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하신 하느님?

한스 큉, 이종한 옮김, 믿나이다(분도출판사)  중에서

 

 

전능자?

이미 오래 전부터 모든 것을 직접 주재하신다는 '전능자'에 대한 의심이 널리 퍼져 있다. 그 전능자는 현대가 발전함에 따라, 기껏해야 한정된 영역만을 관장하고 기적이나 행하는 긴급 구호자로 간주되고 있다. 자연과 역사 안에서 우리의 인간적인 과학, 기술, 경제, 정치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우리의 개인적인 문제들을 더 이상 해결할 수 없을 때마다, 언제 어디서든 불러낼 수 있는 하느님에 대해 사실 누가 의심을 가지지 않겠는가? 그러한 하느님은 정신적, 물질적 발달과 심리학의 발전과 더불어 더욱 더 지성적으로 없어도 되고 실천적으로도 불필요하며, 그래서 갈수록 믿을 만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떠나 고백하건대, 나는 아우슈비츠, 굴락,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은 후 정말 더 이상은 '전능하신 하느님'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없게 되었다. 그 하느님은 그때 그곳에 '섞이지 않고 떨어져 있는'(ab-solut) 주권자로서 인간의 온갖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los-gelöst).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주재하고 모든 것을 행하셨다. 아니 적어도 당신이 원했다면 행하실 수 있었다. 그 후에도 그 하느님은 엄청난 자연의 재앙과 인류의 범죄 앞에서 침묵하고 침묵하고 침묵하고...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전능자'(Pantokrator : '모든 것의 지배자'라는 뜻의 그리스어, omnipotens :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이라는 뜻의 라틴어)란 말은 하느님의 창조 능력을 우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의 우월함과 강력한 활동력을 나타낸다. 이 우월함과 활동력에 맞설 수 있는, 그분에게서 독립된 어떤 정치적이거나 거룩한 원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에서 이 단어는 대부분 히브리어 '사바오트'(Zebaot : '만군의 주'란 뜻)의 번역어로 쓰였다. 그러나 신약성서가 (요한 묵시록과 바울로 서간의 한 군데 구약 인용문을 제외하고) 이 단어를 기피하는 것은 주목을 끈다. 그후 교부들의 저술에서는 물론 이 수식어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교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고, 스콜라신학에선 하느님이 할 수 있는 것과 (그 자체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에 관한 온갖 사변의 소재가 되었다.

현대의 헌법들이 아직도 '전능하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공포되는데, 이로써 정치권력이 정당화될 뿐 아니라, 동시에 인간 권력의 여하한 절대화에도 한계가 지어진다. 오직 계몽된 하느님 신앙만이 '하느님 콤플렉스'(H. E. Richter), 곧 인간의 전능망상(全能妄想)에 대한 결정적 해결책이다. 물론 신경에서도 (또 많은 공식 기도문에서도), 신약성서를 본받아 더 빈도가 잦고 '더 그리스도교적'인 다른 수식어들을 '전능하신'이란 수식어보다 선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극히 선하신' 혹은 (쿠란에서처 럼) '지극히 자비로우신' 하느님, 또는 - 만일 이 단어가 완전히 너덜너덜해지지 않았다면 - 아주 단순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그리스도교적으로 볼 때 가장 그윽한 하느님 수식어로서 선호할 수 있을 것이다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16).

 

현대의 하느님 신앙의 출발

하느님이 인간의 고통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앞으로 따로 다루게 될 것이다. 어쨌든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바에 따르면, 우리는 중세나 종교개혁 시대에 그랬듯이 처음부터 이 세상의 '위에' 또는 '밖에' 계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될 것이다.

