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기독교와 근대화

(274-278)

 

 우리는 동서 간의 사상적 대립과 남북 간의 빈부의 극심한 대립 속에 살고 있다. 동시에 급격히 변천하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시대를 혁명(Revolution)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또 어떤 사람은 급격한 사회적 변화의 시대(Rapid Social Change)라는 말로도 표현한다. 그리고 오늘의 사회적 변혁의 특색은 사회의 어떤 일정한 영역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아 아니라 전체적으로, 종합적으로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사회변혁의 동시성(同時性)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특히 아세아에 있어서는 서구사회가 지나간 1517년 1917년까지의 400년 간에 걸쳐 경험한 큰 변혁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짧은 시일 내에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급격한 변혁이 일어나고 있음은 오늘의 아세아 사회변혁의 한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급격한 변화의 배경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근대화에 대한 자각이다. 근대화 이후의 세게 역사를 서양의 세력이 동양으로 점점 뻗치어 마침내 동양을 정복 지배하게 된 역사라고 요약해서 표현할 수 있다.

아세아의 여러 나라들은 서구의 자본주의 제국주의의 열강세력에 정치적으로 예속되고 경제적으로 착취되어,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로 굴종과 치욕의 역사 속에 살아왔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아세아의 여러 나라들도 자각과 독립의 날이 왔고, 많은 신생국가들이 독립과 해방의 기치를 들고 역사무대에 새로운 질서가 건설되는 탄생의 전통이 이 지역을 휩쓸게 되었다. 즉 독립과 혁명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가 아세아 후진 지역에 다가왔다. 대외적으로는 민족 자주독립을 부르짖고, 대내적으로는 사회개혁을 외치는 소리가 날로 요란하게 들려왔다. 고로 미국의 정치학자 모겐소 교수는 20세기의 세계사의 삼대변혁의 하나로서 아세아의 자각과 독립을 든 것은 너무도 타당한 관찰이라 하겠다. 그러나 오늘날 혁명의 진통을 겪고 있는 나라는 아세아의 여러 나라만이 아니다.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이 넓은 세 지역은 후진 국가의 밀집 지역으로서 무지와 빈곤과 침체와 저개발의 어두운 사회악에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사회악에서 해방되어 문명과 번영과 자유와 진보를 누리려는 주체적 자각과 의지의 소리가 국민들 간에 날로 높아가고 있다. 이 자각과 의지의 집약적인 표현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근대화다. 이는 민족적 자아의 힘찬 각성의 소리이기도 하다. 오늘 세계의 전 인구가 40억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 아세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세 지역이 세계 전 인구의 약 삼분의 이를 점령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볼 때는 전 세계의 부의 겨우 칠 분의 일 정도 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것은 부유와 빈곤의 너무도 극심한 차다. 여기서 남북의 대립, 즉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의 격심한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이 세 지역은 과거 수 백년 동안 서구 열강들의 세력에게 얼마나 착취되고 침략을 당했던가를 위의 숫자 만으로서도 넉넉히 증명된다. 물론 자신들의 무지각에 원인이 있던 것도 의심의 여지는 없다. 그러므로 오늘에 있어서 이 세 지역에 사는 민족들의 공동의 과업은 무지에서 해방되고 빈곤에서 벗어나고 예속에서 자유하는 일이다. 그러면 왜 서구 세력이 동양을 지배하는 비극이 생겼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힘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서양은 동양을 지배할 힘이 있었고, 동양의 여러 나라들은 서양의 침략을 막을 힘이 없었다. 그러면 서양 사람들은 그 힘을 어디서 얻었을까 그 힘은 바로 근대화의 산물이다. 근대화가 동양지배의 힘의 원천이다. 서구의 여러 강한 나라들은 일찍 근대화를 이룩하였고, 동양의 여러 나라들은 미처 근대화를 이룩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바로 남의 지배 밑에 살게 된 하나의 기본 원인이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후, 우리 나라도 지나간 몇 해 사이에 뒤늦게나마 근대화의 연구가 진행되었고, 이제는 그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서게 된 것은 우리의 가장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근대화라는 말은 결국 잘 사는 길의 모색이다. 그런데 문제는 근대화의 원리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방법론이 문제이다. 그것을 전문가들은 과학기술이라고 말한다. 이 무기와 힘을 가지고 서구 사람은 세계를 지배해왔다. 그러면 이런 과학기술을 습득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정신적인 배경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 기독교는 대답할 의무가 있다. 그러면 근대화 작업의 정신적 배경에 대해서 기독교는 무엇이라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긍정적인 생활철학이다.

