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패러다임의 여로 위에 있는 신학

- 자신의 신학 여정에 대한 회고 -

 한스 큉/심광섭 역

 

 

"부인! 내가 지은 책들 안에서 나 자신에 관해 말한 것은 틀린 것입니다"라고 철학자 헤겔(Hegel)은 그를 보고 놀란 여인에게 말했음에 틀림 없다. 철학자에게 이미 '그의' 체계와 '그의' 진리가 중요한 것이 될 수 없다면,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진리를 성찰하도록 허락된 신학자에게는 철학자에 비해 자기의 체계와 자기의 진리가 얼마나 덜 중요하겠는가?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이 자리에서 나에게서 나온 것처럼 "나의" 신학을 요약하기가 망서려진다.

물론 아직 다른 이유도 있다. 내가 이미 30 년 전에 썼던 박사학위 논문으로부터  최근 저서에 이르기까지 나는 다른 신학들과의 경계를 설정하는 대신 더 많은 경우 통합을 시도했다. 그리고 "신학자는 오류를 가장 적게 범하지 않는다. 즉 오류를 가장 잘 범할 수 있다. 신학은 폐쇄적인 체계로 구성될 수 없고 항상 새롭게 구상되어야 한다"라는 의식 안에서 신학의 구상뿐 아니라 구상 안에서 나는 거듭 새로와지는 신학을 수행하였다. 그러므로 신학은 나에게 개인적으로 "끊임 없이 개혁하는 신학"(theologia semper reformanda)이고 항상 새롭게 되어가야 하는 신학이다.

 

1. 가톨릭 전통주의의 패러다임

나는 "선생님의 말씀에 서약"(iurare in verba magistri)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물론 매일 매일 공부를 배웠다. 왜냐하면 배움 역시 신학 안에서 배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의심할 여지 없이 여기서 배움은 가르침과 명제와 교리를 반복 암기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나는 그런 배움의 태도로 20세에 신학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처음 7년 간의 공부는 명제를 중심으로 한 공부였는데, 마지막으로 종합시험을 위해 수백 개의 명제들을 반복하여 익혔으며,  나의 이 모든 신학교육은 로마에서 이루어졌다. 공부는 물론 라틴어로 했고, 전문용어에 대한 끊임 없는 엄격한 교육과 분명한 신학적 구성과 신학 자체의 일관성 있는 논증을 배웠다. 즉 처음엔 "문제의 상태"를, 다음에 문제의 개념을, 그리고 나서 문제에 반대하는 자들을, 마지막으로 그 문제에 찬성하는 논증과 반대하는 논증을 배웠다. 모든 강의는 라틴어로 진행되었고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읽었으며 시험 중 말을 얼버무려 버리는 일이 허락되지 않았고, 성서뿐 아니라 공의회와 교황이 내리는 정의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공부를 요구했고 삼위일체론, 영감설, 예정론의 교리가 지니는 높은 사변으로써 개념적 분석을 요구하는 강한 훈련을 받았다.

이러한 신학은 내용과 형식에서 중세의 스콜라 신학을 지향한 것이었다.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 로마의 주교들과, 또한 특히 라틴 교부신학의 천재인 어거스틴(Augustin)은 삼위일체론부터 시작하여 성례전론과 국가론에 이르기까지 신학과 교회 안에서 중세적 패러다임(paradigma)을 이끌어 냈다. 중세적 패러다임이란 신념들과 가치들과 증명방식들의 총체적 정립인바, 하나의 특정한 사귐으로부터  분리된 것이다. 11세기가 시작될 무렵 서방에서의 그레고리안 개혁이 로마 중심주의를 붕괴시키고 이로 인하여 발생한 동방교회와의 분열 이후 13세기에 나타난 인물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von Aquin)이다. 토마스는 보편적인 관심을 갖고 독자적인 사유를 전개했던 인물로서 방법론적 엄격성과 교육적 수완을 가지고 아직 존재하지 않은 통일성에 관한 위대한 철학적-신학적 종합을 철저하게 구성하였다. 이 종합은 중세적이고 특히 로마-가톨릭적인 패러다임의 고전적 표현이 되었다. 토마스는 어거스틴의 신학에 결정적으로 로마-가톨릭적 방향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도움으로 완전한 이성적 기초도 제공했다. 토마스는 전체적으로 보아 인식과 존재의 질서를 이중적으로 구분하였다. 자연적 기초와 초자연적 상부구조가 그것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두 가지 인식능력(자연적 이성 -- 은총의 신앙), 두 가지 인식차원(자연적 진리 -- 은총적 계시의 진리), 두 가지 종류의 학문(철학  -- 신학)이다. 이렇게 대부분 이층 구조를 가지게 되는데 양자는 분명하게 구분되지만 결코 대립적이지 않으며, 밑에 있는 것이 위에 있는 것, 즉 더 높은 것을 지향한다.

이러한 로마-가톨릭적 신학의 패러다임은 원시기독교의 유대기독교적-묵시문학적 패러다임과 구분될 뿐 아니라, 비잔틴 기독교의 희랍-헬라적 패러다임과도 구분된다. 로마-가톨릭적 신학의 패러다임은 중세 후기에 개혁의 시도가 헛되이 끝난 이후 종교개혁의 혁명적 패러다임 전환과 함께 두번째  교회의 큰 분열로 이끄는 위기로 빠져 들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렌트 회의에서의 복고가 진행되는 동안 반종교개혁적 패러다임이 형성되었으며, 신학적으로 특히 스페인의 바로크 스콜라 신학에서 그 특징이 나타났다. 이 중세적-반종교개혁적 신학의 패러다임은 특히 북유럽에서의 근대의 정신적이며 정치적 흐름 -- 근세철학과 자연과학, 계몽주의,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 -- 으로부터 점점 위협받고 매우 지쳐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가톨릭 국가에서는 신학과 정치, 교과서와 간행물, 교황의 교서와 종교재판 문헌을 동원하여 새롭게 반복되었고, 보다 더 많은 이성적 분석과 보다 더 적은 성서신학을 통하여 피상적으로 현대화 되었고, 마침내 제 1차 바티칸 공의회(1870)를 통하여  교의적으로 그리고 교황이 선포한 법전(Codex Iuris, 1918)을 통하여 법적으로 인가되었다.

이 신(新)스콜라 신학은, 스스로의 이해에서 보더라도,  그 어떤  "신(新)" 신학을 제시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비오 12세 시대에 신스콜라 신학으로 교육 받았고, 이 신학은 로마의 종교재판국 안에서(A. Ottaviani, F. Seper, J. Ratzinger)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강력한 이념적 요새를 점유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신학은 "전(前) 시대의 신학"(J. Kleutgen), 곧 중세의 반종교개혁적 신학을 원상복귀하려고 했던 것이다. 신스콜라 신학은 낭만주의와 메테르니히(Metternich)의 복고주의의 정신으로써 위대한 양식을 가지고(신스콜라주의, 신낭만주의, 신고딕주의, 신그레고리안주의) 전체 교회 안에서 중세적-반종교개혁적 패러다임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당대에 신신학의 선구자로서 심판 받았던 토마스는 그동안에 기독교의 "일반적 스승"(doctor communis)이 되었다. 13세기의 학문적 전위군이 근대적 세계상과 과학에 대하여 모든 수단을 갖고 방어함으로써 합리적 연역적 결론신학을 대변하는 19/20세기의 후위군이 되었다 (1950년 비오 12세의 교서 "인류"는 새로운 "오류의 총괄"과 동시에 마리아의 승천에 관하여 보고한다).

