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경건한 종교

    이건 : 홍순균 평역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

 

본문에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원어에 “정결한 종교”라 하였으므로, 본문을 요약하여 “경건한 종교”라고 제목을 잡았다. 야고보의 종교는 경건의 종교이며, 야고보서는 경건한 종교를 가르치고 있다.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면 상반은 종교의 실행을 말씀하였고 하반에는 종교의 성별(聖別)을 말씀하셨다. 야고보의 종교는 특히 실행의 종교이고, 성별의 종교이다. 바리새인의 경건은 그 형식은 있으나 능(能 - 내용)은 없는 경건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언급하는 “경건한 종교”라 함은 그 능 곧 실행과 성별을 겸비한 경건을 말하며, 뼈대만 남은 바리새인의 의식적 경건이 아니고 생명 있는 진정한 종교를 말한다. 이는 우리의 요구하는 종교이며, 또한 사회가 요구하는 종교이다.

바울은 신앙으로 말미암지 않은 의문(儀文)의 행위를 배격하였고,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지식적 신앙을 배격하였다. 그러므로 바울과 야고보는 각각 그 일면을 말한 것뿐이다. 바울의 신앙관과 야고보의 행위설은 결코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본문에서 말하는 ‘행함’과 ‘성별’을 나누어 말하려 한다. 행함과 성별은 경건한 종교의 2대 요소이다.

 

1. 행함(27절 상반절)

첫째, 사랑을 실행할 것이다. 27절 상반절에서 말하는 경건한 종교는 환난 중의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라 하였다. 야고보서 2:15, 16에도 우선 사랑을 실천할 것을 교훈하였다. 기독교의 본질은 사랑이다. 천사의 방언을 할지라도,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몸을 불살라 구제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거짓 종교이다.

어떤 더운 나라의 한 임금이 얼음덩이로 궁전을 지었는데 그 건물은 화려하여 지나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되었다. 그러나 이 궁전에는 아무도 들어가 살 수 없음은, 이것이 얼음덩이로 된 냉장고인 까닭이었다. 이처럼 세상에 얼음 궁전과 같은 도덕가, 얼음 궁전과 같은 종교단체가 많이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들어가 진정한 생명을 얻지 못함은, 그 외관(外觀)은 웅장하고 화려하나 내적으로 뜨거운 사랑이 없는 까닭이다.

장엄한 의식을 중시하는 종교도 얼음 궁전에 불과하며, 바리새인의 경건한 모습도 얼음 궁전에 불과하며, 모든 이교(異敎)의 의식, 이방인의 점잖은 도덕도 빙궁(氷宮)에 지나지 아니한다. 우리는 의식으로 빙궁을 짓지 말고, 도덕으로 빙궁을 짓지 말고, 모든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는 사랑의 종교를 이루어야 하겠다.

 

둘째, 혀를 삼갈 것(3:2-8)이다. 야고보가 실행을 강조한 중에 언어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3:2).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3:6).

과연 세 치에 불과한 혀에 축복과 저주가 달려 있으며, 멸망과 구원이 달린 것이다. 인류의 타락은 하와의 혀로 말미암았다. 뱀과 교제하며 그 혀로 하나님의 말씀을 희석하였다. 그 남편 아담을 유혹하여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게 한 그 혀, 이 혀는 온 세계를 저주에 쓸어 넣은 것이다.

우리의 지체 중에 악마에게 이용되기 가장 쉬운 지체는 곧 혀이다. 교회에서 종종 분쟁이 일어나는 것도 곧 혀의 작용이다. 여기에 쉬지 않는 악과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 악마는 교회 안에서 혀가 빠른 사람을 찾아다닌다.

 

2. 성별(27절 하반절)

경건한 종교는 스스로 삼가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탄광에서 석탄을 캐는 굴에 들어가 석탄 매연으로 캄캄한 굴속에 한 송이의 흰색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은 너무도 신기하여 가까이 가보니, 그 꽃에는 윤택한 액즙이 흐르고 있어 석탄의 먼지가 와서 붙지 못하고 곧 떨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꽃은 석탄 캐는 굴속에 피어 있을지라도 조금도 검게 물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 복잡한 홍진 세상에서 살아감에 있어, 우리에게도 경건한 생명의 액이 분비되어 우리의 주위를 윤택하게 하지 아니한다면 도저히 초연한 생애를 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동물생리에는 보호색이라는 것이 있다. 즉 주위에 형편에 따라서 털과 몸의 색깔이 변하는 것이다. 예컨대 북극지방 눈이 많이 쌓이는 곳에는 흰곰, 흰여우가 많이 사는 일이라든지, 여름철에 개구리가 녹색을 띠는 일들이다.

그러나 성도의 생애란 보호색을 가져서는 아니된다. 시대 사조를 따라 변할 것이 아니며, 유행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다. 낙낙장송이 눈 쌓인 저 산마루에 우뚝 서 있음과 같이, 세상에서 초연한 생애를 보내야 할 것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롬 12:2). 여기 "본받지 말고"는 원어에 "동화하지 말라"는 말이다. 곧 성도의 생애란 세속에 동화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우리는 산 위에 세운 성이며 등경 위에 있은 등불이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 4:9) 하였다. 이는 그의 생애에 특색을 말하여 준다. 타협이 없는 성별의 생애이다.

 

우리가 성별 생애를 보내려면,


첫째 교제에 삼갈 것(4:4)이다. 친구와의 교제, 교회생활에서의 교제, 사회생활에서의 교제에서,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의 타협적인 생애를 보내서는 안된다. 신앙이 많지 아니한 친구, 속화한 교회, 패역한 사회를 삼가지 아니하면 부지중 이에 동화되게 된다.


둘째, 주의 말씀에 순종할 것(1:25)이다. 우리의 심령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오직 성경 말씀이다. 예로부터 성경을 친근히 하지 아니하고 성결한 생애를 보낸 사람이 없다. 복 있는 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한다. 이 사람은 비유컨대 시냇가에 심기어진 나무와 같이 늘 푸르고 열매를 맺는다.


셋째, 기도할 것(5:13-18)이다. 야고보서는 결론적으로 기도를 권면한다. 우리가 성결의 생애를 지속하려면, 매일 기도로 나를 성별하여 주께 몸과 마음을 드려야 한다. 그리스도의 생애가 성결하심도 주께서 일상 기도의 생애를 보내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