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園 안병무 선생 追想

강근환


 

내가 안병무를 처음 만난 것은 기억컨대 1968년 여름 전국기독교 교육대회 때의 일로 안다. 그 때 그 양반은 독일에서 귀국하여 중앙신학교를 책임지고 있을 때였는데 교육대회에 특강을 맡아 강의하는 모습을 보았다. 오랫동안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특히나 독일의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하였다는 점에서 그 당시의 나에게는 충분히 호기심과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강의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으나, 두꺼운 안경 넘어로 번득이는 눈빛과 시원스레 벗겨진 이마 위로 펄펄 휘날릴 듯한 가느다란 고운 곱슬머리에 자신감 넘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그분과의 직접적인 관계가 이루어진 것은 1975년 한국신학연구소 기획위원이 되면서부터이다. 그 후 몇 번에 걸쳐 기획위원을 계속하였고, 다음에는 이사가 되어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그분의 주변에 있을 수 있었다. 자택에서 가졌던 이사회 때 단호하게 이사장직을 사임하시더니만 그것을 마지막 이사회로 하고 그분은 세상을 떠났다. 살아계실 때 직접적인 대화를 통하여 그분의 깊은 내면의 사상세계를 보다 자상하게 들여다 보지 못하였음이 나에게는 못내 아쉬운 晩時之歎의 感이 된다.

 1. 평신도 안병무

   사람들이 안병무에 대하여 자칫 오해하기 쉬운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그의 신분에 대한 것이다. 그는 유명하고도 훌륭한 신학자면서도 안수받은 목사가 아니다. 신학자요 신학대학의 교수인 그가 목사가 아닌 사실은 한국적 상황에서는 좀 특이한 일이라 하겠다. 오랫동안 해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늦게서야 후배들의 틈에 끼여 안수받기에는 구차스러워 미루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냥 그만둘 만한 일이냐는 것이다. 그분의 결혼은 만혼으로 안다. 귀국 후에 늦으막하게 하였다. 결혼은 늦게라도 마다하지 않고 하였는데 하물며 성직인 안수는 왜 받지않았을까 이상하게 생각된다. 그에 대한 그분의 변은 말로나 글로나 아직 나로서는 접해보지 못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글을 쓰게 되면서 그 문제에 대하여 그냥 지나쳐버릴 수 없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생기는 것을 느낀다. 거기에는 무엇인가 분명한 의미와 까닭이 있을 것이다.
안병무는 신약신학자다. 그는 공관복음 중에서도 마가복음을 중심하여 케리그마가 아닌 사실(사건)을 중심한 역사의 예수를 추구한다. 마가복음서는 예수의 공생애를 말하면서 먼저 예수 주변에 모여든 ‘무리들’에게 주목한다. 2장 4절에서는 그들을 일러 ‘오클로스’라고 한다.
   

그리스어에는 대중을 지칭하는 말로서 ‘라오스’라는 말과 ‘오클로스’라는 말이 있는데 마가복음서의 저자는 이 두 말 중에 ‘오클로스’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이 라오스가 아니고 오클로스라는 것이다. 안병무는 오클로스의 특징을 다음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한다.
   첫째, 예수가 가는 곳에는 그 어디에나 민중(오클로스)이 있다. 안병무는 복음서는 예수운동이 전개되는 이야기로 보고 이것이 바울의 그리스도 표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라고 한다. 둘째, 예수는 민중과 식탁을 함께 했다. 이것은 예수가 소위 죄인(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친구가 됨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행위라는 사실이다. 셋째, 오클로스를

‘예루살렘파’와 대립시킴으로, 예루살렘파에 대립된 예수와 오클로스의 연대성을 드러내고 있다. 넷째, 오클로스는 집권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이다. 왜 공포의 대상이었나? 저들이 불의를 자행한 때문이지만 예수와 민중이 일치되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예수는 오클로스를 ‘목자 없는 양’처럼 보았다는 사실이다. 예수가 오클로스를 목자없는 양처럼 불쌍히 여겼다는 사실은 간접적으로 그 시대의 폭군들을 규탄하는 것이 틀림없다. 여섯째, 예수는 이 오클로스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라고 선언한다. 그 민중에 대한 어떤 선별도 없이 내 어머니와 형제라고 한 것은 파격적이다. 일곱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가 오클로스에 대해서 어떤 윤리나 종교적 평가도 내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오클로스를 무조건 영접할 뿐이다. 그렇다고 반대로 민중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맞아들인다.
   