물론 최소한 로마전통의 근본 인식이 당시의 그와 같은 신학을 통하여 보존되었다. 스콜라 신학과 신스콜라 신학의 모든 사상적 과정을 특히 근대철학과의 논쟁 속에서 한번 훓어본 사람이라면 신학과 교회와 교직 및 최근의 교황의 교서에 이르기 까지 많은 것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여기서 지향하고 있는 신학적 명료성은 매혹하기에 충분하며, 심지어 잠시 동안 사람들로 하여금 안전하고 흔들리지 않으며 그 위에 단지 계속 쌓기만 하면 부족함이 없는 교리의 터전을 -- 우선 철학과 그리고 신학 안에서 -- 소유하고 있다고 믿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자는 "신스콜라 신학의 이 명제가 얼마나 보잘 것이 없는가," "신스콜라 신학이 얼마나 침묵하고 있었는가," 다시 말해 "신스콜라주의가 신기하게도 얼마나 선택적이며 선별적이고 말 그대로 근본적으로 '이단적'이었는가"를 인식하였다. 이를테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한 성서적 고백은 하나의 고도의 개념적 수학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신은 창백한 그리스도에 관한 이론이 되었다. 권위주의와 그의 신학에 대한 나사렛 예수의 처절한 투쟁이 구성적 역할을 하지 못한 것처럼 그의 산상설교도 구성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사실 여기서는 기쁨을 만들고 해방하는 소식인 그리스도 사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건전한 가톨릭 교리"(sana doctrina)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로마 가톨릭 교리는 사법적인 목적으로 형성되었으며 교회의 형벌로써 안전장치를 보증받은 가르침의 규칙으로서 신학자는 마치 법률가가 그의 법률 조항을 다루는 것처럼 그렇게 다루어야 한다. 다시말해 법실증주의가 실정법으로부터 유래하지 않은 모든 원리를 거절하고 현존하는 법을 법과 정의의 처음과 마지막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교의실증주의(Dogmenpositivismus)는 공의회와 교황의 공식적 문서를 신학, 즉 하느님의 계시의 처음과 마지막으로 받아들인다. 교의실증주의는 1854년 "성모 마리아의 기념해"에 나온 하인리히 덴찌거(Heinrich Denziger)의 "교회의 교리결정에 대한 교서"를 논의할 수 없는 교의적 율법책으로 만들고 성서를 인용하여 기초공사를 하며, 비판적 사상을 갖고 있는 신학자들이 이에 대한 토대를 놓지 못하게 했다. 따라서 신학자들에게 삼위일체론으로부터 시작하여 기독론과 교황의 무오류설에 이르기까지 "신비" 앞에서의 "지성의 희생"과 "이성의 제물"을 강요한다.

실제로 신스콜라적 덴찌거-신학은 이 덴찌거 교서를 사실상 교의학 전체를 구성하기 위한 도식으로 만든다. 데찌거-신학에 꼭 들어맞는 것은 교회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들어맞지 않는 것은 비교회적인 것이나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이 신학은 현대인이 이 신학의 전문용어를 이해할 수 있는지, 많은 명제들에 대한 주석적 기초가 연구의 정도에 부합한지, 명제에 대한 증명이 믿을 만한 것인지 혹은 반대 의견에 대한 대답이 말싸움으로 보이는지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우선 선포의 상황이 아주 무시되었으며, 설교자와 교리교사는 빵대신 돌을 얻는다. 즉 그 속에 들어 있는 정신이 아니라 문자가 지배하게 되며 결국 신속하게 변하는 현실에 신앙법칙의 기계적 적용은 쓸모 없는 것이 되었고 신앙의 진리와 신앙의 진실성 안에서의 신앙의 위기를 낳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의회 이전 시기의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해방의 소식이 들려 왔는데, 신스콜라신학의 체계라는 황금으로 된 감옥 한 가운데서, 순수한 실증주의적 교의해석의 난점을 "사변적" 해석을 통하여 해결하려고 하는 시도이다. 나에게 이 신학은 특히 칼 라너(Karl Rahner)의 이름과 결부되어 있다.

 

2. 사변적 출구?: 칼 라너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가톨릭의 정상신학(Normaltheologie)을 넘어서서 질문을 제기했던 위대한 프랑스 신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콩가르(Yves Congar), 루박(Henri de Lubac), 다니엘루(Jean Danielou), 보이라르(Heri Bouillard)와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이다. 그 중에서 콩가르의 작품은 교회론과 교회개혁을 위하여 나에게 모범적인 것이었으며, 샤르댕의 작품은 신학과 자연과학의 화해를 위하여 모범적인 것이었다. 이것들은 교황의 교서 "인류의 종"(1951)과 사제들의 억압(1953)과의 관계 속에서 종교재판적 조처에도 불구하고 모범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독일어를 말하는 학생들은, 특히 독일 교의학자가 덴찌거 신학을 비판하고, 가톨릭적 이해에 따라서도 역시 교의는 시간 제약성을 가지며, 교의 발전의 역사뿐 아니라 교의 망각의 역사도 있으며,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가장 즐거운 공의회적 규정(참 신이며 참 인간)은 단순히 신학적 사유의 끝이 아니라 동시에 신학적 사유의 시작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을 때, 이러한 주장을 경청했다. 그러므로 교의는 단순히 반복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따라 역시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라너 신학의 교의적 형식은 형식적 정통주의를 이유로 문자적이며 글자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나(라너 자신은 후에 덴찌거 신학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키지 않고 새롭게 편집하였다) 전 내용이 적지 않게 재해석되어 있다. 오랫동안 나는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헤겔 및 하이데거에게서 훈련된 고도의 변증법에 대하여 솔직히 놀랐다. 또한 나는 신앙고백과 교리의 해석에서 다양하게 표현되는 신앙 안에서의 교회의 통일과 연속성에 대한 염려를 긍정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신앙의 형식을 변증법적으로 해석하여 신앙의 형식은 남아 있고(보수주의자들의 주 관심사) 내용은 새롭게 주조되는 방법(진보주의자들의 흥미거리)은 훌륭한 것이 아닌가?

교의의 해석에서 이와 같은 형식적 개념의 변증법은 비논리적일 필요는 없으며 대부분 또한 비논리적이지 않다. 개념의 의미를 반대로 해석하기 위하여 개념이 옛 의미로 이해될 필요는 없다. 항상 쉽게 통찰가능한 것이 아닌 것을 능히 통찰했던 편견에 사롭잡히지 아니한 많은 관찰자들에게는 이런 과정이 역사적 진리와 학문적 정직성에 반대되는 것으로 보였을 게 분명하다. 예를 들어, 이단들과 분리주의자들, 유대인 , 모슬렘 교도, 힌두교도, 그리고 (선한 신앙을 지닌) 무신론자들, 이들은 무오류적으로 규정된 교의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에 따르면 "영원한 지옥"으로 가야 마땅한 사람들인데, 이들이 어느날 갑자기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선포되었고, 그러므로 이들은 예외 없이 이미 로마-가톨릭 교회에 속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자명하게도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7 개의 모든 성사(성례전)는 그리스도가 제정했다는 트렌트의 교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한 교회(암묵적으로 7 성사를 포함하여)를 제정했다라는 애매한 진술이 된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의 절대적 우선성의 규정으로부터 주교들의 동료애에 대한 암묵적 진술이 나온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성서학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고 나는 자문한다.

