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기도의 기본 정신

(286-292)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개별적인 영적 생활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이며, 또한 그리스도교 교회생활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에게 접근하는 길인 동시에 하나님이 인간을 접근해 오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도는 신앙이라는 문제와 같이 생각할 때에 바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신앙은 그 내면적인 필연성에서 그 자체를 기도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신앙은 기도에 그대로 반영된다. 신앙은 언제나 투쟁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와 같이 기도도 투쟁적이어야 한다. 투쟁적인 신앙은 하나님에게 무엇을 구하여 얻으려는 기도에서 스스로 표현한다. 그러면 투쟁적인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한 마디로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인간 세계에 실현하는 데 있다. 기도가 무엇을 간구하든, 그 궁극적인 목표는 이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

고로 기도는 언제나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고 부르짖는 고백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반대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무제한의 지배를 탄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말은 현실적인 일에 체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정복한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에 변화를 일으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구하는 데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모든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경륜을 실현시키겠다는 갈망 또는 아무런 장해도 받지 않으면서 이를 실현시켜 보자는 갈망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원칙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그리고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 달라는 탄원이며, 이 뜻이 우리를 전적으로 굴복시키게 해달라는 간구이다. 고로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변화를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우리의 환경 안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문을 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기도는 언제나 전투적인 성격을 지닌다. 하나님의 뜻에 적의를 품는 세력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싸움을 전개하는 것이 기도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주권적인 권능을 불러내는 것이 기도다. 고로 이런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다는 한 가지 목적에 집중한다.

이런 기도는 두 가지 배경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언제나 이 세상에는 악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있다는 사실,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의 주권이 악과의 관계에서도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로 기도는 수동적인 체념으로 화해버릴 수 없다는 것과 또는 인간의 자주 변하는 갈망과 요구에서 인간이 주가 되고 하나님이 종이 된다는 자아 중심적인 방향으로 하는 해석을 버려야 한다. 기도는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고로 기도하는 사람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와 너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이는 것이다." 즉 자신의 전 생애와 욕구를 살아 계신 아버지의 손에 맡기는 것이다.(빌 4:6) 이와 같이 모든 것을 주의 뜻에 일임하는 것이 기도다. 우리가 기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둘째로 기도는 인간만이 하나님을 향해 활동하는 처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시는 처사이기도 하다. 고로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전딜이다. 기도는 단순히 인간이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대답하시는 일이다. 루터는 기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특징있는 표현을 하였다. 기도는 하나의 대화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말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가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한결 더 귀중하다. 신앙의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대답하시는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기도의 근본 정신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관계로 그릇된 기도를 드릴 때가 많다. 첫째로 그릇된 기도는 하나님을 자신의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드리는 기도다. 이런 기도는 어떻게 하면 최선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개인적인 편의를 위해서 이용할 수 있을까 하는 이기주의다. 이런 기도의 전형적인 실례를 든다면, 마태복음 20장에서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를 들 수 있다.

어떤 날 그들은 어머니와 함께 예수님을 찾아가서 자기들이 구상하고 있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장차 수립될 지상 왕국의 최고의 영예인 높은 지위를 구했다. 이런 요구를 알아챈 다른 제자들은 격분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이런 청원을 받아들일릴수 없다고 냉담하게 거절하셨다. 오늘 신자들의 대부분이 드리는 기도는 십중팔구가 이와 같이 자기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드린다. 내가 환란에 빠졌을 때, 혹은 자신의 성공과 안일을 위해서 기도한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에게 축복을 강요하기도 하고 명령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기도의 응답이 없을 때에는 영원히 하나님의 존재마저 부정하고 기도와는 관계를 끊어버리는 사람도 있다. 고로 아고보는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약 4:3) 라고 말했다.

둘째로 그릇된 기도는 외식하는 기도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 외식하는 자들처럼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에서나 큰 길 모퉁이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것을 이미 다 받았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그들은 많이 해야 들으실 줄 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마 6:5-9)고 가르치셨다. 기도는 종교생활에 있어서 나의 신앙을 고백하는 유일한 요소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유일한 길이다. 마치 호흡이 끊어지면 생명이 죽는 것과 같이 기도가 끊어지면 영적 교제가 단절되고 마는 것이다. 고로 바울은 "항상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했다. 그런데 이렇게 종교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기도는 오늘날 천박한 신자들에 의하여 일종의 기술이 되어버렸고, 하나의 연설이나 광고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도란 신비주의자들이 자기도취와 흥분에서 드리는 종교적 감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스스로를 의롭다 하고 남을 멸시하는 율법적인 우월감에서 드리는 것도 아니다(눅 18). 이것은 기도가 아니고 자기 자랑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비밀회담이며, 가장 엄숙한 교제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듯이 신자는 자기의 모든 소원을 솔직하게 고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빌면 된다. 이런 기도에는 기술도, 연습도, 수식도 필요 없다. 다만 심정 그대로의 고백이면 족하다.  

그러면 참 기도의 정신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표현해서, 참 기도의 근본 정신은 하나님의 뜻이 이 세계에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은 평야에 물이 흐르듯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위 사이를 흐르는 계곡의 물과 같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가장 크게 방해하는 것은 인간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은 언제나 대립한다. 그때마다 인간은 자기의 뜻을 꺾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자의에 복종시켜 충돌을 원만히 해결하려고 한다. 이것이 인간의 해결법이다.