이상은 안병무가 마가복음서를 중심으로 집약해 본 예수의 민중이다. 예수가 온 몸을 기울여 민중 편에 서는 모습은 어떤 원인에서든 지금 고난당하는 무리, 지금 배고프고, 지금 울고, 지금 목마르고, 지금 억눌린 자들에게 자신을 내던지는 자세이다. 미움받고, 배척받고, 욕먹고, 누명을 쓰되, 어쩔 수 없는 계층. 이 것은 한마디로 그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다. 안병무는 이러한 가난한 자들을, 예수가 위하고 예수를 따르던 갈릴리의 민중에게서 본다. 이른바 ‘죄인’들로 낙인이 찍힌 소외자들이다. 예수는 이 ‘죄인’들을 그대로 영접했고, 모든 것을 무조건 개방했고, 그들 편에 섰다. 그의 가르침에서 가장 전형적인 것이 그런 내용의 것이다. 당시 갈릴리 사람들은 민중(오클로스)의 상징이다. 그런가하면 예수를 끝까지 따른 자들은 주로 갈릴리에서 따라온 암하아레츠들이었고, 사도들이 아니라 당시 사람으로 취급받지도 못했던 여자들이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120명이 대체로 그들이라는 추측을 부정할 근거는 없다. 그들이 새로운 공동체의 구심점을 이루고 있었다. 안병무는 새 역사의 주인공은 바로 그들이라고 보았다.
   

안병무는 한국 교회사를 두 면에서 보고 있다. 하나는 재래적인 지도층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평신도의 편에서 보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사의 지도층은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그 성격이 정립되었고, 그들은 선교부의 정책에 충실한 하수인의 역할을 하였다. 이에 대하여 평신도는 민중들이다. 이들의 특징은 민중적 한과 민족적 염원을 저들의 희망의 내용으로 함으로 성속이나 정교분리에는 관심이 없다. 이것이 바로 성서적인 전통이다. 이렇게 볼 때 한국 교회사는 철저하게 반예수적인 길을 걸었다고 안병무는 보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제 길을 걸으려면 바로 이 민중운동의 대열에 서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성서의 전통이며 동시에 교회의 구성원인 민중의 염원으로 합류할 수 있는 유일하고 정당한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사는 성서의 민중전통과 한국 교회 구성원들의 염원을 잇는 시각에서도 조명해야 할 것이다.
예수의 최후를 끝까지 지켜 본 사람은 사도들이 아니라 여자들이었다. 예수의 사건을 올바르게 전하려고 사도권과 대항하여 싸운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렇지 못하였다. 마찬가지로 민중사적 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목사나 학자에게로 넘어가면 너무나 쉽게 단순화되고 개념화되고 만다. 그래서 나중에는 추상적인 것이 되어 진실은 과연 무엇이었던가를 알기 힘들게 된다. 이렇게 나는 안병무의 평신도 변을 생각해 본다.


2. 민중신학자 안병무


   안병무는 한국의 민중신학자다. 민중신학은 현장신학이라는 면에서 한국의 사회-정치적인 현실에 응하여 1970년대의 유신체제하에 등장하였다. 민중신학은 기독교회가 역사의 현장 속에서 선교를 해야한다는 세속화 신학과 ‘하나님의 선교’ 사상을 통해 한국의 역사적인 현실 속에서 발전된 신학사상이다. 그리하여 민중신학을 한국의 해방신학 또는 한국 교회 정치신학에 다른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안병무의 신학을 세속화 신학, 또는 해방신학의 지류로 볼 것인가이다.

한국 교회의 신학적 경향성은 대체적으로 말해서 보수적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이를 크게 둘로 나누어 보면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라 할 것이며, 좀더 확대해서 분류한다면 보수주의에서 근본주의와 복음주의로 나누어지고, 진보주의에서 참여적 행동주의로서의 세속화 신학(민중신학) 계열과 종교-문화적 자유주의로서 토착화 신학(풍류신학) 계열로 나누어 진다. 보수적 복음주의 계열은 선교사들을 통하여 전해된 歐美 교회의 전통신학에 바탕을 두고 이를 계승하려는 신학적 작업을 사명으로 삼고 있다면, 진보주의 계열은 보수주의 계열의 이른바 신학적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오늘의 정황, 즉 사회-정치적 내지 문화 종교적 삶의 현장에서 북음의 의미를 모색하고 해석하려는 신학적 시도라고 할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민중신학은 전통적인 서구교회의 신학방법의 틀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오늘의 정황, 즉 우리가 살고 있는 특수적이고도 구체적인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의미를 모색하고 해석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일찌기 대만의 코에(Shoki Coe) 박사(WCC의 전 이사)는 “Contextual Theology”나 “Contextualized Theology”가 아니라 “Contextualizing Theology”이란 말을 사용하기 좋아했다. 그는 신학도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고(ecclesia semper reformanda) 굳게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Indigenization”이라는 말은 그의 판단으로는 과거지향적인 면에서 만족스럽지 못했다. 신학은 소박하게 말해서 복음의 상황적 해석학이라 할 것이다. 상황의 상대성과 신학의 역동성의 복합적인 의미에서 “Contextualizing Theology”이란 말은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그런가 하면 일본의 고주케(Koyama Kozuk) 박사(New York Union 신학교 명예 교수)는 Contextualization은 다만 문화적인 것(“가죽 부대”에 관한 것)만 아니라 신학(“술”에 관한 것)까지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죽 부대에 따라 술맛도 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좀더 확대한다면 “술”에 관한 것은 단순히 신학만이 아니라 성서까지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즉 성서와 복음은 구별된 것으로서 성서 안에서 진정한(authentic) 복음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를 우리는 안병무의 마가복음 연구에서 본다.
   

