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오늘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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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성서는 그리스도를 예언자요, 제사장이요 왕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능을 표시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이 그리스도께서 처음에는 예언자요 다음에는 제사장이요 다음에는 왕이란 말은 아니다. 이 말은 세 가지 칭호와 그리스도의 전도, 십자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 사이의 대응관계를 의미한다. 이 삼직은 구별할 수는 있으나 분리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는 제사장이면서 예언자요, 예언자이면서 동시에 왕이다. 그리스도는 이 세 가지 직능 전부를 가지시고 활동하신다. 예언자이신 그리스도는 귄위로서 가르치며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셨다.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희생으로 드려 하나님의 사죄를 선언하며 죽음을 극복하셨다. 그리고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인간의 무력을 승리로 전환시켜 주신다. 그런데 이 삼직의 활동을 분리시켜서 어느 하나에 편중하는 경우, 즉 예언자의 활동에만 편중하면 필연적으로 도덕주의와 합리주의에 빠지고 만다. 그러면 그는 사상과 원리를 가르치는 하나의 위대한 교사가 되어 저의 과거, 현재, 미래의 활동은 우리의 시야에서 소실되고 만다. 또 제사의 기능만을 강조하면 경건주의와 신비주의에 빠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양이기는 하지만 그의 예리한 예언자적 발언이나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는 생각할 수 없다. 또 그리스도의 왕 됨에만 주의를 집중하면 유토피아주의와 묵시주의에 빠지고 만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영광의 길이 십자가의 도임을 잊어버리게 된다. 고로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분은 불가분리의 것이며 평등하게 강조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원리의 적용이 어느 시대나 반드시 동일해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때를 따라서 어느 하나가 다른 직분보다 더 강조된 일도 있는 것은 부인 못할 사실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적 전통은 그리스도의 제사직과 예언직을 더 강조해왔고 또 그 내용을 밝혔으나 그리스도의 왕직을 명백히 하지 않았다.

우주적인 그리스도는 "나의 주"요 "교회의 주"일뿐 아니라 현재 이 우주의 지배자이시며(골 1:) 천지의 모든 권세가 부여되었고 모든 세력에 대하여(마 28:18) 승리하고 그의 발 밑에 두었다(엡 1:22). 그리고 그 영광으로서 다시 오실 것이다. 이 우주적 그리스도는 사도들이 선포한 것 같이 오늘 우리 사이에 강하게 전파되지 못하였다. 고로 오늘날 우리 교회의 최대의 사명은 그리스도는 왕이시다 라고 강조하여야 하며 역사의 주되심을 입증하는 데 있다고 본다. 원시교회의 신앙고백을 연구한 쿨만 교수는 그 기본적 신앙고백으로서 "그리스도는 주다"(고전 12:13) 라는 고백에 도달하여 원시교회의 신앙의 중심은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현실지배라고 말하였다(쿨만 著由本康 譯 原始社會의 信仰告白 p. 50, 70)

그러면 그리스도를 주라고 하는 그 주성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말은 권위 또는 지상권에서 유래한 형용사이다. 즉 주는 권위를 가진 자, 지상권을 소유한 자를 의미한다. 즉 지배권의 소유자란 뜻이다. 주(kurios)는 당시 헬레니즘적 세계에 있어서 주인이라든가 소유자라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주란 말은 당시의 여러 종교에서는 주로서 예배를 받고 신도에 대하여 절대적 의미를 가진 신이었다. 이에 대하여 크리스천들은 예배의 대상은 유일신 하나님 한 분뿐이고 유일하신 그리스도뿐이라고 강조함으로써 주들에 대하여 부정을 선언하고 그리스도만이 절대적인 주되심을 고백하였다. 신약성서에 보면 여러 종류의 주들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정복됨을 포함하고 있다(엡 1:21, 골 2:15). 다른 주들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 주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크리스천들은 이런 신앙고백으로서 당시의 이교 세계와 대결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을 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은 당시 황제를 주로 예배하는 로마정권에 대한 또 하나의 도전이었다. 네로, 도미시안 시대의 황제 예배는 로마제국의 중심제도가 되었다. 마치 일정 하에 천황을 신으로 예배하도록 우리 민족에게 신사참배가 강요되었던 것같이 황제는 로마시민의 주라고 하는 시민적 고백이 강요되었다. 황제를 유일한 주로 예배하는 로마시민들에게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라고 한 초대교회의 고백은 로마황제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놀라운 부정의 선언이었다. 