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그리스도인의 복의 개념

(250-258)

 

 

일반적인 복의 개념

누가 행복한 용사인가? 이 말은 영국의 자연 시인 워즈워드가 행복된 용사의 성격을 그린 유명한 시의 첫 줄이다. 행복의 탐구는 전 인류의 공통된 갈망이다.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사람 치고 행복을 원치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불행을 피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상정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불행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서, 자살을 택하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는 오히려 범인보다 더 강렬한 행복을 추구하는 욕구가 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을 포함한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인간 오복을 강조해왔다. 우리는 흔히 오복을 갖춘 사람이라든가, 오복을 누리는 사람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 오복이란 서경에 있는 말로서 '첫째는 수요, 둘째는 부요, 셋째는 강령이요, 넷째는 수호덕이요, 다섯째는 고종명'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이 다섯 가지 복은 옛 사람에게나 현대인에게나 인생의 행복에서 빠져서는 안 될 요소들이다. 수는 오래 사는 것이요, 부는 부자가 되는 것이요, 강령은 육체가 건강하고 마음이 편한 것이요, 수호덕은 스스로 덕망을 지니는 일이요, 고종명은 자기 명대로 살다 죽는 것이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가 또 어디에 있을 것인가? 특히 한국사람에게 있어서 복의 추구는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도 강하다. 그래서 정초에 사람을 만나면, 예외 없이 서로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고 인사를 교환한다. 대문에는 큰 글씨로 복자를 써서 붙인다. 자녀의 혼수감을 장만하는데도 복자가 빠진 것이 없다. 옷장에도 복자, 바느질 그릇에도 복자, 벽에도 복자, 축사를 할 때도 만복이 있기를 축원한다.

또 수많은 현대 여성들이 현대식 자동차를 타고 산골짜기를 찾아가서 관상쟁이 앞에 자기의 마음을 털어놓고 미래의 운명을 점친다. 이것은 모두 행복을 갈구하는 인간들의 심리를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닌가?

복받기를 원하는 것은 동양 사람만은 아니다. 서양 사람의 심리도 꼭 같다. 서양에서는 인생의 목적이 행복에 있음을 '에피쿠로스'가 이미 학파를 구성할 정도로 크게 제창했었다. '쇼펜하우어' 같은 사람은 인생을 고해라고 하여 자살을 권한 염세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사실 '쇼펜하우어'는 행복을 추구한 나머지 이를 위해서는 자살이나 광병도 불사해야 한다고 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 심리는 동일하다.

그러나 행복을 추구하는 태도는 다르다. 하나는 소극적이고 또 하나는 적극적이다. 서구 사람들은 행복을 정복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는가 하면 동양사람들은 소극적으로 행복한 데 정복당하기를 기다렸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고로 '럿셀'은 그의 책명을 'Conquest of happiness'라고 하였다. 서구 사람들이 행복을 쟁취하려고 한데 반해서 동양인들은 운이 좋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결정론에 빠져 있었다.

