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인간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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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쇼펜하우얼'은 어떤 날 골똘히 무엇을 생각하면서 길을 걷다가 맞은 편에서 오던 사람과 부딪쳤다. 그 사람은 골이 나서 말하기를 "당신이 도대체 누구길래 길도 보지 않고 다니시오" 하고 대들었다. 이때 쇼펜하우엘은 "내가 누구인지 나도 알기를 원하오" 하고 대답하였다. 성서에 보면 '시편' 기자도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시 8:4) 하고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을 던졌다.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주제는 옛날부터 문제가 되어왔으며 오늘에 와서는 철학적 사고의 초점이 되었다. 역사상 오늘날처럼 인간이 자기자신에게 큰 문제가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 이유는 나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물음은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 하는 결단을 찾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존재의 근원과 행방과 이상에 대하여 언제나 궁극적인 물음을 갖는다. 나는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결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나의 삶의 좌표를 어떻게 설정하고 삶의 방향을 어디에 둘 것인가? 이런 수수께끼를 풀기 위하여 옛날부터 오늘까지 많은 철학자들이 고심했고 여러모로 인간의 정의를 내려보기도 했다. 고대 희랍의 철인들은 인간을 생각하는 인간, 즉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근대에 와서는 자연주의라는 이름 밑에서 인간을 인간 이하의 기계적인 존재로 취급하고 제작하는 기술인으로 정의했다. 그러면 기독교는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기독교는 세 가지 원리에서 인간을 이해한다. 먼저 기독교는 창조의 원리에서 인간을 이해한다. 성서는 인간의 문제를 취급함에 있어서 창조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1. 지음 받은 인간

첫째로 기독교는 신앙을 강조한다. 신앙은 아는 것이 아니요 믿는 것이다. 이성의 차원과 신앙의 차원은 동일한 영역이 아니다. 알 수 없는 것을 믿고 알 수 없기 때문에 믿는 것이 신앙이다. 그런고로 합리주의적인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의 신앙은 부조리하고 역설적이다. 그렇다고 기독교 신앙은 이성의 질서를 파괴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둘 다 인정하되 신앙의 우위성을 강조하려는 것이 신앙인의 기본자세다. 그러므로 '파스칼'은 신앙은 정신의 고차원의 도박이라고 말했다. 도박은 어느 한 편에 걸어야 한다. 도박은 알 수 없는 것에 나를 내던지는 결단적인 행위이다. 그러면 왜 신앙이 도박이냐?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편에 내 인생을 내 맡기고 살 것이냐? 아니면 반대로 하나님이 없다는 편에 내 인생을 맡기고 살아갈 것인가? 인생은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에 대하여 주체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런 고로 신앙은 진지한 도박이다. 둘째로 그러면 신앙인은 무엇을 믿는가? 기독교는 창조주와 피조자의 대화의 종교다. 그런고로 신앙인은 태초에 하나님이 존재하였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유일무이의 신이며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만물의 영장으로 인간을 만들고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으로 믿는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롬 11:36)고 말했다. '이사야서'는 "나 여호와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새 44:6) 했고 '계시록'에는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하신 자라"(계 1:8) 고 설명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자고 인간은 어디까지나 유한한 피조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은 언제나 창조자와 피조자의 관계에 선다. 만일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를 절대화하거나 신성화한다면, 그것은 창조주에 대한 일종의 반역이요 우상숭배의 무서운 죄악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인 인간이해의 첫째 요소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것과 인간은 어디까지나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는 의식이다. 셋째로 그러면 하나님은 인산을 어떻게 창조하셨나? 하는 문제다. 성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시되 1남1녀를 지으셨다고 기록하였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다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깊은 관계를 표시하는 종교적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의 인격자로 창조하심을 의미한다. 여기에 인간존재의 특수성이 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존엄성은 이성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데 있다. 그리고 창조자에 대한 피조자의 기본자세는 두 가지다. 하나는 창조자에 의하여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말은 인간의 본질이 하나님의 본질과 동등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로 대화하고 서로 응답하는 관계에 있음을 말한다.

 