① 만일 현대(헤겔과 그 후대)의 제반 조건 아래에서, 현대적, 통일적 현실 이해로부터 하느님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오직 세상 안의 하느님 그리고 하느님 안의 세상을 상정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이 세상 안에서의 하느님의 역사도 유한하고 상대적인 방식이 아니라, 유한한 것 안의 무한, 상대적인 것 안의 절대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② 하느님은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움직이는 존재로서, 건축가나 시계공처럼 이 세상 위 또는 밖에서 이 세상 안으로 역사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하느님은 역동적이고 가장 실제적인 실재로서, 그분 자신이 가능케 하고 주재하고 완성하시는 세상의 진행과정 안으로부터 역사하신다. 그분은 세계 진행 위에서가 아니라 세계 진행 안에서 역사하신다. 인간과 사물 안에서, 인간과 사물과 함께, 그리고 인간과 사물 가운데서, 하느님 자신이 세계 진행 과정의 근원이요 중심이며 목적이다!

③ 그러므로 하느님은 세계 진행의 특별히 중요한 이런저런 순간들 또는 갈라진 틈바구니에만 끼어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창조적이고 완전한 궁극 근원으로서, 이 세계의 세계 내적이고 세계 초월적인 주재자로서, 그분 자신이 원천인 자연법칙들을 온전히 존중하면서 역사하신다. 하느님 자신이 세계 진행의 모든 것을 포괄하고 주재하는 의미 근거다. 물론 이러한 의미 근거는 신앙 안에서만 받아들일 수 있다.

 

하늘에 계신?

이 모든 것을 안다면 이제 나는 아마 좀 삼가는 태도로, '제2의 천진함'(P. Ricoeur)을 지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께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과연 저 높은 곳, 창궁, 하늘을 우러러도 좋을 것이다. 그 하늘은 무한함, 투명함, 아름다움으로 인해 언제나 하느님의 상징이었고 오늘도 - 자 연과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 그럴 수 있다. 우리는 오늘날 하느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 인격이 아니라 인간을 무한히 넘어서는 존재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저 하나의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원리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오히려 하느님은 초인격적(transpersonal)이고 초인간적(transpersönlich)이다. 모든 유한한 것 안의 무한 자체, 순수한 영이시다. 무한하고 포착할 수 없는 존재이신 하느님은 (니체의 '광인 狂人'에도 불구하고) 다 마셔버릴 수 없는 바다요 문질러 지워버릴 수 없는 수평선이며, 이 땅과 인간이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태양이다. …

그러나 내가 하느님이 모든 것을 수용하고 주재하는 무한한 실재, 나의 유한성과 구별되지만 관계없이 떨어져 있지는 않은 실재라는 것을 안다면, 그렇다면 나는 이 모든 것을 감싸안는 영적 실재를 하나의 상대로 인식하고, 내 안에 또는 밖에 있는 이 상대에게 말을 거는 것이 뜻없는 일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분에게, 나를 감싸안는 무한하신 분에게, 외경심 안에서일망정 '너'라고 말할 수 있다. 과연 나는 다시금, 온갖 대륙의 사람들이 4천년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전통을 따라 해왔듯이, 기도할 수 있다. 찬미하며, 또 흔히는 탄식하며, 감사하고 애원하며, 또 때로는 흥분하여 대들며.

 

아버지 하느님?

'그러나 아버지로서의 하느님? 정말 남자의 모습을 지닌?' 이 문제에 있어서도, 여성 신학자들에게 아픈 깨우침을 받아, 나는 오늘날 하느님은 남자가 아니며 남성적이지도 여성적이지도 않고, 남성과 여성을 초월하신다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도 잘 알고 있다. 또한 우리의 모든 하느님 개념은, '아버지'라는 말 역시, 그저 비유와 은유, 상징과 암호라는 것도 알고 있다. 어떠한 하느님 상징도 저 가부장적인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를 들어 사회 안에서의 여성해방이나 교회 안에서의 여성 사제서품을 저지할 수 없음을 '확인'해 주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은 성(性)의 대립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대립을 포용하고 적극적으로 지양(止揚, 니 콜라우스가 말했듯 모순, 대립들의 상호융해)하시는 언표할 수 없는 신비임을 안다면,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이름으로는 다른 더 높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는 '절대 존재'나 '존재 그 자체'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말해주기 때문에, 다시금 그저 소박하게 그리고 탈가부장주의적으로 - 하느님의 모성(母性)을 유념하면서 - 거의 2천년 전 예수가 가르친 대로 기도할 수 있다. "우리 아버지!"

