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변하였는가?

 J. Moltmann 편,이신건 역,"나는 어떻게 변하였는가?"(한들출판사) 중에서

한스 큉(Hans Küng)

 

사랑하는 남녀 친구들, 만장하신 청중 여러분.

이제 더 이상 무엇을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다루어졌으며, 대충 모든 것에 관해 답변이 주어졌습니다. 황홀한 말씀으로 이어진 장엄한 강좌를 듣고 난 이 꼴찌의 마음은 결코 가볍지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긴 세월을 동시에 살았더라면, 모든 것에 대해 항상 똑같은 말을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나는 침묵하였고, 이제는 점심 식사 후, 로마인이 낮잠을 잔 후 늘 그러하듯이, 내 생각을 한번 더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제 이십 분 동안 나는 내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무엇인지를, 각본을 미리 짜놓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까놓고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그는 정말 변하지 않았어!" 루체른(Luzern)의 나의 작은 마을 수르세(Sursee)로 되돌아간 나에게 남녀 동창생들이 "그는 정말 변하지 않았어"라고 말할 때, 이 말을 나는 늘 큰 칭찬으로 생각하였습니다.

"Semper idem"(항상 그대로야)? 이 말은 원래 내가 선택한 말이 아니라, 내 생애 중에 내가 매우 개인적으로, 그리고 매우 위협적으로 대면하였던 나의 위대한 첫 적수들, 세 분의 대심문관(大審問官) 중의 한 분의 말입니다. "Semper idem" 이 말은 추기경 알프레도 오타비아니(Alfredo Ottaviani)가 무기를 들고 내뱉은 말 입니다. 내가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때, 그분은 매우 위엄있는 모습이었고, 이미 한 눈이 실명한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어떻게 대하든 간에, 부정할 수 없었던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그분은 항상 그대로였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과 내가 거의 동시에 헤겔(Hegel)과 그리스도론을 다루는 맥락에서 비판적으로 문제삼았던 불변성(不變性), "하나님의 불변성"(immutabilitas Dei)이라는 이 사고가 물론 나의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나는 외르크 칭크(Jörg Zink)의 강연에서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동일성(同一性)은 전제(前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만약 내가 오늘 더 이상 나와 동일한 인물이 아니라면, 내가 살아온 생애를 내가 더 이상 대변할 수도 없을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획일성(劃一性)이 아니라 동일성(同一性), 이것이야말로 제기된 물음에 대한 나의 첫 대답입니다. 나의 신학은 항상 거듭 마지막 파도를 탄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할 때, 나는 그런 일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매우 분명한 위상(位相) 안으로 내던져지기 마련입니다. 나는 늘 반복해서 다음과 같이 자문(自問)하였습니다: 비록 우리가 모두 카톨릭 신자들이지만, 내가 추기경 오타비아니(Ottaviani)나 추기경 세퍼(Seper) 혹은 마지막으로 추기경 라칭어(Ratzinger)와 같은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우리는 결국 똑같은 교회에 속해 있고, 똑같은 하나님, 똑같은 예수 그리스도, 똑같은 셩령을 믿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매우 다르고, 다르게 믿고 있지 않는가? 모두가 동일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내가 합리화할 수 있었던 것은 패러다임 (Paradigma: 사고 모형)의 개념, 다른 총체적 사고구조의 개념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마도 여러분은 잘 이해하실 겁니다. 나의 이 믿음의 형제들은 정신적으로 다른 세계, 다른 시간, 다른 세계-시간, 다른 사고 구조, 다른 패러다임 안에서 살았던 것 입니다.

그들의 사고 구조는 물론 -나는 지금 개인적인 것은 물론 교회사적인 것도 모두 생략합니다.- 나 자신울 성장시킨 것과도 똑같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로마 -카톨릭적 패러다임이라 부르는 것, 즉 중세기의 패러다임에 관해서 말씀드리자면, 나는 가장 깨끗한 물을 먹은 자입니다. 놀랍게도 나는 덴칭어(Denzinger)를 잘 알고 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von Aquinas)를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원전(原典)에서 손쉽게 검증하지 못할 그 어떤 교의(敎義)의 그 어떤 해석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를 7년 동안 라틴어로 배웠습니다. 공식적인 교리에서 우리는 확고 합니다. 특히 오직 분명한 라틴어 개념(槪念), 정의(定義)와 논증(論證)만이 요구되는 시험에서는, 우리가 흔히 독일어로 그렇게 하듯이, 조잘거리면서 논쟁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우리는 분명히 배웠습니다.

