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신앙의 사도 바울

  

바울 사도의 전기(傳記)는 세간에 많이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 근거하여, 바울의 전기 중 가장 강령(綱領)이 될만한 몇 가지만 추려서 교훈을 삼고자 한다.

바울은 기독교의 개척자이며, 세계의 위대한 개척자, 탐험가 중에 한 사람이다. 그는 만대의 사표가 되었다. 우리가 사도행전 9장, 13장 이하를 읽어보면 그의 회심과 일대의 전도 기행문이다. 로마서를 비롯한 13서간에 의하여 그의 심령적 심원(深遠)한 경험과 충만한 영적 지혜를 살펴 알 수가 있다. 전자로 그의 표면생활이며, 후자로 그의 내적 생애이다.

바울은 벤야민 지파의 유대인으로 바리새파에 속하였으며, 길리기아 다소의 출생이다. 그는 회심 전에 당시 예루살렘의 석학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을 하여 율법에 정통하였으며, 헬라어와 문학에 숙달하였다. 그의 설교 중 스토아 학파의 유명한 시인 아라닷스, 그레안데스의 말들을 인용함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행 17:28).

하나님의 권능은 무식한 자를 들어 유식한 자를 능가하는 역사도 하시며 유식한 자를 복종시켜 그 거룩한 뜻을 성취하는 도구를 삼으시기도 하신다. 저의 회심 전의 수양은 다 후일 이방인의 전도자로서의 준비가 되었다.

 

저의 열렬한 종교심

저의 종교는 그 연원(淵源)이 깊었다. 저의 자증(自證)한 말과 같이 저는 바리새인의 아들이다(행 23:6). 저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하여 전심전력(全心全力)으로 수양한 사람이다. 저는 30이전부터 예루살렘에서 학문에 열심하여 율법을 배우며 지켰다(갈 1:14). 저는 진실로 거짓없이 율법에 의하여 하나님 앞에 의인 되고자 힘쓰고 힘썼다. 그러나 저가 율법에서 실패한 것은 로마서 7장을 보아서 알 수가 있다. 그가 얼마나 내심의 고민을 가졌으며, 속에 거하는 죄의 세력을 이기 위하여 얼마나 고민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후세의 루터나 웨슬레와 같은 이들도 이러한 고투(苦鬪)를 하였음을 볼 수 있다. 저는 참으로 의 사모하기를 주리고 목마름같이 한 사람이다. 주께서 십자가의 의를 저에게 보여주셨음이 결코 보통으로 된 일이 아닌 것이다.

 

저의 다메섹 경험

다메섹은 저의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일대 전환기를 이룬 곳이다. 반 기독운동에 선봉자가 되어 다메섹 성도들을 잡으려 갈 때 홀연히 공중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는 주의 사랑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사람이 형용할 수 없는 영광의 빛의 비취임을 받았다. 이에 저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것이 저의 회심, 거듭남의 경험이다. 반 기독운동의 괴수가 불과 몇 일 만에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게 되었음(행 9장 참조)은 참으로 놀라운 변화이다. 저의 회개는 돌변적이며, 저의 거듭남은 참으로 순간적이었다. 복음은 참으로 천래(天來)의 폭탄이다. 이 폭탄에 한 번 맞은 사람은 회개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심령이 안 부숴질 수 없다.

누구든지 한 번은 이 다메섹의 경험을 겪어야 기독교를 이해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철저한 통회가 없는 사람은 그 신앙도 미지근하여 신생인지 성결인지 그 경험이 도무지 분명하지가 않다. 사랑하는 독자 형제여 우리의 다메섹은 어느 때 어디인가? 회개가 확실한가? 신생이 분명한가?

 

아라비아 3년

바울의 개종은 기원 35년(당시 저의 연령도 30세 이상임)이다. 갈라디아서 1:17에 보면 저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맛나 뵌 후 즉시 아라비아로 갔다. 그 후 3년 만에 예루살렘에 방문하였다 하였으니 그 동안 주로 아라비아에서 지냈을 것이다. 저는 의외의 돌연한 경험을 통하여 그 완고한 마음이 부스러졌으며, 그렇게 고집하던 율법주의에서 완전히 돌아서게 되었다. 그럼으로 저는 그 받은바 새 종교에 대하여 더 깊은 사색과 명상과 기도로써 그 신앙을 굳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수양을 하고자 함에 있어 종교의 문물(文物)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향하지 아니하고 바로 광야로 갔다. 저는 이 광야 3년간에 주의 영으로 직접 교제하여 그 심령은 묵시의 오묘(奧妙)에 함양되었으며, 그 담략(膽略)은 사명의 완성을 기하였을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광야의 경험이 필요하다. 고적한 곳에서 깊은 기도와 묵상으로 신앙을 굳게 하며 사상의 깊이를 더해야 할 것이다.

 

전투의 30년

바울은 그가 쓴 서간문 중에 누누이 경주의 비유를 들어 말하였음과 같이, 개종 후 30여 년은 참으로 신앙의 마라톤이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에 몰려서 나아가고 나아갔다. 예루살렘의 선배들의 후원도 요구하지 아니하고 다만 다메섹에서 받은 천계(天啓)의 복음 그대로를 전하기에 주력하였다. 바울은 실로 위대한 개척자였다. 고린도후서 11:23-27에 저가 당한 고난의 목록이 기록되어 있다. 무수한 핍박과 환난과 기근과 위험을 겪었다.

바울은 참으로 큰 사람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사도의 미말(微末)에 미말(微末)에도 이르지도 못한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셔서 이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우리들도 진리를 위하여 분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오늘 황막한 영계를 위하여 헌신할 자 누구이며, 분전할 자 누구인가? 오늘의 교회에서는 사업에 치우치며 또는 종교 문헌 연구에 치우쳐 가고 있다. 물론 사업도 문헌도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보다 직접 복음 전하는 일을 힘써야 하겠다. 복음은 사업의 원동력이며 신학의 원소(元素)이다. 회개를 전하며, 성결을 전하며, 부활을 전하며 재림과 심판을 힘써 전해야 한다.


영광의 최후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음으로”(딤후 4:7, 8 상반) 하심은, 기원 67, 8년경에 저가 네로 황제의 핍박으로 로마의 단두대에 오르기 직전에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보낸 글이다. 과연 저의 최후는 영광스러웠다. 다만 죽음의 저편에 빛나는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았다.

과연 신앙이란 우리의 일생의 큰 사업이다. 즉 신앙 그것이 큰 사업이다. 많은 사람이 사업의 중도에서 실패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힘써 기도하며, 깊이 묵상하며, 힘써 전도하여 이와 같은 영광의 최후를 기도(期圖)하여야 하겠다. 주께서 우리들을 부르신 그 뜻을 완전케 이루어야 하겠다. 애굽에서 나온 무리 중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을 귀감으로 삼아, 경계하며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