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무신론적 도전에 대한 교회의 대답

(293-298)

 

서론

교회는 언제나 두 면을 가지고 있다. 한 면은 이 세상과 분리되어 있으니 피안적이고 종말론적인 것이며, 또 한 면은 세상 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즉 교회는 세상의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위하여, 세상 속에, 세상과 더불어 있는 기관이다. 그런데 교회는 지난 이 천년 동안 각 시대를 따라 부단히 불신 세계로부터 도전을 받으면서 성장해왔다. 오늘의 교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무신론자들의 도전을 받고 있다. 오늘날 인류는 신(神)에 대하여 세 가지 태도를 표시하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은 없다는 무신론자, 하나님은 죽었다는 사신론(死神論)이며, 둘째는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는 불가사의론과 셋째는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신다는 유신론이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는 불가지론자도 실상은 무신론자다. 그런데 요사이 '신은 있었으나 죽었다' 외치는 십 여명의 소장 신학자들이 구라파와 미국을 위시하여 전 세계에 파문을 던지도 있다. 니체가 처음으로 '신의 죽음'을 선언했을 때는 부친의 신앙에 반항하는 변태자의 발광이라는 정도로 간주되었고, 막스의 무신론은 과격주의자의 폭언으로 도외시되어 왔다. 현대 꽁트, 까뮈,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철학 사상도 철학자의 한 편성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신학자들 중에서도 금일까지 믿어오던 전통적인 신, 즉 창조주, 초월자로서의 신이 역사 안에서 죽었다고 하는 이가 있다.

이 죽음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며 일시적이 아니라 재생할 수 없는 최종적인 사건이며 동시에 기독교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내용의 신 죽음을 선언하고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뺀, 인간 예수의 교훈에만 의지하여 기독교를 새롭게 재조직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에 전통적인 기독교는 어떤 분명한 대답을 해야 할 시기에 놓이게 되었다.

 

본론

첫째로 우리는 어떻게 신의 생존을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된다. 철학적 연구로도, 자연의 관찰로도, 역사나 문학으로도 신의 존재를 만족하게 입증할 수는 없다. 오직 한 가지 길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기독론적인 입장에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만이 신을 아는 유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친히 나를 본 자는 신으로 보았다고 선언하셨다. 킬케고올은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이어서,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그 사이에는 깊은 단절이 있어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으며, 인간 인성으로 포착할 수 없는 신이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신에게로 가는 길은 없고, 신으로부터 인간에게 오는 길이 있을 뿐인데 이 길을 계시라고 하였다.

신이며 인간이신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인간은 신을 인식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도마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신에게로 갈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아는 길은 무엇인가?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다. 요한 5:39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로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은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다."고 하셨다. 성경을 모르고 그리스도를 아는 길은 없다. 로마 카톨릭교는 성경보다 교회를 우위에 두었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성경만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유일한 신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그리스도와 성경의 관계를 "성경은 그리스도가 누워 있는 구유"라고 말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신의 말씀임으로 궁극적인 권위를 성경에 부여하는 것이다. 만일 이런 권위도 인정할 수 없다고 할 때는 인생의 최고의 목적으로서의 신을 아는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는 신의 아들이오, 우리의 구주라고 고백하는 길이다. 독일의 모든 기관이 히틀러에게 굴복할 때에 유명한 신학자 본회퍼와 말틴 니묄러 박사 일행은 '살아 계신 신의 권능을 이길 자가 누구냐?'라는 니묄러 목사의 최후 설교와 함께 교회에서 감옥까지 행렬을 지어 갔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이 광경을 목도한 아인슈타인 박사는 고백했다. "나도 그 전에 교회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이 지났다. 그러나 나는 지금 교회에 대하여 큰 애정과 칭찬을 드리게 되었다. 이는 교회만이 진리와 도덕적 사유를 위하여 거인 같이 설 수 있는 용기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전에 경멸히 여기던 교회를 지금은 무제한으로 찬양하게 되었다."

둘째로 교회는 무신론적 도전에 대한 대답으로서 '복음을 생활화'해야 한다. 교회는 2천년 역사를 걸어오는 동안에 두 가지 극점 사이를 왕래하였다. 하나는 '숲 속의 종교(폐쇄종교)요 또 하나는 거리의 종교(개방종교)'였다. 초대 교회는 거리의 종교로서 복음을 인간 생활 속 깊이 파고들었다. 즉 개인의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그들의 인격을 변화시키고 생활을 변화시켜 사회요소 요소에서 보이지 않는 형태로 활동하였다. 그것이 마침내 콘스탄틴 황제를 살아 계신 신 앞에 굴복케 하였다. 중세 교회에서는 이런 거리의 종교를 '수도원의 숲 속으로' 끌어 들여 그것을 몇몇 직업적인 종교적인 손에 넘겨버렸다.

기독교는 약 천년 동안 수도원 속에서 포로의 생활을 하였다. 종교개혁은 기독교를 해방시켰다. 그러나 다시 형이상학적, 추상적 신학 논쟁자들의 숲 속의 포로가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를 평민화하고 생활화하기 위한 운동이 일어났으나 실패했고, 다시 신정통주의 신학이 등장했다. 오늘날 신은 죽었다고 외치는 운동도 어떤 의미에서는 이 '숲 속에 종교로서의 전통적인 기독교'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이런 도전에 대한 대답으로서 복음을 생활화하여야 한다.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신언(神言)이 거리에 직결되어서 개개인을 새롭게 하고 가정, 거리, 기관 사회 및 국가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신의 주권이 교회 안에서만 맴돌지 말고 인간 역사의 마디마디에 직결되고 사회의 구석구석에 전달될 때, 세속화니, 신의 죽음이니 하는 망언은 옛 이야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