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기독교와 과학세계

(266-273)

 

 오랜 역사를 통해서 우리 기독교가 믿어 온 우주기원의 역사는 창세기 1:1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근거로 삼는다. 이 말씀은 우주탄생의 선언이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에 우주창조를 끝냈는데, 첫날은 빛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둠을 밤이라 불렀다"(창 1:3-5). 둘째 날은 하늘과 땅을 구별하셨다. 하나님은 물을 상하로 갈라 그 사이에 장소가 있게 하셨다. 땅은 밑이고 하늘은 위고 그 사이는 공간이다(1:6-8). 셋째 날은 지구상의 물과 육지를 구별하셨다. 대양(大洋)과 대륙(大戮)의 구별이다(1:9-13). 넷째 날에는 천체(天體)의 출현이다. 하늘에는 일월성신이 있게 하시고 큰 빛으로 낯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빛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별들을 만드사 빛과 어두움을 구별하시고 네 계절을 주셨다(1:14-19). 다섯째 날에는 물 가운데 그리고 공중에 동물을 내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대양에는 어류에 속하는 동물, 공중에는 조류에 속하는 동물을 창조하셨다(1:20-23). 제6일에는 창조의 절정이라고 볼 수 있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1:24-31) 제7일에는 쉬셨다. 처음에는 빛, 다음은 하늘과 땅의 구별, 다음은 바다와 육지의 구별, 다음은 천체의 출현으로 주야의 구별, 그 다음은 수중, 공중의 동물, 끝으로 육상의 동물과 인간 창조다. 이상이 과거 우리 기독교가 정통적으로 믿어온 성서적인 우주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적인 대신비 속에서 이 우주를 생각하였고, 지구를 떠난 다른 세계는 하나의 꿈 속에서나 그려보는 세계로만 여겨왔다.

현대 과학자들에 의하면 이런 우주는 이미 100억년이나 존재해왔고, 인류의 조상은 겨우 12만년 전에 생겼고, 인류의 문명은 6천년 밖에 되지 않는다. 100억년의 우주 진화 과정 끝에 나타난 인간이 이렇게 방대하고 무한한 우주의 진화과정을 조정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런 인간 지식의 발달과 함께 지난 수 십년 동안에 과학 세계는 깜짝 놀랄 만큼 변화되었다.

특히 1969년 7월 21일 억만년의 침묵을 깨고 아폴로 11호가 인간을 태우고 꿈에 그리던 달세계에 착륙했다. 그날 오전 11시에 달에 인간이 첫 발을 디뎠고, 그 다음날 새벽 두 시에는 달을 떠나 25일 새벽에 무사히 지구로 귀환했다. 40만 키로미터의 엄청난 우주 비행 끝에 인간이 첫발을 내디딘 아폴로 11호는 인간이 우주에 쏘아 올린 4천39번째의 인공물체였다. 뿐만 아니라 1976년 7월 21일에는 우주의 오랜 수수께끼의 화성(火星)에 생명체가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탐색하기 위한 미국의 무인 우주선 바이킹 제1호가 1975년 8월 20일에 발사한 후 11개월만에 무려 3억2천40만 킬로미터를 날아가서 화성 표면에 착륙하였다. 이로써 현대과학은 태양계 탐색에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영역이 우주 공간으로 단번에 확대된 우주 시대의 새로운 기원을 이루었다. 그것뿐인가? 자동차, 선박, 기차, 비행기 등을 통해서 교통이 말할 수 없이 편해졌고,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 전화 등을 통하여 우리 나라만 아니라 전 세계 어느 나라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건 즉각적으로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연탄, 석유, 가스, 전기 등으로 전례 없이 생활이 편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과 같이 세계 인류의 깊은 관심을 과학 세계로 모아 보기란 역사상 처음이다. 고로 한 마디로 표현해서 오늘은 과학의 세계다. 오늘의 이런 과학적인 발명을 크게 구분한다면, 첫째는 원자핵물리학(原子核物理學)이다. 둘째는 플라스틱 과학이다. 종래의 금속, 목재, 석재에만 의존하던 것이 이제는 플라스틱에 의하여 국민경제 생활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셋째는 인간의 손과 머리로 만든 최초의 천체인 인공위성의 발사다. 그래서 흔히 현대를 원자력 시대니 플라스틱 시대니, 전자공학 시대니 하고 여러 가지로 이름을 짓는다. 그러나 가장 많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우주과학 시대다. 1957년 11월 4일 소련이 스프티닉크 제1호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공위성으로 등장했다.