이런 화합할 수 없는 두 개의 고백의 대결은 드디어 큰 박해를 초래하였고 많은 순교자를 내게 되었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로마제국의 피 흘리는 탄압정책은 드디어 실패하고 323년에는 콘스탄틴 대제에 의하여 제국 영토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공인이 선포됨으로써 그리스도만이 주라는 고백은 승리하게 되었다. 고로 황제예배를 거부한 때문에 박해가 심했던 시대에 쓰여진 계시록에 그리스도가 "주의 주", "왕의 왕"(계17:14)이라고 불리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주라는 말은 이방종교가 섬기는 신에 대한 칭호였으며 로마황제에 대한 칭호인 동시에 유대교에 있어서는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칭호이기도 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치 않기 위하여 야웨라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구약성서는 이 거룩한 칭호에 대하여 주라는 뜻의 "아도나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그래서 기원 전후해서 야웨 대용으로 아도나이란 말을 썼다. 이 말은 결국 "그리스도는 주다"의 고백과 동일이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의 말과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주다'의 고백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유대교에 대한 또 하나의 도전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죽인 것은 유대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며 주다"라고 담대히 선언함은 당시 하나님을 아도나이 라고 부르는 유대인에게 대한 엄한 비판과 대립의 표현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절대성을 주장함이다. 이상과 같이 지나간 긴 역사를 통해서 많은 우상적인 세력을 이기신 주 그리스도에 대하여 현대인은 어떤 고백을 해야 하며 어제의 그리스도를 오늘의 그리스도로, 어제의 주님을 오늘의 주님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운명은 결정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의 급변하는 인간 상황 속에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이 없으신 그리스도가 오늘 나의 구주로, 교회의 주로, 세계의 주로 고백될 때에 비로소 나 개인이 살고 교회가 제 구실을 하게 될 것이며 세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무대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나의 주

그리스도를 오늘의 주라고 고백할 때 그 신앙의 내용은 무엇인가? 먼저 이 고백은 구원론적 입장에서 그리스도는 "나의 주"라는 그리스도와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고로 이 고백은 첫째로 자신의 구속의 체험이라는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 즉 예수는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출하시기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확신과 그리고 그 죽음은 바로 나를 위한 사랑에서 나온 하나님의 행위이다 라는 산 경험을 통해서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상황에서 그의 죽으심의 목적과 나 개인에게 주는 효과는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모든 악의 세력에서 구출하기 위한 것이며, 또는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승리하게 하며 나아가서는 죄로 인하여 단절된 인간을 죄책에서 구출해 내는 데 있다. 즉 우리의 적을 멸하시고 우리를 해방시켜 주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나의 절대적인 주가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그리스도를 오늘의 나의 주라고 하는 고백은 실제적인 구원의 경험에서만 할 수 있는 산 고백이고 결코 관념론이 될 수 없다.

둘째로 이 고백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영적인 생명의 교제를 통해서만 할 수 있다. 로마서 1:3~4에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섰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한 바울의 고백이나, 또는 사도행전 5:30~31에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그리스도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조로 삼으셨느니라."고 한 베드로의 고백은 죽은 자에 대한 하나의 추억이나 회상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만난 경험에서 한 고백이며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임재 앞에서 생명을 걸고 한 고백이다. 그리스도를 나의 주라고 고백함은 그리스도에게 예배하고, 그의 말씀을 조용히 들으며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을 의미한다(빌 1:20). 스테반이 순교할 때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행 7:59)" 한 것은 이 고백의 절정이다. 이와 같이 신앙의 대상이 명백하지 않으면 기독자의 실제적인 산 신앙생활은 기대할 수 없다.

