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종교들-세계평화-세계윤리: 21세기를 향한 현실적 비전

(World Religions - World Peace - World Ethic: A realistic vision for the 21st Century)

때: 2000년 9월 22일(금) 오후 4:00-6:00
곳: 서울 YWCA 회관 대강당 / 주관: 크리스챤 아카데미

 

I. 도전과 응답


1. 우리는 러시아나 유럽뿐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미주, 아시아에서 신앙인과 비신앙인, 종교적인 사람과 무신론자, 세속주의자, 사제(司祭)와 비사제 사이의 새롭고 위험스러운 긴장과 다극화 현상이 나타나는 세상과 시대에 살고있다.
이러한 도전에 대해 본인은, 신앙인과 비신앙인 사이에 상호 존중하는 가운데 협력이 없이는 인류는 생존할 수 없다고 응답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진실로 새로운 문화적 갈등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는가? 라고 본인에게 말한다.

2. 우리는 『문명의 충돌』에 - 예를 들면, 이슬람의 문명과 서구의 문명간 충돌- 의해 인류가 위험에 처한 세계와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의 전쟁에 의해 그리 위협을 받고 있지 않지만, 어느 국가, 도시, 거리와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갈등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 이러한 도전에 대해 본인은, 문명의 충돌에 있어서 종교간의 평화 없이는 문명간의 평화는 없게 될 것이다라고 응답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종교들이 진실로 증오와 대립과 전쟁을 지지하고 유발시키지 않았는가라고 질문할 것이다.

3. 우리는 평화가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힌두교, 불교 등 모든 종류의 종교적 근본주의 - 때로는 사회적 불행에 처해있는- 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세계와 시간 속에 살고 있으며 서구의 세속주의에 대한 대응과 삶에 있어서 기본적 방향에 대한 갈망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도전에 대해 본인은, 종교간의 대화가 없이는 종교간의 평화가 없게 될 것이다라고 응답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서로 다른 신앙 간의 수많은 교리적 차이와 장애들이 진정한 대화를 하나의 천진난만한 환상으로 만들지 않는가 라고 반대할 것이다.

4. 우리는 종교 간의 더 좋은 관계가 로마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와 종교와 이데올로기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독단주의(dogmatism)에 의해 방해받고 있는 세계와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도전에 대해 본인은, 교의적 차이는 있지만 하나의 세계 윤리가 없이는 새로운 세계 질서는 없게 될 것이다라고 응답한다.



Ⅱ. 새로운 세계질서와 세계 윤리

1.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에 의존해서는 더 좋은 세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a. 외교적 활동만으로는 이전 유고슬라비아의 경우와 같이 정직함보다는 위선의 특성을 지니며, 어떠한 지역에 평화와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음을 자주 보게 한다.

b. 단순한 인도적 지원은 정치적 행위와 해결을 대치할 수 없다. 유럽의 열강들은 보스니아에 정치적 행동대신 인도적 지원을 함으로써 자신들을 침략자들의 권력 안에 넣게 되었고 전쟁의 범죄에 공모하게 되었다.

c. 우선적으로 군사적 개입에 있어서, 완벽한 평화주의는 당연히 새로운 대학살(holocaust)과 다시 있어서는 안 되는 새로운 인종몰살(genocide)을 허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정, 군사개입의 결과는 종종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경향이 있다.

d. 국제법의 경우에 있어서, 그와 같은 법은 민중들과 개인들의 권리보다는 정부의 무한한 통치권과 정부의 권리에 더 많은 초점을 두고 있다. 만약 도덕적 신념과 도덕적 의지가 법률, 휴전 또는 조약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힘은 유럽에서 평화적인 협정을 맺은 영토의 변화만이 수용될 수 있다는 원칙을 고수하지 못할 수도 있다.

2. 긍정적인 표현을 하자면, 더 좋은 세계질서는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토대가 이루어질 때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

- 공동의 비전, 이상, 가치, 목적과 범위(criteria);
- 모든 사람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에 대한 강화된 지구적 책임;
- 문화와 종교를 포함하는 모든 인류, 국가와 권력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의 새로운 결합 윤리, 하나의 새로운 세계 윤리, 하나의 지구윤리가 없이는 세계 질서는 없다.

3. 그러한 지구윤리의 기능은 무엇인가?

