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감사의 종교적 의미

(241-249)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을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하나는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감사할 줄 아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사색과 감사는 오직 인간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는 요소다. 고로 인간의 존엄성은 감사에 있다. 인간이 감사하지 않을 때, 그 존엄성과 삶의 길을 잃게 된다. 중국의 영계기라는 팔십 노인은 어린 손자를 등에 업고 하루에 세 번씩 하늘의 은혜를 감사하며 춤을 추었다고 한다. 첫째는 자기가 동물로 태어나지 않고 만물의 영장되는 인간으로 태어남이요, 둘째는 고통이 많은 여자로 나지 않고 남자로 태어남이요, 셋째는 일찍 죽지 않고 80여세를 건강한 몸으로 살아 온 것이라고 하였으며, 또 철인 플라톤도 이와 비슷한 감사의 조건 셋을 들었다. 첫째로 하나님이 자기를 짐승으로 창조하지 않고 사람으로 창조하신 것이며, 둘째로 자기가 야만인으로 태어나지 않고 문명한 희랍 사람으로 태어남이요, 셋째로는 자기가 제일 존경받는 철학자로 태어난 것이라고 했다. 우리에게는 감사의 조건이 너무나 많다.

하나님의 은혜, 자연의 은혜, 부모의 은혜, 스승의 은혜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의 마음 사전에는 감사라는 말이 지워진지 오랜 듯하다. 우리는 잃어버린 감사의 마음을 다시 찾아 짓밟힌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 나라 사전은 '감사'란 말의 뜻을 '고마움', '고맙게 여김', '고마운 마음으로 사례함' 등으로 설명하였다. 또 한편 '고맙다'는 말은 남의 은혜나 신세를 입어 마음이 뜨겁고 즐겁다는 뜻이며, 은혜는 베풀어주는 혜택, 고마움 신세 등의 뜻으로 설명하였다. 즉 혜택은 은혜와 덕택이며, 신세는 남에게 도움을 받거나 괴로움을 끼치는 일이며 독이 남에게 미치는 일이라고 되어 있다. 또 히브리어나 희랍어의 감사의 뜻을 종합해 보면, 감사는 개인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집단적이고 외적이면서 동시에 내적이라는 주체적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영어의 감사한다(Thank)는 사고한다(Think)와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 즉 감사의 태도가 먼저 내향적(內向的) 긍정으로 충실해진 후에 외향적(外向的) 표현이 된다는 함축적 의미가 거기에는 보인다. 사람은 감사하지 않을 때, 삶의 길을 잃는다. 고로 감사는 삶의 의미를 찾는 단서가 된다.  

성서는 감사의 생활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과의 삼각관계의 가장 높은 관계상황을 하나님의 역사행위로서 표현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가르친다. 즉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질 태도는 감사뿐이며, 그 감사는 모든 자연을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아서 산다는 데서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예배행위라고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미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성숙한 인간이 아니면 감사를 알지 못한다. 자식이 부모의 은혜를 감사할 수 있게 될 때는 그가 또 남의 부모가 되어 보는 때부터이다. 제자가 스승의 은덕을 감사하게 되려면, 자기가 또 남의 스승이 되어서부터이다. 감사할 줄 알고 있는 인간은 그 인간의 성숙성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 정말 하나님을 바로 알고 자기를 잘 알고 또 자연을, 또 이 관계를 이해하게 되는데, 거기서 인간이 표명할 수 있는 말은 감사뿐이다. 그러므로 영어를 말하는 민족들은 언제나 가장 자주 쓰는 말이 감사하다는 말이다. 사실 인간을 바로 알고 보면, 모든 것에 감사할 것이다.

이러한 성서적 감사의 표현은 구약 시편에 가장 잘 표현되었다. 거기에 표현된 감사는 언제나 하나님, 인간, 그리고 자연, 이 삼위일체(三位一體)적인 개념을 전제한다. 고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망명한 청교도들은 첫 추수의 감격 속에서 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예배의 자유를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했고, 또 자연의 추수물의 축복을 감사하였다. 그리고는 한 가족처럼된 청교도 형제들과 즐거운 잔치를 베풀고 추수의 기쁨과 형제의 사랑도 서로 나누었다. 특히 원주민 인디언을 청하여 그들과 같이 앉아서 잔치를 베풀므로 감사의 성서적 의미를 충분히 표시하였다. 인간의 감사의 대상은 먼저 만물의 창조주이시오 세계의 주재자이시오, 사람의 삶과 죽음의 운명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 감사의 표현은 그것이 하나의 예배행위이다. 그러므로 감사를 아는 사람은 예배의 심정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예배의 주어(主語)는 '감사합니다'하는 그것이다. 고로 장로교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 제일조에 보면, "사람의 제일가는 목적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영원토록 기꺼워하는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피조물된 인간의 창조주 신을 향한 그의 고귀한 존재의 목적을 밝힌 엄숙한 말씀이다. 성서에 의하면 인류의 시조 아담은 에덴동산을 쫓겨났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은 감사의 표시로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 삼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고 창세기에 기록되었으며, 그 후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를 드렸다. 즉 구속함을 받았다고 고마움에서 감사의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리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그 얻는 것에서 십 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고 창세기 기자는 기록하였고, 이 멜기세덱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건은 근대 휴머니스트의 반동으로 금이 가고 드디어는 크게 깨어지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하나님 대신에 인간을 찬미하고 예배하게 되었고, 마침내 인간은 하나님의 고귀한 자녀의 자리에서부터 천한 인간 동물의 아들의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비극적 전락과 함께 중세기의 하나님의 평화와 안식은 사라지고 그 대신 근대 동물적 인간의 전쟁과 절망이 따르게 되었다. '신은 죽었다'고 외치며 '인간만세'를 부르짖었던 휴머니스트의 반동은 마침내 하나님이 없는 동물의 지옥을 만들어, 양차에 걸친 무서운 전쟁살육을 지나서 이제는 전면적인 인류의 원자적 자살 행위에서 발광하고 있다. 이 얼마나 비참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최후인가? 인간은 이 하나님 없는 전쟁과 살육의 지옥의 시대에서 더 살 수 없게 되었다. 고로 근대 로서아의 예언자 니콜라스 베르자이엡(Nikolas Berdgaeve)은 이 하나님 없는 비극적 근대의 종말을 고하고 과감하게 '새로운 중세기의 하나님의 품속으로 돌아 갈 것'을 절규하였다.