그러나 중세신학적 패러다임에 해당하는 것은 다음의 것이다: 모든 자연인에게 귀속되는 "초자연적 실존"( bernaturliche Existenzial)에 관한 라너의 가설은 신스콜라적인 2층 구조 사상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은 마치 (비오 12세가 지체 없이 심판한)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영원한 하느님을 직관하고자 하는 추구가 있다(desiderium naturale beatitudinis)는 예수회의 사제이며 추기경인 앙리 드 루박의 해결책이 2층 구조 사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과 같다. 양자의 사상은 모두 요셉 마레샬(Joseph Mar chal)의 가톨릭 초월철학으로부터 유래하며 당시에 뜨겁게 논쟁된 토마스적 2층 구조 사상의 거짓된 극복이며, 이 사상은 오늘날 자연-초자연에 관한 전 용어와 함께 잊혀지고 있다. 라너가 교황의 무오류설 논쟁(1970)에서 교회의 편에 섰고 스스로를 "체계내적" 신학자로 선언한 사실은 추후에 그를 최후의 위대한 (자극적인) 신스콜라주의자로 알려지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달리 생각할 수 있는가? 교회의 교의가 그러한 해석을 필요로 한다면 신학은 어떠한 종류의 터전을 가져야 하는가? 젊은 신학자로서 새로운 터전을 조망하는 자는 칼 바르트(Karl Barth)의 교회 교의학이 성서와의 연결 속에서, 성서해석의 깊이 속에서, 예술적인 교의학의 건축술에서 그리고 교의학을 형성하는 사상적이고 언어적인 힘 속에서 그와 같은 신학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3. 위기신학: 칼 바르트

개신교 신학은 17/18세기 루터적이며 칼빈적인 엄격한 정통주의 시대 이후에, 계속하여 계몽적이며 근대적인 신학의 패러다임을 관철시켜 나갔다. 이 패러다임은 19세기 쉴라이에르마허(F. Schleiermacher)에 의하여 고전적인 체계를 얻었고 자유주의 신학과 함께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근대의 모든 것에 너무 잘 적응하였으며, 결국 낙관적이며 개신교적인 문화적 개신교(Kulturprotestantismus)라는 수로 안에서 항해하였다. 문화적 개신교는 1차 세계대전의 결말과 함께 끝이 났다. 독일의 지도적 신학자들은 축제적인 성명서를 쓰면서 이 전쟁을 환영하였고, 자유주의 신학은 철저히 전쟁과 타협한 셈이다.

1차 세계대전의 붕괴 이후의 일반적인 정치적이며 경제적이고 문화적이며 정신적인 위기 속에서 위대한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으로 대표되는 당시 지배적인 시민-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스위스 목사였고 독일 교수였던 칼 바르트(Karl Barth)는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발흥하는 것을 도왔다. 후에 "변증법적 신학"이라고 불리운 바르트의 "위기신학"은 문화와 사회, 제도와 전통 및 권위의 붕괴에 직면하여 패러다임의 전이를 요구했다. 즉 주관적인 경험과 경건한 감정을 떠나 성서에로, 역사를 떠나 하느님의 계시에로, 하느님 개념에 대한 종교적 언급을 떠나 하느님의 말씀의 선포에로, 종교와 종교성을 떠나 그리스도 신앙에로, 인간의 종교적 욕구를 떠나 전적 타자이시며 오직 예수 안에서 계시하시는 하느님에게로 옮겨지는 패러다임의 전이를 요구한 것이다.

전적 타자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신성의 이름으로 바르트는 단호하게 모든 종류의 "자연신학"에 대하여 항변하였다. 자연신학은 쉴라이에르마허의 뒤를 따라 하느님과 그의 계시 대신 전적으로 경건하며 종교적인 인간에 정향된 자유주의적 문화적 개신교의 형태로, 혹은 스콜라신학과 제 1차 바티칸공의회를 따라 하느님과 인간을 동일한 차원에서 다루며, 인간과 하느님, 자연과 은총, 이성과 신앙, 철학과 신학의 협력을 마련한 로마 가톨릭주의의 형태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변증법적 신학"은 종교개혁자들의 위대한 의도를 다시 받아들여 인간을 더 이상 조화로운 자연-초자연의 구도 속에서 보지 않고, 날카로운 전위의 설정 안에서 "모순 속에 있는 인간"(E. Brunner)으로 보았다. 그렇지만 위기 신학자들은 마르틴 루터적인 의미에서 이성을 타락한 "창녀"로 보거나 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곡예사"로 보거나, 인간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했다거나 세계를 "악마"의 세계로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이미 개신교적인 해체(Diastase)는 종교개혁과 함께 토마스주의적인 종합을 분리하였다.

바르트의 신학은 이처럼 교회와 신학에 관한 중세 로마-가톨릭적 패러다임에 대한 계획적인 저항일 뿐 아니라 계몽주의적 근대-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자유주의적 문화적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주의는 궁극적으로 지배적인 정치체제, 즉 독일 제국과 그의 전쟁 정책뿐 아니라 국가사회주의에도 무비판적이며 순응적으로 편승하였다. 개신교 "독일 그리스도인"(deutsche Christen)은 국가사회주의에서 일종의 계시를 보았으며 "지도자"에게서 기독교와 독일을 연합하는 새로운 루터 심지어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러나 가톨릭의 2층구조 신학을 대변하는 저명한 교의학자 미카엘 쉬마우스(Michael Schmaus)나 교회사가 요셉 로츠(Joseph Lortz)는, 기독교가 초자연적 차원에서 원한 것을 국가사회주의는 자연적 차원에서 실시할려고 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질서, 통일, 권위, 하나의 제국, 하나의 지도자).

이러한 맥락에서 칼 바르트의 "위기 신학"은 근대적 패러다임에서 근대이후적 패러다임으로의 전이에로 불을 붙였다. 물론 근대이후적 패러다임은 당시에 불투명한 윤곽으로써만 인식할 수 있었다. 계속적으로 다음과 같은 놀라운 일이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당시에 이미 칼 바르트는 결정적으로 근세의 유산인 국가사회주의와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평화와 사회정의를 위한 정치, 기독교 "사회주의" 및 모든 정치적 체제에 대한 교회의 비판적이며 예언자적 태도를 찬성하는 발언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일은 그의 새로운 신학적 개입이다. 바르트는 "하나의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고백으로써 1934년 바르멘 총회에 감명을 주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또 다른 사건이나 힘, 형태나 진리가 하느님의 계시"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칼 바르트의 위대한 의도는 오늘날 보존되어야 하며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향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성서의 인간적 증언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주제로 떠오르며, 하느님의 말씀은 단지 역사적 연구 뿐 아니라 신앙을 요구한다. 교회는 인간의 말로 된 선포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며,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과 신뢰하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하느님에 관한 모든 진술의 결정적 시금석인 성서의 사신(메시지)은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되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자신은 신자에게 말씀하시고 행위하신다.