그 후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서독, 중공 등 여러 나라에서 국가 총 예산 중 막대한 퍼센테이지를 우주 과학 분야에 투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위에 말한 것은 대표적인 것에 불과하고, 그 외도 이에 못지 않는 위대한 과학세계의 발전을 의학, 생물학, 전자공학 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미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생명이 길어져서 심각한 인구 문제를 빚어냈다. 게다가 DNA를 합성하여 생명체를 창조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화학약품이나 전자장치로 인간이 감정, 태도 등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약을 먹여 거짓말을 못하게 한다든지, 전자 바늘로 뇌신경을 자극해서 웃게 만든다든지, LSD와 같은 약으로 신비스러운 경향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또 우생학(優生學)의 발달로 말하자면, 인간의 씨를 개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최근의 의술의 발달로 우리의 심장이나 폐나 장을 사람이 만든 기계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고 또 요즘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 심장이식의 경우처럼 다른 사람의 내장을 물려받을 수 있는 가능성도 생겼다. 그리고 우생학의 발달로 말하자면, 인간의 씨를 개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마음먹은 대로 그 성격을 형성 할 수 있게 되고, 그것을 다음 세대나 후손들에게 전해 줄 수 있다는 지론이 된다. 만일 생물학자가 성서의 원리대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인간성으로 대치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리고 세계 인류가 모두 그런 인간성으로 바뀌어진다고 가정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생물에 관한 연구는 지상의 동식물에만 그치지 않고 깊은 바다의 동식물에까지도 그 연구의 손을 뻗고 있다. 지금까지 해저 연구는 해면에서 불과 6500미터 이하를 더 깊이 파고들지는 못했다. 그래서 1948년 스웨덴의 유명한 항해학자 한스 페터슨(H. Petteron)은 '해저의 비밀' 이라는 저서에서 6500미터 이하에는 여간한 생물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을 내렸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1만990미터의 바다 밑까지 내려가 거기에도 생물이 살고 있던 사실을 조사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20세기말이나 21세기초에 가서는 수중농업 또는 수중유전학이 탄생되어 나올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런 진전과 발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금까지 수 천년 동안 인류는 다만 자연을 이용하고 변형하는 데 지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동식물의 품종의 개량과 신종까지도 만들어낼 것이라는 가정이다. 21세기부터는 주문하는 대로 남성이나 여성이나 자유자재로 그 성격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그리고 21세기에는 원자력이나 전자공학을 이용하여 지구의 구조를 여러 가지 각도에서 바꾸어 놓을 수가 있게 되었다.  

하나님이 6일 동안에 지구를 창조하신 후 좋다고 하신 원형 그대로는 만족 못한다는 이야기다. 지금까지 인간생활의 적합했던 육지는 지구표면의 30%이하에 불과하다. 사막지대가 육지의 총 면적의 15%를 점유하고 있다. 그래서 사막지대를 개척하고 바다를 육지로 만들기도 한다. 또 지구상의 기온 조절이 가능해졌다. 영도 이상의 기온을 모르던 영원의 빙산에 따뜻한 바람이 불어갈지 모른다. 구약성서의 말씀 같이 높은 곳이 낮아지고 낮은 곳이 돋우어지고 황무지에 장미꽃을 피게 한다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 지금부터 50년 혹은 100년 후에는 교통수단이 놀라울 정도로 단축된다. 육로를 달리는 철도의 경우 기관차에 원자로를 장치하여 원자력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에는 막대한 화물을 싣고 먼 거리를 용이하게 달릴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의 자동차 사용의 전망은 어떤가? 격증하는 인구 증가로 도시에서는 자동차 사용이 금지 될 가능성이 많다. 뉴욕시의 경우만 하더라도 어떤 지역은 자동차의 달리는 속도가 보행 속도와 비슷하다. 그렇게 되면 도시에는 교통수단이 보행이나 헬리콥터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그 때에 가서 자동차는 교회로 도시권을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교외용 자동차에는 제트엔진을 장치하게 되면, 시속 250킬로에서 300킬로의 스피드로 달릴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 때는 좌석도 마음대로 방향을 조정해서 택할 수 있다. 운전사도 불필요하게 될 것이며, 스위치나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있게 된다. 문자 그대로 자동차의 구실을 하게 된다. 비행기의 경우도 원자 에너지를 이용하면 여객기라 할지라도 2만 미터의 높은 공간으로 올라갈 것이고, 시속 6천 킬로미터까지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우주여행의 꿈, 벌써 별과 별 사이의 항행학이 하나의 연구분야로 다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면 이렇게 끝없이 발전해 가는 과학세계와 인간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여기서 우리가 꼭 잊어서는 안 될 한가지 사실은 기술과 과학이 인간을 위해 있지, 결코 인간이 기술과학을 위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마치 성서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지 않다는 진리를 이런 경우에도 타당성을 지닌다. 그런데 오늘의 문제점은 기술문명의 앞에서 인간은 점차적으로 소외당하고 비인간화(非人間化) 내지는 비인격화(非人格化)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지금까지 지탱해 온 인간의 존엄성마저도 기계라는 거창한 괴물 앞에 뿌연 안개처럼 사라져가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던 모든 일을 이제는 기계가 대신할 수 있다는 데서 인간은 기계를 섬기게 되었고, 심지어는 기계를 하나의 우상처럼 추앙하게끔 되었다. 예를 들면 전자계산기(Computer)라는 전자두뇌기는 만명의 수학자가 7시간에 풀 수 있는 수학적인 문제를 단 7분이면 거뜬히 풀어낸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모든 것이 자동화(automation)되어 선진국에서는 놀아도 오늘보다 넉넉하게 먹고, 입고, 살 수 있게 되리라고 한다. 만일 전부가 일한다면, 한 주일에 평균 여덟 시간만 일하면 된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를 반대로 생각한다면, 아까 말한 계산기의 경우 만 여명은 실직자가 된다는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전자 혁명 이전에는 수 만명의 고용인을 필요로 하던 생산공장에서도 자동화 기계화는 과학기술의 혜택으로 불과 10명의 인원으로서 같은 분량을 생산해 내게 된다. 요소 요소에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만들어져 소비공장으로 곧장 운반되어 나간다. 그 다음에 찾아드는 문제는 무엇일까? 도대체 남아있는 인간의 역할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성과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오묘한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 기술문명의 목적인데, 오히려 인간이 기술의 노예가 될 때 비애와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다. 여기서 과학문명 그것만이 단독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가 뒤따라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것이 바로 도덕이요 신앙이요 종교요 하는 것이다.

