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성서에서 본 효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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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경은 부모님을 떠받드는 것이요, 시중은 부모님의 잔심부름을 잘하는 것이고, 부양은 잘 대접하는 것이며, 안락은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지도 실천은 부모의 뜻을 좇아 순종하며 그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범주 속에서 인간 윤리의 기본을 효에다 두었다. 고로 효는 모든 덕의 근본이다. 부모에게 효하는 자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경시하지도 않는다. 부모님께 공경과 사랑을 모두 기울였을 때, 덕화는 백성에게 미치고 사해에 퍼진다고 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효의 개념은 어디까지나 상호간의 윤리가 아니라 부모에 대한 일방적인 태도이다. 즉 쌍무관계(雙務關係)가 아니라 편무관계(片務關係)다. 부모의 은덕은 무한해서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어서 이와 같은 효행을 다한다 해도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은 자녀들에게 강요되는 예속적인 윤리이다. 그런데 오늘날 효도하면, 유교만이 주장하고 공자만이 혼자 말하는 진리처럼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비기독교인 중에는 기독교를 불효의 종교, 불충의 종교처럼 여기고 기독교는 부모에 대한 효성도 나라에 대한 충성심도 없는 종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비난은 기독교가 무엇인지 성서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하는 말이다. 신구약 성서는 일관해서 기독교가 세상 어느 다른 종교보다도 철저한 효의 종교임을 설명해 준다.

그리스도가 탄생하시기 이 천년 전 바벨로니아의 유명한 '하무라비' 왕이 공포한 법전에는 자식이 만일 부모를 때리면 그 손을 베어 버리라는 조문이 있다. 구약성서 중에서도 여러 곳에서 효에 대한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1:15).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신 27:16).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잠 30:17),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생육한 자를 즐겁게 하라."(잠 23:25)는 등의 교훈이다. 특히 동서양을 막론하고 효의 전형이라고도 말 할 수 있는 구약성서의 효부 룻의 미담을 지적할 수 있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유대인의 한 가정이 타국(이방)에 이사를 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이방 여자 둘을 며느리로 맞이했다. 그 후 그 집은 패망하고 시어머니는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고 두 며느리를 불러 각각 좋은 데로 개가할 것을 권했다. 그 때 맏며느리인 룻은 울면서"어머니 묻히는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어머니의 친척은 나의 친척이요 어머니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머니를 버리고 내가 어디로 가오리까?"하며 시어미니를 따랐다. 그리하여 그는 끝까지 시어머니를 모시고 봉양함으로 마침내 패망한 가정을 새로 일으키고, 그의 후손 가운데서 유대나라의 유명한 중홍황 다윗 임금이 났다.  

어느 종교에서 이보다 더 큰 효를 찾아 볼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 설명한 것보다 더 근본적인 효의 개념을 기독교의 근본인 모세의 십계명에서 찾는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나의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오래 살리라"(출 20:12). 이 말씀은 효의 근본을 설명한 것이다. 이 계명은 십계명을 새긴 두 개의 석판 중에 첫째 것에 속한다. 그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의무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임무임을 명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효하는 꼭 같은 마음으로 육신의 부모를 섬기라고 가르치는 기독교가 과연 불효의 종교일까? 어떤 이는 한국 성서는 효라는 글자가 없기 때문에 기독교를 불효의 종교로 단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글자가 문제가 아니다. 그 사상의 내용이 문제다. 영어에 파이어티(Piety)라는 말은 윗사람에 대한 경애와 순종을 표시한다. 이 말 속에는 효성도 애국충성도 모두 포함되어 있다. 고로 성서는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했다. 여기 부모라는 말속에는 포괄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물론 우리를 낳아준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모라고 부른다. 그러나 부모라는 말의 뜻은 단순히 그렇게만 이해할 수는 없다. 선조들도 부모라고 부를 수 있다.

예를 들면 너희들의 아버지 아브라함이라든가 또는 우리들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은 좋은 실례가 될 것이다. 히브리 사람들이 부모라고 표현한 말은 부모 및 선조라는 말과도 같다. 고로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고 할 때는 너희 선조를 공경하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우리들 위에 서서 우리를 지도하고 지배하는 사람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 속에는 단순히 나를 낳은 부모에 대한 공경뿐 아니라 우리를 지배하는 주권자 혹은 우리의 영혼을 지도하는 스승에 대한 공경의 의무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노인에 대한 공경은 성서가 가르치는 중요한 교훈이다. "너는 백발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레 19:23). 효에 대한 사상은 구약에서만 아니라 신약성서에서도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그 실례로서 골로새서에 "자녀된 자여 범사에 네 양친에게 순복하라. 이것이 주께 즐겨하시는 바니라"(골 3:20). 또 에베소서에도 "아이들아 주안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엡 6:1)는 말씀을 들 수가 있다.

끝으로 예수님 자신의 부모에 대한 효행과 그에 대한 교훈을 살펴보기로 하자.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께서 어떤 집에서 설교를 하고 계실 때에 어떤 사림이 찾아와서 당신의 모친과 형제들이 부른다고 말했다. 그 때 예수의 대답은 "누가 나의 형제이며 나의 모친이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모두 내 형제요 내 어머니다."라고 했다. 또 예수께서 열두 살 때 예루살렘에 상경하였다가 아들을 염려하는 부모에게 "왜 나를 찾으시나이까?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시나이까?"하고 대답하셨다.

물론 이 말씀은 이 세상의 의무보다도 일 층 더 중대한 임무를 띠고 있는 신분임을 보이시고져 함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동양인의 효의 개념에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고 부모에 대한 온당한 태도라고 하기 어렵다. 또 가나 혼연에서도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했고, 마가복음에 보면 "부모나 처자나 자매나 형제나 재산을 버리는 자는 이 세상에서 백 배나 얻으리라"고 했으며, 또 마태복음 8장에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에 따르겠다는 사람에게"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다. 이러한 여러 가지 예를 볼 때에 기독교는 동양인의 충효주의와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기독교는 효도를 철저히 가르치는 종교다. 그러나 동양의 효와는 전혀 다른 근거에서 이를 가르친다.

동양도덕은 혈연(血緣)에 의한 도덕이다. 즉 동양인에게는 직접 피를 분급한 자가 부모요 형제요 친척이다. 그 외는 전부 남이다. 결국 혈연을 토대로 한 가족제도를 주장한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바는 우리의 진정한 부모나 형제는 나와의 혈연관계이기에 앞서 나의 생명의 주님을 모시는 데 중점을 둔다. 그 이유는 인간의 중심은 육이 아니고 영혼과 인격에 있기 때문이다. 육은 부모에게서 받았지만 영혼과 인격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는 것이다. 고로 영혼의 관계는 육신의 관계보다 일층 더 깊다. 고로 기독교는 육신의 부모에게 효하기에 앞서 먼저 영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 효할 것을 가르친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진 자리야 육신의 부모에게도 진정한 효를 할 수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어머니에게 취하신 태도는 명백히 이 사실을 증명한다. 만민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택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 순종이요 효의 절정이다. 그리고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한 것은 육신의 부모에 대한 효성의 결정이라고 본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하나님께 대한 효를 육신의 부모에게 하는 효에 선행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