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독실한 신앙의 군인 고넬료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며 은혜를 베푸심에 있어 국가나 인종의 차별이 없으시다. 이제 우리가 상고하고자 하는 고넬료는 로마로부터 파견된 이달리야 군대의 백부장(百夫長)이다. 저가 이방인 군인으로서 우주의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 경배함은 참으로 경하할 일이다. 하나님은 고넬료를 구원하시는 일로 말미암아 베드로에게 있는 인종적 편견을 타파하셨다. 사도행전 10장을 잘 읽어보면 고넬료의 인격의 감화와 신앙 체험이 얼마나 놀라웠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유대인들은 선민(選民)의 긍지와 자부심으로 이방인에게는 친근히 하지 아니하였을 뿐더러(행 10:28) 이방인은 하나님이 아주 버리신 백성으로만 알았다. 그래서 이방인은 개와 같이 천히 여기었다. 베드로도 이러한 인종적 편견에서 아직 떠나지 못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고넬료를 구원하심을 보고, 저의 신학사상은 한층 보편적이 되었다(행 10:34, 35). 베드로의 고넬료의 집 전도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유대인의 전유(專有)가 아니라 넓게 전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 과연 하나님의 은혜는 국가와 인종과 계급의 차별이 없이 일시동인(一視同仁)으로 임하신 것 같이 오늘 기독교회에서도 이 사람을 본받아야 한다.

일본에 어떤 유력한 전도자가 수년 전에 아프리카에 갔는데 그 곳 어느 교회에 가보니 입장은 백인에게만 한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어, 그 전도자는 말하기를 저들은 지금 예수가 그 회당에 오셔도 용납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셈족으로 황인종의 후예로 나셨기 때문이다. 과연 오늘 소위 기독교 국가에서도 인종 차별이 심한 것은 참으로 그리스도의 정신에 위배되는 일이다. 대저 사람의 가치가 인종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신앙에 있는 것이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지만 그의 종교생활을 보건대 율법을 자랑하며 성결의 가면을 쓰고 다니는 바리새 교인의 이상이다.

 

의인 고넬료

성서 기자는 저를 의인이라고 기록하였다(행 10:22). 이 “의인”이라는 귀한 호칭은 아무에게나 다 붙여 준 것이 아니다. 이런 영예로운 호칭은 성서 중에 많지 않다. 아벨(마 23:35), 노아(창 7:1), 롯(벧후 2:8), 욥(욥 1:1), 사가랴의 부부(눅 1:6), 요셉(마 1:9)과 주님 예수(사 53:11, 눅 23:47)에게 붙여진 것이다. 성령이 저에게 “의인”이라는 귀한 호칭을 붙여 주시게 하신 것이다.

세상에서 “의인”은 참으로 만나기 어렵다. 아브라함이 소돔 고모라를 위하여 중재(仲裁)한 역사(歷史)를 보면, 그곳에 의인 열 사람이 없었다(창 18:32). 만일 의인 열 사람만 있었다면 소돔과 고모라는 망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고넬료가 이처럼 귀한 의인의 호칭을 받은 것은 어찌 칭송할 일이 아니겠는가.

 

저의 종교생활

다시 저의 종교생활을 살펴보면,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행 10:2) 하였다. 저가 이처럼 경건하여 온 집안이 하나님을 섬기며 구제하며 기도한 것을 보면, 참으로 성도의 생애를 보낸 사람이다. 우리가 말로는 믿는다, 믿는다 하여도 실 생활에 있어 이러한 종교미(宗敎味)가 깊어져 있는가 반성해 보아야 하겠다.