- 지구윤리는 하나의 새로운 이데올로기이거나 상부구조도 아니다;
- 이것은 서로 다른 종교와 철학들의 특정한 윤리를 불필요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 그러므로 이것은 토라(Torah), 산상수훈, 코란(Qur'an), 바가바드기타(Bhagavadgita), 붓다의 가르침, 또는 공자의 말씀을 대신하려는 것이 아니다.
- 지구 윤리는 공동 가치, 표준 그리고 태도에 대한 최소한의 필요함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지구윤리는 교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교에 의해 확정될 수 있고, 비신앙인이 지지할 수 있는 것으로서 가치와 취소할 수 없는 표준과 도덕적 태도를 연결하게 하는 최소한의 기본적 교감(交感)이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 가능한 것인가?



Ⅲ. 지향(orientation)의 결핍

인간이 모든 상황과 모든 곳에서 꼭 간직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지향의 공백은 전지구적인 문제이다. 이것은 공산주의의 몰락 후 이전 소비에트 연방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경우이며, 표면적으로는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는 여전히 전과 같이 억압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적이며 영적인 공백에 대처하는 것은 러시아나 중국뿐만이 아니라 모든 문명들에 속한 문제이다.

유럽에서 리버풀(Liverpool)에 있는 열 살의 두 소년에 의해 두 살의 어린아이가 살해당한 후 자유주의 잡지와 칼럼인들이 "지향의 정글"(the orientation jungle)과 문화사에 있어서의 전례 없는 금기(taboo)의 결핍에 대해 불평하였다. "가장 젊은 세대는 가치로 따질 수 없는 가치들의 혼동을 극복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1950년대와 60년대에 부모와 학교, 교회와 종종 정치인에게조차 소통되어 왔던 옳고 그름, 선과 악의 분명한 규범들이 더 이상 거의 인정되어
질 수 없다."

그러나 필자의 말을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본인은 정치와 경제에 있어서 윤리의 재회복과 재평가를 요청하고자 한다. 본인은 (긍정적인 면에서) 모든 도덕을 찬성한다. 그러나 동시에 (부정적의 의미에 있어서의) 도덕주의에 반대한다. 도덕주의는 도덕을 과대평가하고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 이유는? 도덕가들은 도덕을 인간행동의 유일한 범주로 설정하고 경제와 같이 생명의 다양한 면의 상대적 독립성을 무시한다. 그러한 결과로 그들은 정당화된
규범과 가치(평화, 정의, 환경, 생명, 사랑)를 본질적으로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으며, 또한 어느 단체(예를 들면, 정당, 교회, 이익 단체)의 특정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추구한다.

도덕주의는 한쪽 면을 스스로 드러냄으로서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 합리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어느 특정한 도덕적 입장(예를 들면, 성적 행위, 임신, 피임, 유산, 안락사, 그리고 비슷한 이슈들)을 강요하게 된다. 다른 말로, 몇 개의 공통된 도덕적 규범을 말하자면, 오늘날의 치유적인 풍조(ethos)와 정치화를 향해 감동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어떤 종류의 근본주의자들이나 기회주의적인 정치인들을 지지하고 싶지 않다.

앞으로 이루어지게 될 새로운 세계질서에 있어서 이 지구상의 인간이 보다 확실한 생존의 확신을 가지고자 한다면, 인간의 확신에 대한 보편적이며 기본적인 일치가 긴급히 요청된다.

우리 시대에 있어서 수 천년 된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질문은, 왜 인간은 악이 아닌 선을 행해야 하는가? 왜 인간은 "선과 악을 초월해" 서 있지 못하는가? 왜 그들은 권력, 성공, 부(富), 재물, 성(性) 등에 대해 자신들의 의지를 단순히 책임지게하지 않는가?

기초적 질문들이 종종 무엇보다 가장 어려운 것이다. 종교적 권위에 의해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수세기 동안 인정되어 왔던 대부분의 도덕, 법률, 관습 등은 더 이상 자동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전 세계적인 대화, 지구적 대화는 하나의 세계윤리, 지구윤리에 대한 공유된 가치, 규범, 그리고 기본적인 태도에 대한 일치를 이끌도록 이미 착수되었다.

