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교회 생활의 분석과 반성

(205-215)

 

 어제의 교회 생활

미국의 저명한 사상가 라인홀드 니이버 교수는 기독교를 지적하여 흔히 예언자의 종교라고 즐겨 불렀다. 그의 저서 '기독교 윤리학'에 보면 그는 기독교의 본 바탕을 두 가지 차원의 조화에 있다고 보았다. 즉 위로는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인 신앙의 차원과 아래로는 이웃을 향하는 수평적인 사회성의 차원, 이 두 차원의 완전 조화가 이루어질 때에 성서적인 기독교는 실현된다고 주장했다. 니이버 교수의 기독교에 대한 이런 예언자적 선언은 그 당시 기독교의 정통주의 교회와 자유주의 교회 양쪽에 다 같이 던지는 놀라운 폭탄이었다. 하나님을 향한 교리적 신앙만을 주장하는 정통주의 교회에 대해서는 이웃을 향한 사회참여의 결함을 지적하고, 또 이웃을 향하여 사회참여만을 강조해온 자유주의 교회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향한 입체적인 신앙의 부족을 지적함으로써, 양쪽에 모두 대담한 개혁을 선언하였다.

그런데 과거의 한국교회는 니이버가 주장한 사회성의 차원보다는 교리적인 신앙의 차원에 편중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창립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소위 근본주의 신학에 입각한 폐쇄적이며 배타적인 신학교육을 실시함으로써, 교리적 신앙만을 열심히 강조해왔다. 그리고 이웃을 향한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은 아주 잃어버린 지대처럼 극히 등한시했다. 고로 선교 100주년을 향한 한국교회의 역사를 두고 생각할 때, 삼일운동을 전후하여 있었던 소수의 초대교회의 사회운동을 제외하고는 그후 나라가 주권을 찾을 때까지 우리 교회는 이웃을 향한 사회적 책임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극히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개인 구원을 위해서는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으나, 교회의 사회적 책임인 정치, 경제, 교육, 예술, 노동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방인의 지대처럼 불신자의 손에 내맡겨 버렸다. 이것은 성서적인 기독교의 일면만을 이해한 데서 온 비극이다.

니이버 교수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고, 성서적 기독교는 위로 향하는 신앙성과 아래로 이웃을 향한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실천하는 데 있다. 특별히 주님께서 기독교의 수평적인 차원인 세상을 위한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선한 행실을 비유로써 가르친 것은 대단히 의미가 깊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줌으로써 이웃 사랑의 사회적 책임을 행한 사람은 위대한 제사장도, 레위 사람도 아니고 무명의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행하라고 분부하셨다. 이것은 교회에 대한 주님의 경고이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과거의 한국교회는 이 사마리아 사람의 사회적 교훈을 진실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존 베네트 교수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인류의 레위 사람이요, 제사장인 근대 기독교가 그 선조들이 하는 일을 본받아 가련한 피해자들을 산간에 그대로 버려 두고 자기들만 토지와 공장을 독점함으로써, 마침내 역사의 심판주는 이방인인 공산당으로 하여금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회적 구제의 구호를 들고 역사에 등장하게 하였다"고 지적했다. 이 말은 공산당이 인류의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기독교의 무능한 무책임함을 경고한 말이다. 우리는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우리는 과거의 한국교회가 역사의 판가리 싸움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끝까지 과감하게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지 못함을 부끄럽게 뉘우쳐야 한다.

