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질이냐 양이냐

이 건 글, 홍순균 평역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

 

얼마 전에 중외일보 논설란에 "기독교회 문제, 교도반성의 가을"이라는 제하의 논설을 읽었다. 그 글에 “교회를 양으로보다도 질로 한층 정화(淨化), 심화(深化), 영화(靈化)함에 교회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간에 교회는 외형으로만 확대되었다” 하였다. 나는 이러한 논평을 기독교회의 교역자 된 한 사람으로서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만 하여도 신도수가 3, 40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통계에 수적으로 양이 늘어간다고, 이를 큰 성공으로 알거나 자랑으로 삼는다면 크게 부끄러운 일이다. 질이 없는 그 양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천국은 질이 없는 쭉정이 같은 양이 표준이 아니라 알곡과 같은 질이 표준이 되는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하신 주님의 말씀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양에 속한 자들이요 교회 통계표의 수치에 들어가는 사람들이며,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곧 질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양에 속한 자는 쭉정이 신자요 질에 속한 사람은 알곡 신자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심판 날에는 질이 없는 쭉정이 신자와 교역자들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이(시 1:4) 감히 주님 앞에 서지 못할 것이고, 주님 앞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불구덩이에 버림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심판 날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의 저울에 놓여 달리게 될 것인데, 그 날에 알곡이 되지 못한 신자는 참으로 가련한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신학자, 목사, 전도사들 중에도 그 불에 던짐을 받을 자가 있을 것이며, 예수님으로 내걸고 사업을 하던 자들 중에도 그 불에 던짐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을, 주님의 하신 말씀으로 보아서 분명히 알 수 있다(마 7:22, 23). 신학자의 수가 많아서 천국이 아니요, 목사의 수가 많다고 천국이 아니요, 신자의 통계의 수가 많아서 천국이 아니다. 천국은 오직 그 신앙의 질 여하에 있는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과연 양에 있는가 질에 있는가? 그 확대(擴大)가 표면에만 있지 아니한가? 교역자의 수가 증가됨이 표면에만 있지 아니한가? 이는 참으로 강개(慷慨)한 마음으로 헤아려 보아야 할 일이다. 회개하지 아니한 신자, 회개하지 아니한 교역자, 그 수가 아무리 많은들 아무 소용이 없다. 태산과 같은 쭉정이가 아무리 많아도 사람을 굶주림에서 구원하려 함에는 한 되의 알곡을 당하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양적으로 많은 통계의 숫자상의 신자를 얻었다 한들 독실한 신앙의 질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거름에도 쓰이지 못할 것이다.

주님 세상에 계실 때 때로는 4,000명, 5,000명씩 주님을 따랐지만, 주님의 택하심을 보면 그 중에서 70명을 택하여 제자를 삼으셨다. 그 중에서도 12명을 정선하셨으며, 12제자 중에서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특별히 친근히 하시고 병든 자의 집에도 같이 가시고, 변화산에도 같이 가셨으며, 겟세마네에 동산까지 같이 가셨다. 이것으로 보아도 주님께서는 양으로 만족하시지 않으시고 오직 그 영안이 질을 보심에 있으셨음을 알 수가 있다. 4, 5천명의 쭉정이는 불과 2, 3명의 알곡을 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3명의 제자 중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골고다까지 따라간 제자는 오직 요한 사도뿐이었다. 4, 5천 명의 수량이 하나인 요한의 질을 당치 못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많은 무리가 앞뒤로 따라오면서 호산나하며 함성을 올리며 주님을 영접하였지만, 불과 며칠이 지나 빌나도의 법정에서 강도 바라바는 석방하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주님은 신자의 수가 많아지는 것보다 그들 신앙의 질이 독실하여지는 것을 더욱 기뻐하신다.