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신유에 대한 신학적 이해

(230-235)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이다. 고로 기독교의 경전인 신구약성서는 기사와 이적으로 가득차 있다. 모세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져낸 일이라든가, 엘리사가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친 일이라든가, 또는 예수께서 친히 모든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 등, 성서의 태반 기사가 기적의 역사다. 지난 여러 세대를 통하여 기사와 이적의 역사성을 부인하려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기적들은 역대 기독신자들에게는 움직일 수 없는 신념이 되었고, 영적, 정신적, 도덕적 교훈으로서 그들이 정신생활에 용기를 제공하여 왔다. 신유는 이런 기적에 속하는 복음이다. 그리고 이 신유의 복음은 지나간 반세기에 걸쳐 우리 성결교회의 전도의 표제 중 하나로서 시대마다 강조되어왔고, 오늘에 있어서도 많은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과 흥미를 모으고 있는 문제이다.

그러면 성서는 신유에 대하여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를 생각하여 보자.  성서에는 신유에 대한 기사가 헤일 수 없이 많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 몇을 택해서 신유에 대한 성서적 근거와 의의를 찾아보기로 하자. 출애급기 14장 16절에 "여호와 가라사대 ...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하였고, 마태복음 8장 16-17절에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고 하였으며, 야고보서 5장 14-15절에는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고 하였다.  위의 몇구절만으로도 신유에 대한 성서적 근거는 충분하며, 그 의미도 스스로 설명해준다.

그러면 신유란 무엇이냐? 한 마디로 요약해서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육체의 병을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고침을 받는 것이다. 이 사실은 이론보다도 예수님 자신의 치유 사역이 증명해준다. 그리고 예수께서 기적으로 모든 병을 고치신 것은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도 인정하였던 것이며, 적어도 사복음서에 기재된 것은 모두 사실적 가치가 충분한 것이라고 믿는다. 더욱이 의사인 누가는 그런 신유에 관한 기사를 누구보다도 자세하게 더많이 기록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신유의 기적을 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그 제자들에게도 주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고, 모든 병을 고치기도 하였다. 이 신유의 기적은 예수의 제자들뿐 아니라 그 뒤를 따른 많은 성도들이 병을 고쳤고 또 고침을 받았다. 이런 시례를 들자면 끝이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지금도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그의 수많은 제자들을 통하여 신유의 기적을 계속 나타내고 계신다. 아무리 과학이 고도로 발달해도, 이론으로서 설명할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하고 계시며, 이런 능력의 역사는 기도와 신앙을 통하여 새로운 증거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신유의 복음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먼저 구원론적인 입장에서 신유의 복음을 설명하여 보자. 인간을 두 가지 성품으로 구성되었다. 하나는 영적인 요소요 다른 하나는 물질적인 요소다. 그리고 이 두 성품은 꼭같이 인유의 타락에 의하여 불행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즉 몸은 병들고 영혼은 부패하게 되었다. 이렇게 인간이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됨으로 인하여 깊이 병든 육과 영은 모두 구속의 은총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가버나움ㅇ서 전도하실 때, 네 사람이 메고 온 중풍병 환자를 향하여 네 병을 고쳤다 말씀하시지 않고, 네 죄를 사하셨다고 용서를 선언하셨다. 또 야고보에서도 "믿음으로 간구하는 기도는 병든 사람을 구원할 것이며, 또 그가 지은 죄가 있다면 사함을 받을 것이다"라고 했고, 시편에도 "여호와는 너희의 모든 불의를 사하시고, 너희의 모든 병을 치료하신다"(시 103:3)고 했다. 위의 말씀들은 영혼과 육체를 분리할 수 없듯이 죄와 병의 깊은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인간이 한 가지 죄를 지으면 그 겨로가로 반드시 병이 생긴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근본 타락은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만일 육체의 질병이 타락의 결과요 열매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신유의 복음이 그리스도의 위대한 구속의 죽음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는 신학적 내용을 용이하게 시인할 수 있다. 이러한 신학적인 이해에서 생각할 때, 근본적으로 영혼이 죄에서 구원받는 것과 육체가 질병에서 고침받는 사실을 전인적(全人的)인 구원론에서 분리시킬 수는 없다. 사죄와 신유가 시간적으로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죄의 깊은 은총을 체험한 사람은 욥과 같이 신유를 미래의 약속으로 대망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은 우리의 죄와 함께 육체의 병에도 유효하다는 말이다 .고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둔 죄를 사함받을 수 있듯이, 모든 육체적 질병도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약속을 이미 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인산은 영혼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요 영과 육의 두 성품으로 창조되었고, 또 타락도 전인적인기 때문에 구원도 전인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세에서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을 통해서 보증된 구원이 완성은 현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얻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유에 대한 구원론적인 이해는 그 완성을 위해서 종말론적인 성격을 띄고 나타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처음 익은 멸매, 곧 생명에 있어서의 구원의 처음 익은 열매를 얻는 것은 현재이다.