예수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표현인 교회는 이웃과 세계의 봉사자로서의 자신의 위치와 그 모습을 지녀야 한다. 자기 이익만을 위한 자기 본위의 종교를 버리고 교회는 이 세상 그 어느 단체보다도 사회와 국가의 불행에 대하여 강한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 무책임한 정치가나 사회 지도자가 민족 국가에 주는 손해보다 무책임한 교회 지도자가 주는 손상은 몇배나 치명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사회에 대하여 연대적인 책임을 지어야 한다. 국가가 망하는 날에는 교회도 존재할 수 없다. 고로 사회적 불안은 기독교에 있어서 남의 일이 아니다. 과거 한국교회의 경건주의적 현실포기는 엄격히 말해서 현실악에 대한 긍정을 의미하며, 사회문제에 대한 외면은 바로 사회악에 대한 공범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과거의 역사 의식은 한 마디로 말세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이 사회를 악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며, 둘째는 그 악을 시정하기 위하여 과감하게 투쟁하려고 하지 않는 미온적인 태도이다. 우리의 두 발은 언제나 한국이라는 땅 위에 붙어 있어 한자라도 떨어져 살 수 없다. 고로 이 땅에서 생기는 일 모두 다 교회가 걸머져야 할 시대적인 멍에다. 우리 교회는 언제나 이 세상 밖에 서 있는 구경꾼이 아님을 명시해야 할 것이다 고로 교회는 이 사회 모든 영역, 모든 분야를 향해 과감하게 문을 열어야 한다. 사회와 국가 그리고 온 인류를 향한 봉사의 사명을 잃고 교회의 자기농성, 자기도피, 건물 속에서만의 궁색스런 활동, 자기파끼리만의 독선, 자기만 구원 얻으려는 영적 이기주의를 버리고, 시대적인 모든 무거운 짐을 대신 지고, 이웃과 운명을 같이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의 사건은 신앙의 차원에서 결실하는 데서 그 본질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교회 생활

그러면 지나친 보수신앙 때문에 현실을 외면한 과거의 한국교회는 오늘의 교회 생활에 어떤 유산을 물려주었는가? 그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괴이한 신비주의 운동이요, 둘째는 이에 반발한 신도들이 세속적인 물결에 갈대처럼 흔들리고 조수처럼 밀려가는 자유주의적 교회생활이다. 그래서 오늘 한국교회 안에는 신비파를 분별없이 따르는 많은 신도가 있는가 하면, 반면에 현대 감각의 만족을 위해 줄달음치는 신도들도 많다. 신비를 내세우는 신도들은 진보적인 신도들을 향해 은혜 없는 자라고 비난을 퍼붓는가 하면, 현대감각에만 관심을 쏟는 신도들은 보수적인 신비파를 향해 미신적이라고 상대도 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의 한국교회의 목자들은 이 두 극단적인 신도들 틈바구니에서 고민하고 있다. 신비적인 감정적 교인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자신도 초현대적인 지도자가 되거나 아니면 그 방면의 인물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작업을 한 달에도 몇 번이나 해야 하며, 또 한편 현대의 첨단을 달리는 진보적인 신도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자신도 초현대적인 지도자가 되거나 아니면 그 방면의 인물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것이 자의 건 타의 건간에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편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에서 목회를 한다는 것은 아주 인기가 없는 목회자가 되고 만다. 그런 탓인지는 모르나 최근 이 양극단으로 기울어지는 목회자의 수가 점점 늘어간다.    