우리가 아무리 물질 생활이 풍부하고 온갖 현대문명을 향락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인간은 도덕적인, 영적인 존재로서 영구한 생명을 탐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은 '다리 위에 세운 집'이요, '길가는 손님의 여관집'에 불과하다. 우리의 고향은 여기가 아니다. 우리 고향은 그리스도와 어거스틴과 프란시스가 살던 중세기 하나님 품에 있지, 결코 니체나 다윈이나 막스 따위의 하나님 없는 비극의 지옥문에는 있지 않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의 질문은 한 젊은 서기관의 질문만은 아니다. 이 영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인생은 결국에 가서 무의미(無意味), 절망(絶望), 허무(虛無)로 끝날 것이다. 그것은 이 작은 반딧불 같은 생명이 어둠 속에서 얼마 동안 반짝인다 할지라도, 결국 어둠 속에서 삼켜버릴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먹을 것, 입을 것이 부족함이 없고 온갖 문화생활을 유감없이 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영혼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나와 창조주 하나님과의 문제가 풀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가장 어리석은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과 같이 극단으로 휴머니즘, 매카니즘, 매터리얼리즘의 노예가 되어 버린 세속화한 세대에서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고, 그의 거룩한 무릎 앞에 겸손히 머리 숙일 수 있는 이 경건은 특별히 귀한 일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자연과 문화의 유산(遺産)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은 정직하고 충실하다. 자연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는 미덕을 은총으로 인간에게 베푼다. 그래서 이 속임 없는 자연의 미덕과 창조주의 얼굴을 비추는 그 경건을 그려서 시인과 종교가들은 그들의 생애를 자연의 품속에서 살았다. 우리는 대한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행복과 산과 물과 아름다운 꽃과 나무와 새의 노래를 즐기는 행복에 대하여 감사해야 한다. 어떤 공장을 경영하는 한 청년이 예수를 믿은 후 처음 맞이하는 감사절에 전기회사로부터 전기요금을 지불하라는 고지서를 받았다. 그는 매달 막대한 전기요금을 지불해 왔었다. 그는 이 고지서를 받은 감사절 날 조용히 대자연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전기의 몇 억배나 밝고 한번도 고장 없이 매일 대지를 비치는 태양을 생각하고 태양을 지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였다. 하나님은 한번도 태양료를 지불하라는 고지서도, 독촉장도 인류에게 보내신 일이 없다. 그래서 그는 그해 전기요금의 일 년분을 10배하여 헌금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인간은 자연의 은혜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오히려 그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잊어버리고 있다. 영국의 유명한 목사 스폴쫀은 "우리에게 별빛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달빛을 주실 것이요, 우리에게 달빛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면, 그는 우리에게 햇빛을 주실 것이요, 우리에게 햇빛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면, 그는 우리에게 햇빛이 필요 없는 더 좋은 곳으로 인도하실 것이니, 거기는 하나님의 영원한 빛이 밤낮으로 비칠 것이다." 이 말은 스폴쫀 목사가 소득에 대한 감사를 드리면 드릴수록 더 좋은 것으로 주심을 가르치는 교훈이다. 자연 시인 워즈워스(William Wordworth)는 자연의 영감과 경건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누나, 어렸을 때 그러했더니 어른된 지금도 그러하네, 장차 늙어서도 그러하리, 그렇지 않고 어이리! '어린애'는 '어른'의 아버지, 원컨대 나의 오는 세월을 낱낱이 자연에의 경건으로 얽매고저." 오늘날 기계문명의 절정에 서서 노예 같이 자기 실존을 잃어버리고 분주히 헤매는 현대인에게 이 정적(靜寂)의 침묵 가운데서 오는 자연의 경건과 영감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귀하다. 그러므로 이 자연의 경건 속에 우리의 피곤하고 상한 심령을 의탁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또한 자연에 대한 감사와 함께 문화적 유산에 대하여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문명의 이기(利器)를 매일 같이 이용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감사를 해본 적이 별로 없다. 우리가 야만 생활에서 문명생활로 한 걸음 더듬어 올라간 그 문화사의 자취를 살핀다면, 그 거치른 자연을 소재로 한 이념의 승리를 하나의 감격으로만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피와 땀으로 엮어진 더 높은 마음들의 희생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대로 만든 많은 영웅, 철인, 예술가, 과학자들을 역사 무대에 진출시키고 그들을 섭리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의 발 뿌리에는 6000년의 문화사와 유구한 희생의 흔적이 놓여있다. 이 문화의 유산이 오늘날 우리에게처럼 풍부한 때는 없었다. 작은 목소리로 전 세계에 들리게 하며, 하늘같은 바다를 건너 서로 말하고, 날개 없는 인간들이 수 만리 창공을 단숨에 날아다닌다. 전에는 상상도 못할 명약들이 나와 지금은 인생의 수명을 연장해 준다. 우리가 이런 건설의 거인들을 생각할 때, 이런 것을 가능케 한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문화가 그리스도를 먼저 배운 나라들에서 발전했다는 사실을 예사로 알아서는 아니 된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가 서양 문화 건설의 원천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조물주 하나님의 사랑과 자연 그리고 문화의 혜택에 감사할 것을 말했다. 그러나 또 하나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은혜를 같이 나눌 내 이웃이 필요하다. 즉 인간 가족 사이의 동정과 감사의 생활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자연 이외에 나와 내 이웃 사이에 깊이 얽혀진 사랑과 동정과 우정을 생각하여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동정과 사랑을 실천한 가장 아름다운 미담을 300여년 전 청교도와 미국 본토 원주민 인디언들과의 교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언어도, 풍속도, 생김도 전연 다르고 거기에 인연조차 없는 낯설은 침입자 청교도와 미개한 원주민 사이에 벌어진 그림보다 더 아름답고 시보다 더 경건한 그 동정과 감사의 표현은 결국 인류 역사에 그 유래가 없는 모든 인종과 문화의 전통이 한데 모여 한 가족을 이룬 북미 합중국이란 이름의 공동사회에 축복이 실현되었고, 또 그들이 일찍이 밟았던 그 강변에 UN 빌딩이 우뚝 서 있게 된 것은 의미 깊은 일이 아닌가? 이러한 이웃과의 사랑과 공동사회는 오늘 분열되고 피 흘리고 싸우는 모든 민족과 지역에 꼭 같이 이루어져야 하겠다.

