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목회상담의 지도원리

(216-224)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은 누구나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제 각기 다른 내용의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아무 문제도 가져 본 일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든가 인간다운 인간은 못되는 사람이다. 문제를 가지고 살면서 그 문제를 해결지어 나가는 것이 우리들의 일생인 것이다. 그가 지니고 있는 문제를 보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단정해도 좋을 정도로 사람들은 모두가 스스로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또 같은 문제라도 사람에 따라서 실패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성공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사회가 이 모양으로 복잡다단해지고 기계문명이 최고도로 발단한 현대에 있어서 사람의 정신 생활은 언제나 긴장해 있다. 이와 같은 정신 상태에 있으므로 그렇게 복잡하지도 않고 심각하지도 않은 문제에 당면할 때, 현대인은 그 해결의 방도를 발견하지 못할 때가 많다. 또 어떤 이는 육체적으로나 위생적으로 특수한 기관이 정신적으로 균형을 잃어 버려서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도 실패를 할 때가 많이 있다. 혹은 이상과 현실의 투쟁으로 선악의 판단력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가지각색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신자들을 지도하는 목회자는 언제든지 침착한 판단과 부동의 확신과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분담해서 적절한 충고와 최선의 해결책을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런 면에서 선진국가의 교회들은 목회자에 의한 상담지도자가 더욱 더 강조되어 가고 있음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은 실제면에 대한 관심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로 17세기 영국 비국교 신학자요 저명한 목회자인 리차드 박스터는 목회성공의 비결을 상담에서 찾고 말하기를 "어떤 신자들은 목사의 30분간의 상담으로 10년 간의 예배 설교에서 얻은 이득보다 더 큰 것을 발견하고 있다"고 상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고로 외국 교회에서는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쯤은 특별히 목회 면담일로 정해서 그날은 목사가 하루 종일 교회 사무실에서 신자들을 맞아 여러 가지 문제를 놓고 면담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목회상담 지도의 소재는 거의 모두가 임상 심리학으로부터 온다. 아마도 이 사실은 목회적 상담 지도법이 아직도 교회의 신학 구조 안에 짜여넣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심리학이나 신학이 다같이 동일한 근본 문제에 관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인간성의 문제'다. 고로 우리 목회자로서는 상담법의 모든 원리에 대하여 어떻게 신학적으로 대응하느냐?가 문제다.      

첫째로 목회자는 일반상담에서와 같이 먼저 좋은 청취자가 되는 것이다. 문제에 봉착한 사람들이란 흔히 문제를 자기 안에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다. 고로 그들은 먼저 이야기하고자 하는 요구가 있다. 이 사실은 상담 지도자가 들어주는 버릇을 길러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런데 과거 한국사회에 있어서 면담 지도의 전통적 관념은 이 점에 있어서 본말이 전도되어 있었다. 즉 지도자 편에서 말하고 당사자 편에서 듣곤 하였다. 이것은 상담지도 원리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상담(Counseling)의 낱말이 조언(助言)이란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목회자는 먼저 상담 요청자의 문제를 잘 청취할 줄 알아야 한다. 문제를 지닌 사람들은 언제나 청취자의 필요를 자각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목회자들은 그것은 모르고 상담지도의 과정에 구애되어 자위적 태도를 취하기 쉽다. 이는 그가 스스로의 역할에 대한 지나친 책임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해답을 주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의무감에서 오는 강박관념(强迫觀念) 때문에 목사는 듣기도 전에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오츠(Wanue, E. Oates) 씨는 청취에 대하여 세 가지 의미를 말했다. 첫째로 청취는 실제로 당사자의 말을 듣는 것을 의미하며, 둘째로 당사자로 하여금 말하게 함을 의미하며, 셋째로 청취는 사실상 말하고 있는 그 사람을 얻는다고 하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둘째로 목회상담의 지도 원리는 당사자(當事者)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도록 지도하는 것이다. 면담 지도자는 당사자의 문제를 내가 꼭 해결해 주어야 되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지 말고 당사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면담지도의 과정에 있어서는 제시된 문제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며, 당사자의 인격 성장을 도모함으로써 당사자로 하여금 자기의 장래에 할 제반 문제를 전보다 더 잘 다룰 수 있게 하자는 데 있다. 어떤 때 비록 목사가 당사자보다 훨씬 앞서서 문제의 해결점을 발견하였다손 치더라도, 그가 만일 현명한 사람이라면 당사자를 문제의 초점에로 인도하여 자기 스스로 그 해결점을 발견하도록 할지언정, 결코 해결책을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결코 지혜 있는 상담지도자는 아닐 것이다. 고로 목회자는 문제보다는 그 문제로 고민하는 그 인격에 더 큰 비중을 두어, 그로 하여금 스스로 문제를 해결 해나가도록 지도하여야 한다.  