옛날 사도 바울이 살던 그 시대에도 오늘과 같은 현상을 볼 수 있었다. 그 때 유대인은 그 기질이 이적을 추구했고, 헬라인의 기질은 지혜를 추구하여 현실에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 어느 한 쪽에도 기울어지지 않고 중용을 지키며 십자가의 도만 전한 사도들은 어느 쪽에도 인간의 대상이 못되고 미련한 놈으로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오늘 한국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은 이런 딜레마에 빠져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서 신도들의 지지와 인기를 얻느냐, 아니면 좀 늦어도 십자가의 길로 강행군을 하느냐 하는 고민 속에 깊이 빠져 있다. 신비파의 특색은 눈에 보이는 기적을 추구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기적을 부인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적의 종교다. 신구약 성서는 기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구약성서에 보면, 애굽 나라 바로에게 내린 열 가지 재앙이라든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넌 것,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내리는 만나를 먹고 반석을 쳐서 샘물이 나게 한 것이라든가 또는 여리고성을 기적으로 무너뜨린 것, 엘리야가 바알선지와 싸워 이긴 것, 엘리사가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친 것 등등은 모두 가시적인 기적이다. 고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모든 선지들보다 더 위대하신 메시야가 오면 보다 큰 기사와 이적을 나타낼 것으로 기대한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에게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한 것이라든가(마 16:1-3) 또는 예수께서 공생애에 나서려 할 때에 마귀가 그를 시험하여 기적으로써 돌로 떡을 만들고, 성전에서 뛰어 내리고, 자기에게 절함으로 천하 만국을 주겠다고 유혹한 것도 이 때문이다. 마귀는 유대인들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종교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기적을 나타내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함으로 구속사업을 성취하는 것보다 빠른 방법이라고 유혹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도 기적으로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굶주린 대중을 먹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와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그들의 요청을 단호히 거부하시면서 "이 악한 세대가 기적을 구하나 요나의 기적 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 너희가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서 무덤 속에 봉해도 삼 일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강경한 태도로 말씀하셨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자신도 기사와 기적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요구를 물리쳤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기적을 행하는 것이 인류를 죄에서 건지는 구속의 방법이 결코 아님을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는 기사와 이적으로 무리들을 회개시켰다는 기사가 성서에 별로 없다. 고로 고침을 받은 한명의 나환자 중 단 한명만이 예수를 찾아와서 감사를 표시했을 뿐이다. 또 때로는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오 천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시기도 했으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릴 때는 그 중 하나도 남지 않고 두려워서 모두 도망쳐 버렸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기적 행함에 대하여 지극히 소극적이며 냉담하였다. 고로 병을 고쳐주신 다음에는 병자에게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고 엄히 명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 신도들의 기적관은 어떤가? 누구는 이상함을 보았다더라, 누구는 안찰하여 기적으로 병을 고쳤다더라, 누구는 입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더라, 또 누구는 죽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한다더라, 누구는 이상한 방언을 한다더라 하고 마치 이런 은사들이 기독교의 본질이요 전부인 것처럼 잘못 생각하여, 이런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 것만이 신령한 교회생활의 자격심사표처럼 오해하고, 이것을 널리 선전하고 따르는 지도자와 신자들이 많다. 그들은 이런 가시적인 기적을 통해서 구원이 성취되는 줄로 믿는다.

이런 잘못 된 신도들의 기적관 때문에 오늘날 차원 높은 기독교를 미신화하고 상식 이하의 종교로 그 품위를 전락시키고 말았다. 이런 열광적인 교회생활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나라 교회의 특산품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교회생활 형태는 상식과 합리적 논리를 부정하는 것 자체가 올바른 신앙 태도라고 믿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세속적인 것과 교회의 모든 기성 질서를 모두 부정하고 타계적인 새로운 질서에 대해서 매우 열광적이다. 그런데 이런 가시적인 기적을 추구하는 계층은 결코 무식한 대중만이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지식의 첨단을 걷는 문화인들도, 메마른 마음 바닥에 초조해진 종교가들도 또는 인간성을 탕진한 유물주의자와 허욕에 들뜬 몽상가들이 모두 기적추구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기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냉정히 말해서 자신의 본분과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자기 공허한 산울림이기도 하다.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 여유 없는 초조감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기독교를 기적의 종교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기독교의 진정한 기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러한 가시적인 기적이 아니라, 예수가 온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 같이 우리도 죄에서는 완전히 죽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 같이 우리도 의롭다 함을 얻어 성령으로 새 사람이 되는 운동이다. 바울은 이런 기적을 가리켜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런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은 되었도다"(고후 5:17). 이런 인격의 변화, 새로운 창조가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기적이다. 죄인이 변화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 즉 마귀의 자식이 변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이외의 다른 기적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또 하나의 뚜렷한 신앙형태는 진보주의 혹은 윤리주의다. 이것은 소위 현대 감각에 예민한 지성층에 만족을 주려는 것이다. 이들은 현대 지성이 용납하지 않는 기독교의 형이상학적, 초월적, 관념적, 타계적 요소들을 도외시하고 그 대신 기독교의 윤리적인 요소인 사랑, 봉사, 희생 등의 미덕을 크게 클로즈업시켜 세상에 대한 빛과 소금의 책임을 강조하는 태도다. 이것은 니이버 교수가 지적한 대로 수평적인 사회성의 차원을 강조함으로 수직적인 신앙을 약화시킨 기독교의 일면만을 강조한 새로운 타입의 휴머니즘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런 교회생활의 모습은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현대문학의 구조와 그 발전에 대하여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종교 신앙의 사회 문화면에 있어서의 독자적 기능에 크게 관심을 갖는 자유주의 신학에 근거한 것이라고 본다.