그러나 기도의 깊은 정신은 하나님의 뜻의 구현이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지 못할 때도 많다. 우리의 기도가 아무리 간절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경우에 그 기도는 응답을 받을 수 없다. 성서에 보면, 예수님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이루어 주겠다"(요 13:14-14)고 약속 하셨고, 또 사도 야고보에 의하면 엘리아가 간절히 기도함으로 삼년 육개월 동안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아니하였고, 또 기도함으로 비가 내려 땅에 소산을 윤택케 하였다고 한다(약 5:). 그러나 구약과 신약에 보면, 엘리아보다 신앙이 더 강한 모세나 사도 바울이나 심지어는 예수님 자신의 최후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한 예가 있다.

그러므로 무엇이나 다 이루어주신다고 하셨지만, 무엇이든지 내가 원하는 대로 다 응답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도의 정신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뜻에 맞지 않는 기도는 아무리 그 목적이 좋아도 응답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먼저 응답 받지 못한 모세의 기도를 생각해 보자, 모세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필생의 소원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자기 발로 약속의 땅을 밟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을 목표로 삼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나와 40년 동안 광야를 지나면서 지기 어려운 짐을 지고 견디기 어려운 환난을 견디어 냈던 것이다. 그는 나이가 백이십 세나 되어 이 세상에서 소망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수세나 되어 이 세상에서 소망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수고와 슬픔의 한 평생을 보낸 마지막에 가서 그에게는 유일한 소원도 아니었다. 그는 40년 간이라는 긴 수고에 대한 대가라고는 받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다만 죽기 전에 자기 발로 요단강을 건너서 자기 눈으로 가나안 땅을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의 평생 소원은 오직 이것 뿐이었다. 늙은 충복의 기도를 하나님께 차마 물리치실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모세는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간절히 애원하였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무슨 신이 능히 주의 행하신 일 곧 주의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 할 수 있으리이까? 구하옵나니 건너가게 하사 요단강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신 3:24-25). 얼마나 겸손하고 사심 없는 기도인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아버지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을 텐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가 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의 이 기도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대답하셨는가? 여호와는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그만해도 족하다. 이 일을 가지고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너는 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리라"(신 3:26-27). 얼마나 무정한 대답인가? 모세의 필생의 기원은 여기서 단호히 거절당하고 말았다. 모세는 하나님께 대하여 매우 충직했는데 반하여 하나님은 매우 냉혹하고 무자비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구약의 충복 모세의 기도를 물리치셨다.

그는 또한 신약의 충복인 바울의 기도도 물리치셨다. 바울에게도 모세와 같이 하나의 간절한 소원이 있었다. 그는 자기 몸에 찌르는 가시 같은 병이 제거되기를 빌었다. 이 기도는 단지 자기 육체의 고통을 없애달라는 소원만은 아니었다. 그가 전도하는 데 큰 장애가 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기의 건강 때문만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쓰라린 가시가 자기 몸에서 어서 물러가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던 것이다. "이것이 내 몸에서 어서 물러가게 해 주십사고 주께 세 번이나 애원하셨다"(고후 12:8).그러나 주님은 이 충성스런 종의 기도를 끝내 응답해 주시지 않았음은 무슨 까닭일까? 이것 또한 모세의 간구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처럼 간단하고도 무정한 것이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권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진다."(고후 15:9)는 것이었다. 너의 몸의 쓰라린 가시는 제거될 필요가 없다. 내 은혜는 이를 메우고도 남음이 있다는 말씀이다. 바울이 이 간절한 기원도 모세의 그것처럼 역시 응답을 받지 못하고 말았다. 신약과 구약의 신앙의 대표자가 아무리 신앙이 두터웠어도 그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무슨 이유일까? 하나님의 뜻은 그들의 애원과 달랐기 때문이다.

비단 모세나 바울 뿐이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조차도 그의 최후의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셔서 "할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옵소서"(막 14:35-36)하고 세번이나 애원을 하셨다. 그처럼 땀이 피방울 같이 되어 땅에 떨어지도록 간절했던 예수님의 기도조차도 하나님은 들어주시지 아니 하셨다. 그래서 예수는 그의 원수들의 손에 넘겨져서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고만 것이다. 왜 그랬을까? 결국 인류를 위해 십자가의 쓴잔을 마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기도할 때, 나의 뜻과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 그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룩하기 위함이 기도의 참 뜻이요, 근본정신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로 기도의 세계는 당신과 나와의 숨이 막히는 듯한 긴장한 세계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단순히 신을 명상하는 것도 아니요, 종교적인 심정으로 하나님 안에 잠기는 것도 아니다. 기도는 영원의 실행이며, 감정보다 먼저 의지의 문제이다. 고로 기도는 하나님과 나의 영과의 영원한 씨름이다. 즉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싸우는 것이 기도다. 앞서간 많은 성도들의 기도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은 나라가 어지러워질 때, 국가의 운명을 걸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씨름하였으며, 개인의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에도 그 문제의 해답을 얻을 때까지 씨름한 것이다. 신앙생활은 기도하는 생활이다. 기도 없는 생활은 아무리 입으로는 신을 찾으나 실제로는 무신론자의 생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