그래서 내가 로마에서 터득했던 모든 것에 대해 지금까지 감사하고 있습니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가 종종 내 책임으로 돌렸던 일종의 "반로마적 감정"을 나는 전혀 갖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할 말은 많지만, 지금은 이것이 주제가 아닙니다. 물론 나는 일이 그렇게 되어가지 않는다는 사 실을 이미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좀 늦게, 대략 5년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것을 설명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내가 간단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내 건강에 문제가 생길 정도로 독문학부(Collegium Germanicum)에서 몇 달 동안이나 논쟁하면서, 결국 나는 신학 에서 로마적 체계(System)를 문제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신스콜라적 체계가 더 이상 지지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습니다. 물론 피오(Pius) 12세와 같은 교황이 거의 매일 공포한 것이 오류(誤謬)가 있는지 아닌지, 혹은 교황이 그 당시 공포한 대로 아기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서라면 어머니가 생명을 잃어야 하는지 등에 관해서 이미 질문이 제기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무오류성(Unfehlbarkeit: 無 誤謬性)의 문제는 아직까지 중심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교황이 말한 것은 실제로 오류가 없다고 널리 인정되었습니다. 여하튼 교황의 말을 공적으로 반박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위험해졌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권위에 대한 이 물음이 나로서는 매우 일찍부터 예민한 문제였습니다.

나는 무오류성의 교리를 근본적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내 게 훈수(訓手)를 놓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그 누구도 내가 무오류성의 문 제에서 지나쳤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로지 독일에서만, 이 문제가 너무 위 험하기 때문에 회피하려고 했던 그런 카톨릭 신학자들 측에서, 그렇게 주장되었습 니다. 흔히 자주 거론되는 것처럼 내가 지나친 것이 아니라, 혹시 지나치게 될지 모른다고 그들은 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최근의 신앙 대회에서 교황의 이름으로 공포된 여성의 성직임명 불가능에 대한, 무오류하다는 교리는 내가 그레고리아나 (Gregorianan)에서 배웠던 명제(命題)의 아주 분명한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이 명제는 지금 유감스럽게도 "일상적 직무"(Magisterium Ordinarium), 즉 교황과 주교 들의 일상적 직무에 관한 제2 바티칸 공의회(公議會)의 교회헌장 25항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교황의 공식 발언이나 공의회 결정의 "특별한 직무"(Magisterium Extraordinarium)와 꼭 마찬가지로 오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이미 60년대부터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만, 내가 매우 일찍부터 개인적으로 알게 되었던 칼 라너(Karl Rahner)와 또 프랑스인, 특히 앙리 드 루뱅(Henri de Rubac)과 이브 꽁가르(Yves Congar)는 -생애와 관련된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내게 매우 큰 자극을 주었습니다. 라너는 신스콜라주의(Neuscholastik)의 큰 건물마다 문을 활짝 열어재쳤습니다. 그는 방마다 뛰어 들어가서, 모든 것을 뒤집고 재정돈하였습 니다. 물론 그는 즉시 다시 다른 방으로도 들어갔고, 거기서도 모든 가재도구들을 재정돈하였으며, 그리고는 이제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라너의 사고가 하나의 동적 변증법(動的 辨證法)임을 나는 꿰뚫어 보았 습니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밖에는", "없다", "교회", "구원"이라는 이 모든 개념들을 마구 섞어 놓으면- 결국엔 정반대의 말도 할 수 있게 됩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 아니 교회 밖에도 많은 구원이 있다. 이들은 모두 "익명적(匿名的) 그리스도인들"이다. 물론 그는 이들이 모두 당연히 "익명적 카톨릭교인들"이라고 말하는 데까지는 감히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라너에게는 이 일이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1970년에 나의 책이 발행된 것이 계기가 되어, 라너와 내가 무오류성의 문제에서 서로 갈라서게 된 사실은 카톨릭 신학에서 전개된 하나의 비극 (悲劇)이라고 나는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 책은 꼭 쓰여져야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내가 또 한 권의 책을 쓰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오류가 없다고? 하나의 물음"(Unfehlbar? Eine Anfrage)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꼭 쓰여져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이 제기한 물음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묵묵부답(默默不答)입니다. 그리고 튀빙엔에서조차 이 물음에 대해 감히 분명한 대답을 주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 냐하면 그 당시 교회 당국(當局)으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즉 내게 일어난 바로 그 사건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역자 주: 한스 큉은 튀빙엔 대학의 카톨릭 학부 교수였다가, 이 문제로 인하여 교황청으로부터 교수직을 박탈당하였음).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이것은 첫 패러다임, 중세기가 우리에게 건내준 로마 카톨릭적 패러다임에 속한 것입니다. 이 패러다임은 반(反)종교개혁 운동으로 인해 강화되었으며, 신스콜라주의로 인해 반(反)현대적으로 칼날이 날카로워졌습니다. 내가 포기해야만 했던 사고 구조, 그것은 복음과도 거의 맞지 않았거니와, 우리 시대와도 거의 맞지 않았습니다.

