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눈물의 선지 예레미야


1. 명백한 사명

예레미야는 참으로 모범적인 교역자이다. 제일의 원동력은 저에게 명백한 주의 사명이 있었음이다.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 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 1:5하반, 7,10, 17-19)

과연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직접 보내신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보내 섰다는 명백한 자각이 없으면 복음을 담대히 전할 수 없다. 예레미야는 원래 성품이 소담 예민한 사람이지만, 그 성질과는 전혀 다른 가혹한 예언을 하였다. 저는 타락한 종교와 정치사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준엄하게 전하였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이와 같은 용감한 사역 자를 기다린다. 강단에서 어름어름하면서 천중의 지위, 혹은 학식에 눌려 감히 회개하라는 경책의 설교를 하지 못하고, 신 술어나 학설이나 소개하며 재미있는 이야기나 하고 만다. 어떤 교회에서는 사경 회를 하려면 제일 구수하고 우스운 이야기 잘하는 강사를 택하여 청하여 다가, 한 주간 실컷 웃고 지낸다. 이렇게 웃고 구원을 얻는다면 매일 희극(喜劇) 장에 나가면 조치 않을까? 아! 우리는 회개의 도리를 철저히 전할 것이며, 지옥의 심판을 분명히 말할 것이다. 지옥은 과연 신학박사라도, 목사라도, 장로라도, 황제, 대통령이라도, 죄가 있으면 삼키기를 사양치 아니한다. 예레미야 당시에 타락한 교역자들이 많이 있었다. 저들은 우선 하나님께서 보내시지 않은 자. 즉 사명이 없는 자이며(렘 23:32), 철저한 회개를 전하지 아니하며 인민을 완전한 구원으로 인도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보통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 하다, 평강 하다하나 평강이 없도다](?8:11) 하심이 그 말이다. 모든 교역자들은 반드시 사명을 위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명백한 사명의 자각이 없이 교역한다면 아는 품 파리 군이요, 직업적 전도자이다. 발남의 길을 가는 자이다.

2. 눈물의 사람

구약에 있어, 제일 예수 그리스도와 닮은 인물은 예레미야다. 저는 과연 정적(情的)인 인물로, 항상 강개(慷慨)의 기분에 충만하였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슬퍼하셨음도, 역시 정적(情的)인 인물이었던 까닭이다. 혹시 예수를 본 사람들이 예레미야인가 함도 크게 잘 못됨은 아니다. 아! 선지자는, 도성의 황폐를 바라보며 강개의 눈물에 넘치었다.

[어찌하여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러게 되면 살육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哭泣) 하리로다](렘 9:1).

그 백성이 오직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고, 외국을 의뢰하며 모든 수림(樹林) 사이에서 우상을 섬기는 그 형편은 얼마나 선지자의 가슴을 태웠겠습니까? 미구에 바벨론 대군의 약탈로 말미암아 성전의 무너짐과 자녀의 죽임과 전답의 황폐를 생각하며 전망하니 참으로 마음 아프고 눈물이 아니 날 수가 없었다.

[시온의 도로가 처량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 고를 받았도다](애 1:4)

아! 우리에게도 이런 눈물이 있어야겠다. 모든 사람의 영혼이 지옥을 향하여 주저함이 없이 달려가는 형편이 아닌가? 오! 주여 눈물을 주시옵소서 아멘.

우리 주님 예수께서도 감람 산 아래로 내려오시다가 성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시면서 크게 우셨다(눅 19:41).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리스도에게 순종치 아니하고,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장차 잔혹한 로마 군에게 유린당할 형편을 내어다 보셨기 때문이다. 굉장한 성전과 곳곳에 우뚝 솟은 회당과 거리에 삼삼오오 짝지어 거니는 젊은 남녀들과 도포를 입고 점잔 하게 양반 거름을 하는 종교가들, 그들의 운명을 생각할 때에 주님의 가슴에서는 안타까움의 긴 한숨이 북받치며,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시게 되었다. 아! 우리에게도 동족의 영혼들을 위하여 이러한 눈물이 있어야겠다.

