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메시아의 선구자 요한


예수께서 전도하심에 앞서, 유대 광야에 색다른 인물이 나타났다. 그의 의복은 검소하여 약대털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띠었으며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꿀)이었다. 그의 외침은 매우 준엄하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함이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여 년이나, 선지자의 외침을 듣지 못하던, 유대의 종교계는 큰 충격으로 술렁거렸다. 독사의 자식들아 하는, 격노한 메시지는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하여 선민적 교만으로 스스로 의롭다하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청천벽력(靑天霹靂)과도 같았다. 그의 위풍은 당당하여 속화(俗化)한 교역자(敎役者)와 같지 아니하여 추상 열일(秋霜烈日=가을에 찬 서리 와 여름의 뜨거운 해라는 뜻으로 형벌이 엄정하고 권위가 있음의 비유)과도 같았다. 그의 외침으로 잠자던 영혼들이 각성하고 부흥하게 되여, 요단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모여들어, 각각 자기의 죄를 자복(自服)하였다. 그들 중에는 부자들, 관리들, 군인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 이처럼 신약의 선구, 유대의 새로운 종교운동에 부흥의 도화선(導火線)에 불을 부친, 그는 과연 누구인가? 그는 바로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 세례 요한이었다. 이 사람은 모태로부터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의 성격에 대하여 배울 것이 많이 있는 가운데, 그 중에서 몇 가지만. 들어 배우고자 하다. 저는 참으로 모범적 교역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1. 저는 겸손한 사람이다.

저의 사명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저의 외침의 격려(激勵)되여, 유대의 종교의 촉망(囑望)이 저에게 집중되어 크게 소동(騷動)하며, 저를 추앙(推仰)하게 되었다. 그러나 저는 자기를 들어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뒤에 오실 예수만을 증거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그리스도인가 생각하였으나, 저는 겸손하게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였다.

영적인 교역자와 육적인 교역자의 구별은 이러한 경우에 나타난다. 육적인 교역자는 자기의 명예가 높아지는 것만을 좋아하여, 자기를 들어내며 모든 일에 있어 내가 어떻게 하였고,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자기 자랑을 한다. 따라서 자기의 동배(同輩) 간에도, 다른 형제의 성공, 명예를 투기한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그러하지 아니하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역기라"(빌 2:3)

일직이 영국에 후레챠 선생에게, 한 청년이 찾아와서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하면 영국에 제일 유력한 교역자가 되겠습니까?" 하고 질문할 때에, 후 선생은 대답하기 "형제가 이 나라에 제일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 유력한 교역자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과연 그러하다. "겸손은 존귀보다 먼저 있다"(잠 18:12). 우리 기독교의 모든 덕의 중심은 겸손이다. 이스라엘의 영도자 모세는 천하에 겸손한 사람이라 하였으며(민 12:3), 예수께서도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마11:29)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은 낮추시고 겸손한 사람은 높이신다. 교만은 멸망의 시초이다. 이러한 겸손이 없고 는 아무리 학문, 재능을 갖추었다 하여도 하나님에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 어렵다.

2. 저는 담대한 사람이다.

요한은 참으로 대담한 사람이었다. 유대의 종교 사회를 향하여, 죄를 지적하여 경책(警責)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으며, 저는 죄를 대적하기를 피 흘리기까지 하였다. 헤롯왕이 그 동생 빌닙의 아내를 취함으로, 저는 이 일은 절대 불가(不可)한 것으로 대담하게 헤롯왕을 책망하였다. 보통 교역자들은 청중의 지위와 학문, 재력에, 그 마음이 억압되어 감히 회개의 설교를 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요한을 배워야겠다. 다윗 왕이 범죄 하였을 때에, 선지자 나단은 왕에게 와서 대담하게 왕의 죄를 지적함으로 다윗은 회개하였다. 향촌의 한 평범한 사람으로서, 어찌 제왕 앞에서 그 죄를 경책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일은 성령의 권능을 받지 아니하고서는 능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비겁함이 일소되고 누구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게 된다. 우리가 설교하려고 강단에 올라 잠시 기도하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청중을 대하게 ? 때, 그 기개는 천병 만마(千兵萬馬-썩 많은 군사와 말)를 호령하는 장군의 기세와 같은 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때 외치는 그 메시지는 참으로 폭탄과 같은 위력을 나타나게 될 것이다. 능히 청중의 마음에 있는 죄악의 바위를 깨트려 부수게 되는 것이다.

