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사랑의 사도 요한


사도 요한은 갈릴리 벳세대 출신으로 그 어머니는 살로매요, 그 아버지는 세베대이다. 저의 직업은 어부이다(마 4:21-22). 처음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이었으나, 어느 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요 1:29) 하는 세례 요한의 증거를 듣고 비로소 예수를 믿고 따르게 되었다.

저가 처음 믿을 때에 들은 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씀은 참으로 그가 가장 사랑하고 사모하는 이름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저서 계시록에는 이 이름을 20여 회나 쓰고 있다. 그는 사도시대의 교회에서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세 기둥이었다(갈 2:9). 저가 당시 대제사장을 알아서 그 아문(衙門)에 들어간(요 18:15) 사실을 미루어 생각건대 상당히 여유 있는, 소위 양가 자제였던 것 같다.

주께서 열두 제자를 삼으신 때에 저와 그 형 야고보에게 ‘보아너게’(우뢰의 아들)라는 별명을 주셨는데, 이는 저의 성격을 말씀하신 것으로 그 성격이 열정적이며 또한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저는 열혈남아이었다. 한번은 주께서 제자들과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다가 그 곳 사람들이 주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저가 곧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 하였다. 이에서 ‘보아너게’적 성질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심성은 다 성령세례 받기 이전의 심성이니, 즉 혈기이며, 복수의 정신이다. 저는 거룩하신 주를 따르면서도 이와 같은 혈기의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소위 신자라는 사람들 중에도 성경도 잘 알고, 찬송도 잘 부르면서 그 마음에는 서로 원망하며, 복수심을 가지고 있는 무리들이 많이 있다. 어느 교회의 경우, 교우끼리 칼을 품고 다니며 서로 죽일 기회를 찾다가 부흥회 때에 회개하고 서로 화해하는 것도 보았다. 중생한 사람의 마음에라도 이러한 악독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성결의 은혜, 즉 성령의 불세례를 받아야 이러한 악독이 소멸되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아, 복수의 정신, 이는 참으로 무서운 죄악이다. 이 마음은 곧 지옥이다.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 간에, 장로와 집사 간에 서로 원수를 맺고 적대 행위를 하는 무리들은 다 지옥에서 슬피 우는 자와 같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죽어 지옥에 가기 앞서 이미 지옥에 앉아 있는 자일 것이다.

이런 복수의 정신을 가지고 자기를 대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멸망이 임하기를 원하던 요한은,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은혜로 변화를 받아 사랑의 사도가 되어, 이제는 원수를 위하여 복을 빌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저서 요한1, 2, 3서를 읽어보면 그 주제가 사랑인 것을 알 수가 있다. 요한일서에만 사랑 ‘애’(愛)를 60여 회나 기록하고 있다. 저의 말이 사랑이요, 마음이 사랑이요, 행동이 사랑이다. 그의 전 인격이 사랑이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변화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하신 말씀을 비롯하여, 그 사랑이 넘치는 성경구절을 다 들어 말할 수가 없다. 저는 기독교는 곧 사랑의 종교임을 확실히 체험하였다(요 13:34, 참조). 참으로 사랑을 가진 자가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저는 또한 심원한 신비의 신앙인이다. 최후 만찬석상에서 유독 주의 품에 의지하여 앉은 제자가 곧 저였다(요 13:33). 저는 주의 품에 기대어, 만민을 위하여 끓는 사랑으로 뛰노는 주의 심장 고동을 들었다. 이 사실을 다만 육체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저가 주의 마음을 알아내는, 주님과 깊은 교제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저는 주의 심장의 고동을 친히 들어서 반포한 사람이다. 주의 품에서 사는 생애인고로 마지막 계시록의 광경까지 보게 되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요 3:16) 한 성구를 기록한 이가 곧 요한이다. 저는 주와 더불어 깊은 교제를 통해(요일 1:3) 주의 가슴에서 사랑의 뜨거운 피가 뛰노는 그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3:16은 참으로 후세의 수억만 인을 구원으로 인도한 성구이다. 루터는 이 말씀을 ‘성경의 축도’ 또는 ‘소복음서’라 하였으며, 무디는 “만일 성경이 다 불탈지라도 요한복음 3:16만 있으면 우리가 구원 얻기에 넉넉하다”고까지 말하였다.

다시 오순절 이전의 저를 상고하여 보건대 저는 야망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그의 형 야고보와 함께 주께 나아와 구하기를 ‘주께서 영광으로 계실 때에 자기들을 좌우 승상 되게 하여 달라’(막 10:35-37)는 의미로 말한 일이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허영을 따르는 육의 속한 성질로 말미암은 것이다. 저의 사상이 얼마나 유치한 것이었나를 알 수 있다.

메시아의 거룩한 역사에 대하여도 그 견해가 희미하다. 영광의 메시아를 맞기 전에 고난의 메시아를 맞아야 할 일에 대하여도 철저한 깨달음이 없다. 다만 주를 이용하여 자기의 행세를 높이고자 함에 불과하다. 대개 성결치 못한 자의 마음에는 언제나 자기 과장을 위하여 명예, 권리, 지위를 탐하는 정신이 떠나지 않는 것이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불 세례로, 저의 심령은 성결하여졌다. 후에 증거하기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요일 2:15) 하였다. 이는 그의 성결 체험을 통해 알 수 있다. 저는 분명히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을 다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고, 저의 마음에는 오직 주를 사랑하는 거룩한 사랑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저가 후에 오순절 전, 자기의 상태를 회고하였을 때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저는 참으로 자기가 말한 바와 같이 주의 사랑하는 제자였다. 또한 저에게는 인내와 용기가 있었다. 주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예고하실 때에 베드로는 “내가 죽을지언정 주를 버리지 않겠노라”고 호언장담하였다. 그러나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당일에 그처럼 호언장담하던 베드로는 그 종적을 감추었다. 주의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간 사람은 이 요한과 몇몇 부녀들밖에 없었다(요 19:26). 저는 참으로 주를 사랑하였으며, 주께서도 저를 사랑하시고 미쁘게 여기셨다.

주님께서는 최후 십자가상에서 그 모친의 봉양을 이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셨다(요 19:27). 이것은 주께서 그를 친동생같이 신임하셨던 것을 증명함이다. 전설에 의하면 저는 마리아를 모시고 에베소에 가서 종신토록 봉양하였다 한다.

마지막으로 저에게 한 가지 배울 것은 그의 진리에 대한 기치가 선명하였던 사실이다. 요한이서 10, 11절에 보면 이단자에 대하여는 교제까지 끊으라고 하였다. 대저 전도자는 이처럼 진리에 대한 태도가 분명하여야 한다.

오늘날 천주교와 타협하고 이교도와 타협하는 등 애매한 태도를 가진 교역자나 신자가 많이 있다. 이것은 곧 바벨론이다. 어떤 교역자는 말하기를 천주교를 믿으나, 안식교를 믿으나, 유교나 불교나 그 궁극은 다 일체라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는 바벨론 음행의 술에 취한 자의 소위이요, 결코 기독교의 진리를 가진 자의 말이 아니다.

우리들은 진리의 기치를 선명히 드러내야 한다. 이단과 속화에 대하여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한 바울의 증거를 보라. 진리에 대하여는 이처럼 굳세고, 그 기치를 선명히 하여야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