀는 일, 배우는 일, 섬기는 일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남기고 가신 위대한 유산들이다. 교회는 먼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수직적인 교제가 있어야 하며 그리고 이웃사이에 수평적인 사귐이 있어야 한다. 이 화해의 제단이 예배이다. 그 다음 우리는 예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이 있어야 한다. 끝으로는 섬기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 봉사의 직책은 선교를 포함한다.

예수께서 제자의 발을 씻음같이 교회는 땅 끝까지 이르러 세계와 인류이 발을 씻어주는 섬김의 증거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다. 건전한 예배와 교육과 선교의 균형을 수립하는 것은 새로운 목회형태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셋째로 새로운 형태의 목회는 그 방법에 있어서 세상으로 향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다. 대체로 과거의 선교 방법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선교의 목적은 교회의 유지와 그 자체의 번영을 위해서, 선교의 책임은 교직자에 국한된 것으로 생각하여 왔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목회는 전면적으로 닫혀져 있던 구조였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밖으로 향하는 구조로 다시 구축하지 않고서는 선교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선교의 방향이 교회 울타리를 넘어 세계로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기능은 예언자요 제사장인 동시에 세상에서 길 잃은 무리를 지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 고로 선교에 있어서 교회의 안과 밖을 구별하는 태도는 금해야 한다.

이 시대의 목회자는 오히려 교회 밖으로 시선을 돌려 그들이 하고 있는 일에 깊은 관심과 이해와 동정을 가지고 충분한 협조의 태도를 임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교회는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말 것이다. 다른 말로 표시하면, 지금까지의 교회가 '오시오 구조'(Come Structure)였으나 이제부터는 가는 구조, 즉 세상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구조(Go Structure)로 바뀌어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로 오늘의 목회의 방향은 도시사회로, 농촌사회로, 특수산업사회로, 학회 혹은 군대로 넓어져야 한다. 다시 말하면 목회의 장소와 대상이 세계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진정 교회는 인간의 생활 전역에 센터가 되어서 교회에서 멀고 가까운 모든 생활 부문까지 목회의 손을 뻗쳐야 한다. 오늘의 목회에는 이런 우주적인 규모의 방법이 필요하다. 과거의 한국교회의 목회는 지나치게 구별과 차별을 많이 가진 형태의 목회였다.교회에 나오는 신자만을 살피는 목회, 그 중에서도 자기 교파에 속한 신자 혹은 그 중에서도 자기가 섬기는 개교회의 사람들만에 관심을 기울이는 목회였지, 사람들이 일하고 살아가는 장소와 기관 또는 교회가 서 있는 지역 사회에는 관심조차 가져보지 못하였다. 이제 새로운 타입의 목회는 양들이 밤낮 살며 놀며 운동하는 목장도 아울러 살피고 돌보아야 할 것이다. 책임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 오늘의 목회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 실로 교회는 그 문을 사방으로 열어 놓고 인간과 사회의 생활전면에 어디나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터놓아야 한다. 이런 목회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 생활을 지배하며 구속하시는 주권자가 되게 해야 한다. 그의 주권과 은총이 개개인의 실존에만 국한되거나 교회라는 가시적인 울타리 안에 제한하는 목회형태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권과 구주 되심은 개개인의 내면생활은 물론 역사와 자연 안에서도 현실화되고 사실화되어져야 한다. 목회의 대상이 이렇게 세계적이 되려면, 과거와 같이 전도의 책임을 교직자에게 제한하여서는 불가능하다. 교회 전원이 동원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능도 동원되어야 한다. 마치 상점에 진열해 놓고 앉아서 사러오는 사람을 기다리듯이 종소리를 듣고 교회를 찾아 나오는 사람만 기다리는 식의 목회방식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많은 신도를 무장시켜 세상으로 파견하여 사람 낚는 어부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전 신도와 전 기구를 총동원하여 계획성 있게 구원의 복음을 전 인류에게 전할 때, 한국과 세계의 복음 화는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새로운 목회라고 해서 어제의 교회를 떠나서 새로운 방안을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기성교회는 어디까지나 이 새로운 목회의 모든 홈 베이스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