자유주의 신학은 그 동기에 있어서 오히려 진리의 변명을 위하여 또는 교회의 역사적, 요청에 응답하는 종교의 행동이기도 하다. 자유주의 신학이 그 시대에 대하여 복음을 해석하려고 한 그 의도와 또 그 책임성에 대하여는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점은 그 신학의 출발점과 그 표준원리에 있다. 즉 그 출발점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인간의 선천적인 능력에 있다. 그들이 삼위일체의 권위, 전적 타락의 자연인의 모습,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형제성을 종교의 본질로 삼는 것은 훌륭한 휴머니즘의 종교는 될지 몰라도 구속의 종교는 아니다. 이런 신학사상은 세속 사회에 대한 정화책으로 장점을 지니기는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기독교가 지녀야 할 본질적인 요소들이 결여되어 있다. 즉 인간이 마땅히 지녀야 할 죄의식과 용서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 등 주체적인 사상이 결여되어 있다. 그들에게 가장 인연이 먼 것은 타계적인 종말적인 경건사상이다. 그들의 소망의 전부는 현재에 걸려 있다.

이들은 오늘의 사회가 급격히 변천하기 때문에 교회생활도 그것과 발을 맞추어 좋든 나쁘든 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변하는 세상에의 참여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결국에 가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없게 된다. 이 세상에 참여한다는 것(Participation in the World)과 교인의 입장을 이 세상에 동화시킨다(Identification with the World)는 말과는 엄격히 구별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 안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관여하는 것은 세상을 구하는 데 목적이 있지 결코 동화되어 세상의 세례를 받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맛 잃은 소금이 되고 만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세상에 깊이 참여했으나, 죄에 동참한 일이 없다. 그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세상에 참여했다. 그것은 오직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다. 고로 그리스도인이 세상과의 결속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세상에 파견하신 목적을 잃게 한다. 배는 언제나 바다에 떠야지 산꼭대기에 올라앉으면 무가치하다. 그러나 배에 물이 들어오면, 그 배는 파선되어 물 속에 가라앉고 만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지나친 타계사상도 위험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주체성을 잃고 이 세상에 동화되어 버리는 영합주의는 더욱 위험하다.

 