내가 칼 바르트의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바르트는 1935년 본(Bonn) 대학의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추방되어 바젤 대학교에서 거의 20 년 동안 "교회 교의학"을 가르쳤으며, 그가 결코 완성하고자 하지 않았던 기념비적 작품을 한권 한권 출간하고 있었다. 예언자적이며-표현주의적인 로마서의 신학으로부터 바르트는 그 사이에 "신정통주의"(이 단어는 미국에서 사용되고 있으나, 여기서도 완전히 피할 수 없다) 조직신학자가 되었으며, 그 자신 하느님의 예정의 신비를 수백 쪽에 달하는 글을 통해 기독론적으로 해명하려 했으며 천사와 악마에 대해서도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다. 초기 "변증법적" 신학의 시기에 하느님의 은총을 위한 깔대기로써 취급되었던 하느님의 창조는 "교회 교의학"에서 4권으로 다루어졌으며, 창조로부터의 이방인의 신인식을 위하여 결론을 이끌어 내야 했다. 그러나 바르트는 창조론에서 아직 이러한 통찰에 저항한다. 이제 완전하게 출판되어야 하는 그의 교의학 마지막 권인 화해론에 이르러 비로소, 그러나 많은 예방책을 마련하면서, 바르트는 "하나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빛"이 있으며, "하나의 말씀" 외에 "다른 말씀"이 있음을 인정한다. 여기서 "자연신학"과 철학 및 인간 경험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드러나며, 간접적으로 그리고 침묵 속에서 바르트가 초기에 단순히 불신앙과 우상 및 행위를 통한 의(義)로서 평가절하했던 세계 종교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엿볼 수 있다.

이로써 패러다임 전이의 필연성으로부터 자유주의 신학을 떠나 본의 아니게 신정통주의에로 흘러간 "교회 교의학"의 닫혀진 체계는 적어도 원칙적으로 무너졌으며, 디트리히 본회퍼가 나치스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에서 비판한 바르트의 "계시 실증주의"는 근본적으로 터전을 상실하였다. 만일 바르트가 다시 젊어질 수 있다면 오늘날 그는 자신의 신학을 다시 반복하는 바르트주의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바르트는 그의 생애 마지막 무렵 하느님의 신성보다는 하느님의 인간성의 표시로 옛날의 신학 논쟁자인 에밀 브룬너와 화해할 것이다. 브룬너는 일전에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 안에 있는 "접촉점"의 이론으로 인하여 바르트의 날카로운 "반대(Nein)"를 받고, 결국 바르트와의 결별하였다. 오늘 바르트는 그의 위대한 반대 논객이었던 루돌프 불트만과도 화해할 것이다. 불트만은 바르트의 신학적 근본 입장(하느님의 신성, 하느님 말씀, 선포, 신앙...)을 모두 긍정하였으나 자유주의 신학의 중요한 관심사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주석에서의 역사비평적 방법과 인간 실존을 향한 비신화화론과 성서해석학의 필연성을 견지하려고 했다. 이러한 시도는 근대 이후적이며, 근대 이전적이 아니다.

 

4. 주석학과 교의학 사이의 분열 극복

학창 시절에 나는 역사-비평적 주석학을 그레고리안 대학의 신스콜라 신학 과정 안에서는 배울 수 없었으나 교황의 성서연구소와 후에 파리의 가톨릭 연구소와 소르본느 대학에서(Oscar Cullmann) 배울 수 있었다. 1959년 독일의 대학으로 옮기면서 교의학자 역시 역사적 성서비평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야 했다. 50년대 말과 60년대 초에 독일 신학은 칼 바르트의 교의학보다 루돌프 불트만과 그의 제자들의 해석학과 주석학에 의하여 지배되었다.

불트만의 청렴한 진실성과 포괄적인 역사적-주석적-철학적 지식으로부터 연유하여 - 내용적으로 종교개혁자들과 방법론적으로 하이데거의 실존분석과 연결하여 - 성서의 말씀을 현대인을 위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하며 현대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다시 하느님의 말건넴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불트만의 방법은 나에게 처음부터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불트만이 전기 하이데거의 포로가 되어 실존주의적 환원을 다음과 같은 점에서 감행하고 있음을 생각하였다:

- 불트만은 처녀탄생, 지옥으로의 여행과 승천등과 같은 신화를 옳게 비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나친 비평은 역사의 예수를 무시한다.

- 불트만은 인간실존을 강조하기 때문에 우주와 자연 및 환경세계에 대한 관심을 어둡게 한다.

 - 불트만은 실제적 세계사를 인간의 역사성으로, 참된 미래를 인간의 미래성으로 환원하며, 그의 세계-내-존재의 신학은 구체적 사회와 정치적 차원을 간과한다. 물론 불트만은 국가사회주의 시기에 바르트와 함께 용감하게 싸웠음에도 그렇다.

튜빙엔에서 불트만학파의 주석학은 에른스트 케제만(Ernst K semann)이라는 인물과 결부되어 있는 바, 그는 스승 불트만에게 충성과 동시에 비판을 보냈다. 케제만은 가톨릭적 지평 앞에서 -- 주석학적으로 기껏해야 칼 헤르만 쉘클레(Karl Hermann Schelkle)로부터 자문을 구하고 있었다 -- 바르트와 불트만 사이에서 입장을 찾았던(1960년 이후) 젊은 가톨릭 신학자에게 진정한 도전이 되었다. 특히 케제만은 불트만 학파가 역사적 예수와 교회론적 문제점을 재발견하고 예리한 해석학적 문제를 제기하도록 한 인물이다.

그 때부터 나는 복음과 신약성서는 근본적으로 구분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이러한 원칙적인 구분이 모든 신약성서의 사실비평에 포함된다는 것을, 나는 교의학자로서 -- 지금까지의 가톨릭과 개신교의 교의학에서 통용되어 왔던 것과는 달리 -- 역사-비평적 주석학의 결과를 집중적으로 연구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교의학에 포괄적으로 통합했을 때 비로소 충분히 알게 되었다. 그 일은 오랜 세월 동안 힘들고 논쟁적인 길을 걷는 일이었다.

조직신학은 주석학을 보조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신학적 기초학문"(J. Blank)으로써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나는 점점 분명하게 인식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대부분의 교의학자들은 실상 거절하지만 나는 원칙적으로 받아들이며 실천적으로 실현하여, 비판적으로 보충해야 하는 해석학적-방법론적 귀결을 찾았다. 이것은 종교개혁과 근세의 패러다임 전이를 수행하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 신학의 "영혼"과 "삶의 원리"는 성서에 우위성을 두는 것이다. 신약성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규범을 주는 규범)에 관한 근원적이며 본래적인 전승이 그 이후에 따르는 모든 교회 전승(교부와 공의회와 교황의 규범화된 규범) 보다 우선한다는 사실로부터 주석학과 교의학의 관계설정을 위한 결론을 내려야 한다. 이로써 교의학 - 나는 기초신학과 윤리를 포함한 조직신학이란 이름을 선호한다 - 의 가치가 결코 침해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기초로부터 보강된다.