3. 성령의 불 세례

먼저 말한바와 같이, 교역자의 사역의 원동력은, 사명인 동시에 따라서 성령의 불 세례가 있어야 한다. 가령 사명을 말하면, 열차의 기관사와 같고, 성령의 세례는 기관의 불과 같다. 기관사가 있는 동시에 불이 있으면, 열차는 순조롭게 운행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 속에 사명이라는 기관사가 있고, 성령의 불이 있으면 우리의 일생을 순조롭게 운행시길 것이다. 저 20여 년간 소아시아와 유럽을 분주히 달리며 복음을 전파한 바울의 일생은 이 두 요소가 겸비한 까닭이었다. 누구든지 교역자의 자격을 가 추려면 이 불 세례가 있어야 한다. 저 유명한 무디는 성령세례를 받기 전에도 상당한 활동을 하였으나, 그러나 저는 그 현재 이상의 더 큰 능력의 충만함을 받기를 원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두 부인의 증거로, 이 은혜를 깨닫고 기도하여, 저는 드디어 권능의 불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 후부터 저의 역사는 현저한 능력이 나타났다. 저의 증거의 의하면 같은 제목으로 설교하였지만, 이 은혜 받은 후에는 현저한 능력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 20:9) 하였다.

이 말씀은, 즉 예레미야의 속에 불 세례가 있음을 증거 함이다. 누구든지 이러한 불이 마음속에 있어야 모든 영혼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전도하게 된다.

4. 성언(聖言)을 묵상하는 사람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렘15:16)

이 구절은 예레미야가 그 얼마나 말씀에 대한 취미와 묵상을 가졌는가를 알 수가 있다. 과연 성도의 생애를 뿌리 깊게 하고 윤택하게 하며 능력 있게 하는 것은, 말씀 충만함에 있다. 복 있는 자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 1:2-3).

또한 시편 19편을 정독하여 보면, 옛 성도들이 얼마나 그 말씀에 대하여 취미를 가졌으며, 온오(蘊奧=학문이나 지식이 쌓이고 깊음)하였는가를 알 수가 있다. 무디 선생은 말하기를 [말씀 충만은 곧 성령의 충만 이라] 하였다. 에베소 5장 18-21에와 골로새 3:16-17에 말씀을 비교해보면 성령의 충만한 결과와 말씀의 충만한 결과가 동일하다.

현대 교역자들은 성경연구를 매우 등한히 하고 있다. 교역자 양성기관인 신학교에서도 역사, 철학, 어학 등 시간을 제하면, 사실 성경 배우는 시간은 몇 시간 못된다. 또한 설교할 때에도 참신한 성구를 인용하기보다도, 유명한 사람들의 격언 등을 인용하는 것을 더 좋게 안다. 교역자가 되어 성경을 모르는 것이 수치이지, 철학, 과학 등을 잘 모르는 것이 무슨 큰 수치인가. 가령 의사가 되었으면 의학을 모르는 것이 큰 수치이며, 변호시가 되었으면 법학을 잘 모르는 것이 큰 수치일 것이다. 우리 영혼의 의사가 된 교역자는 반드시 성경에 정통하여야 될 곳이다.

예레미야의 속에 있는, 말씀은 곧 불이 되었다(렘 5:14). 하나님께서는 이 성경에 친근하며 정통한 사람을 반드시 들어 쓰신다. 현대 교역자들이 다- 성경연구에 등한하고 다른 학문으로 자기의 능력을 삼고자하는 것은 [진정한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나일 강수를 마시려고 애굽 길에 가는 모양이다] (렘2:13, 18). 과연 성경은 무궁한 생명수요, 인간의 학문은 다 나일 강수와 같은 것이다. 그런즉 우리는 예레미야에게 있었던 명백한 사명과 동족의 운명을 위하여 흘린 눈물과 성령세례와 말씀에 충만함을 가지고, 전락해 가는 교계의 대세를 영적 방면으로 돌이키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