그러나 여기서 많은 현대인들은 또 묻는다. "그리스도인들이 옛 계약(창조주 하느님)과 새 계약(당신 창조물들을 돌보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책들을 근거로 믿는 것들은 다른 종교들이 그들의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들과 그렇게 완전히 달라야만 하는가?" 대답 : "아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간(間)종교적 전망을 덧붙이기로 한다.

 

세 예언자적 종교의 전능 신앙

지금까지 하느님과 창조 이해와 관련하여 개진해 온 내용은 그리스도교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도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신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아브라함의 한 분 하느님을 믿는 세 예언자적 종교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에 있어서 근동 지역과 셈족 어군이라는 공동의 기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의 근본적인 공통성이다.

- 아브라함의 한 분 하느님께 대한 신앙 :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은 이 세 전승 모두에 의하면 유일하고 참되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위대한 증인이었다.

- 우주적 순환 안에서 생각하는 역사관이 아니라, 일정한 목표에 정향된 역사관 : 하느님의 창조에서 시작하여 시간을 따라 전진하며 완성을 통한 종국에로 정향된 우주적·보편적 구원 역사.

- 예언자적 선포와 거룩한 경전들 안에 확정, 기록된 불변하는 규범적 계시.

- 유일신 신앙에 기초한 인도주의적 근본 정신 : 하느님의 뜻의 표현으로서의 열 가지 '말씀' 또는 '계명.' 여기서 우리는 세계 종교들의 공통된 세계 정신의 정화(精華), 핵심, 근본 구성요소를 볼 수 있다. 그러한 근본 요소에 상응하는 것들은 물론 다른 종교들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이 세 아브라함적 종교들은 다함께 근동과 셈족이라는 기원과 예언자적 특성을 지니며, 윤리적으로 정향된 유일신론적인 세계 운동을 이루고 있다. 평화, 정의, 자유, 인간 존엄성, 인권을 위한 이 세 종교 공동의 투신, 끊임없이 위협하는 모든 종교적 열광주의를 배제한 투신이 절실히 요구된다. 바로 이 세 종교 안에서 갈수록 강화되는 근본주의적인 경향에 직면하여.

 

동양 종교의 절대 존재

그러나 여기서 당연히 인도와 중국에 기원을 둔 종교들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이하 그저 윤곽만 그리기로 한다). 왜냐하면 그 종교들도 하나의 절대 존재, 어떤 궁극적이고 지극히 높은 실재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힌두교 전통에서는 브라흐만(Brahman)을, 불교 전통에서는 다르마(Dharma)나 열반(Nirvana)을, 중국 전통에서는 도(道)나 천(天)을.

세 가지 상이한 체계의 종교들(셈족, 인도, 중국에 기원을 둔)의 공통된 상이성을 밝혀보이는 일은 세계 종교들의 조직신학에 속할 것이다. 우리 사도신경의 첫 항목과 관련해서는 특히 다음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우리는 인도나 중국 종교들의 실제적인 또는 외관상의 다신주의에 미혹되어서는 안 된다. 인도인이나 중국인 또는 일본인이 바이어른이나 이탈리아의 바로크 성당에 들어와 본다면, 그들 역시 바로 그 즉시는 유일신 종교라는 인상을 받지 못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인도, 중국,일본의 오만 가지 귀신과 신적 존재들은 유일한 궁극적 실재와 전적으로 구별된다. 중국이나 인도에 기원을 둔 종교들도 모든 실재를 규정짓는 하나의 궁극적이며 지극히 높고 현묘한 존재를 인식, 인정하고 있다. 이 존재는 내면적이거나 지배하는 위격일 수도 있고, 모든 것을 능가하고 주재하는 원리일 수도 있다.

