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에베소서의 교회관

     이건 : 홍순균 평역

 


교회는 헬라어 원어로 ‘에클레시아’이다. ‘불러내었다’는 뜻이다.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을 여호와께서 불러내시어 광야로 인도하여 마침내 가나안 복지까지 인도하였음과 같이, 죄악에 빠져 세상 권세에 얽매여 있는우리를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불러내셨다 함이다. 그러면 교회란 그 원어의 의미에서만 보아서도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 수가 있다. 즉 ‘세상에서 불러내며 죄악 중에서 불러내었다’는 것이다. 만일 세상과 죄악 중에 벗어남을 얻지 못한 교회는, 진정한 의미의 교회가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교회에 대하여는 두 가지 의의를 말할지니, 곧 넓은 의미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단체’도 교회이며, 좁은 의미에서 말하면 ‘예수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개인 개인도 또한 교회이다.’ 에베소서의 교회관(敎會觀)을 상고하고자 한다. 에베소서에는 교회에 대하여 네 가지 의의를 말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였다(2:22). 여러 사람이 모여 예배하는 단체나 개인 성도나 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하시는 전(殿)이다. 그러면 우리 예배당은 얼마나 영광 있고 거룩한 처소인가? 이러한 신성한 의미를 가진 처소에서 세속 유희를 서슴지 않고 자행함은 결단코 용납치 못할 일이다. 여러 가지의 연극, 가극, 댄스, 영화상영 입장권을 발매하는 음악회 등을 오늘 교회당 내에서 거리낌이 없이 행하고 있다. 심지어 청년남녀가 변장을 하고 연애극을 한다. 찬양대라는 미명하에 청년남녀의 연애회합의 기회를 삼은 일, 한 사람에 50전, 1원, 3원 하는 청(靑) 백(白) 황(黃) 등 입장권을 발매하는 율동대회 등을 교회에서 감히 행하고 있는 현대교회에 하나님께서 어찌 거하실 것인가? 이래도 성령이 거하실 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양과 소와 비둘기 등을 팔며, 돈을 바꾸는 것을 어떻게 하셨던가? 그 의자를 휘둘러 엎으시고, 다 내쫓으시며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었는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마 21:13; 요 2:16) 하시지 아니하였는가! 음악회, 연극 등으로 입장권을 발매하는 것이 이것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생각할지어다. 만일 예수께서 그 자리에 나타나시면 그 무리들의 운명이 어찌될 것인가? 이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오히려 멸시(롬 2:4)하는 자의 악행이다. 세상에 빛이어야 할 교회가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 나타내기 위하여 함인가? 하나님이 어찌 빈궁하여 교회당에서 입장권 팔아 얻은 금전을 가지시고 경비를 쓰려 하시며 청년남녀의 연애극으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시겠는가? 이는 다 타락하고 부패한 세인을 기쁘게 하며 환심을 사려고 하는 소위이다. 우리가 만일 교회에서 이러한 일을 계속 행한다면 우리와 우리의 자녀를 다 지옥으로 인도하는 일이다. 어찌 통탄하지 않으랴! 교회가 신령한 영적인 힘을 잃게 되면 반드시 이러한 속물(俗物)로 대충(代充)하게 된다. 이는 ‘에클레시아’가 아니라 아직 죄 중에 빠져 있는 상태이다.

우리는 귀를 기울여 주님의 경고를 들어보자.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마 11:21, 23) 하신다. 속화해 가는 교회들이여 천당에 오를 듯싶으냐? 음부에 떨어질까 두려워하라. 주의 심판이 자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서 떠나라.

다시 개인의 심령적 교회를 말하겠다. 우리 마음이 어떠하면 하나님의 성전이 될까? 두말할 것 없이 성령의 불 세례를 받은 심령이어야 한다. 곧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골 3:5), 무릇 이러한 마음속에 죄악을 다 정결케 한 성결한 심령이라야 과연 성령이 내주하여 계시는 성전이다. 우리는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주의 제단에 나아가 하늘의 불을 받자. 이것은 교리나 조직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사실로 성결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받자. 구하여 받자. 거룩치 못한 자는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셨다(히 12:14).

 

둘째, 그리스도의 지체라 하였다(5: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셋째, 그리스도의 신부라 하였다(5:32).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5:31-32). 이 두 절의 말씀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임을 말하고 있다. 대개 부부는 일신(한 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동시에 곧 그의 신부가 된다. 창세시에 하와는, 아담을 잠들게 하고 그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만드셨다. 그러므로 아담이 하와를 볼 때에 이는 내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에 뼈라 하였다. 따라서 부부는 두 사람이나 실상은 한 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잠들게 하시고, 그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보혈로 신부 되는 우리 성도를 지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있고,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오묘하다. 과연 우리는 일편단심 오직 그리스도만을 향하는 정결한 신부가 되어야 하겠다(고후 11:2).

옛날 애인을 추억한다든가 오늘에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든가 하는 일은 주께서 결코 용납하시지 아니하신다. 주는 과연 투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전적인 사랑을 요구하신다. 화조월석(花朝月夕)에 김군(金君) 이랑(李郞)을 교제하는 창부적 행위를 결코 용납하시지 아니하신다. 정조가 굳지 못한 여자는 아무 사람에게나 애교를 부린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부는 결코 그렇게 못한다. 아니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나의 사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므로 그렇게 할 틈이 없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약 4:4) 하였다.

과연 우리의 영혼이 정조가 있어야 한다(계 14:4). 속화한 교역자와 신도들이여 마땅히 경성할찌어다. 바벨론(세상) 음행의 술에 취하지 말라(계 17:2). 우리가 만일 세상일과 속된 일에만 분주하다가 신앙의 정조에 손상을 받으면 후일 무슨 면목으로 주를 뵈올 것인가? 주께 버림을 받을까 두렵다.

 

넷째, 군대라 하였다(6:1-17). 그리스도의 교회와 신도는 진리를 위하여 전투하는 군병이다(딤후 2:4). 현대 교회는 이 전투적 기세를 취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세상에 아당(阿當 - 남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하여 알랑거리고 아첨함)하여 강화를 청하는 상태에 있다. 인간의 영계를 포위한 마귀의 군대는 심히 강대하다(전 9:14). 전쟁터가 된 영계를 함락, 약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설교를 하되 슬슬 우스개 이야기나 하고, 소위 시대 사조에 맞춰 가며 한다든지, 사회사업으로 교회의 상무(常務)를 삼는다든지 하면, 적진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귀에게 치소(恥笑)나 받을 것이다. 그것은 농가성진(弄假成眞 - 실없이 한 말이 참된 것과 같이 됨)하며 승허입실(乘虛入實 - 속여 실에 들어감)하자는 병법 같으나 실은 스스로 속는 일이다.

우리가 법대로 싸우되 6장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지 아니하면 최후에 개선을 기약치 못한다. 지금은 기독교가 이론에만 치우치고 전투적 기분이 없다(유 1:3).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하셨다.

과연 신앙생애란 전쟁의 생애이다. 세상을 두려워하여 참전면유(讒諂面諛 - 아첨하고 아부함)하는 전도자들이여! 강단에서 죄악을 공격하기를 두려워하는 겁쟁이들이여! 죄를 대적하되 피 흘리기까지 하라(히 12:4)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 모든 거룩한 선지자 사도들은 이 진리를 위하여 싸우는 태도로 일관하다가 결국에는 순교하였다. 신약 첫머리에 세례 요한도 그리하였고 12사도도 그리하였다. 오늘의 교회가 사회와 타협하는 자세를 취함은 군대 되는 교회의 의미를 잃어버린 증거라 하겠다.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아 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