물론 신학적 기초학문으로서의 주석학에 관한 논제는 일방적으로 교의학(그리고 윤리와 실천학)을 목적으로 형성될 수 없다. 이 논제는 신약성서가 "채석장"으로써만 사용될 수 없는 것처럼 특히 교리사와 신학사 및 교회사를 고려하여 주석학 자체에 대한 요청으로서 구체화 되어야 한다. 신학의 "기초"는 전체가 아닌가! 내가 이미 다양하게 행한바 조직신학자는 주석학자의 요청에 부응하여 보다 포괄적인 논제를 형성할 수 있다: 역사-비판적으로 기초된 주석학은 역사-비판적으로 책임있는 교의학을 촉구한다.

사실상 주석학과 조직신학 사이의 균열은 현대 교의학의 불행이다. 그리스도적 원천으로부터 사유하려고 하는 교의학은 역사-비판적으로 탐구된 성서적 실상의 근거 위에서만 수행될 수 있다. 게르하르트 에벨링(Gerhard Ebeling)은 옳게 이사실을 주장한다. 비역사적 교의학은 아직 현대적이라 할지라도 비역사적 주석학과 같이 낡은 것이라는 주장은 충분할 수 없다. 주석적인 업적을 불충분하게 취사선택하여 인식하는 교의학은 그 자체 불충분하다.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대신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의 매너리즘에 빠져 권위만을 요구하는 교의학은 학문적이지 않다. 학문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와 방법론적인 훈련, 결과에 대한 비판적인 논의와 문제 제기 및 방법에 대한 비평적 검토가 주석학에서와 같이 교의학에도 요구된다. 성서와 마찬가지로(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리 역시 역사-비평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현대 주석학에서와 같이 현대 교의학 역시 엄격한 역사적 착상을 추구해야 하며 타협 없이 관철되어야 한다. 또한 교의학의 진리는 끊임 없이 역사적으로 뿌리내린 진리여야 한다!

오늘날 주지하는 바와 같이 상당히 진지한 교의학은 그 어떤 방법으로든지 학문적이며 비판적이고 역사적이 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모든 진지한 교의학은 그 어떤 방식으로든지 역사-비평적 책임에 관심을 갖는다. 이 때에 결정적인 것은 역사-비평적 책임을 구체적으로 인지하는 방법과 주석의 결과를 적용하는 방법이다. "각 교파의 교리를 (모든 교파는 자신의 교리를 가지고 있다) 비평적 주석의 빛에서 해석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 그 반대가 아님)는 결정적인 물음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혹은 기성 교회의 가르침(가톨릭, 정교회, 개신교회)과 갈등에 빠졌을 때 이것을 갑자기 역사-비평적 방법에 "한계"를 설정하려 들지는 않겠는가하는 물음이다.

비역사적이며 타협적인 성서주의와 교리주의는 개신교 신학의 - 원죄, 지옥과 마귀,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에 관해서도 - 자의식적 발전 속에서 허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 할 수 없다. 불트만은 찬양받았으나 실제로 하르낙처럼 그렇게 무시되었다. 그의 실존론적 해석은 찬양되었으나 비신화화론은 은닉되었다. 가톨릭 신학은 트렌트 공의회의 특별한 언명, 이를테면 성사에 관한 언명이나, 교황과 공의회의 무오류에 관한 제 1차 바티칸 공의회의 특정한 언명이 거의 신약 성서나 고대 교회의 역사로부터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시 등장한 로마의 종교재판(J. Ratzinger) 앞에서의 불안 속에서 기껏해야 호기심을 유발하는 외형적 해결(온건한 무오류나 오류가능한 무오류)만을 시도한다. 우리는 지금 "얼어붙은 교회" 안에 살고 있다고 칼 라너는 죽기 바로 직전에 말했다.

교의학적으로 처음부터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 바로 그 곳에서 자주 교의학적 태도의 전형적인 도약이 관찰될 수 있다. 바로 그 곳에서 가톨릭 혹은 개신교 교의학자는 주석적으로 책임감 있게 산을 한발자국 한발자국 오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적 인식의 길이 계속 열려 있지 않은 듯이 보이는 곳에서는 갑자기 위로부터 "정상"으로 날아와 마치 하늘 나라에서 다 보았다는 듯이 삼위일체 하느님과 그의 신비에 관하여 말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역사 비평의 업적을 무시하지 않지만 주석학과 교리사의 자극을 받아들여 소위 높은 교리와 관계된 신학을 수정하는 대신에 역사 비평을 사변적으로 무색하게 한다.

따라서 오늘날 조직신학자로서 교리를 신스콜라적으로 보존하거나 사변적인 조화를 꾀하는 대신 철저한 역사-비평적 결단을 감행하는 일은 쉬운일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신학하는 모든 행위에서의 첫번째 상수가 중요성을 얻게되며, 나는 그 상수에 따라 신학적 작업을 펼쳐 나가려 하고 있다.

 

5. 신학의 근본 규범으로서의 그리스도 사신

나는 새로운 세계신학적( kumenisch) 패러다임이 가지는 첫번째 신학적 상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비평적 세계신학의 근본 규범은 유대교 전통으로부터 나온 그리스도 사신(메시지),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이 그리스도의 원천적이며 근본적인 증언은 구약과 신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전적으로 살아 있는 역사의 예수에 집중되어 있으며, 또한 나의 개인적 그리스도 신앙에 대하여도 규범이며 비판 기준이다.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 신앙고백은 단순히 "예수는 주님이시다"(Iesous Kyrios)라는 고백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주님은 황제나 교황도 아니며, 국가나 교회도 아니며, 정당이나 지도자도 아니며,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바로 나사렛 사람 예수시다. 그분은 선포와 행동과 싸움과 고난과 죽음과 새로운 삶 속에서 하느님 자신을 대변한다. 예수는 하느님의 형상이며 말씀이고 아들이며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신앙은 오늘날의 문제의식에 직면하여, 신학이 역사-비평적 예수 연구를 통해 책임지고 있으며, 교회적인 오해나 비교회적인 오해를 막고 있다. 역사의 예수에 대한 역사적 되물음은 신약성서의 자료를 근거로 가능하며 오늘의 발전된 문제의식에 직면하여 필수적이다. 참으로 기독교는 신화나 전설이나 동화에 근거해 있지 않으며, 하나의 가르침(기독교는 "책의 종교"가 아니다) 위에 근거해 있지 않다. 기독교는 우선 역사적 인격이신 나사렛 예수 위에 근거해 있다. 그분은 하느님의 그리스도로 믿어진다. 신약성서의 증언, 즉 선포적 성격을 지닌 보고로부터 예수의 전기적이거나 심리적인 발전을 재구성하는 일이 불가능하며 또한 전혀 불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증언으로부터 신학적인 이유와 목회적인 이유 때문에 긴요하게 요청되는 것을 재구성하는 일은 가능하다. 즉 수백 년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채색되고 은폐된 그의 사신과 삶의 실천, 그의 삶의 운명과 인격에 대한 근원적 윤곽을 새롭게 통찰하는 일은 가능하다. 역사의 예수를 "재구성"하는 일이 아니라 "재발견"하는 일이다. 예수의 세례부터 그의 죽음에 이르는 처음 제자들의 정신적 여행 보고서를 추적하여, 왜 그들이 예수의 죽음 후에 예수를 살아 있는 그리스도로서 하느님의 형상과 말씀과 아들로서 알린 이유가 무엇인지 오늘날의 인간에게 분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이 점에서 나는 가톨릭 교의학자 스킬레벡스(Edward Schillebeeckx)와 일치한다. 예수의 선포와 삶의 실천으로부터만 그의 처형을 이해할 수 있으며, 십자가와 부활은 추상적인 "구원사건"으로 형식화될 수 없다.