그러면 과학이 세계와 종교의 관계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기술문명은 반종교적인 것도 아니요, 비종교적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과학은 종교가 아니다. 종교는 결코 과학기술을 이단시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동시에 과학을 구세주처럼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인간의 주체성을 찾아 본연의 질서를 선포하는 역할이 곧 종교에 주어진 사명이다. 고로 세속도시라는 책을 쓴 하비 콕스는 다른 논문에서 주장하기를 현대의 과학기술은 성서의 전통에 근거를 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술문명이야 말로 지금까지 종교가 다 설명해주지 못했던 창조질서의 깊은 관심을 부각시켜 주는 바가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과학은 하나님을 부정한다든지 하나님의 부재(不在)를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춰진 진리의 깊이를 알려준다고 보아야 한다. 기술 문명이 이 만큼 발달했으니 이제는 하나님이 불필요하며 종교는 더욱이 필요 없다고 한다면, 기술은 한층 더 인류의 우상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런 생각은 참 과학의 뜻을 모르는 데서 하는 말이다.  

이제 우주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뚜렷하게 빛나게 되었다. 오늘의 놀라운 과학 문명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만 아니라 인간이 답사할 수 없던 무한대의 광막한 다른 넓은 세계도 창조하셨고 지배하신다는 비밀의 베일을 하나씩 둘씩 벗겨가고 있는 증거다. 소련의 처음 우주비행사는 우주를 비행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내가 아무리 찾아보아도 이 우주 안에는 기독교가 믿는 거와 같은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더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 소련의 비행사와는 대조적으로 미국의 한 우주비행사는 비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신비스럽고도 찬란한 우주의 광경을 보고 나는 창조주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새삼 확신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우주과학은 결코 하나님의 존재나 신의 거소(居所)를 발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화성이나 금성이나 또 다른 어떤 세계에 인간이 탐험을 간다하여도, 하나님은 끝내 육안으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동요에서만 부르던 달세계 별세계를 탐험했다 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우주과학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답사하고 그의 영광과 놀라운 솜씨를 발견하는 그 이상의 종교적 의미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앙의 세계에서만 찾을 수 있지 과학의 세계에서는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까지 하나님을 지구의 하나님으로만 알았기 때문에 문제였지, 전 우주의 하나님으로 믿을 때는 아무런 문제도 있을 수 없다.

우주과학이 아무리 위대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보다 더 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과학이 아무리 발달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주관하는 자는 오직 인간이기 때문이다. 또 아무리 우주과학이 하늘을 마음대로 내왕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넘어 그 이상의 영역으로 뻗어 나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과학은 그것이 인간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따라서 그 깊은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인간 역시 하나님과의 종교적 관계에서만 참된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과학세계와 기독교는 하나의 원(圓) 속에 서있는 것이지 적대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