그러면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갈망하는 행복의 내용이 무엇인가? 그것은 공통적으로 가시적이며 물질적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현세에서 지식을 얻으면 얻을수록 지혜의 부족을 더욱 느끼고, 경제적으로 안정을 얻으면 얻을수록 시들하게 생각되고, 여가가 생기면 생길수록 만족치 않은 생각이 든다. 만일 이 세상에서 물질이 풍부하고 환경이 좋다고 해서 행복할 수 있다면, 오늘 행복에 겨워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반드시 그렇지 못하다는 게 인간의 고민이 있다. 금년에 미국의 대부호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그 중 한 사람은 억만장자인 '하워드·휴즈'다. 그는 20억불의 재산을 남겼다. 그러나 신문보도에 의하면 그의 말년의 10여년 간은 가장 고독한 생활을 했다. 그는 외부 사람과의 접촉을 일체 끊고 고독 속에 살았다. 그의 끝없는 돈에 의한 여성편력은 조강지처도, 자녀도 없이 가장 외로운 죽음을 하게 했다. 또 한 사람은 미국의 석유 재벌 '장·풀게티'다. 그는 무려 20억에서 40억불을 유산으로 남겼으나, 그의 사생활로 미루어 볼 때, 그도 역시 행복하지 못했다. 그는 다섯 번 결혼하고, 다섯 번 이혼했다. 그의 자녀들도 모두 불행하게 죽었다. 만일 물질의 풍요함이 행복의 기초라면, 역사 이래로 가장 많은 재산을 모았고 또 유산으로 세상에 남기고 간 위의 두 사람이야말로 가장 행복했어야 할 터인데,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현대인들은 아폴로 11호가 달세계를 정복한 후부터는 우주과학에서 행복을 추구하게 되었다. 달세계 정복 후 계속되는 과학의 발전은 작년 8월 20일에 우주의 오랜 수수께끼였던 화성에 생명체의 존재여부를 탐색하기 위해서 발사한 바이킹 제 1호가 11개월 동안 3억 3천 40만㎞를 날아가서 화성 표면에 착륙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미국은 태양계 탐색의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 이렇게 끝없는 과학의 환상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 한마디로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다. 그러면 우주과학이 과연 현대인이 추구하는 행복의 궁극적인 기초가 될까? 해방 후에 미국의 어떤 작가가 쓴 '지구의 최후'라는 희곡 마지막 부분에 미국과 소련을 위시한 세계열강들이 수소폭탄을 장치한 로켓을 수없이 하늘에 쏘아 올렸다. 그리고 본부에서 단추만 누르면 그 로켓이 공격목표에 자동적으로 떨어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국의 한 조종사가 정보를 잘못 듣고 소련이 미국을 공격한다는 바람에 단추를 눌러 소련을 공격하자, 소련이 이에 대응하고 또 다른 나라들도 연쇄반응을 일으켜 결국 지구는 불덩어리로 화했다는 장면이다. 이것은 한편은 희곡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이 공상적인 이야기가 현실화되어 가는 것을 생각하면 과학에서 참 행복을 찾는 현대인에게 행복 대신에 도리어 불행한 예감을 주고 있지 않는가? 모든 인간이 그렇게도 골똘히 추구하는 참 행복은 오늘 많은 사람이 생각하듯 그렇게 단순하게 물질의 풍요함이나 문명의 발달에서 저절로 굴러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현대인의 생각을 훨씬 넘어 보다 깊은 곳에 행복의 원리가 있다.

 

성서에서 본 복의 개념

그렇다면 보다 본질적인 행복 더 영구적인 행복은 무엇이며, 인간은 어디서 그것을 얻을 수 있을까? 이런 물음에 대하여 기독교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한다. 그것은 고차원적인 행복을 얻기 전에 먼저 인간의 혼 속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 문제는 불행의 원인인 죄와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이다. 이 두 가지 문제의 해결이 없이는 참 행복은 주어지지 않는다. 이 두 가지 문제의 기본적인 해결을 위해서 이스라엘 한 시인은 다음과 같은 해답을 주었다. "복있는 자는 악한자의 의견대로 행치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아니 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도 아니한다." 이 말의 깊은 뜻은 진정 복된 사람은 먼저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고 방향감각을 흐리게 하는 인생의 근본 문제인 죄를 무서워하며 미워하라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죄 속에서 향락과 인생의 행복을 찾으나, 기독교인은 반대로 죄와 관계를 끊는 데서 행복을 찾는다. 시인이 제시한 진정한 행복은 재산이나 지식이 풍부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다고 믿었다. 아무리 부귀 영화를 누린다 해도, 마음 속에 불안과 공포가 꽉 들어차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면 그 불안, 공포의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죄다. 허다한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하나 불행의 원인이 무엇인지, 또 어디 있는지를 생각하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다.

고로 불행의 원인이 되는 죄의 가시를 뽑아 버리지 않는 한, 영원히 행복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고로 인생의 참다운 행복의 조건은 생활환경이나 기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태도에 있다. 죄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내 영혼이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 생애에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의 관계가 정당한 상태에 놓여 있는가? 하는 종교문제와 또 나와 이웃과의 관계가 정당하냐 하는 윤리문제다. 건전한 종교와 윤리는 죄 문제를 해결 할 때에 이루어진다.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하고 사람과 화목하는 대원리는 죄 문제를 처리함에 있다. 인간의 모든 부조리, 구조악, 제도악 등, 온갖 죄악이 제거되지 않는 한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복을 받을 수 없다. 이것은 지나간 날의 역사가 그림같이 보여주고 있다.