인도의 마라바루 지방에는 도마 그리스도교도라고 불리 우는 사람들이 교회를 형성하고 독특한 예배의식에 의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 교회는 예수의 열두 사도 중의 한 사람인 도마에 의하여 전도를 받고 세워진 교회라고 한다. 물론 이런 전승(傳承)의 출처는 신약 외전 중 도마행전에 의한 것임으로 그 사실성(史實性)의 보장은 제한될 것이지만 이 도마행전은 흥미 깊은 한 토막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즉 예수가 죽으신 후 제자들은 세계선교의 활동을 위해서 세계를 분할하고 추첨에 의하여 각자의 선교지를 결정하였다. 그 때 도마에게 추첨에 의하여 결정된 선교지는 인도였다. 그러나 도마는 몇 가지 이유로 인도에 가는 것을 거부하였다. 첫째 이유는 자신의 건강이 예루살렘에서 인도까지 긴 여행을 견디어 낼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 이유는 히브리 사람이 어떻게 전연 낯설은 인도인 사회에 들어가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도 선교를 끝까지 사양하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어느 날 도마에게 나타나서 "도마야 너는 두려워 말고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 내가 항상 너와 같이 하리라." 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도마는 완강히 주의 말씀을 거부하면서 나를 선교사로 꼭 보내시려거든 인도 이외의 다른 곳으로 보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 때 마침 예루살렘에는 아바네스 라고 하는 인도의 상인 한 사람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인도의 왕으로부터 숙련된 목수를 구해보라는 명을 받고 예루살렘에 온 사람이다. 왕이 예루살렘에 이 사람을 보낸 이유는 왕궁건설의 새로운 계획에 의해서였다. 그런데 어떤 날 예수는 시장에 숙련된 목수 한 사람을 노예로 갖고 있는데 당신이 그 노예를 살 마음이 없느냐고 물으시면서 멀리 서 있는 도마를 가리켜 보였다.

아바네스는 그 노예를 사기로 결정하고 예수와 상인 사이에는 가격조절이 되어 결국 도마는 상인에게 팔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상인은 도마가 서 있는 곳에 가서 예수를 가리키면서 저분이 당신의 주인이요 하고 물었다. 그 때 도마는 서슴지 않고 "네, 그는 나의 주님이십니다."하고 긍정적인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 아바네스는 도마에게 "나는 당신을 당신 주인에게서 샀습니다." 하고 선언을 했더니 도마는 한마디 말도 없이 침묵 속에 순종하였다. 이것이 도마가 인도로 가게 된 전말이며 도마교회 설립의 유래라고 한다. 이 이야기의 사실성 여부는 어떻든 간에 이 이야기의 중요성은 "그리스도는 나의 주다"라는 도마의 고백이다. 아바네스가 물었을 때 반드시 그는 나의 주님이라도 대답할 아무런 논리적 이유를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게 됨은 예수의 위대한 인격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와 도마와의 인격적 관계에서 생긴 산 경험의 신앙고백은 그가 원하지 않은 인도로 가게 한 하나의 힘이었을 것이다. 도마가 단순히 예수의 제자로 머물고 주라고 고백하지 못할 때는 불건전 무능력이란 자기판단을 절대화하므로 잠재 능력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되고 주 안에서 생활을 하게 될 때 도마는 상상도 못한 자기 가능성이 꽃피게 되었다. 예수를 나의 주로 영접해 드리는 순간 숨은 자기를 발견하게 됐다. 손에 못 자국을 만져 보고 자기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자기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하던 도마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영적 체험을 하는 순간 "나의 주여 나의 하나님이여" 하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를 나의 주로 고백하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현재 내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살아 움직일 때만 가능하다. 우리에게 이런 철저한 신앙체험이 없는 한, 결코 예수는 나의 주가 될 수 없고 나는 그의 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오늘 사회복지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데서 나와 그리스도와의 직접적이며 수직적인 신앙체험을 소홀히 여기는 경향을 우리는 늘 경계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

위에서 오늘이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와 개인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다 설명하기가 부족하다. 그리스도는 나의 주일뿐 아니라 교회의 주이시다. 그리스도만이 유일하신 주이시고 그 이와 어떤 세력도 교회의 주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의 절대적인 주장이다. 만일 그리스도 이외의 그 무엇이던 교회의 주가 될 때 교회는 그 본질을 잃게 된다. 그러면 먼저 교회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요약해서 교회는 그리스도만을 머리로 모시는 그의 몸이며 그 몸에 붙은 많은 거듭난 지체들이 한데 모여 성도의 교제를 하는 공동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머리요, 교회는 그 몸이요, 신자는 그 몸의 지체이다. 그래서 머리와 몸과 지체가 삼위일체가 될 때 교회는 성립되는 것이다. 고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유형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이 바로 교회이다. 그러므로 머리와 몸 사이에는 상하전후의 전도(顚倒)가 없이 질서 정연하다. 머리가 먼저요 몸은 따른다. 머리는 말하고 몸은 듣는다. 머리는 명하고 몸은 봉사한다. 머리는 위에 있고 몸은 아래에 있다. 이렇게 상하 전후 주종의 관계가 분명하다는 데서 교회는 건설된다. 그러나 몸은 여러 지체가 모인 공동체이다. 이 지체는 개인이다. 이 가정, 저 가정, 저 직장, 이 직장에 속하여 그 곳에서 일하는 개인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기만의 문제를 가지고 반복할 수 없는 단 한번의 삶의 상황을 경험하고 있는 개인이다. 