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죄인이냐 의인이냐

이 건 글, 홍순균 평역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많은 교역자나 신자들이 기도할 때에, "이 죄인", "이 죄인이" 하고 기도하는 것을 듣게 되는데, 그러면 기독신자란 한 평생 죄인이라는 누명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어떤 교역자는 말하기를 "사람이 세상을 사는 동안 죄에서 완전히 떠나 성결할 수가 없다"며, 우리가 매일 죄짓는 생활을 하는 처지에서 기도할 때에 죄인이라고 함은 당연하다 하며, 또 말하기를 "사람이 설혹 성결한 삶을 산다하여도 감히 성결하다 할 수 없으므로, 죄인이라 하며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겸손한 것이라"고 한다. 과연 그의 말과 같이 매일 죄짓는 생애를 사는 사람이라면 죄인이라 자복하는 것이 옳은 일이지만, 이렇게 매일 죄의 자복만 하는 사람은 겸손한 것 같으나, 그 생애가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고 하나님과 의에 대하여 산 체험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여전히 죄악의 멍에 아래에서 죄의 종노릇하는 형편인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이름을 부르면서 매일 죄의 생애를 계속한다면, 첫째는 자신에게 있어 심히 불행한 일이며, 둘째는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이름에 모욕을 들이는 것이며, 셋째는 기독교를 아무 능력 없는 종교로 인정받게 하는 일이다. 또한 겸손을 나타내기 위하여 성결을 증거하지 않는다면, 죄는 겸손에 없어서는 아니 될 불가결한 요소인가? 이는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나의 친구 교역자 한 분이 어느 교회에 가서 성결을 고조하였더니, 그 교회 교역자가 반대하며 질문하기를 “성경에 의인은 없나니 곧 한 사람도 없다 하였는데 어찌 사람이 감히 성결을 말하며 성결을 전파할 것인가” 하였다 한다. 이는 두말할 것 없이 그는 성경을 오해하고 있음이다. 물론 전 세계 인류는 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그러나 우리 기독신자는 지난 죄의 생애에서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전에 지은 죄를 다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의인인 것이다.

우리는 이를 분별하여 알아야 한다. 자기의 위치를 깨달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떠나면 그 순간 곧 죄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된 이상 어찌 죄인일 수 있는가? 우리는 본래 들포도나무와 같았으나 이제는 참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한 줄기 한 입에, 같은 섬유 같은 질이 된 것이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롬 11:16).

내가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 됨을 역설하는 것은, 나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과장하는 것 같이 오해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나, 이는 나의 의인 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그저 나는 죄인이라" 하면서 매일 그 생애가 죄와 분리된 생애에 들어가지 아니함을 안타까이 여겨서 하는 말이다.

우리는 어느 때까지 "이 죄인", "이 죄인이" 하면서 살 것인가? 죄를 짓다가 죽어도 예수의 구속의 은혜로 구원을 얻을 줄 믿는가? 만일 그렇게 믿는다면 이는 큰 착각이니 속히 회개하여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시대에 니골라당이 있었는데, 이들은 곧 은혜방조파이다.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자기의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여, 제멋대로 방종하며 예수의 공로만 의지한다는 파당이다.

오늘의 교회에도 이러한 계통의 파당들이 있다. 바울 서간에는 믿음과 은혜를 고조하였으며, 야고보서에는 행위와 율법을 정례(精勵)하였는데, 중세시대에는 이 두 주장에 대하여 모순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였다. 루터와 같은 분은 심지어, 바울의 서간은 금석의 글이라면 야고보 서는 지푸라기와 같은 글이라 하기까지 논평을 하였다. 만일 이러한 조류를 깊이 따라가면 필경에는 니골라당과 같이 은혜방종의 수렁에 빠져 들어감을 면치 못할 것이다.

기독교는 물론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종교이다. 그러나 그 신앙, 그 은혜라 함이 인간의 도덕상 의무를 떠난, 신앙이 아니며 은혜가 아니다. 예부터 종교성 경향이 자력설(自力說)과 타력설(他力說)로 편중되어 왔다. 자력설에 치우치게 되면 이는 바리새인의 율법주의에, 타력설에 치우치게 되면 역시 니골라당의 은혜방종으로 치우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의 종교는 이 두 설 중에 그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타력에, 이 구원을 성취케 하려는 인간 자력이 합하여 됨을 말한다.

가령 여기에 깊은 우물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가 있을까? 자기 힘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위에서 줄을 내려 보내 주어야 한다. 줄을 내려주는 일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줄이 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과 같고, 그 줄을 잡은 것은 우물에 빠진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이 은혜의 줄을 붙잡는 것은 곧 우리의 신앙으로 한 순간이라도 그 줄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놓는 순간, 곧 다시 빠지게 될 것이다.

이제 죄 중에서 사는 사람을 이 은혜의 줄을 붙잡은 사람이라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죄 가운데에서 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죄에서 벗어나 의로운 생애를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다. 로마서 6:1-2에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으사 선을 행하게 한 새 사람인 것이다(엡 2:10, 15).

우리는 신분상으로 보아도 죄를 범치 못할 것이며, 양심상으로 보아도 죄를 범할 수 없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은 그 의는 우리로 하여금 한 번도 범죄치 아니한 것으로 보신다는 뜻이니 무릇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죄인이 아니라 놀라운 의인인 것이다.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는데, 누가 능히 우리들을 정죄하리오!

우리의 과거의 모든 죄는 안개와 같이 다 소멸되었으며, 지금에는 새로운 심령에 새로운 양심을 가지고 선악을 분명히 판단하여 나아가며 성령의 인도하심만 받아 나아갈 때에 어찌 매일 죄짓는 생애로 고통당할 것인가? 이러므로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의인인 것을 자각하고 범사에 성령을 힘입어 의로운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