현대의 민주주의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은 명백하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스스로를 이해하는 통로라면, 그 세계관도 중립적이어야만 한다. 현대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종교와 종파, 철학과 이데올로기에 대해 반드시 관대해야 한다. 그리고 민주주의 정부는 삶 또는 삶의 방식에 대한 의미를 선포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유럽, 미국, 인도 또는 일본 어디에서건, 명백하게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딜레마의 근거가 충분히 되지 않는가? 캔터베리의 대주교인 카레이(Careya) 박사는 영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옳게 말하고 있다. "이 나라는 아직도 기독교인들의 유산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고 있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신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오늘날 우리 전체사회를 묶는 가치에 대해 분명하게 규정하고 면밀하게 초점을 맞춘 체계를 발견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희생을 발견하고 있듯이, 실용주의적인 편견(utilitarian bias)을 지닌 세속화는 확고한 가치체계를 제공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도덕적 공백에 대해 늘 행복해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평상적으로 어떤 것을 유지하려고 하는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을 느끼고 있다. 그들은 어떤 것에 의지하기를 원한다.

너무도 복합적이게 된 우리의 기술 세계에서, 그들의 개인적인 삶의 혼란 속에서 그들이 설 자리를 원하고 있고, 추구해야할 할 노선을 갖고자 하며, 기준과 목적을 갖기를 원하고 있다.

간략히 말하자면, 사람들은 기본이 되는 윤리적 지향점 같은 것을 가지려는 억제할 수 없는 욕구를 느끼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경험들은 인간이 더욱더 법률과 계율에 의해 향상될 수도 없으며, 물론 그들은 단순히 심리학과 사회학에 의해 개선될 수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심리학자와 사회학자들도 아마 이것에 동의할 것이다. 기술자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기술적인 방법을 알고 있지만 기술적인 전문지식은 아직 의미에 대한 지식은 아니다. 인공 두뇌학의 전문가들은 아마도 법칙들이 아직은 지향점이 아니라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그래서 법률은 아직 도덕이 아니라는 본인의 견해에 대해 법률가들이 공유할 것으로 희망한다. 간략히 말하자면, 모든 합리적인 사람들은 법률이 하나의 도덕적 근거가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 아마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도시와 공동사회의 안전은 단순히 돈이나 더 많은 경찰과 감옥만
으로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국가가 제재와 힘에 의해 강요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에 대한 윤리적 용인은 어떠한 정치 문화의 전제조건이다. 만약 인구의 중요한 부분과 강력한 힘을 가진 집단 또는 개인들이 법률을 준수할 어떠한 의도도 갖고 있지 않다면, 유럽공동체나 미국 또는 UN이든, 개별적인 국가들 또는 기구들이 새로운 법률은 끊임없이 만드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들이 자신들의 집단적 이익을 무책임하게 부여하는 충분한 길과 방법을 발견 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느 로마인이 말했다: "도덕이 없는 법률은 무엇인가?'(Quid leges sine moribus?)



Ⅳ. 결합된 지구윤리를 향하여

분명 세계의 모든 국가들은 경제적이며 법적인 질서를 가지고 있으나, 어떠한 나라도 이러한 질서가 윤리적 일치와 민주주의적 법률이 살아 있는 국가의 시민들 사이에 도덕적 관심이 없이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미 인권 선언에 대해 찬성표를 던진 프랑스 혁명의회의 구성원 절반이 인권과 더불어 인간의 책임("devoirs")을 명백히 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계속되는 토론의 이슈로 남아 있다.

두 번의 세계 전쟁이후의 현세기에 있어서, 국제적인 공동체는 이미 (그것이 없이는 국제 조약들은 사실상 완전한 자기 기만에 지나지 않을) 초국가적, 초문화적, 그리고 초종교적 법적 체제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만약 하나의 새로운 세계질서가 유지되려면, 최소한의 공통된 가치, 규범과 기본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시간적인 제약을 지닌 성격이지만, 전 인류가 공감할 수 있는 단어로 묶을 수 있는 하나의 윤리는 짧게 말하면 지구윤리이다.