그러나 이런 개인들이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 이 구석 저 구석에서 호출을 당하여 모여든 사람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부름을 받을 때는 개인으로 받았으나 부름을 받고 본즉 벌써 개인이 아니요, 다수가 동일한 부름에 의하여 모여졌고, 동일한 방향에 섰고 동일한 사건에(구원의 사건) 대하여 같은 인식을 하고 같은 고백을 하며 찬미하여 감사하는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가 됐다. 그것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그리스도만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둘 이상 모일 때 바로 그 장소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다. 고로 이 교회는 세상의 다른 많은 공동체와는 달리 거룩한 공회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곳이다. 여기 거룩하다는 말은 결코 하나님과 같은 거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별한 단체, 구별한 공회이기 때문에 모이는 사람들이 비록 세상에서는 볼 것 없는 가난하고 어리석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성별한 교회 안에서 되어지는 교제는 거룩한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이 만남에서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과의 인격적인 생명의 관련에서 생겨나는 하나의 놀라운 사건이다. 고로 성도의 교제라고 한다. 전에 우리 이방인은 예수를 모르던 자요 이스라엘 국적에서도 멀고, 약속과 계약에서는 외인이요, 세상에서는 아무런 소망도 없고 하나님 없는 자였는데 이제는 부름을 받고 십자가의 피에 의하여 구속받아 하나님이 계약과 선택의 같은 반열에 서게 된(엡 2:12) 사람들이 사랑 안에서 연결하며 자기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인 교회를 자라게 하는 것이다(쳅 4:16). 고로 이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맺은 형제성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많은 죄인들이 신앙과 사랑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머리를 하는 신앙의 공동체인 이 교회의 사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만이 공동체의 주로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먼저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주요, 세상이 주로 섬기는 어떤 것도 그것이 권세이건, 금전이건, 과학이건, 인물이건 간에 교회의 머리됨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몸은 하나의 머리만을 섬겨야 한다. 고로 교회가 항상 그리스도만을 교회의 주로 고백하기 위해서는 신랑에 대한 신부와 같이 사랑과 복종을 바쳐 살아야만이 이 세상 어떤 권위에도 복종하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교회의 주로 섬길 수 있다. 우리는 과거 교회사에서 가끔 교회가 그리스도에 대한 절개를 변하여 세상의 속된 세력을 교회에 받아들여 거룩한 공회를 속된 공동체로 전락시킨 일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반면에 이 절개를 굳게 지킨 예도 많다. 그 실례로서 1940년 '바르멘 선언'은 독일 고백교회의 중대한 성명이다. 이 바르멘 선언은 "교회는 주 예수만을 선교한다."와 "성서에 나타나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며 그 말씀에 우리는 생사를 걸고 신뢰하며 복종해야 한다."고 했다. 즉 그리스도교회는 한 영역에서는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또 다른 주에게 복종하는 식으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이다. 고로 바르멘 선언은 그리스도의 절대적 주권을 명백히 엄명한 것이다. 1940년 히틀러가 독일 국민의 전 생활분야를 나치화하려는 기도에서 검거의 선풍을 일으켰다. 먼저 가장 유일한 단체인 노동자연맹, 사상계, 대학사회 등에 손을 댔다. 그러나 그들은 맥없이 히틀러 정권 앞에 항복하고 말았다. 나치스의 마수가 교회를 건드렸을 때 독일교회는 어용(御用)교회와 고백(告白)교회로 분열되었다. 이 때 '니묄러' 목사와 '본훼퍼' 등 몇몇 지도자들이 인도하는 고백교회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이길 자가 누구냐?"고 외치면서 히틀러 정권에 항거하고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하게 내세웠다. 그 때 이 사실을 친히 목격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미국의 주간잡지 타임지에 이 목격담을 다음과 같이 실었다. "나는 먼저 대학사회에 기대를 걸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누구보다도 자유를 사랑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히틀러의 탄압 앞에 묵묵히 항복하는 글을 바쳤다. 다음으로 나는 언론계에 기대를 걸어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실패였다. 그런데 내가 전연 생각도 해 본적이 없고 내가 항상 멸시해온 고백교회만이 자신 있게 히틀러의 불의에 항거하고 감옥을 향하여 열을 지어 섰다. 나는 이젠 전에 멸시하던 교회에 대하여 최대의 경의와 존경을 표시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실로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현실에 증명하기 위함이다. 고로 우리는 세상 불의에 대하여 방관할 수 없다. 만일 교회가 세상의 불의한 세력에 항거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킬 때, 결국 교회는 그 불의의 세력을 받아들여 교회의 주로 모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래서 라인홀드 니버교수는 현대교회의 무능함을 지적하면서 "현대교회는 제단에서 십자가를 내리고 그 대신 '나쁜 것은 보지 말라, 듣지 말라, 하지 말라'의 세 원숭이 새끼를 그 자리에 놓은 거나 같다."고 비난하였다 예수를 주로 모시는 오늘의 교회가 경건주의적 현실포기는 악한 현실에 대한 긍정을 의미한다.

