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십자가에 대한 신학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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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대한 이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주간을 수난주간 혹은 큰 주간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이 주간은 사람 편에서 볼 때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의 무서운 고난의 주간이었으므로 수난주간(the Passion Week)이라 불리며,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그것은 독생자를 통해 인류를 구속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역사의 주간이 때문에 큰 주(the Great Week)라고 불린다. 이 주간에 초점적인 사건은 갈보리 산 위에 선 예수의 십자가인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십자가에서 기독교는 출발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십자가의 종교라고 부른다. 그러나 십자가에 대한 이해는 오늘에 와서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중세의 역사를 장식했던 십자군이 십자군기를 높이 들고 성지를 향해 진군해간 적도 있다. 1853년 '크리미아' 전쟁 때 '나이팅게일'양의 국경을 초월한 사랑에서 만국 적십자기가 탄생하였다.

또 오늘의 세계에서는 '스위스'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등 십자가로서 국기를 제정한 나라들도 많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처음부터 이런 영광의 상징은 아니었다. 원래 십자가는 비참한 죄수의 형틀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이것은 거룩하고 존엄한 것의 상징으로 그 의미가 달라졌다. 뿐만 아니라 오늘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신앙생활을 대표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고, 바울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일 이외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 이 십자가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인류사회와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하나님의 정의

우리는 먼저 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를 본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의 의를 철저히 주장하셨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인류가 지은 무서운 죄악을 준엄하게 폭로하셨다. 동시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의와의 심각한 대립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죄인과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교를 말한다. 인간 편에서 볼 때 십자가는 끝까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에 항거한 결과이다. 이것을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거룩하신 하나님은 털끝만치도 인간의 죄와 타협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 거룩하심과 인간의 죄와는 물과 기름의 관계와 같다. 이 사실은 예수께서 당신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죄에 대하여 엄한 태도를 취하셨는가를 보면 안다. 예수님의 거룩하심과 진실이 죄와 절대로 타협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십자가에 달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의가 인간의 죄에 대하여 철저하게 주장될 때, 주의 십자가는 필연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범죄한 인간의 최후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의를 나타내고자 할 때, 인간의 죄는 심판을 받고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인을 위하여 저주를 받은 자가 되었고(갈 3:13), 그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이 되는 것이다(고후 5:2).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은 만인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십자가의 죽음이다. 예수의 죽음을 떠나서 기독교는 성립될 수 없다. 죄라고 하는 것, 그리고 죄에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적 요소다.

인생의 고(苦)와, 고에서의 해탈을 말하는 불교와, 인생의 죄(罪)와, 죄에서의 구원을 말하는 기독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나는 고의 종교요 하나는 죄의 종교며 하나는 해탈의 종교요, 하나는 구원의 종교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죽음은 자연사가 아니고 수난의 죽음이었다. 요컨대 주께서 지신 십자가는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의 표현인고로 인류의 죄를 폭로하는 것이며 심판이 되는 것이다. 정의의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의 죄악에 대하여 영원한 부정을 선언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의 표현인 동시에 또한 사랑의 표현이다. 만일 십자가가 인간들의 죄를 폭로하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으로 끝났다면, 그것은 영원한 비극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터진 그리스도의 심장은 화산의 분화구처럼 하나님의 넘쳐흐르는 사랑의 심정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랑은 반드시 심판을 통해서 인류에게 전달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흘린 회생의 피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대립했다. 이것은 두 하나님의 싸움이 아니라 한 하나님의 싸움이었다. 즉 공의와 사랑, 이 두 속성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의는 수단이요 사랑은 목적이었다. 십자가처럼 하나님의 높고 거룩한 사랑을 우리에게 강하게 호소한 것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남의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고 그 죄를 지심으로 남의 죄를 사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류의 죄사함을 의하여 없어서 안될 것은 하나님 편에서나 인간 편에서나 동일하다. 십자가는 종횡 두 개의 교차에 의하여 된다.

횡목(橫木)이 표시하는 것은 땅이며 종목(縱木)이 표시하는 것은 하늘이다. 하늘인 종목이 땅인 횡목을 관철하고 있는 데 십자가의 의의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늘과 땅을 하나로 만드셨고 영으로 육을 성화시켰다.