기도는 신자생활의 불가결한 요소이다. 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깊은 곳으로 이끌어가며, 기도는 우리 영혼을 만족케 하며 힘있게 하는 유일한 요건이다. 저의 생애는 보통 경건하고 구제하고 기도하는 등 도덕적 방면뿐 아니고, 저는 깊이 기도하던 중에 이상(異象)을 보는(행 13:3-7) 놀라운 영교(靈交)의 체험을 가진 사람이다. 오늘 교계에서 기독교 사상을 말하는 사람은 많으나 충실하게 기도하는 사람은 적으며, 교회 사업에 열심 하는 인물은 많으나 기도에 열중하는 사람은 적은 것은 교회가 조잔(凋殘)하여 가는 일대경향이며 원인이다. 우리들은 고넬료의 종교생활을 깊이 배워야 하겠다.

또 저가 자기의 가정을 예배처소로 제공한 사실을 보면(행 10:24, 27) 저는 온 집안을 모두 주께 인도하였으며, 그 이웃에게도 좋은 빛을 나타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오늘 우리들도 가정을 이처럼 복음의 강단으로 제공한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교회에 속한 모든 가정에서 구역을 나누어 이처럼 가정집회를 힘쓸 것이다. 이것은 구령(救靈)의 첩경이요, 교회 진흥책의 한 요건이 된다. 고넬료의 인격의 감화는 유대 전국에 미쳤다(행 10:22). 무릇 기독신자란 이런 좋은 감화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바울이 교회 직분자의 자격에 대하여 말하기를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하였다. 신자로서 금전문제나 이성문제 등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조소를 받게 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주의 이름이 우리로 하여금 영광을 받으시기도 하시며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하시니,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이웃을 사랑하며 범사에 빛 된 생활을 힘써야 한다. 이것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본분이다.

 

저의 구원

끝으로 저의 구원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려 한다. 저가 베드로를 청하여 복음을 듣기 전 생애를 살펴보면, 기도하기를 힘쓰며 구제하기를 좋아했다. 저의 경건한 생애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또 베드로의 전도를 듣게 할 필요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 쉽다. 이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의 구원은 오직 복음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기도를 항상 할지라도 구제를 많이 한다 할지라도 그 기도가 구원이 아니며, 그 구제하는 선행이 구원이 아니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신앙하는 일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는 것이다. 구원에 대하여 사람의 공적론(功績論)을 세우는 것은 부패한 천주교의 가르치는 교리이며, 또는 이교도의 망상일 뿐이다.

무릇 사람의 의란 하나님 앞에 떨어진 누추한 옷과 같은 것이다(사 64:6). 누구든지 자기의 의로 하나님 앞에 설 자는 천지간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예비하신 의,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입어야 능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이다(사 61:10, 갈 3:27).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공로 없이 의롭다 하시는 길을 아나니 이것이 곧 복음이다.

고넬료의 평소 생애는 참으로 종교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을 찾는 자의 상태일 뿐이고 아직 하나님 앞에 확실히 기독교적 신생의 경험은 얻지 못한 줄 안다. 그러므로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저의 신실무위(眞實無僞)한 종교적 요구를 채워 주시기 위하여 복음의 사신 베드로를 그의 집에 보내신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면 덮어놓고 신령한 사람인 줄 알며, 구제사업이나 많이 하는 사람이면 덮어놓고 구원받은 사람인 줄 아는 사람이 많이 있으나, 내가 알기로는 교회 안에서 기도 많이 하며, 구제 많이 하는 사람이라도 아직 고넬료와 같이 복음의 진수에 들어가지 못간 사람이 많이 있다. 참으로 신생과 성결의 체험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많이 있다.

베드로가 저의 집에 가서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할 때에 그 집에 모인 사람들 모두에게 성령이 강림하셨다(행 10:36-44). 이로써 저들은 비로소 정식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저희는 확실히 천국 기업에 참여할 사람들이 된 것이다(행 10:47, 엡 1:13). 이때에 고넬료에게는 참 만족이 있었을 것이며 참 기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즉 저의 생애에 가진 기도나 구제가 결코 저의 구원이 아니고, 오직 십자가의 복음을 들은 것이 곧 저의 구원이 되었다. 자기의 신령적(神靈的)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이로써 한 거울을 삼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