오늘의 사회문제에 대한 비참여는 곧 사회악에 대한 공범을 의미한다. 우리가 현실을 악한 것으로 규정한다면, 그리스도의 주권을 가지고 그것을 시정해보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現存 No. 2.p.1). 왜냐하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주권을 선포할 때, 그 대상은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주권이 교회 속에서만 맴돌다 없어지지 말고 인간 역사의 전선으로 퍼져 인간사회의 구석구석에 직결되어야 한다. 교회는 이 세계 지배의 중심점이다. 고로 예수는 교회를 통해서 만물을 지배하시며 역사를 섭리하신다. 교회는 예수의 주권을 복종할 뿐 아니라 그 주권에 참여하여 세계를 개조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가 여전히 개인주의 혹은 계급주의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고로 현대교회는 과거에 분열하고 상극의 모든 교파간에 관영과 인내와 사랑을 강조하여 도덕적 원리와 정치적 배려에서 일치를 바랐으나 현실적 통일은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 운동은 과거와는 달리 교파를 불문하고 동일한 세계의 위기에 직면하여 세계와의 죄의 연대성을 고백하면서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고, 교회를 통하여 세계에 산 질서를 건설하여 교회의 유일무이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서 사분오열의 모든 교회를 하나의 거룩한 공회로 불러내는 노력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의 세계의 주

그리스도는 나의 주요 교회의 주인 동시에 세계의 주되심을 신약성서는 강조하였다. 신약성서 기자들이 세계에 대하여 진술함은 교회에 대하여 진술함과 일치한다. 마태는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백성의 왕 되심을 실증하려 하였고 동시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위임한 사람을 구하려 왔고 또 그리스도는 자기 양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 선한 목자이며 이 세상 죄를 제거하는 양이며 이 세계의 구주이며 신자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동시에 이 세상의 죄도 용서하신다고 강조하였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8절과 19절에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는 이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일이라고 말했다. 교회와 세계가 그리스도를 주로 의존함에 있어서 상호관계가 있음을 명백히 한 성구는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여기 보면,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일 뿐 아니라 또한 세계 전체의 머리이시다. 교회와 세계는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리스도를 통해서 존재한다. 그리고 교회와 세계는 같이 그리스도안에서 밀접하게 결합되어있다. 엡 1:22-23에 보면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에 세웠다"고 하였고 골로새 1:18에는 "그리스도는 그의 몸인 교회의 머리요, 그리스도는 만물의 으뜸이 되신다."고 하였다. 앞에서 설명한 말들은 세계 전체에 대한 장(長)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교회와 세계의 상호관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도구인 교회는 그 활동범위가 전 세계를 포함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개인 영혼의 운동, 즉 하나님의 백성의 운명만을 취급하지 않으시고 전 우주와 인류라는 각도에서 생각하고 계획하신다. 고로 그리스도는 믿는 자에게만 결정적 사실이 아니라 모든 역사의 중심이다. 기독교는 역사의 변두리에 그 위치를 두지 않고 역사의 한가운데 둔다. 그리스도는 세계 전체의 상태를 변화시킨다. 고로 세계가 위기에 처할 때 교회는 이에 대하여 특별한 책임을 갖는다. 교회는 자신이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 세계에 봉사하는 것이 목적이다. 고로 '쿨만' 교수는 교회와 세계의 관계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두 개의 동심원(同心圓)으로 표현했다. 교회가 내원(內圓)이라면 세계는 외원(外圓)이다. "내원인 교회는 외원인 세계를 보냄을 받는 것이다." 이 두 원은 그리스도를 같이 주로 모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는 기독자가 멀리 해야 할 악마의 나라이다. 잠깐 있다가 없어질 세상이다. 그러면 이런 세계에 대한 긍정적인 면과 동시에 부정적인 면의 조화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우리는 세계를 두 개의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다. 하나는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다. 또 하나는 세계가 하나님의 보내신 구세주 예수를 배척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적의를 표시한 일류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고로 성서는 이 우주를 하나님의 구원의 의중에 개입된 실재 전부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역사의 분기점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함께 생겼다. 