그리고 이것은 명백하게도 지구화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이다. 경제, 기술, 통신의 지구화는 또한 재정과 노동 시장으로부터 환경과 조직적 범죄에 이르기까지 문제들의 지구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필요로 하는 것은 윤리의 지구화이다. 다시금, 이것은 하나의 동일한 형태의 도덕적 윤리가 아니라, 모든 지역, 국가, 이익단체들이 동의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인간을 위해 하나의 공유된 기본적인 윤리는 필요 불가결하게 공유된 최소한의 도덕적 가치, 기본 태도와 규범을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진정, 하나의 윤리, 지구적 윤리가 없어서는 어떠한 새로운 세계질서도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지구윤리를 구체화하고 공식화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다른 국가, 지역, 문화 그리고 종교의 윤리적 명제가 서로 모순되지 않는가? 물론 그들은 상호간에 많은 구체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반면에 인간의 모든 위대한 도덕적, 종교적 전통들의 바탕에는 서로 공통된 것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본인의 확신은 1990년에 독일어로, 1992년에 한국어로 번역된 『세계윤리 구상(Global Responsibility: In Search of a New World Ethic)』라는 책이 최근 몇 년 사이에 광범위한 국제적인 후원을 받았다는 사실에 의해 분명해 졌다.

- 1993년 9월 4일에,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의회의 대표들은 종교 역사에 있어서는 처음으로 "지구윤리를 향한 선언(Declaration Toward a Global hic)"을 채택하였다.
- 1997년 9월 1일에, 전임 대통령들과 수상들의 국제행동위원회(InterAction Council)에서 처음으로 지구 윤리가 요청된다고 하였고 UN에 "인류의 책임에 대한 세계 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esponsibilities)"이라는 제안을 제출하였다.

이러한 두 선언문은 서로 분리된 문서가 아니다. 이들은 지구 윤리의 규범을 제시하기 위한 영향 있는 국제적 조직의 긴급한 요청에 대한 반응들이다. UN의 지구적 통치 위원회(Commission on Global Governance)와 문화와 발전 세계위원회(World Commission on Culture and Development) 등의 두 기구에서 1995년의 보고서에서 이러한 이슈들에 대해 한 장(章) 전체를 할애하였다. 같은 이슈들이 다보(Davos)에서 열린 세계 경제 포럼과 유네스코에서 세계 윤리 계획에 대한 새로운 계획들을 다루어왔다. 아시아에서 이러한 이슈들에 대한 관심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제안된 인류의 책임에 대한 세계 선언은 서언에서 밝힌바와 같이 윤리적 관점에서 세계 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을 지지하고 토대를 보강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존엄성을 완전히 받아들이며, 그들의 분리할 수 없는 자유와 평등, 상호간의 연대성 등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다시 새롭게 하고 강화시키고자 한다." 만약 인권이 보장되어질 수 있는 곳에서조차 인권이 보장되어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필요불가결한 정치적, 윤리적인 의지가 결핍된 것이다. 가장 열렬한 인권 운동가들은 법의 통치와 인권의 향상은 남성과 여성들이 올바르게 행동할 준비성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식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인권의 법률적 유효성이 반드시 인간의 책임의 실질적 이행에 달려있다고 제안하는 것은 잘못일 지도 모른다. 인권사상을 선행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공동체 속에서 책임을 완수함으로서 자신들의 가치를 보여준 사람들만 그러한 권한을 즐길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이것은 권리와 책임에 대한 전제조건인 개인의 절대적 존엄성에 대한 인식과 배치된다. 어떠한 주장도 인권에 속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인간의 책임이 개인 또는 공동체에 의해 반드시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안하지는 않는다. 어떤 주장도 인권에 속할 수 있다는 생각은 권리뿐 아니라 언제나 책임을 가지고 있는 개인이 한 영역이다. 모든 인권은 정의된 바와 같이 인권을 존중할 의무와 직접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두 선언문의 기본 원칙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핵심만을 인용하자면, "모든 인류는 인간답게 대접받아야 한다"는 것과, 황금률인 "당신이 당신에게 하여주기를 바라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긍정적인 표현을 하자면,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하기를 바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행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네 가지의 변경할 수 없는 방향, 즉 인류의 불가피성이 (세계 종교의회 선언문에서 폭넓게, 국제행동위원회의 제안에서 간결하고 법률적인 형태로) 발전되었다.

1. 비폭력 문화와 생명존중에로 헌신. 즉,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된다. 긍정적으로 표현하자면 모든 "생명을 존중하자!"이다
2. 일체성의 문화와 단순한 경제적인 체제에 대한 헌신, 즉, "남의 것을 훔쳐서는 안 된다."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성실하고 정당하게 대하라!"이다
3. 관용의 문화와 신뢰의 삶에 대한 헌신, 즉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하라!"이다.
4. 평등한 권리의 문화와 남성과 여성사이의 협력에 대한 헌신, 즉 "성(性)을 남용하지 말며, 비도덕적 성을 행하지 말라"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다른 사람을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라!"이다.