내가 이웃에게 옷 한 벌이라도 줄 수 있고 예수의 이름으로 목마른 자에게 물 한 잔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동정과 사랑이 있다면, 이 사회는 보다 밝아질 것이며 인간들의 입에서는 감사의 표현이 넘쳐흐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자연과 문화 그리고 이웃에 대하여 감사해야 될 것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감사는 일시적이거나 좋은 환경에서만 해서는 아니 된다. 고로 바울 사도는 항상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가 건강할 때 감사했으면 병났을 때도 감사해야 하며, 부유할 때 감사했으면 가난한 환경에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그것이 참 감사다. 신약성서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바울 선생이 얼마나 어려움을 당했나를 알 수 있다. "그는 무수히 매를 맞고 몇번이나 감옥에 갇혔고, 길의 위험과 산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과 도회의 위험과 유대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았고 이방 사람에게도 핍박을 받았고 다메섹에서도 그랬고 에베소 고린도에서도 그랬고 예루살렘에서도 그랬다." 그는 일생을 핍박과 환란과 곤고 속에서 살면서 그 입에는 항상 찬송이었고 마음에는 항상 감사로 넘쳤다. 고로 그는 이런 역경 속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라고 외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데살로니가전서 5:16-18의 말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시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를 설명하면서, 이 말씀이야말로 인간이 완전에 도달한 경험담이라고 하였다. 또 18세기의 기도의 용장이던 윌리암 로오(Willilam Law)는 "만사가 절망일 때에 하나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신앙은 그 절망을 극복하게 된다고 하였다."

여수 순천반란 사건 때에 공산당에게 두 아들을 희생한 손양원 목사님은 그 아들의 추도식 석상에서 다음과 같은 열 가지 내용의 답사를 함으로 많은 대중에게 큰 감화와 신앙의 힘을 주었다. 그는 두 아들의 희생에 대하여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감사를 표시하였다. 첫째는 나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둘째로 허다한 성도들 중에서 어찌 이런 보배를 주께서 하필이면 나 같은 부족한 사람에게 맡겨주셨는지 나는 그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없어 감사한다. 셋째로 삼남 삼녀 중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것을 감사한다. 넷째로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한데 두 아들이나 순교하게 됨을 감사한다. 다섯째로 전도하다 총살당함을 감사한다. 여섯째로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한다. 여덟째로 두 아들의 순교의 결과로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을 생각하니 한없이 감사한다. 아홉째로 이상의 기쁜 마음을 주신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감사한다. 끝으로 "오! 주여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복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것이 진정한 감사이며 범사에 드리는 감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