 

인간의 운명  

갈보리 언덕에 세워진 세 십자가는 인류를 대표한다. 하나는 영원히 멸망한 죄인을 대표하고, 또 하나는 회개하고 구원얻은 성도를 대표하며, 가운데의 십자가는 인류의 운명을 결정한다. 예수께서는 최후 순간 회개하는 강도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파격의 은총이었다. 이 순간부터 인간의 운명은 결정된다. 하나의 영원한 생명에로, 또 하나의 영원한 멸망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 중 하나는 끝까지 오만불손한 태도를 취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자기와 똑같은 죄인으로 생각하고 그를 비방하여 말하기를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렇다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대들었다. 그러나 다른 강도는 그 사람을 꾸짖으며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 하고 애원하였다. 한 사람은 예수의 무죄하심과 그의 구주 되심을 인정하고 그에게 자신을 위탁하였다. 그러나 다른 강도는 자기의 죄인됨을 깨닫지 못하고 십자가의 형을 끝까지 억울하게 생각하며 거기에서 놓여나기를 위하여 몸부림쳤다. 이 사람의 눈에는 내세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최후까지 현세의 삶에만 치중하여 십자가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최후까지 현세의 삶에만 치중하여 십자가에서 내려가 살아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한 사람은 깨끗이 현세의 미련을 끊어 내세를 바라보았다. 예수여, 나라에 임하실 땐 나를 기억하소서. 솔직하고 아름다운 고백이다. 한 사람은 자기가 지은 일생의 무거운 죄 위에다 최후에 하나님의 아들을 반역한 무서운 죄를 첨가하여 영원한 멸망을 자취하였다. 그러나 다른 강도는 최후 순간에 자기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영원한 구원의 보장을 받았다. 이렇게 십자가는 인류의 운명을 갈라놓는다. 문제는 십자가 앞에서는 인간의 자세에 따라 그 운명은 영원히 결정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고 구원받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전 1:18)고 말했다.

 

오늘의 십자가

그러면 이 십자가는 오늘에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십자가는 역사의 한 점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역사의 중심에 서 있다. 역사 속에 있으면서 그것을 한없이 초월해 있다. 신학자 '오스만 쿨만'은 '그리스도의 시간'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구원과 관계 있는 종말론적 시간을 하나의 직선으로 그어진 시간의 중심을 밟고 서는 분이 그리스도라고 지적한 것은 주목할 만한 말이다. 십자가의 사건은 '갈보리'라고 하는 한 지점에서 발생한 사건이지만 그것은 공간을 넘어 바로 내 앞에, 내 속에 서 있는 오늘의 십자가로 체험될 때 그 의미는 산다. 그 곳과 이 곳 사이에 가로놓은 먼 공간적 거리가 극복되지 않는 한,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나는 만날 수 없고 또 그것은 나의 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건이 되고 말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2천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것은 시간의 제약을 넘어 바로 현재 이 순간 나에게 항거할 수 없는 강한 능력으로 육박해 오는 뜨거운 피로 지금 나의 영혼을 향하여 호소해오는 살아 계신 현재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2천년이란 시간적인 거리를 넘어 동시대성을 갖지 않으면, 십자가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면 이런 십자가 앞에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우리는 먼저 나의 죄인됨을 겸손히 고백해야 한다. 십자가에서 폭로된 가룟 유다의 죄, 제사장, 장로들의 죄, 빌라도와 로마 병정의 죄뿐 아니라, 오늘의 나 자신의 죄를 자각하여 상한 심령으로 심각한 참회가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십자가의 현실 앞에서 깊이 생각할 것은 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내 죄를 사해 주심 같이 우리도 남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모든 인류의 고난에 참여하심 같이 우리도 남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세로 시대적인 무거운 짐을 질 각오가 필요하다. 십자가는 교회의 지붕이나 제단에 달아매거나 사람의 가슴에 걸고 다니는 장식품이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메고 가야 할 십자가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건설되고 그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도 십자가 지기를 회피한다거나 그리스도를 사모하면서도 십자가만은 안 보려는 신앙의 태도를 가진다면, 십자가와 오늘의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면 우리가 메고 가야 할 십자가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회생과 화해와 사랑의 십자가다. 굶주린 대중, 사회에서 소외당한 대중 속에 참여하는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또한 우리는 화해의 십자가를 지고 찢어진 가정, 부조리한 사회, 갈라진 교회와 민족을 화해시키는 운동에 참여하는 선구자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