그리스도는 이 세계에 오셔서 세계를 향하여 "나는 내 나라에 왔다."(요 1:11)고 하셨다. 그러나 이 세계는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이 때 역사의 분기점은 생긴 것이다. 낡은 세계는 새 세계에 대하여 반항하기 시작하였다. 낡은 세계의 반항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심판이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 대신에 그리스도를 세계의 주로 하는 새로운 세계를 개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세계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시작이다. 여기서 중첩된 두 개의 시대, 즉 없어질 금세와 안 보이는 영원한 세계인 내세는 성령을 통하여 지금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낡은 세계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다. 교회는 주로 교회의 내부만이 아니라 외부도 이미 지배하고 있다. 낡은 세계가 하나님에 대하여 반항함에도 불구하고 또 스스로 심판을 초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이 세상을 사랑하고 계심을 교회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왕의 왕이시며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겐 충성을 맹세하도록 결단을 촉구해야 한다. 교회는 이와 같이 참된 세계의 주요 왕이신 그리스도에게 대한 메시지를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 그리고 전 인류에게 선포해야 한다. 엡 3:9의 말씀대로 "하나님 안에 숨어 있는 심오한 뜻", 즉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표현되었다는 사실을 교회는 세계 모든 세력들에게 선포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주되심을 개인에게 설교할 때는 교회는 개인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이 사회가 알도록 요구할 때는 사회는 악마적 세력에 의한 자기 파괴에서 구출되어 정의와 평화 속에 살 수 있는 약속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계와는 관계에서 추호도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세계는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사나, 교회는 참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계가 알지 않으면 안될 하나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이 세계의 참된 주가 되신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이것을 거부할 권리는 없다. 이런 중대한 사명을 가진 교회인고로 세상이 우리의 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세상이 우리를 욕하고 비난하고 핍박해도 우리는 세계가 이미 주되신 그리스도에게 정복되었다는 기정 사실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공격에 공격으로 보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세상을 위해 대신 기도해야 할 제사장의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루터'는 그의 전통적인 설교에서 하나님의 세계통치를 두 개의 형태로 설명하였다. 하나는 우편의 왕국이고 또 하나는 좌편의 왕국이다. 우편의 왕국은 그리스도께서 그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지배하시는 영역이며 좌편의 왕국은 세상의 권력으로 통치하는 영역이며 그 목적은 은혜의 행위가 아니고 정의의 보존이다. 전자는 영적이며 교회적인 영역이고 후자는 사회질서의 영역이다.

즉 하나는 복음적 영역이고 또 하나는 율법적 영역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좌편 왕국은 타락한 세계가 무질서와 멸망에 방치되지 않기 위하여 주어진 저지의 수단이며, 우편 왕국은 사죄와 구원의 질서이다. 그런데 이 두 질서, 즉 그리스도의 복음과 정치적 영역, 교회와 세계의 관계가 그리스도론적 질서에서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질서에 들어가게 된다고 강조하셨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편의 왕국인 교회의 주인 동시에 좌편의 왕국인 이 세계의 주가 되신다는 말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교훈은 넓은 의미에서 교회와 이 세계의 화해를 의미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는 세계 전체의 화해이다. 지난번 미국 연합장로교회에서 통과시킨 67년도 신앙고백서의 특징은 교회 밖의 세계로 시야를 돌린 점이다. 교회가 단순히 개종자의 어장으로서가 아니라, 교회가 세계와 공존하며 화해의 노력을 책임진 파트너임을 인식시킨 점이라 하겠다. 오늘의 세계는 오늘의 그리스도에 의하여 화해의 작업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그리스도는 동쪽 세계만의 주가 아니며, 서쪽 세계만의 주도 아니다. 동서가 화목하는 세계의 주시며 카톨릭만의 주도 프로테스탄트만의 주도 아니고 전체 교회의 주되심을 알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이 모든 이방 세계까지도 그리스도의 영적인 주권 밑에 들어와 복종할 날이 올 것을 믿어야 한다. 이런 뜻에서 그리스도는 나의 주요, 교회의 주요, 그리고 세계의 주이심을 확신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