역사 자체로부터 제기된 물음을 고려하고 가능한한 광범위하게 대답할 수 있는 신학만이 적어도 서양과 동양에서 서구적으로 교육받은 사람 가운데 살아 있는 오늘날의 첨단 문제 의식을 지닌 신학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은 학문적 신학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비평뿐 아니라 다른 문학비평적 방법을 적용하는 일은 불가피하며 이를 통하여 학문적 확실성과 최고의 가능성을 지닌 역사의 예수를 찾아낼 수 있다.

 

6. 신학의 지평으로서의 오늘의 경험세계

신학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항상 세계와 대면하고 있다는 점에 신학은 일치한다. 당대의 시대에 부합하는 신학이란 신학이 현대의 세계와 대면하고 세계의 궁핍과 희망에 대하여 개방할 때 가능하다. 나는 새로운 패러다임 안에 있는 신학의 둘째 상수를 다음과 같이 확정한다: 비평적 세계신학의 지평은 애매모호성과 우연성과 변화가능성 속에 있는 우리의 현재적 경험세계이다. 물론 우리의 애매모호한 오늘의 현실은 실제적 경험 뿐 아니라 역사적 경험을 통해 구성된다. 그리고 근대에서 탈근대에로의 이행과정 중에 있는 오늘의 인류의 경험과 비판적이며 구성적으로 관계하는 신학 만이 오늘을 위한 신학일 수 있다.

종교개혁의 패러다임 전이 이후 17/18세기에 근대성에로의 새로운 패러다임 전이가 표출된 사실에 대하여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근대적 패러다임은 근대철학과 과학 및 국가와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의하여 규정된다. 엄격한 의미에서 "근대적" 총체성의 좌표는 종교개혁과는 반대된다.그리고 우선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에 반대하는 관철을 시도하지 않았던 과거를 지향하는 문혜부흥의 많은 경향들과 연결하면서 신앙에 대한 이성의 우위, 신학에 대한  철학의 우위(철학의 인간학적 전환과 함께), 은총에 대한 자연의 우위(자연과학, 자연철학, 자연종교), 점차적으로 세속화하는 세계에 대한 교회의 우위를 목표로 한다. 간단히 말하면, 기독교의 특이성에 대하여 보편적 인간 세계가 강조된다. 이러한 점에서 근대성의 특징을 도식적으로 고찰하면, 종교개혁과 반대되는 위상을 띄게 된다.

 

           이    성 <-------------------- 신    앙

           자    연 <-------------------- 은    총

           세    계 <-------------------- 교    회

           철    학 <-------------------- 신    학

           인간세계 <-------------------- 기 독 교

              

7. 근대-계몽주의적 패러다임에서 탈근대적 패러다임으로

근대 세계에서 종교는 점점 사사화되었고 무시되었으며, 왜곡되고 -- 교회의 반동적 태도로 인하여 - 정말 박해받았다. 아무튼 신학은 이러한 반대적인 전체 흐름으로 현혹될 수 없었고 이제 변증학으로 굳어진다. 17/18세기의 교파적 사고가 끝나고 계몽주의와 독일 관념론 및 낭만주의와 함께 근대적 사고가 등장함으로써 신학은 결코 부정적으로만 이해될 수 없는 시대의 분깃점을 맞이한다. 이 시대에 역시 위대한 신학이 있었고, 근대신학의 고전적 대표자인 쉴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에게 칼 바르트 자신은 항상 존경을 보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까지 다양하고 충만한 경험이 근대의 신학 형성에 이바지 하였으며 인간과 세계, 우주와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러한 경험은 탈근대의 시대에 철회될 수 없다. 근대의 자연과학, 근대철학, 근대 민주주의, 근대의 종교비판, 근대의 인문-사회과학, 근대의 주석학과 역사가 낳은 영속적 결과가 신학을 변화시키지 않았던가!

양차 세계 대전의 와중에서의 총체적 문화 붕괴 이후, "근대의 종말"(Romano Guardini)과 새로운 "시대의 정신 상황"(Karl Jaspers)이 항상 되풀이되어 진단되었고, 모든 것이 거짓이 아니라면, 사실상 우리는 근대적 패러다임에서 탈근대적 패러다임에로의 전이 한가운데 있다. 탈근대적 패러다임을 여기서 개략적으로 다음의 몇 가지 특징으로 설명하여 보자. 우리 시대는 여러 가지 점에서 투시불가능하다:

- 1918년이나 1945년과 비교하여 세계정치적 위상이 완전히 변하였으며 유럽의 제국주의와 식민지주의가 다중심적 세계를 통해 해체되었다.

 - 19세기에 이미 알려졌고 양차 세계 대전으로 강화된 근대적 해방운동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넓은 기반 위에서 파괴되었다.

- 제국주의와 식민지주의에 대한 투쟁뿐 아니라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불의한 사회구조에 대한 투쟁이 발생하였고 여성, 유색인, 제 3세계인들이 완전한 정의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 근세의 힘인 과학과 기술과 산업이 심각하게 문제시되었고 인간의 인간성과 지구의 거주 가능성을 위하여 근세의 힘에 대한 윤리적 책임과 제어가 새롭게 부과되어야 한다.

- 환경운동으로부터 평화운동에 이르는 맣은 대안적 운동들이 많은 관점에서 탈유물론적 세계관을 예고한다.