3. 저는 교파심(敎派心)이 없는 사람이다.

요한이 애논에서 세례를 베풀 때에, 예수께서도 전도하시며 세례를 베푸셨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가 요한에게 와서, 일종의 교파적(敎派的) 심사로 그 일을 고발하였다. 이 때 요한의 마음에는 일호의 야심도 없었다. 저는 겸손하게 예수의 하시는 일을 축하하며, 자기는 그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자라고 말하였다. 이는 전혀 교파수립주의(敎派樹立主義)에서 떠난,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서의 성도의 자세라 하겠다. 우리는 이러한 자세를 배워야 한다. 나는 장로교파(長老敎派)이니, 나는 감리교파(監理敎派)이니, 나는 성결교파(聖潔敎派)이니, 나는 참례교파(浸禮敎派)이니 하며, 각각 교파적인 자아심(自我心)을 가지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여기에서 반목 질시하는 폐해가 적지 아니하다. 교파는 없을 수 없다. 교파는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줄로 안다. 그러나 교파주의는 죄라 하지 아니 할 수 없다. 대저 교파의 동기와 성립(設立)이 물론 이단(異端)에서 비롯함도 적지 아니하다. 오늘날 개신교회(改新敎會)내에 600여 교파가 있다고 한다. 그것이 다- 정통(正統) 신앙의 교파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안에는 이단파(異端派)가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이 이단은 물론하고 원래 교파가 생긴 것은,

각 사람의 신앙에 다소의 특색

이 있음으로, 이 계통(系統)을 따라 맞는 사람이 신앙의 동일점(同一点)에서 집합(集合)하다 보니, 한 교파가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사도 시대를 말하면 같은 그리스도안에서, 바울, 요한, 베드로 사도는 각각 그 신앙의 특색이 있었음을 볼 수가 있다. 바울의 특색은 신앙이며, 요한의 특색은 사랑이며, 베드로의 특색은 소망이었다. 루터파의 특색은 "신앙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진리를 고조함이며, 웨슬레파의 특색은 "신앙으로 성결함을 얻는" 진리를 고조함이다. 오늘의 정통신앙에 속한 각 교파를 보면 각각 그 특색과 사명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이러한 동일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하며, 기도하는 중에 점차 확장되면 필연의 결과로 한 단체가 창립되게 되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루터의 개혁으로 시작된 개신교를 열교(裂敎)라고 하다. 개신교와 카톨릭에 있어, 개신교 파의 수립은 필연의 사실이다. 분리하지 아니 할 수 없었다. 오늘도 속화한 교회 중에서 순복음적 설교를 용납치 안은 일이 많음으로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또는 진리 보존을 위하여 불가불 분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각각

교파적 치우침과 편파심

을 버리고, 각 교파가 그 특색을 발휘하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완성하도록 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우리 각 교파는 그의 지체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심을 기억 할 것이다. 전에 모세의 진중(陣中)에 엘닷과 메닷이라는 사람이 있어 성령의 감동으로 예더니, 혹이 모세에게 와서 고발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청하여 이를 금(禁)하라 하였다. 그 때 모세는 관대한 마음으로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신으로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11:226-29). 이는 모세에게 교파심이 없었음을 보여 준다.

무디 선생이 영국에 전도여행을 할 때에 누가 묻기를 당신은 어느 교파에 속하였느냐 하니 무디는 곧 대답하기를 "나는 성공회, 조합교회, 교리교회, 장로교회 등 모든 교파에 속한 전도사올시다"하니, 또 묻기를 당신의 신경은 무엇이냐 할 때 "네 이사야서 53장이올시다"하였다고 한다. 이는 무디의 금도(襟度)가 관대하여 하등의 교파적 편협함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차라리

진리에는 편협하고 고집할 지언정

교파에 치우치거나 고집하지 말 것이다. 새 예루살렘에 속한 그리스도의 신부는 전 세계 각 교파 중에 산재해 있는 것이다. 진리에 위반되는데 타협적 태도는 취할 수 없거니와 교파가 다르다하여 제휴(提携)치 아니한다함은 용렬(庸劣)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