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성도의 신음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이스라엘의 지자(智者), 솔로몬은 그 기록한 글에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전 7:4) 하였다. 이 말씀은 무슨 이론으로나 역사의 재료로 해석하기에는 심히 곤란하고, 다만 그와 같은 체험을 가진 사람들만이 아멘으로 받아들일 성구이다. 거칠고 냉랭한 세상에서 성도에게 닥쳐오는 모든 시험, 핍박, 곤고는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살려는 우리로 하여금 은혜의 깊은 바다로 나아가게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이 고난의 시험에 합격하려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도 성령을 받으신 후에, 광야에서 삼대 시험을 받으셨다. 주께서 성령을 받으신 후에 광야의 쓸쓸한 경험을 맛보신 것과 같이 우리 성도도 은혜가 깊을수록 늘 광야에 처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가정에도 광야가 있고, 교회에도 광야가 있고, 사회에서도 광야가 있고, 친구간에도 광야가 있고, 자녀와의 관계에도 광야가 있다. 도처에 있는 광야가 모두 우리를 시험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가정에 대한 집착보다, 교회에 대한 집착보다, 사회에 대한 집착보다, 오직 그리스도의 대한 애착이 더욱 깊어짐으로, 모든 광야는 변하여 주님과 교제하는 아름다운 비원(秘苑 - 대궐 안에 마련된 동산)이 된다. 여기서 함께 거닐며 주와 더불어 속삭이는, 주님의 사랑과 위안을 받는 그 즐거움이야 진실로 알 사람이 적은 것이다. 이곳은 성도의 신비한 생애이며, 지성소 안에 있는 생애이다.

모든 믿는 사람이 모두가 이러한 경험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전도보다, 우리의 사업보다, 그 무엇보다 직접 우리와 더불어 교제하는 데서 더 만족하시는 것이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베다니라는 마을에 들어가시어 마르다라 하는 자매의 집에서 대접을 받으실 때에, 그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서 그의 말씀을 듣고, 마르다는 주님을 대접하는 일로 밖에서 분주하다가, 주님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를 원망하였다. 이 때에 주님은 마르다에게 마리아의 이 선한 직분을 빼앗지 못하리라 말씀하셨다(눅 10:38-42).

오늘도 이와 같은 일을 보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만 하여서는 쓸데없다. 실제로 활동하여야 한다" 하여 기도하는 일을 아주 경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기도하는 것이 폐일까? 기도하지 아니하는 것이 큰 폐이다.

이 마리아는 영적 교제를 즐기는 영성이 깊은 영적인 신자를 대표한다. 마르다는 사회 봉사로만 일을 삼는 육적인 신자를 대표한다. 우리의 생애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많다면 참으로 좋은 직분을 받은 신자라 할 수 있다. 정말 한국 교회 신자 모두가 기도하는 사람이 된다면 교회의 부흥, 민족의 부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마귀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기독교는 사람의 운동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령운동이므로, 우리는 힘써 기도하여 여호와의 역사하심이 멈추지 아니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가 반드시 이루시리라!


본문에 “탄식”이라 하신 말씀은, 마음속 깊이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음하는 상태를 말씀하심이다. 곧 임산부의 해산의 수고와 같은 형편을 말함이다. 오호라! 성도에게는 이러한 신음이 있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시던 주님의 심정, 겟세마네 동산에서 외로이 기도하시던 주님의 심정, 이러한 심정을 가진 성도에게도 말할 수 없는 신음이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가룟 유다를 향하여 그 얼마나 마음에 신음하셨을까? 이러므로 로마서 8:26에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신다” 하였다.

이 성령의 탄식은 곧 성도의 탄식이 되는 것이다. 아! 가정에서도 이러한 신음이 있고, 교회에도 이러한 신음이 있고, 친구를 대하여서도 이러한 신음이 있고, 세상 허영을 따라가는 사람들을 볼 때에도 이러한 신음이 있고, 은혜에 더 깊어지지 않은 신자들을 볼 때에도 이러한 신음이 있고, 노인을 대하여서도 이러한 신음이 있고, 청년을 대하여서도 이러한 신음이 있고, 기도할 때에도 이러한 신음이 있고, 설교할 때에도 이러한 신음이 있다.

아! 이는 그리스도의 심정을 가진 성도의 신음이다. 예루살렘의 황폐를 전망하는 예레미야에게도 이러한 신음이 있었으며, 하루아침에 뜻하지 않은 재난과 그 아내의 핍박까지 받은 욥에게도 이러한 신음이 있었고, 그릿 시냇가에 은신한 엘리야에게도 이러한 신음이 있었고, 바울, 루터, 존 번연, 웨슬레, 이 모든 성도들에게 이러한 신음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곧 초상집에 있는 경험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생을 더 알게 되며 세상을 더 알게 된다. 이는 과연 하나님의 학교이다.

오호라! 이 성도의 신음이 언제나 없어질까? 이는 곧 우리 육체가 영화(榮化=예수님 재림하실 때 신령한 몸으로 변하는 것)할 때에 없어질 것이다. 본문은 곧 바울의 영화의 소망을 동경하는 비장한 노래의 일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