 - 근대 세계의 위대한 신인 "진보"가 거짓된 신으로 밝혀졌고 참된 하느님을 향한 외침이 다시 커졌으며, 이것은 단지 기독교 안에서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요컨대, 이런한 것은 오늘날 특히 근대의 결함을 한번도 통합하지 않았으며 지금 새로운 탈근대적 패러다임을 만족시켜야 할 신학에 대한 굉장한 도전이다. 이 때에 근대의 비판적 결함은 간과될 수 없다. 중세적-반종교개혁적-계몽주의를 비판하는 패러다임을 신봉하는 자들이 탈근대적 패러다임을 대변하는 자들이 이성과 계몽주의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을 보고 기꺼이 그러나 존경하는 마음 없이 제휴의 손을 내민다. "계몽주의"는 결코 간과되거나 철회될 수 없다. 계몽주의는 계몽주의의 실적과 한계를 넘어서는 계몽화된 계몽주의를 통하여 완성되어야 한다. 이 새로운 계몽주의는 종교를 더 이상 무시하거나 왜곡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새로운 방식으로 비판적으로 통합한다. 모든 것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제1세계, 2세계, 3세계의 종교가 재발견되는 과정속에 살고 있다. 종교는 모든 종교비판적 색조에 대한 문명 진단자보다 더 저항적임이 입증된다. 그러나 신학은 어떠한가? 나는 이러한 정신사적 상황 안에서 신학에 주어진 기회를 단지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8. 탈근대적 패러다임의 신학

현대의 경험 지평 앞에 열려 있는 신학, 엄격하게 학문적이며,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세계 개방적이며 현재와 관계하는 그런 신학만이 모든 다른 학문들과 함께 대학에서 그의 자리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와 같은 신학만이 참으로 세계적 신학인데, 이는 여전히 확산되고 있는 교파적 분리 정신을 떨쳐내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사람, 그저 사람인 사람을 향하여 관용의 마음을 갖되, 기독교의 특수성을 밝힐 과제를 안고 다가서는 그런 신학이다.

신학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 신학의 인식비판적 근거는 무엇인가? 달리 말해 신학은 오늘날 우리세계의 애매모호성과 우연 그리고 변화가능성에 직면하여 -- 지금 이 글의 마지막에 즈음하여 처음의 생각으로 되돌아 간다 -- 소위 인간 인식의 명증적 기초에 대한 물음을 제기해야 하지 않는가? 이 물음은 신스콜라 신학과 중세적 패러다임 뿐 아니라 데카르트(Descartes)와 근대의 패러다임에도 제기된다. 근대적 패러다임은 방법적 회의의 길 위에서 참으로 좁은 길,지적이고 사변적인 확실성의 길 위에 있지 않은가? 사람이 참으로 철저하게 의심한다면 이 확실성도 의심해야 하지 않는가? 따라서 우리는 보다 더 깊이 생각해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의 이성적 사유의 진리에 대해 물을 뿐 아니라 -- 비판적 합리주의(Hans Albert)는 이러한 물음을 끈질기게 회피하고 있다 -- 이성의 이성성에 대해 물어야 하지 않는가? 회의의 극복뿐 아니라 절망의 극복에 대하여 물어야 하지 않는가? 하느님과 세계의 현실성에 대하여 뿐 아니라 회의와 사유 안에서 경험된 자신의 실존의 현실성에 대하여서 물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과연 현대인은 데카르트적-지적인 방법에 의하여 여전히 확실성에 도달할 수 있는가?        

인간은 종종 그의 행동과 사유에서 사실상 끊임 없이 이성의 이성성을 전제하고 있으며 세계와 인간의 양면적 현실성을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모든 회의와 사유, 직관과 연역 속에 선험적인 것, 즉 우리가 대부분 자명하게 실천하는 그리고 모든 인간이 -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유신론자이든 무신론자이든 - 철저한 이성적 방법으로 감행하거나 동시에 거부할 수 있는 신뢰가 전제되어 있다.        

나는 이러한 근본 통찰을 로마에서의 학창시절 갖게 되었으며 튜빙엔에서의 첫번째 강의(1960)에서 처음 학문적으로 서술하였으며 마침내 {하느님은 존재하시는가}(Existiert Gott?)(1978)라는 책에서 폭 넓게 전개하였다. 나는 이 통찰을 신학적 근본 착상으로 삼고 중세적-신스콜라적 2층구조의 조화("이성 위에 있는 신앙")와 종교개혁적-개신교적 원천("이성에 반대하는 신앙") 이나 계몽적-근대적 원천("신앙에 반대하는 이성")이 지니는 이분법을 극복하였다. 그와같은 전통적 질문제기는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할 때 철저히 낡은 것이 된다:

- 철저하게 의문시된 현실성에 직면하여 원칙적인 입장, 즉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근본결단이 문제가 된다. 이 근본결단은 현실성 일반에 대한 인간의 근본 태도를 규정하고 책임지며 채색한다. 즉 자기자신과 타인과 사회와 세계에 대한 근본 태도이다.        

- 인간은 원칙적인 불신 속에서 삶과 이성과 현실성이 실천을 통해 철저히 관철되기가 거의 불가능할지라도 자기 자신과 세계의 의문시되는 현실성에 대하여 원칙적인 혹은 사실적인 부정(Nein)을 말할 수 있으며, 이 때 인간은 현실성에 대해 눈을 감는다(원칙적인 혹은 사실적인 허무주의의 선택).

- 그러나 인간은 삶과 이성과 현실성 일반에 대한 근본적 신뢰 속에서, 모든 어려움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실천을 통해 철저히 관철할 수 있는 자기자신과 세계의 의문시되는 현실성에 대하여 원칙적인 혹은 사실적인 긍정(Ja)을 말할 수 있으며, 이때 인간은 현실성에 대해 자신을 개방한다(원칙적인 혹은 사실적인 근본신뢰의 선택).

- 이 근본 신뢰를 이행할 때 근원적인 이성, 내적 합리성이 열린다. 인간은 근본 신뢰를 멸망의 세계 속에서 선물로서 체험하며, 그러나 동시에 끊임 없는 과제로 체험한다. 이 근본 신뢰는 합리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모험이며 따라서 비합리적인 모험이 아니라 철저히 합리적 모험이다. 그러나 이 모험은 궁극적으로 초합리적인 모험으로 남는다.

이것이 비합리적이며 "무비판적인 독단주의"와 궁극적으로 동일하게 비합리적으로 기초된 "비판적 합리주의" 사이의 길, 즉 비판적 합리성의 길이다. 그러나 신학사에 나타난 고전적 해결책을 고려해 보면 아래와 같은 한계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1) 중세적-신스콜라적 2층 구조 사상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점은 신앙이 단순하게 이성 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 왜냐하면 이미 소위 이성의 "자연적" 차원과 명증성의 차원에서 근본 신뢰(단순한 명증적 신뢰는 아니다)나 근본 불신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신뢰하면서 받아들이거나 허무주의적으로 거부되는 "은총"이 문제가 된다.

- 신의 존재 역시 "자연 신학"이 요구하듯이 순수 이성의 증명이나 제시로 엄격하게 승인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성 자체 안에 근거된 신뢰를 근거로 승인된다.        

(2) 개신교적-바르트적 이분법에 대하여 신앙은 이성에 대립되지 않는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성의 차원에서 행하여지는 것은 - 일상적인 생각, 직업과 과학, 철학과 종교 안에서 - 신앙에 단순히 부적합하거나 처음부터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인간이면 누구나 다 피할 수 없는 긍정과 부정, 근본 신뢰와 근본 불신, 칭의와 저주의 변증법으로 규정된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 역시 바르트의 신학이 주장하듯이 오직 성서가 계시하는 증언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비기독교적으로 하느님을 믿는 경우에서처럼 현실성 자체 안에 근거된 신뢰를 근거로 역시 가능하다. 이 신뢰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하느님을 믿는 신앙(하느님의 계시와 은총으로부터 나온)이 된다.        

(3) 근대적-계몽주의적 이분법에 대하여 이성은 신앙에 대립되지 않는다는 점이 강조될 수 있다.