 1957년 3월에 캘리포니아주의 아주사라고 하는 조그마한 타운에 있는 모 여중학교 학생들과 이야기한 때가 있었다. 그 때 어떤 학생 하나가 나에게 당신은 서구문명과 동양문명을 비교하면 어느 것이 수준이 더 높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 때 나는 어느 문명의 수준이 더 높고 낮은지는 말하기 어려우나, 서구문명이 동양문명보다 진보적이라는 사실만은 인정한다고 대답했더니, 다른 학생이 묻기를 동양의 여러 나라들은 서구의 여러 나라들보다도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명에 있어서 후진성을 띠게 된 그 이유가 무엇인가하고 물었다. 이 두 학생의 질문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첫 번째 질문은 동서간에 어느 민족이 더 잘 사느냐?일 것이고, 두 번째 질문은 서양 사람이 동양 사람들보다 더 잘 사는 이유가 무엇이냐? 의 말로 풀이할 수도 있다. 잘 산다, 못 산다 하는 문제는 결국 생활철학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우리의 조상들이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살았느냐에 원인이 있다. 그러면 동양문명은 어디서 왔는가? 그것은 하지 말라(Do Not)의 부정적인 철학의 산물이다.

옛 글에 己所不慾이면  勿施於人이라는 말이 있다. 즉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철학이다. 그러나 서구문명은 이와 반대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 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하라(Do)의 긍정적인 생활 철학의 산물이다. '하지 말라'와 '하라'의 철학내용은 하등의 차이가 없다. 악한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이나 좋은 일을 하라는 말이나 그 뜻에 있어서 동일하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문명에 있어서 하늘과 땅의 차이를 가져왔다. '하지 말라'의 철학을 따르면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마치 여리고 도상에서 불한당을 만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간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은 하등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하라'의 긍정적인 생활철학을 좇는다면 내가 선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자진해서 남에게 시행해야만 된다. 예를 들면, 반드시 사마리아 사람같이 자진해서 남을 도와야 한다. '하지 말라'의 철학은 입산수도는 죄가 아니라 덕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하라'의 긍정적인 철학은 은퇴는 일종의 죄악이며, 남에게 베풀어야 할 선을 베풀지 않으면 이는 덕에 배치되는 행동으로 간주한다. 부정적인 철학을 강조하면, 은퇴적이고 수동적이고 비관적인 국민성을 조성하게 된다.

그래서 과거 동양사람들은 적은 일이나 큰 일이나 강요를 받지 않고서는 자진하여 일하지 않았다. 그런 윤리적 사고가 오늘의 문명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하라'의 긍정적인 철학을 강조하면, 진취적이고 낙관적이며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성격을 길러, 작은 일에서 큰 일에 이르기까지 자진하여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 두 철학의 결과로서 지나간 수세기 동안 동양 사람들은 산 속 깊은 곳에 사원을 짓고 그 속에서 참선하며 도를 닦았다. 혹은 서당에 도사리고 앉아서 공자, 맹자를 가죽 책장이 뚫어지도록 읽고 있는 동안에 서구사람들은 지하자원을 캐내고 비행기와 로케트를 만들어 우주를 정복하게 하는 등 오늘과 같은 놀라운 문명을 건설해 놓았다. 그러면 서구 사람들이 이룩한 현대문명의 정신적 배경이 된 하나의 긍정적인 생활철학은 어디서 온 것인가? 이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기독교의 산물이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이다.

서구 사람들은 중앙 아세아 한 가운데 계시 된 생명의 종교를 먼저 받아들여 그들의 삶의 표준을 삼았다. 서양격언에 "바울을 싣고 온 배는 인류의 문명을 싣고 왔다."는 말이 있다. 이 격언은 조그마한 유대 나라에서 시작한 생명의 기독교를 헬라와 로마 같은 그 당시의 문명 세계에 이식하였다는 뜻이다.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는 이 천년 전에 십자가에 죽어버린 예수가 아니라 죽은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오늘까지의 인간 역사를 움직이시는 산 그리스도다. 인간의 죽은 교훈을 기초로 한 소극적인 '하지 말라'의 철학과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인격을 토대로 하여 이룩된 적극적인 '하라'의 철학은 오늘과 같은 색다른 문명을 이루어 놓았다. 이렇게 된 원인은 결코 서양 사람이 동양 사람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라 그들은 생명의 종교를 먼저 받아들여 보다 긍정적인 생활철학의 표준을 삼았다는 데 있다. 우리의 잘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근대화의 정신적인 힘은 어디서 구할 것인가? 이제라도 과거의 동양적인 '하지 말라'의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과감하게 시정하고,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대로 하나님과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적극적인 생활철학을 갖는 데 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국민은 먼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영접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