마가복음은 그 첫 서두에 ‘복음의 시작”이라고 했는데, 그가 이제부터 기록하는 내용 전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선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의 행태를 추적하여 서술한다. 그가 죄인으로 낙인찍힌 자, 가난한 무리, 병자들, 여인들, 즉 민중들과 함께 살았던 삶과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돌진해서 처형당하기까지의 삶을 포함시켜 복음이라고 했다. 그에게는 교훈보다 그의 삶이 더 중요했다.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을 입으로만 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했다. 십자가는 그의 말씀의 절정이다. 안병무에 의하면 이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으로 성육신되고 구체화되었다. 복음의 담지자는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이 복음의 성서적 메시지의 전승자는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복음’과 ‘가난한 사람들은’ 한 쌍을 이루는 한 실체라는 것이다.    

안병무는 그리스도 케리그마의 전승주체와 예수 사건 전승주체를 뚜렷하게 구별한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예수 사건을 말함과 더불어 박해가 일어났다. 이런 마당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두 가지 형태의 증언의 줄기가 이루어졌다. 교회의 운명을 책임진 지도층은 교회의 존속을 위하여 로마제국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선교하는 길을 모색했다. 그것이 바로 케리그마의 형태로 나타났다. 케리그마는 예수의 행태가 어떠했으며 그를 누가, 어떻게 처형했는지 말하지 않고, 단지 그 죽음의 의미를 선포하는 것이다. 가장 초기에 공포된 그리스도교회의 고백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5장 3-7절과 빌립보 2장 6절-11장을 보면 이러한 경향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이 두 곳에서는 예수의 사건을 말하기는 했으되 그 사건을 비역사화했다. 그러므로 십자가 처형의 장본인을 건드리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 중에 또 다른 전승이 맥을 이어왔다. 그것은 교회의 전면에 나서서 공적인 책임을 지지 않은 이름없는 예수의 민중들을 통해서 일어난 말의 사건이다. 저들은 십자가 사건의 목격자이며 빈 무덤의 목격자들로서 증언했다. 그러나 공적인 교회고백은 이 여인들을 위시한 예수의 민중들의 증언을 공적 고백으로 받아들여 공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제도적 교회의 공적 고백인 이른바 케리그마와 민중의 유언비어가 따로 전해지고 있는 것을 합쳐서 문서화한 것이 바로 마가복음이며, 이로써 우리도 예수의 사건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계속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안병무의 신학은 오클로스와의 관계선상에서 이루어진 예수 사건 중심적인 복음 이해를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구현하려는 작업이라고 본다.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1970년대의 한국의 사회-정치적 역사적 현장에서 발전된 신학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의 신학은 단순히 사회-정치적 정황의 요청에 부응하여 인위적으로 구축한 허구적 신학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곧 그의 신학은 복음에서 비롯된 복음을 바탕으로 한 복음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다만 복음의 이해와 해석이 다르고 새롭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가난한 사람에 의하여 전승된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이라는 ‘복음’과 ‘가난한 사람들’을 한 쌍의 실체로 보는, 즉 여기에 선택받은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복음)의 우연한 조역이 아니라 그 구조적인 요인이라는, 예수 사건 중심적인 복음의 이해와 해석의 시각에서 우리의 역사적 현실인 정황에 조명된 신학이다. ‘정황’과 ‘복음’의 이해에 대하여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잘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이 양면의 상관관계성을 포괄한 시각에서 이해되고 해석된 복음의 바탕에서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사회-정치적 정황에서 출발하여 복음의 의미를 추구한 아래에서 위로의 상향적 신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복음의 이해에서 출발하여 정황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위에서부터 아래로의 성육신적인 하향적 신학이라 함이 좋을 것이다. 복음은 그 본질에 있어서 상대성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복음은 민중, 곧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과의 관계성에서만 복음이지, 그 민중과의 관계성을 떠나서는 이미 복음이 아니다. 누구를 위한 복음인가?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바로 이 복음 이해에서부터 발원되었다고 할 것이며, 여기에 그 특이점이 있다 할 것이다. 따라서 그의 민중신학은 이러한 바탕에서 더욱 논구되어야 한다고 본다.
   

안병무는 신학은 물론 성서까지도 전통적인 절대적 견지에서 탈피하여 상대화시킨 참 자유주의 신학자인가 하면, 동시에 진정한 복음을 성서연구를 통하여 진지하게 추구한 철저한 복음적 신학자이기도 한 민중신학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또한 한국산 신학자이다. 민중신학은 한국 기독교 백 년의 역사를 통하여 이룩된 한국산 신학의 시도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러한 시도가 한국 교회사의 흐름에서 볼 때 1930년대의 종파운동인 김교신의 ‘조선산 기독교’의 모색과 최태용의 ‘조선신학’의 주창 등에서 이미 나타났었다는 사실이다. 안병무의 민중신학이 한국산 신학으로서 평가되고 더한 발전을 모색함에 있어서는 『성서조선』을 중심한 김교신의 신학사상을 한국 신학사적 맥락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