또 이스라엘 시인은 하나님의 축복을 방해하는 불신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자라고." 이 말의 뜻은 역사 속에 표현되는 하나님의 섭리, 자연 속에 표현되는 그의 영광, 자신의 실생활을 통해서 체험되는 하나님의 뜻을 항상 묵상하는 생활이다. 이런 묵상에서 생활의 힘이 생기고, 삶의 목적을 알게 되고, 생활의 방법을 찾게 된다. 마치 상인이 항상 이익을 생각하고 정치인들이 앉으나 서나 정권을 생각하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항상 묵상하는 자는 행복하다. 이렇게 인간의 마음 속에서 죄와 불신의 가시를 제거한 사람은 마치 "시냇물 가에 심은 나무가 그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않음같이 그 하는 일이 다 형통한다." 만가지 행복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과 연결될 때,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설정되고, 영원한 평화는 이루어지며, 그 결과로 현실의 모든 축복도 주어진다.

예수는 공생애에 나서자마자 파격적이고 역설적인 복의 개념을 선포했다. 그것이 바로 산상설교에서 제시한 복의 개념이다. 이것은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복의 개념과는 정반대다. 예수가 선포한 복의 개념을 피상적으로만 받아 드린다면, 마치 실패한 자를 위로하며 마음 상한 자를 어루만져주며, 생존경쟁에 넘어진 자를 불쌍히 여기는 약자에 대한 선물 같이 생각된다. 그래서 독일의 철인 니체는 기독교 윤리를 "노예의 도덕"이라고 비난하면서, 세상에서 제일 가엾은 인간들의 종교라고 지적했다. 또 교회를 몹시 핍박한 제2세기 사람들은 기독교를 '가난하고, 무식한 사회의 찌꺼기인 농민과 거지와 종들의 종교'라고 비난했다.

또 예수가 주장한 복의 개념은 구약의 행복관과도 다르다. 유대인들은 골똘하게 축복을 추구한 백성이었다. 그들의 종교적 사회적 생활의 기준이었던 모세의 율법은 복과 화로서 엮어져 있었다. 마치 한국사람들이 바라던 오복의 개념과 비슷하다.

또 예수의 행복의 개념은 현대인의 생각과도 정반대였다. 현대인을 지배하는 복의 개념은 사람이 성공하려면 박력과 재주가 있어야 하며, 타산적이어야 하며, 남을 위하는 생각보다는 자기 이익을 앞세워야 하고, 힘껏 돈을 벌며, 고통을 피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남을 희생시키는 것도 사양치 않는다. 그런데 예수가 선포한 복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몹시 슬퍼하는 인간의 마음 속에 어떻게 행복이 깃들일 수 있을까? 어떻게 비애의 쓴 것으로부터 행복의 향기를 끌어낼 수 있을까? 세상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납득이 안가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무력을 슬퍼하며 자신의 지은 죄를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또 예수는 온유한 자가 복되다고 선포하셨다. 이렇게 생존경쟁이 심한 때에 뱃심과 박력으로 출세의 비결을 삼는 오늘의 세계는 동서를 막론하고 은유의 덕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는 온유한 자라야 땅을 차지한다고 선포하셨다. 그리고 예수는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으며, 남을 긍휼이 여기는 자, 마음이 깨끗한 자, 화평케 하는 자, 핍박을 받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다. 예수가 선포한 복의 원리는 세상 사람들의 축복의 역사에 대한 도전인 동시에 하나의 새로운 축복개념의 선포라고 믿는다. 그 이유는 예수가 선포한 복의 개념은 장차 세상을 뒤집어 엎을 늠름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고로 유대의 학자 '몬데비오리'는 예수의 복에 대한 윤리는 영웅들을 위한 윤리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예수의 복의 선포는 어디까지나 신앙에 기초를 두었고, 어느 시대의 사회제도나 정치 문제보다도 인간변화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복의 개념 