2. 죄를 지은 인간

다음으로 기독교는 타락의 원리에서 인간을 이해한다. 창세기에 보면 유일신 여호와는 무에서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제일 마지막에 자기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점에서 인간 이외의 모든 피조물과 엄연히 구별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를 만물 중에서 가장 사랑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을 모두 피조물의 지배자로 정하고 '아담'과 '이브'로 하여금 '에덴' 동산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에덴'에 있는 모든 과실을 다 따먹되 다만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만은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교활한 뱀의 유혹으로 그 과일을 쳐다보는 순간 세 가지 자극을 받고 금단의 과일을 따먹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다. 그 세 가지 자극이란 곧 미각의 자극(먹음직하고), 시각의 자극(보암직하고), 그리고 지성의 자극(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더라)이었다.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지혜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된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결과로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고 죄와 사망과 고뇌의 운명을 영원히 짊어지게 되었다. 왜 인간에게  번민이 있고 죽음이 있고 죄악이 있는가 하는 인간 실존의 근본 문제에 대해서 '창세기'는 신의 계명을 거역한 인간의 타락에 대한 형벌이라고 대답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신학적인 깊은 진리를 상징한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유와 신의 명령에 거역하는 자유를 아울러 갖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진리를 상징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 자유를 남용하였다.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탐욕 자기를 절대화하고 주인화하려는 오만에 사로잡혀 하나님께 반항했기 때문에 '에덴'의 낙원에서 추방되고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랑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이러한 단절을 잇는 것이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다. 성서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엄한 피조자임을 말하는 동시에 자유의 남용으로 타락한 죄인이 되었음을 말해준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이브'의 원죄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었다. 인간의 본성은 부패해졌고 그 의지는 썩어 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을 상실했다. 모든 인간의 혈관 속에는 뱀에게 유혹 당한 나약한 의지가 계승됐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아담'의 오만과 탐욕이 깃들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기독교의 인생관은 낙관적이다. 그러나 '아담' '이브'의 원죄로 인하여 그 본성이 타락한 죄인이라고 보는 점에서는 기독교의 인간관은 비관적이다. 기독교는 인간이 모두 죄인이라고 단정한다. 그리고 기독교가 인간을 모두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결과적인 죄에서가 아니다. 그러면 기독교가 말하는 죄는 무엇인가? 죄는 여러 가지 아니라 하나다. 그 하나의 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먼저 하나님 앞에서 짓는 죄다. 기독교가 제시하는 이 하나의 죄는 단순히 사회악이니 법률 악이니 혹은 도덕 악이니 하는 것 뿐 아니라 그런 악들의 원인을 말한다. 이 죄는 사회나 국가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이기 이전에 벌써 하나님 앞에서 범하는 죄이다. '시편' 기자는 이 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나이다"(시 51:4). 기독교가 모든 인류를 죄인으로 규정하는 원리는 여러 가지 결과적인 죄들이 아니라 모든 죄의 원인이 되는 하나의 죄를 말한다. 그러면 이 하나의 죄란 무엇인가? 신구약 성서는 이 하나의 죄를 불순종 또는 불신앙이라고 말한다. 즉 이것은 피조자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자기를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으려는 교만이다.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10계명 중 제 1계명을 범하는 우상숭배다. 이런 교만을 '키엘케골'은 '절망의 죄'라고 설명하고 그것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지적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원죄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이런 죄의 힘은 전 인간을 속박하고 지배하는 힘이라고 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이 죄의 유전은 보편성을 띄고 있다. 누구에게나 미친다는 말이다. 한 사람에 의하여 죄는 세상에 들어왔고 또 그 죄의 값으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미쳤다고 말했다. 그런데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도 없으니 율법 밑에는 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 의인은 없다."(롬 3:9-20)라고 했다.

 

3. 구원받은 인간

기독교는 창조와 타락과 구원의 세 원리로 인간이해를 요약한다. 만일 기독교가 원죄로 인하여 인류는 타락한 죄인이 되었고 그 결과로 사망이라는 벌을 받는 것으로 그친다면, 기독교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어두운 비극을 선언하는 종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구원의 원리를 제시한다. 타락한 죄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구원의 진리를 제시한다. 여기서 기독교는 세 번째의 원리인 구원받은 인간의 탄생을 강조한다. 기독교는 죄와 불행의 어두움에서 벗어나서 생명과 행복에 이르는 새로운 복음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복음의 종교다.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빛과 생명과 행복에 이르는 복음을 주려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구약 39권은 우주창조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구세주의 간절한 대망으로 끝나는 '이스라엘' 민족사다. 메시아 대망은 구약성서를 일관하는 기조음이다. 이렇게 대망 하던 메시아가 탄생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원하던 메시아의 이미지와는 너무도 달랐다.'이스라엘' 민족은 실망하고 분노하여 그리스도를 죽였다. 그의 비관적인 십자가의 죽음에서 구원의 종교인 기독교는 탄생했다. 하나님은 죄와 타락 속에서 신음하는 인류에게 자기의 독생자인 메시아 예수를 구주로 보내어 구원의 길을 열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내는 은총이다. 유대교의 민족신은 거칠고 존엄하고 배타적인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은 예수의 경험을 통해서 사랑의 하나님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의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되었고, 의의 종교는 사랑의 종교가 되었다. 유대의 민족종교는 인류적인 세계종교로 발전했다. 유대인만의 구원을 주장하던 극단적인 민족주의의 종교인 유대교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하여 전 인류의 구원을 염원하는 세계종교로 전개됐다. 그리스도를 전 인류의 구주로 믿고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기본신앙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핵심원리는 사랑이다. 그는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했다. 사랑이 예수의 척도요 기독교의 생명이다. 이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이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는 사랑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기독교 신앙의 알파요 오메가다.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인간을 사랑하라는 두 계명, 죽 수직적인 사랑과 수평적인 사랑이 한데 교차되고 밀접한 관계를 이룬다.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에게 나타남으로서 구원은 성립된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고 함은 구원의 종교라고 하는 뜻과 같은 내용이다. 그리스도가 메시아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절대로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은 기독교적 인간이해의 제3요소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피조자인 인간은 '아담'과 '이브'의 원죄로 타락하여 죄인이 되었지만 하나님이 인류에게 보내신 메시아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길이 다시 열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인간상은 창조와, 타락과, 구원의 세 가지 원리로 요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