셋째로 목회상담의 지도 원리는 문제에 대해서 신속히 이해(理解)하는 것이다. 상담 지도자가 요청자와 그가 제출한 문제를 빨리 이해하는 것은 상담의 필수적 조건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당사자가 전달코저 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바로 파악하는 일이다. 이것을 심리학적 술어로 말하면 '감정 이입'(The Empathetic Process)이다. 즉 자신을 요청자의 위치와 환경에 서게 하는 것 또한 타인의 상황(Situation)에 완전히 참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당사자의 표면에 나타난 행동을 통하여 그의 중심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람은 먼저 그 문제 전체를 관찰 할 수 있는 공지(空地)로 나아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문제를 보다 더 지성적으로, 보다 더 확실한 근거 위에서 다룰 수 있는 것이다. 문제의 배후에 있는 진상(眞相)은 당사자에게 있어서 불쾌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당사자는 진상에 부딪치기를 꺼려 이를 회피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는 사건을 합리화시키려고 구실을 찾으려 함으로써, 남을 속이는 일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속이는 일에도 성공하는 것이다. 면담 지도자의 등장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 장면에 있어서다. 그는 당사자가 자기의 문제를 솔직히 논의함으로써 문제가 객관화되도록 권면한다. 신속한 이해는 강요가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에 당사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금까지 억압해 버리기만 하였던 불쾌한 진상을 긍정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끝으로 목회상담의 지도원리로서 생각해야 될 것은 목회자는 인간성을 은폐하지 말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목사는 나라는 주체를 어떤 장식품 속에, 목사란 법옷 속에 숨겨 놓고 인간 이상의 자리에 앉아서 상담 요청자를 대해서는 아니 된단 말이다. 해방 후에 '나의 길을 가련다'라는 영화가 유행하였다. 그 영화에는 두 신부가 나타난다. 한 신부는 늙은이고 한 신부는 젊은이다. 그들은 대조적이다. 모든 일에 생각하는 바와 취하는 방법이 다르다. 늙은 신부는 사고방식이 낡고 까다로운 할아버지로 자기 교구에 속하는 신자들을 마치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학생 취급하듯 하였다. 자기는 언제나 정당하고 신자들은 언제든지 나쁘다. 그래서 그 거리의 아이들이나 그 교구 내의 신자들은 이 할아버지를 좋아할 리가 없다. 그래서 매사에 트러블을 일으킨다.

그러나 새로 부임해 온 젊은 신부는 경험은 별로 없으나 인간미가 풍부한 사람이다. 그는 까다로운 규칙이나 습관에 구애됨이 없이 살아있는 인간을 취급하는 것이 자기의 직무임을 알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인간으로서 그들에게 따뜻한 벗이 되었다. 하루는 야구복을 입고 거리에 나간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신부에게 가졌던 경계심을 풀어지고 친밀감을 느껴 그에게 달려온다. 어떤 때는 그들과 함께 오락도 하고 노래도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거리의 아이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이야기를 줄거리로 한 영화다. 나는 이 영화를 여러 해 전에 보았지만 실로 느낀 바 많았으며,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오늘날 많은 청년들은 불평하기를 목사님을 만나면 숨이 막힌다든가 말이 나오지 않는다든가 머리를 들 수 없다든가 사나운 시어미니 앞에 나간 것 같다는 등의 말을 한다. 이것은 목사의 손에는 꼭 성경과 찬송가와 그 입에는 비판하고 꾸짖는 말만 하는 그 태도에 만나는 사람이 일상 가지고 있는 그대로는 용납되지 않을 것 같은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감을 주는 까닭이다. 이런 태도가 목회자의 품위(品位)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나, 현대인에게 맞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킬케골이 가장 가혹하게 비판한 것은 이와 같은 19세기의 덴막에 있던 가식적이고 허식적이고 비인간적인 교회 지도자들이었다. 고로 목회 상담자는 좀 더 인간미를 발휘하여 인격 대 인격, 즉 '일대일'로서 이야기할 수 있고 벗이 되어야 할 줄 안다. 1961년 7월 17일 날 아침 10시경에 점잖게 보이는 청년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나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였다. 하나는 기독교의 자살관이며 또 하나는 기독교의 영생문제였다. 나는 아는 대로 대답하였다. 그러나 내 대답이 다 끝난 후에도 그는 자기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그는 보통 청년 같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신분을 묻기 전에 그에게 "당신과 나는 같은 인간이니 우리의 연령이나 지식의 차이나 입지(地立)든가 하는 의식을 떠나서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까?" 하고 제안을 하였다. 그리고 나는 나의 과거를 먼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 순간 이 청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그는 자기의 과거를 숨김없이 모두 말하였다. 그가 3살 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재산과 함께 그를 절에 바쳤다. 그 후 그는 비구승이 되어 30년 간을 수도생활을 하다가 불교에 대한 회의와 고민을 안고 속세로 뛰쳐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를 용납하여 주는 사람이 없어서 몇번 자살을 기도하다가 마지막 기독교의 자살과 영생관을 알아보려고 목사를 찾았던 것이다. 그는 그 후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나중에 그가 나에게 보내온 "나의 고백"이라는 글 가운데에 나를 기독교로 전향할 마음을 갖게 한 것은 목사님과의 처음 대화에서 "내가 본래의 입장에서 서로 이야기합시다" 한 그 한 마디였다고 하였다. 나는 그때 아무 의식도 없이 그런 말을 하였던 것인데, 그러한 결과를 가져왔을 때에 크게 깨달은 것은 목회 상담자는 인간성을 은폐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원리를 생각 할 때, 목회상담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아직 이 방면에 발달이 있는 것 같이 보이지 않으며, 또 목사를 찾아가는 신자는 특별한 부탁이나 있으면 가지만 자기의 신앙문제 해결을 위해서 목회자를 찾아가는 이는 극소수인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으며, 앞으로 어떻게 하여야 여러 가지 문제를 지닌 많은 사람들을 목사가 만날 수 있으며 또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연구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