나는 새로운 세계질서가 평화를 증진시키고, 자연 친화적이고 종교일치의 (ecumenical) 공동의 파트너십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다원적인 세계사회 속에서 도출된다면 더 나은 질서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결 론

1899년의 인류의 희망은 위대한 것이었다. 19세기의 신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이 "발전(Progress)"이었으며, 사람들은 영원하고, 어마어마한 발전이 20세기에도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세기에 두 세계 전쟁과, 구라(Gulag) 群島 사건, 대학살 (Holocaust), 원자폭탄 등을 경험하였다. 21세기는 더 좋아질 것인가?

1899년에 어느 누구도 이러한 "영원한" 발전이 멈추고, 반동적 운동의 지도자들이, "극단주의 세기"라고 불리어지는 세기에 중요한 인물들이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1899년, 젊은 러시아 지성인, 나중에 레닌이라 불려진 Uljanow가 시베리아에서 당시까지 망명을 하고 있었다. 1899년, Stalin이라 불려진 동방정교회의 신학도인 Djugashvili가 Tbilissi/Georgia에서 신학교에서 살면서 혁명활동을 익숙해가고 있었다.
1899년, 이탈리아에서 16세의 소년과 오스트리아에서의 다른 10세의 소년이 그들의 미래에 대한 꿈만을 꾸고 있었다. 그들은 나중에 "수령"과 "지도자"라고 불리었다.
공산주의, 파시즘(fascism), 나찌주의 등은 진정 "극단의 세기"의 결정적인 거대한 반동적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10년 전인 1989년에 막을 내렸다. 본인은 본인 스스로,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더 좋은 세계질서를 위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회가 있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1918년, 새로운 세계 질서는 윌슨(Wilson) 대통령에 의해 선언되었지만, 그는 베르사유에 있는 "유럽의 현실정책(European Realpolitik)"에 의해 패배하였고, 새로운 세계 대신 현실 세계 질서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1945년, 새로운 세계질서는 UN 헌장에 마련되었으나 스탈린(Stalin)의 "현실정책(Realpolitik)에 의해 황폐화되었고 하나의 새로운 세계질서 대신 세계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1989년, 하나의 새로운 세계질서는 걸프 전쟁(Gulf War)이후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부시 대통령에 의해 발표되었다. 그러므로 문제는 "인류는 이번 세기의 이러한 세 번째 기회를 잃을 것인가"이다.

이 강연이 새로운 세계질서를 위한 완전한 비전을 제시하는 일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인은 중요하고 결정적이라 보여지는 어느 정도의 범위를 본인의 분명한 역사적, 철학적, 신학적 관점에서 개괄적으로 나타내고자 노력하였다. 결론을 내리기 위해, 새로운 세계에 대한 본인의 확신을 요약하고자 한다.

- 종교간의 평화 없이는 국가간의 평화는 있을 수 없다.
- 종교간의 대화 없이는 종교간의 평화는 있을 수 없다.
- 우리의 지구를 위한 공통의 윤리적 규범을 고려하지 않고는 종교간의 성공적인 대화는 있을 수 없다.
- 그러므로 하나의 지구 윤리가 없어서는 우리의 지구의 생존은 없을 것이다. -끝-



<지구윤리에 대한 참고문헌>

Hans Kueng, 『세계윤리 구상(Global Responsibility. In Search of a New World Ethic)』 (SCM Press, London / Continuum, New York 1991; Korean: Benedict Press, Waegwan 1992).
Hans Kueng Karl-Josef Kuschel (Eds), 『지구 윤리. 세계종교의회 선언문(A Global Ethic.
The Declaration of the Parliament of the World’s Religions)』 (SCM Press, London / Continuum, New York 1993)
Hans Kue ng (Ed.), 『하나의 지구윤리에 대한 긍정적 대답(Yes to a Global Ethic)』 (SCM Press, London / Continuum, New York 1996).
Hans Kueng, 『지구촌 정치와 경제에 대한 지구윤리(A Global Ethic for Global Politics and Economics)』 (SCM Press, London 1997 /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1998)
Hans Kueng - Helmut Schmidt (Eds), 『지구윤리와 지구적 책임(A Global Ethic and Global Responsibilities)』 Two Declarations (SCM Press, London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