이미 로마에서부터 개신교 신학자 칼 바르트를 알게 된 것을 나는 아주 큰 소 득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아니 그분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 그레고리아 나에서 학사 과정을, 그리고 파리에서 박사 과정을 밟을 때,- 그분의 신학을 매우 철저히 공부하였기 때문에, 그 이래로 나는 신스콜라주의 못지 않게 바르트 신학 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개신교 신학도 -바로 그 마지막 의도까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르트에게서 단지 그분의 교의학(Dogmatik)의 거대한 건축미(建築美)만을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쉴라이어마허(Scheiermacher)의 건축술에 대해서 경탄하듯이, 그분의 건축술에 대해서도 나는 경탄해 마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인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를 심리학과 종교사(宗敎史)로 해소시킬 수 없다는 점을 말해 준 신학자가 우리 시대에 왔다는 사실, 바로 이 사실은 나를 지탱해 주는 매우 든든한 밑받침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이처럼 비판적인 단계를 밟아 온 과정을 나 스스로 외로이 바라보아야만 했던 기간 동안, 로마와 스위스, 파리에서 이 위대한 신학을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칼 바르트와 인간적으로 매우 친해질 수 있었다는 사실도 -물론 이 강연과는 상관이 없는 사사로운 일입니다만- 나의 온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나의 박사 학위 논문의 주제였던 바르트 신학과 카톨릭 신학의 칭의론(稱義論)이 지금까지도 신학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나의 중심(中心)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인이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 이것은 나의 실존(實存) 그 자체입니다. 즉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 때문이 아니고, 또 신학적인 행위 때문도 아니고, 신앙 때문이요, 하나님 자신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토대입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닥쳐올 때마다, 나는 늘 이것에 의지해 왔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바로 이것을 나는 1957년의 내 저서에서 -카톨릭적으로 잘 이해하여- 모두 밝혀 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위원회를 만들어 끝없이 칭의, 칭의, 칭의하며 논쟁하는 모든 카톨릭 신학자들과 개신교 신학자들을 바라보노라면, 웃음만 나올 따름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이제 더 이상 문제꺼리가 되지 않습니다. 라칭어(Ratzinger)조차도 이 점에서는 나와 일치합니다. 하지만 칭의의 메시지가 교회헌장(敎會憲章)의 문제, 직무(職務), 교황직(敎皇職)을 위해, 다르게 말씀드리자면, 생활의 의미를 위해 어떤 함의(含意)를 지니는지의 문제는 하나의 다른 문제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종교개혁, 즉 종교개혁적 패러다임을 나는 이렇게 일찍부터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의 신학 안으로도 통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16세기의 신학논쟁을 회고하게 되면, 나는 이제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습니다. 카톨릭적 넓이 안에 개신교적 중심을 두자. 이것은 지금까지도 변 치 않는 나의 표어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16세기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튀빙엔 의 몇몇 개신교 동료들과 다른 점입니다만-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늦어도 튀빙엔에 온 이후로 현대의 패러다임역사-비판적 주석을 바르트의 신학 못지 않게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발견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강연에서 아무도 역사-비판적 주석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놀랐습니다. 내 기억으로는 이 모든 말씀들 가운데서 단 한 마디도 이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나는 묻고 싶습니다: 역사-비판적 주석이 없어도 무방합니까? 물론 나는 지금 사랑하는 나의 친구들이 여기서 무엇을 말할지 이미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미 신학적으로 모든 것을 넘어섰다느니, 불트만(Bultmann)에게서 배웠다느니 라는 말들을 할 것입니다. 그래요. 불트만에게서 배울 수 있고, 예를 들어 그분의 탈신화화(脫神話化)는 몽땅 버리고 실존적 해석만은 따를 수 있겠지요. 하지만 만약 우리가 계몽주의 이래로 쟁점이 되어온 이 사안을 늘 배척하기만 한다면, 뤼데만(Lüdemann)의 책처럼 그리 새롭지도 않은 고서(古書)들이 개신교 신학에서 굉장한 자극을 주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대관절 왜 그렇습니까? 