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설교의 유형변화

(282-285)

 

영국의 유명한 P. E. Sanster가 쓴 '강단에서 하는 연설'(Preach in Pulpit)이란 책에 보면, 어떤 목사와 유명한 배우가 주고받은 다음과 같은 한 토막의 이야기가 있다. 목사가 배우에게 "위대한 진리를 항상 말하는 나 목사는 한 주일에 겨우 한번 사람들의 교회당에 채우는데, 당신은 어떻게 사람이 만들어 낸 소설을 말하면서도 매일 저녁 극장을 채웁니까?" 이런 목사의 물음에 배우는 "그것은 당신은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면서도 그 진리를 마치 소설처럼 말하고, 나는 소설을 말하지만 마치 진리인 양 말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이런 대답에 우리는 전적으로 찬성할 수는 없으나, 강단에서 설교를 통해 선포되는 진리가 소설처럼 전달되서는 안 되겠다는 교훈을 받는다. 우리는 오늘의 '교회가 병들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 병든 원인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교인들의 영적인 영양이 고루 그리고 바르게 계속적으로 공급되어 있지 못하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근년에 와서 신도들이 기성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사이비한 신앙운동에 큰 매력과 흥미를 가지고 자신이 오랜 동안 소속되어 있던 교회를 버리고 그러한 운동에 가담하는 경향이 많은 것을 본다. 그 이유를 간단하게 말할 성질은 못 되나, 대체적으로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첫째로 기성교회의 강단이 그들의 구미에 맞는 양식을 공급하지 못함이고, 둘째로는 설교의 형태가 여러 모양으로 변해서 진리를 이해하는 데 혼돈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고로 근년의 변화된 설교의 유형을 추려보는 것은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해방 후의 한국 강단의 설교를 다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첫째 유형은 전통적인 유형이다. 이런 형의 설교는 아직도 우리 나라 교회 강단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것은 전형적이며 고정적인 내용을 자기고 있다. 이런 형의 설교는 매우 단순하고 율법적이며 통속적이다. 그것은 예수를 믿고 구원 얻어 천당 가는 길을 내용으로 한다. 이런 간단한 표현 속에는 신앙의 골자가 들어 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분석해도 "주 예수를 믿으라"는 기독론과 "죄사함을 얻어 새 사람이 되는" 구원론과 "천당에 간다"는 종말론의 주제가 모두 내포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을 만큼 교리적인 신념이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타율적인 신분의 변경이며, 이 세상과는 유리된 타계적인 지대에서 특권의 자리가 보장되어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또 종말의 개념도 미래적이고 장소적인 것에 지나치게 치우치고 있다. 이런 유형의 설교는 타율사상 또는 지나친 타계사상 때문에 크리스천들의 현실적인 고민이나 갈등 같은 것은 문제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깊이 생각할 것은 세속의 도가니에서 정신적인 폐허에서 한숨짓고 몸부림치는 현대인에게 지나치게 단순한 메시지의 고답적인 반복보다는 갈등과 고민의 낮은 차원에서 출발하여 고차원의 세계에로 이끄는 과정이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되어진다.

두 번째로 들 수 있는 설교의 유형은 사회 윤리면에서 특별한 강조점을 둔 진보적인 스타일의 설교다. 이것은 해방과 함께 강조되기 시작한 설교의 형태다. 지나친 종래의 개인구원을 강조한 영적 일변도의 메시지에 염증을 느끼고 이에 대항하여 신체적, 경제적, 모든 면을 포함한 전인적인 구원, 즉 인간생활의 모든 면을 구원하는 데 복음의 참 의미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설교는 현대 지성이 용납할 수 없는 종래의 형이상학적, 초월적, 관념적 타계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그 대신 기독교의 윤리적인 요소인 사랑, 봉사, 희생 등의 기독교의 윤리적인 미덕을 크게 클로즈업시켜 빛과 소금의 책임을 다하려는 데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바람직한 인간의 삶을 구현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나, 기독교가 본래 지니고 있는 보다 귀중한 근본적인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 즉 인간의 진실된 회개와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이라고 하는 입체적인 사상이 소외되어 있다.

세 번째로 근년에 와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색다른 설교의 유형은 소위 열광적인 신비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설교다. 이런 설교는 방언, 병고 치는 것, 묵시 받는 것 등을 강조하는 설교다. 이런 설교의 특색은 부정(否定)에 있다. 상식과 합리성을 부정하는 것 그 자체가 올바른 신앙적 태도라고 믿고 있다. 이런 설교는 전통적인 메시지와 사회 윤리를 강조하는 설교를 모두 부정한다. 이런 형의 설교는 변천하는 상황에도 외면하고, 따라서 교회의 기성질서도 부정한다. 그 대신 자기 나름대로의 새로운 타계적인 질서를 확립하는 데 지나치게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런데 이런 설교는 가장 영적이며 신비적인 것을 표면에 내세우지만, 실제적으로 그 메시지의 내용에 있어서는 가장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을 강조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 이런 설교는 솔직히 말해서 설교자 자신의 책임과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초조감과 자기 공허에서 만들어진 산울림에 불과하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해방 후의 몇 가지 설교의 유형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시대적으로 명백하게 구분하기는 곤란하며 또한 어느 유형의 설교만이 절대적으로 바람직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이런 여러 형태의 설교는 각각 장단점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이런 유형의 설교들이 동시에 한국교회의 강단을 점령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문제는 어떤 유형의 설교를 하든, 그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인간들의 가슴속에 바르게 전달되면 된다. 그리스도가 군중을 향해 입을 열었을 때는 무슨 딱딱한 고담이나 요사이 부흥집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중의 인기를 노리는 우스게 소리나 자기 자랑을 일삼는 재담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전하는 말씀 속에는 권위가 있어 민중의 가슴속을 파고드는 힘이 있었다. 고로 산 설교는 적어도 두 개의 초점을 가져야 한다. 하나는 영원한 말씀이요, 또 하나는 변천하는 현실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인 것 같이 설교는 어떤 유형의 것이건 하나님과 인간, 영원한 시간은 만나게 하는 중보의 역할을 그 사명으로 살고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