바람직한 교회생활

그러면 바람직한 교회생활의 참 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그것은 먼저 교회와 세계를 이원론적인 구조에서 보려는 세계관을 지양하는 것이다. 즉 교회가 세계를 적대시하며 두려워하는 세계관을 버리고 교회의 안과 밖, 즉 교회와 세계를 동심원(同心圓)에서 보는 새로운 세계관을 확립하는 것이다. 즉 한 분 하나님의 지배 밑에 있는 교회와 세계를 하나로 보게 될 때, 우리의 교회생활은 바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 속에 오시고 이 세상을 위해 사신 것처럼 우리 교회도 그 존재의 근거와 양식이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와 꼭 같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전도 초기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인류를 구원의 길로 초대하셨다. 이런 초대에 응한 무리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신 다음에 불러모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치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을 다시 세상으로 파견하셨다. "내게로 오라", "세상으로 가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서 교회의 안과 밖의 생활이 항상 분리되서는 안 되는 것을 배운다. 부름을 받고 모인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주의 명령에 의하여 세상으로 파견되어 각 분야에 흩어져 그리스도인으로서 살 것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예배당에 모였을 때만 교회생활을 한다면, 일주일에 한 시간 혹 두 시간만 신자가 되고 그 나머지 날은 모두 예수와 관계없는 이방인이 될 것이다. 이런 교회개념 때문에 과거 한국교회 신도들은 세상과 교회를 완전히 구분하여 교회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세상은 악마가 지배하는 곳이라고 생각하여 하나님이 계시는 교회당 안에서는 엄숙하고 경건하게 생활해야 하고 세상에 살 때는 이와는 정반대의 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참된 교회생활은 예배당에 모여 있을 때나 세상에 흩어져서 살 때나 꼭 같이 교회 안에 산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교회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만일 예배당이라고 하는 공간 속에 갇혀 있다면 모르거니와 그를 역사의 주인이라고 믿는다면, 그는 어디나 계실 것이며 그의 지배 밑에 사는 신자는 항상 하나님께 예배하는 심정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교회는 현재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지배하는 영역이면 어디나 해당된다. 고로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가정이나 공장, 학원, 장터 등은 바로 교회생활의 연장이 되어야 한다. 고로 교회생활의 안과 밖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어야 한다.

둘째로, 바람직한 교회생활은 보수사상과 진보사상이 조화된 곳에서만 가능하다. 사도행전에 보면, 지중해 연안에 처음으로 세워진 안디옥 교회 신자들은 이면에서 가장 모범적인 교회생활을 했다. 그 교회 안에는 교사들과 예언자들이 같은 회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은 일치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교사들은 보수적이고 예언자들은 진보적이었기 때문이다. 또 이 교회의 지도자인 바나바와 바울도 사상이 달랐다. 바나바는 진보적인 사상의 소유자였고, 바울은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제2차 사도여행을 떠날 때, 바나바는 마가를 동반하기를 바랐고, 바울은 그의 실수를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이 일로 인하여 안디옥 교회는 진보와 보수 두파로 사상이 갈라지게 되었다. 바나바는 죄인이라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바울은 교회의 순결과 질서를 들어 서로 맞섰다. 이 때에 안디옥 교회는 어떤 태도를 취하였을까? 안디옥 교회는 어느 한편에 서지 않고 두파를 모두 포용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을 다시 선교지로 보내면서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교회에는 언제나 보수사상과 진보 사상 둘이 병존해야 건전한 교회가 된다. 보수주의자들만 있다면 교회는 말라빠지고 독선적이 되며, 또 진보주의자만 있으면 교회는 세속화되어 버릴 위험이 많다. 안디옥 교회는 사상과 의견이 다른 두 지도자에게 자기 주장을 포기하고 한 쪽에 순응 할 것을 권하지 않았다. 둘 다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꼭 같은 모양으로 창조하시지 않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서로 싸우고 갈라지고 뜻에서가 아니라 서로 부족을 보충해서 원만하게 살라는 뜻에서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하셨고 동시에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보수사상과 진보사상을 겸하여 가지라는 뜻이다. 소금은 자신의 순결과 남의 부패를 막는 보수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는 자신의 순결과 남의 부패를 막는 보수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걸고라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수라고 하는 소극적인 교훈에 안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빛이 되라고 하셨다. 빛은 진보적이다. 어둠을 뚫고 새것을 개척하는 정신이다. 오늘의 세계는 눈부시게 진보 발전했다. 고로 우리의 사상도, 예배의식도, 교회구조도, 선교전략도 모두 새로워져야 한다. 참으로 바람직한 교회생활은 영원불변의 진리를 생명을 걸고 굳게 지키면서도 시대마다 새로운 스타일의 옷을 갈아입어야 그 진리는 영원히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