강의도 책도 이 물음을 명백하게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더 꼼꼼히 따져 가며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고 합시다: 당신은 죽음과 악마, 지옥과 원죄(原罪)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신의 그리스도론의 주석적 근거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당신은 삼위일체론을 역사-비판적으로 해명하실 수 있습니까? (윙엘이 그래요! 라고 대답하자, 청중 가운데서 웃음이 터짐.) 그러면 이런 자명한 대답만이 나올 뿐입니다(웃음). 하지만 이런 대답은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웃음). 이성보다 의지에 호소하니까요(Statt pro ratione voluntas, 또 다시 웃음이 터짐)! 실로 여러분은 지금 역사-비판적 주석이 활발해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릴 것은, 여기에 계시진 않지만 우리 모두가 배웠던 튀빙엔 사람 에른스트 케제만(Ernst Käsemann)이 그분의 스승 불트만을 배우고 이해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결정적인 점에서 그를 비판하셨고 수정하셨다는 사실은 나로서 영원히 감사할 일입니다. 단지 역사성(歷史性)만이 아닌 현실적인 역사, 단지 미래 성(未來性)만이 아닌 실제적인 미래, 단지 세계성(世界性), 세계-내-존재(世界-內- 存在)만이 아닌 오늘 존재하는 실제적인 세계와 사회, 단지 케리그마(선포)의 그리스도만이 아닌 역사의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한 이 역사의 그리스도가 내게는 중심이 되었습니다. 아마 케제만이 안 계셨더라면, 나는 "Christ sein"(그리 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라는 책을 역사의 예수로부터, "아래로부터" 파악할 용기를 갖지 못했을 겁니다. 선포의 그리스도와 분리할 수 없는 이 역사의 예수는 내게 신학의 구체적인 중심입니다. 신학적으로 보자면, 바로 여기에 나의 정체성이 근거 해 있습니다. 하지만 계몽주의 이래로 나는 이 중심을 오직 역사-비판적 주석에 의해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내가 내리는 진단은, 개신교 신학 이든 카톨릭 신학이든 간에, 현대신학의 불행이 바로 이 점에, 즉 역사-비판적 주석의 결과와 전수된 교리 간의 엄청난 균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균열을 극복했다고 생각하는 교의학자들이 여기에 와 계시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하지만 내게는 그게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에베하르트 윙엘(EberhardJüngel)과 나눈 대화가 기억나는데, 거기서 윙엘 자신은 "우리가 정말로 이 일을 해냈습니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침묵 가운데서 나는 이 일을 해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내게 변하지 않았던 점은, 간단히 말씀드려서, 내 신학의 중심(中心)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으나 지평(地平)은 늘 변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나는 필립 포터 (Philip Potter)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즉 성서와 신문입니다. 또 성서, 복음, 나 자신의 중심은 단순히 "복음"(福音)이 아니라 말하고 투쟁하고 고난받았던 한 인간,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입니다.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한 주님, 그분이 언제나 중심입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늘 변하는 지평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신문입니다. 시간이 한 인간에게 부과한 것, 그를 움직였고 끌어간 것은 모두 지평입니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이 중심이고 무엇이 지평인지 분명히 깨달은 후, 나는 계속 전진하려고 시도합니다. 신학의 길에서도 나는 크게 우왕좌왕한 적은 전혀 없습니다. 이 점에서 나는 아마도 나의 동료요 친구인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과 차이가 날 겁니다. 그는 부활의 신학으로부터 출발하여 십자가의 신학으로 나아갔고, 다시금 혁명의 신학으로부터 출발하여 놀이의 신학으로 나아갔습니다. 나는 좀 지루한 편이고, 대립적인 주장을 덜 내세웁니다. 혹은 여러분이 원하신다면, 좋은 의미에서 그저 "카톨릭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웃으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카톨릭적 노선은 한계선을 긋는 데 있기보다는 포괄적으로 -물론 내게서는 늘 비판적으로- 통합하는 데 있습니다. 나의 투쟁적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신학 전반에서 나는 늘 한계선을 긋는 일보다는 통합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래서 늘 새롭게 배우고, 새롭게 작업하며, 새로운 지평으로 출발하려고 애썼습니다.