- 왜냐하면 이성의 이성적 기능은 이미 이성에 대한 신뢰를 전제하고 있으며, 이 신뢰는 합리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 하느님을 믿는 신앙 역시 비이성적이며 맹목적 모험이 아니라, 이성 앞에서 책임질 수 있으며 현실성 자체 안에 근거된 신뢰이다.

이러한 세계신학적 근본 착상으로부터 하느님을 믿는 신앙 특히 그리스도적 하느님 신앙, 다시말해 탈근대적 패러다임 속에서 {그리스도인 됨}(Christ Sein)(1974)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과 이로부터 {기독교와 세계 종교}(Christentum und Weltreligionen)(1984)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이 전개될 수 있다. 이제 나는 여기서 "나"의 신학에 대한 내용이라기보다는 역사적-해석학적 입문을 중단하고 결론적으로 이러한 현시대적 패러다임의 테두리 안에서 내 신학의 구체적 표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어느정도 내가 이러한 표준에 부응하는지는 다른 사람의 판단에 맡기고자 한다.

 

9. 비판적 세계신학의 성격과 양식        

우선 모든 신학하는 일의 성격(Ethos)에 해당하는 사항으로서 내가 의미 있게 생각하는 것은 아래의 비판기준이며, 이것은 여기서 엄하게 가르칠 가치가 있고 이책의 "주음(主音/cantus firmus)"이다. 새로운 탈근대적 패러다임을 지향하는 신학은 아래의 4 가지를 필요로 한다:        

(1) 기회주의적이며 타협적인 신학이 아니라 진실한 신학: 그리스도적 진리를 진실성 속에서 찾고 말하는 신앙에 관하여 생각하는 책임성. 그리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통일성에 철저히 봉사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진실한 신학 없이 진실한 교회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2) 권위주의적 신학이 아니라 자유로운 신학: 교회 당국의 행정적 기준이나 제어장치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과제를 이행할 수 있는 신학과 그 신학의 근거 있는 확신을 특정한 지식과 양심에 따라 발설하고 출판하는 신학. 그리고 이것은 철저히 교회로서 권위를 위하여 봉사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신학 없이 자유로운 교회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3) 전통적인 신학이 아니라 비판적 신학: 학문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품격과 방법론적 훈련과 모든 문제 제기와 방법과 결과에 대한 비평적 검토를 자유롭고 진실하게 이행할 수 있는 신학. 그리고 이것은 철저히 교회의 교화와 사회 안에서의 교회의 건설을 위하여 봉사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비평적 신학 없이 이 사회 안에서의 비평적 교회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4) 교파적 신학이 아니라 세계 신학: 다른 신학을 적이 아니라 동료로 여기며 분리가 아니라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 신학. 상호이해는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안으로 교회와 교회 사이의 영역에서, 밖으로 다양한 지역과 종교, 이념과 학문을 지닌 교회 밖과 그리스도 밖의 세계를 향하여 진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성격의 세계성은 신학과 다른 학문에서 진행되는 패러다임 분석의 초문화적이고 보편주의적인 측면에 부합한다. 그리고 이것은 철저히 이 세계 안에 있는 교회의 파송을 위하여 봉사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세계신학 없이 세계교회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이미 {하느님은 존재하는가}(1978)라는 책 안에서 구상했던 것을 순서에 따라 강조하고자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향하는 신학은 신학하는 일에서의 다른 성격을 요구하듯이 다른 양식을 요구한다. 이러한 신학을 위하여 아래의 근본 착상을 생각할 수 있다:

(1) 이미 신앙인이 된 자를 위한 신비한 학문이 아니라 불신앙인을 위한 이해력.

(2) "단순한" 신앙과 "교회"의 체계를 변호하기 위한 특별 배려가 아니라 엄격한 학문성으로써 진리를 위해 타협하지 않는 노력.        

(3) 이념적 반대자를 무시하거나 이단시하거나 신학적으로 횡령할 것이 아니라 가장 넓은 시야와 관용과 최상의 목소리로 해석하며 동시에 공정하고 객관적인 토론을 하여야 한다.        

(4) 학문간의 협력은 요구될 뿐 아니라 실시되어야 한다: 해당 학문과의 대화와 자신의 고유한 주제에 집중하는 일은 하나다.        

(5) 적대적인 대립이나 평화-분리적 양립이 아니라 비평적-대화적 상호관계가 요구되는 바 특히 신학과 철학, 신학과 자연과학, 신학과 문학 사이의 상호관계가 요구된다. 종교와 합리성, 종교와 시(詩)는 하나다!        

(6) 과거의 문제가 우위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인간과 인간 사회의 광활하고 다양한 문제가 위위성을 갖는다.        

(7) 다른 모든 규범을 규범짖는 기독교 신학의 규범은 그 어떤 교회와 신학의 전통이나 제도가 아니라 복음, 즉 근원적 그리스도 사신 자체이다. 신학은 역사-비평적으로 분석된 성서의 실상으로부터 방향을 제시 받는다.        

(8) 신학은 성서의 고어체나 헬라적-스콜라적 교리주의나 유행을 따르는 철학적-신학적 은어로 표현될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현대인의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긴장이 유발되어서는 안 된다.        

(9) 믿을 수 있는 이론과 살아있는 실천, 교의학과 윤리, 개인적 경건심과 제도의 개혁은 분리될 수 없으며 해체될 수 없는 연관성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        

(10) 교파주의적 분리적 정신이 아니라 세계종교와 현대적 이념을 함께 교려하는 세계신학적 넓이가 필요하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과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사람과 인간 일반에 대한 최대의 관용 및 기독교의 특이성을 강조하는 일은 하나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신학에 이름을 붙인다면 간략하게 그러나 확정하지 않은 채 비판적 세계신학(kritische  kumenische Theologie)이라 부르고 싶다. 이 명칭이 나 개인에게 의미하는 바는 새로운 시대에 동시대적으로 되는 신학을 의미한다:        

(1) 이 신학은 부단히 "총체적"이며 "보편적"인 교회를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가톨릭적"이며, 동시에 철저히 성서와 복음과 관계한다는 의미에서 "개신교적"이다.        

(2) 이 신학은 끊임 없이 역사 앞에 책임적이라는 의미에서 "전통적"이며, 동시에 현대의 물음과 씨름한다는 의미에서 "동시대적"이다.        

(3) 이 신학은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적으로 구별된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동시에 "세계", "전 지구의 삶의 영역", 모든 그리스도 교회, 모든 종교와 모든 지역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세계신학적"이다.        

(4) 이 신학은 가르침과 진리를 이해한다는 의미에서 이론적이며 학문적이고, 동시에 삶과 개혁과 혁신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실천적이며 목회적이다.        

이로써 나의 신학을 충분히 서술한 것 같다. 위대한 사상가 파스칼(Blaise Pascal)은 집주인이 "나의 책, 나의 주석, 나의 역사 등"에 관하여 말하는 저자는 "우리의 책, 우리의 주석, 우리의 역사"에 관하여 말하는 편이 더 낫다고 했다. 왜냐하면 통상 거기에는 자신의 소유보다 남의 소유가 더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