그러나 이 말은 오순절파에서 말하듯이 현세에서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완전한 열매를 얻는 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의 전인적인 구원을 믿기 때문에 신유의 은혜를 구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한 분명한 설명은 로마서 8장 18-23절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피조물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종속된 것은 그들의 자의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종속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피조물이 사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영광의 자유를 함께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성령의 처음 열매를 가진 우리 자신들도 속으로 신음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삼으시고 우리의 몸을 온전히 속량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랄 때에는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성령의 처음 열매, 즉 영혼의 구속을 받은 기독교 신자들의 신음은 장차 우리의 몸의 완전한 구속을 기다림에서이다. 아들이 되기 원한다는 말은 현세에서 이미 하나님의 되기는 하였으마 명실공히 갖추어진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몸까지 완전히 구속받은 아들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구원관은 영과 육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헬라적인 구원관이 아니고 영과 육이 합한 히브리적인 전인적 구원을 말한다.고로 몸까지 속량을 받을 때, 구원을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하나님의 아들들이 신음하는 최대의 원인은 약한 육체 속에 영혼이 갇혀 있기 때문이다. 고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하셨다(마26:41). 육체의 속량은 구원의 완성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바울의 말대로 지금은 우리의 처음 믿을 대보다 구원이 더 가까와짐을 느끼게 된다(롬 13:11).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뵈증된 것은 육체의 병을 고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이 부활되고 완전하여져서 하나님의 영화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주 예수의 강림할 때가지 우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흠없이 보전되기를 힘써야 한다고 강조한다(살전5:23). 주께서 강림하실 때에는 땅에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병고치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 전부터 주님을 믿던 우리는 단지 육체의 병만 완전히 낫는 것이 아니라 부활된 몸으로 하나님께 여오강을 돌리는 완전한 몸이 된다. 이것은 이미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와 병을 친히 담당하실 때에 보증하여 놓은 것의 완성이다. 결국 신유의 복음을 신학적으로 바르게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계획하신 구원의 전 역사에 비추어 고찰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면 끝으로 이런 신유의 복음이 전도에 있어서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하려 보내시면서도 '가르치는 일'과 '증거하는 일'에 치중하도록 권하셨다. 결코 예수님이 병고치는 기사와 이적을 전도의 중심이라고 가르치시지 않으셨다. 사도 바울도 여러 가지 은사 중에서 이적을 행하는 것은 제4, 제5 뒤에 둔 것은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친히 병을 고쳤음에도 불구하고 기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에게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기적을 구하니, 요나의 기적 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고 하시면서, 참 기적은 내가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느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또 그는 병을 고치신 다음에 병나은 자에게 엄히 경고하시기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것은 신유가 전도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표제임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유일한 방법은 아니며, 또한 전도의 중심도 아님을 명백히 교훈하신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가 신자들의 기사와 이적에 대한 태도는 어떠한가? 누구는 이상을 보았다더라, 누구는 방언을 했다더라, 누구는 죽은 사람과 이야기를 했다더라, 누구는 안찰을 하여 병을 고쳤더라, 하고 거리 거리에서 포스터를 붙이고 신문에 집회를 공고하는 등, 신유의 은사를 구원의 전 역사와는 관련이 없이 가시적인 종교적 현상으로만 생각하고, 그것이 마치 기독교의 본질이며 전도의 전부인 것같이 선전한다.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이 신령한 자의 자격심사표나 되는 것같이 역설하기도 한다. 구원의 깊은 내용과 관련된 신유의 복음을 잘못 이해함으로 인해서 기독교를 미신화하며, 상식 이하의 종교로 그 품위를 떨어뜨리고 있다. 심지어는 병고친다는 미명 아래 수만의 금품을 걷기도 하고, 때로는 안찰한다고 병자의 몸을 마구 주물고 때리다 사람을 죽이는 과오까지 저지른 예는 한 두건이 아니다. 그래서 세인의 비난을 받고, 오히려 전도의 문을 막을 뿐 아니라 신자의 믿음을 파멸로 몰아넣기도 한다. 이러한 지도자들은 냉정히 말해서 자기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그리고 막다른 골목에 부딪친 여유없는 초조감의 몸부림이지, 결코 선교의 바른 태도는 아니다. 전도에 있어서 신유는 어디까지나 구원의 멧시지를 전달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의 표현이며 백성들에 대한 봉사의 표현일 뿐이지, 전도의 본질이 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