끝으로 한국교인들의 생각을 점령하고 있는 축복의 개념을 분석해 보기로 하자. 한국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 셋이 있다. 그것은 "예수 믿고 은혜 많이 받으시오, 예수 믿고 구원받으시오,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로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교인들의 신앙과 화복의 개념과는 분리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나는 한국교회가 지니고 있는 복의 개념을 내가 직접 체험한 다음의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몇해 전에 필자가 설교 목사로 봉사하던 어느 교회에서 생긴 일이다. 그 교회에 모 대학에 근무하는 젊은 버스 운전사 한 사람이 가족들과 함께 한 주일도 빠짐없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예배에 참석했다. 그런데 이 젊은 운전수는 아무런 알림도 없이 교회에 발을 끊었다. 그 부인에게 사유를 물었더니, 내 남편이 큰 시험에 들었으니 예배 후에 꼭 자기 집을 방문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나는 예배를 마치자마자 그 부인을 따라서 운전수를 방문했다. 젊은 운전수는 나를 보자 화가 나서 만나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이유를 조용히 물었다. 그 때 운전수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퉁명스런 반문을 했다.

"교회에 잘 다니면 복을 받는다고 설교했지요?" "그렇고 말고요 교회에 잘 다니고 신앙생활 잘하면, 틀림없이 축복을 받지요"하고 대답하자, 젊은 운전수는 벌떡 일어나면서 뱉는 말이 "당신은 목사가 아니라 거짓말쟁이요. 내 아들의 행방 하나도 감시 못하는 그 따위 하나님이 무슨 복을 준단 말이요, 나는 당신에게 속았소, 나는 절대로 안 믿을 거요." 사유인즉, 중 3에 다니는 그의 큰 아들이 삼 주일 전에 말없이 집을 나가 행방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집나간 아들이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 다음 주일 아침 예배에 그의 악마 같던 얼굴이 천사처럼 변하여 만면에 웃음을 지으면서 참석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예배 후에 어떤 마음으로 다시 교회에 나왔느냐고 물었다. 그 때 그 운전수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지난 주일 목사님이 제 집에 와서 기도하고 가신 다음 날 내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를 잘 믿고 교회에 잘 다니면, 틀림없이 복을 받을 줄 믿습니다." 이 젊은 운전수의 고백은 한국교회의 대다수의 교인들이 지닌 축복의 개념이며, 신앙상태를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주일 예배에 잘 참석하는 것도,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교회에 헌금 바치는 것도 모두 복의 개념과 결부된다. 감사의 표시이기보다는 내가 만원을 바치면 당장에 이 만원의 축복이 임할 것을 바라는 마음에서 드린다. 자신의 행복과 축복만을 바라는 신앙, 이것은 분명히 신앙은 신앙인데 참 신앙은 아니다. 이런 신앙은 내게 유익하면 하나님이 필요하고 내게 불리하면 하나님이 필요 없는 상업적인 신앙이다. 이것은 자신의 목적 추구요 욕망이지, 참 신앙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것은 신앙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하나님은 항상 내 명령에 따라서 축복을 내리셔야 한다. 이런 신앙은 만사가 잘 되면 좋으나 인생이 난국에 처할 때는 버리거나 약해지고 만다. 이런 것을 심리학에서는 욕망의 반응이라고 하지, 신앙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은 신앙을 복의 개념과 결부시키는 경향이다.

삶의 과정에서 어떤 난국에 봉착하게 될 때, 이것은 분명히 주일도 잘 안 지키고 11조도 잘 안 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저주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보통 때는 생각도 않던 헌금을 받치기도 하고 회개도 하며 부르짖는다. 어려움에 빠졌을 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참 신앙은 인간의 삶 전체의 문제요, 생활 자체가 종교적 의미를 지닐 때에 가능하다. 신앙인에게는 고통이 삶의 전부가 아니다. 고로 고통을 하나님의 저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이것은 날마다 생기는 삶의 과정이며, 보다 높은 차원에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현세의 출세나 축복을 받기 위해서도 아니고, 환란을 모면하기 위함도 아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인생의 최고의 목적이며, 궁극적인 관심사다. 인생은 신앙에서만 가장 높은 목표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가장 높은 목표는 신앙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위에서 나는 일반적인 행복의 개념,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의 개념, 그리고 오늘의 한국 교회인들의 복의 개념을 정리해 보았다. 결국 얻어진 결론은 오늘의 한국교인의 복의 개념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그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고로 시급한 것은 미신적인 복의 개념을 벗어나 참되고 바른 행복관과 신앙생태를 형성하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