실로 실천적인 목양(牧羊)의 길 대신에 학문적인 신학을 위한 결단이 내려진 이래, 즉 하나의 돌멩이가 물 속으로 던져진 이래, 나의 사상노선은 점점 더 크게 퍼지는 동심원(同心圓)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즉 나의 사상은 미리 계획된 것이 아니라 시대의 도전으로부터 자극을 받은 것입니다. 중심에 있는 원(圓)에 관해 말씀드리자면: 1950년대에는 칭의론(稱義論)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근거를 세우려고 노력하였습니다. 1960년대에는 공의회(公議會), 교회 및 재통합에 대한 질문에 집중하였는데, 교회에 관한 책 이후로 이 질문은 무오류성(無誤謬性)의 문제에서 극치(極致)를 이루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신학적 토대와 그리스도론적 토대를 연 구하였는데, 헤겔(Hegel)의 그리스도론에 관한 책을 필두로 하여, "Christ sein"(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Existiert Gott?"(하나님은 존재하는가?), "Ewiges Leben"(영생)이라는 책이 쓰여졌습니다. 1980년대에는 -1979년 12월 로마와의 큰 갈등 이후로- 세계종교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였으며, 아울러 해석학(解釋學), 모형 교체(模型交替), 열린 에큐메니칼 신학의 문제도 연구하였습니다. 끝으로 1990년대 에는 온 인류의 종교적 상황을 연구하였습니다. 세계 문학, 음악과 심리치료에 관 한 연구 외에도 특히 유대교, 그리스도교 및 -이것도 역시 연구하기를 바라는 것으로서- 이슬람교를 역사적-체계적 분석하는 프로젝트(Projekt Weltethos)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Stiftung Weltethos(財團法人 世界精神)를 통하여 계속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은 더딘 작업이었지만, 대단히 강도높은 작업이었습니다. 물론 여러분은 "어떻게 나의 마음이 변하였는가?"를 놓고 한없이 많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끝으로 세계정신(Weltethos)이라는 단어는 오늘의 탈-현대적 패러다임 안에서 구속력을 갖는 가치, 불변하는 규범 및 인류 생존에 필요한 태도를 갖는 데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기본합의가 무엇인지를 표현합니다. 이것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임무입니다. 그리고 카톨릭과 개신교의 젊은 신학자들도 점점 더 많이 이런 큰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어 기쁩니다. 그런데 내 시간은 지금 여기서 끝나는군요. 여하튼 살아가는 것과 신학하는 것은 언제나 내게 즐거움을 줍니다. 그리고 오래 동안 이 일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