- 중국 종교는 오랜 옛날부터 하느님을 지칭하는 두 가지 이름을 알고 있다. 하나는 모든 자연신들과 자연의 영들의 최고 지배자인 '높은 곳에 계신 주'[上帝]이다. 다른 하나는 '하늘'[天]인데, 모든 인간의 운명을 공평정대하게 주재하는, 지성과 의지를 지닌 우주적, 도덕적 힘(질서, 본질)이다. 이 두 이름은 가장 높은 존재, 모든 것을 포괄하는 힘을 지칭하기 위해 결합된다. 이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실재를 주국 도교에서는 도(道)라고 한다.

- 힌두교(의 여러 종교들)에서는 우파니샤드 시대 이래 모든 것을 포괄하는 브라흐만이 궁극적 실재로 받아들여져 왔다(이 신앙이 온갖 인간적이고 신인동형적인 신화들과 결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신비적인 침잠(명상)을 통해 이 실재에 다다를 수 있다.

 

종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물론 많은 공통점이 있다 하더라도 종교들간의 상이점을 지워 없애서는 안 된다. 심지어 아브라함의 한 분 하느님을 믿는 세 예언자적 종교들 사이에도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유대교는 하느님의 백성과 땅에 근본 관심을 두고 있으며, 그리스도교는 메시아인 하느님의 아들에, 그리고 이슬람교는 하느님의 말씀과 경전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상이점들에 관해 승리주의나 경건한 열광주의의 그릇된 정신이 아니라, 상호 이해와 평화의 정신 안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앞으로 이어지는 장들에서 그리스도교 고유의 것에 집중하겠지만, 동시에 혹시 반유대 주의나 반이슬람주의로 오해받지 않도록 애쓸 것이다. 유대인이나 이슬람 교도들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초대하기 위해 그리스도교 고유의 것을 말하며 노력할 것이다. 그리하여 최소한 상호 이해의 길을 발견하고 한 걸음이라도 함께 가고자 한다.

한 분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윤리에 필연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은 이미 분명하다. 우리 시대와 같은 하나의 전환기, 많은 이(특히 지성인과 주요 직책에 있는 사람)들이 '전세계적으로 만연된 냉소주의'에 물든 시대에 그 많은 가치들이 너덜너덜해지고, 온갖 주의, 주장을 헐값에 살 수 있으며, 개혁에 대한 믿음은 쇠퇴하고, 도덕은 이기적인 이익 추구로 대체된 듯이 보이는 이 세상에서 하나의 새로운, 대안적(代案的)인 윤리적 근본 태도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터해 살아가는 일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것은 어디에 근거를 가지는가? 나는 인간으로서, 하느님께 대한 이상적 신뢰 안에 하나의 '아르키메데스의 점', 하나의 굳건한 입장을 가진다. 그리하여 그것에 의해 아직도 '나의 세계'를 규정하고 움직이고 변화시킬 수 있다. 하나의 절대적인 존재, 그에 의지하여 나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이 절대적인 존재와의 자발적인 결합은 나에게 이 세상의 모든 상대적인 것(아무리 중요하고 힘이 있다 하더라도)에 대한 커다란 자유를 선사한다. 이 하느님께만 나는 최종적으로 책임을 진다. 국가나 교회, 정당이나 회사, 교종이나 그 어떠한 지도자에게도 나는 책임이 없다. 그러므로 대안적인 윤리적 근본 태도가 닻을 내리는 곳은 바로 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다. 이 근본 태도의 척도는, 하느님의 말씀이요, 그것의 생명력은 그분의 영이다. 그것의 중심에는 자유와 사랑이 있고, 그것의 정상에는, 아마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새로운 희망과 삶의 기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